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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이세계 최면물-134화 (134/414)
  • 대충 이세계 최면물 13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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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바, 밥 먹으러 가자.

    배고프다."

    "어, 응!"

    "오빠, 또 봐!"

    같은 학교에 있으니까 또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데칼."

    이제 가려는데 디아나가 뒤늦게 날 불렀다.

    "응?"

    "……나도 같은 급이야. 내일 수업 때 봐."

    "그래."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수줍어하는 여자는 참 보기 좋다.

    「예쁜」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어야 하지만.

    드물게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밝히는 디아나는 꽤 사랑스러웠다.

    나와 아바는 여자들과 헤어진 후 식당으로 갔다.

    점심 식사는 3pt를 지불하고 그저 배를 채울 수 있는 메뉴로 주문했다.

    어차피 뭘 시켜도 엘린의 솜씨에 미치지 못해서 실망할 뿐이다.

    그대로 조개 성에 가도 좋겠지만, 친한 친구랑 같이 밥 먹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정말 여러모로 대단한 지령이었어. 아지트에 들어갔을 때 심장이 뛰던 것. 아직도 잊을 수 없어."

    "나는 핏기가 가시는 것 같았는데."

    "데칼을 좋아해서 쫓아온 사람이 범인이었지? 인기 좋은 것도 큰일이네. 목숨을 노려지다니…….

    나라면 잠도 못 잤을 거야."

    "나도 그날 밤은 무서웠어. 어디서 튀어나올까 봐."

    하지만, 지금은 다시 만나도 놀라지 않을 것 같다.

    서연을 설득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이기는 하다.

    현대부터 이어진 인연. 각별한 연결을 느끼기는 한다.

    거기다 예쁘기는 예쁘기도 하고…….

    "아바."

    그때였다.

    머리를 짧게 깎은 체격 좋은 남성이 다가와, 아바를 불렀다.

    아바는 의자에서 튀어 오르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화들짝 놀랐다.

    "형."

    형? 아바의 형이라면.

    로운 가문의 장남, 「바덱 로운」……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정말, 아주 간신히 기억해냈다.

    "얘기는 들었다. 긴급 지령을 완수해냈다지?"

    바덱은 같이 식사 중인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하고 일방적으로 얘기를 이어나간다.

    "으, 응."

    아바는 수저를 놓고 쭈뼛쭈뼛한다.

    "사나이라면 자기 일은 스스로 할 줄 알아야 한다.

    여자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남자가 되지는 마라.

    뱅가드 가문의 영애도 지령에 참여했다고 들었는데, 네가 잘 리드했겠지?"

    "……잘 모르겠어. 나보다 디아나 양이 더 대단하니까. 이끌었다고 하기는 좀……."

    "똑바로 내 눈을 보고 말해. 언제 남자가 될 거냐?"

    "……."

    아바는 기가 죽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식탁을 소리 나게 치고 주의를 끌었다.

    "이봐.

    밥 먹고 있는 거 안 보여?"

    밥상머리에서 뭐 하는 짓거리야?

    "너는 누구지?"

    "데칼. 모험가 출신이다."

    어차피 내 출신을 알면 비웃을 게 뻔하기 때문에, 꿀릴 것 없다는 듯이 바로 밝혔다.

    바덱은 날 똑바로 보고 있다가 코웃음을 쳤다.

    "……아바. 친구는 가려서 사귀어라.

    이런, 생긴 것만 반반한 놈들은 빈 수레가 요란하듯 도움이 안 되지.

    전선에 이런 녀석은 쌔고 쌨어. 며칠 만에 마물이 무섭다며 집으로 가고 싶다고 우는 놈."

    "데칼은 그런 사람이 아냐."

    형제끼리 성격이 왜 이렇게 달라?

    말끝마다 사람 무시하는 게 보여서 화가 치밀었다.

    "모험가 출신이라고. 다시 말해줄까?

    귀가 안 좋은 것 같은데. 밥 먹는 거 방해하지 말고 꺼져."

    "……내가 바덱 로운이라는 걸 알고 하는 말인가?"

    "바덱인지 마덱인지. 남의 가족 일에 끼어들 생각은 없지만, 밥 먹은 뒤에 둘이서 얘기해도 되잖아?

    너 때문에 입맛이 없어졌다는 건 알고 하는 말인가?"

    "큭큭큭."

    바덱은 기분 나쁘게 웃었다.

    "재밌군.

    데칼. 기억해두겠다."

    으, 기억하기 싫은데 잊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이럴 때 나 자신에게 최면을 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지만.

    결국 바덱이 떠난 후, 몇 술 더 뜨다가 관뒀다.

    "미안해. 데칼."

    "왜 네가 사과해?"

    "형의 기분이 나쁜 건 아마도 내 탓이야. 형은 평소에도 긴급 지령을 비겁한 편법이라고 생각해서."

    "비겁한 편법?"

    "자격 없는 녀석들에게 사다리를 내주는, 없어져야 할 시스템이라고……."

    웃기는군.

    그놈 사고방식이야 내 알 바 아니지만, 다시 짜증 나게 하면 대들지 못하게 해야겠다.

    남자한테 최면 걸 일은 별로 없지만 생기게 될 것 같은 강한 예감이 들었다.

    몇 마디 나눴을 뿐인데 자기가 전선에서 활약한 군인이라는 사실에 엄청난 자부심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여기 후보생들보다 나이도 많고 이룬 것도 있으니 은근히, 아니 대놓고 무시하는 거겠지.

    "솔직히 형이 저럴 때마다 짜증 나지?"

    "무, 무슨. 나는 그런 생각은……."

    "형제끼리 뭐 어때?

    골탕 먹이고 싶지 않아?"

    "……!!"

    아바는 놀라서 입을 떡 벌리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상상조차 해본 적 없다는 듯이.

    누가 들었을까 봐 두리번거리기까지 하는 걸 보니, 집안에서 형의 위상이 상당한 것 같다.

    이런 순진하고 착한 모습이 형이 말하는 남자가 되지 못한 아바라면.

    내 생각에는 재수 없는 형한테 한마디 해주는 게 남자가 되기 위한 첫걸음 같은데.

    "형이 또 이상한 소리 하면 확 들이받아 버려.

    한번 해보면 다음부터는 별거 아냐."

    "나, 쫓겨날지도 몰라……."

    "네가 하는 말이 맞으면 그럴 일 없지. 형보다 나은 점이 너한테도 있을 거야."

    "그런 게 있을까. 형이 나보다 훨씬 강한데."

    "디아나 말 잊었어?

    자신감을 가지라고. 강함 말고도 인정받을 방법은 많아."

    "……."

    아바는 내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알았어. 데칼. 생각해볼게."

    오지랖은 이쯤 할까.

    아바라면 무슨 말인지 이해했을 것이다.

    아직은 굳이 바덱을 최면으로 혼내줄 필요는 없겠지.

    거기다 그런 사용은 웬만하면 지양하고 있다.

    스스로 생각하는 최면의 가장 올바른 사용법은, 어쨌든 내가 꼴리는 일에 쓰는 것이니까.

    곰급이 된 나의 새로운 학교생활이 시작된다.

    근데 뭐가 달라지는 거지?

    오랜만에 기숙사에서 잠들고 깨어났더니, 침대 뒤에 있는 영혼 패널에서 새로운 지침이 안내되었다.

    뭐라고 길게 쓰여있기는 했지만 중요한 부분만 읽으니 요약하면 이랬다.

    토끼급과 늑대 급이랑 다르게 곰급은 정해진 커리큘럼이 없는 것 같다.

    아니, 없다기보단 자율적으로 할 수 있는 부분이 늘어났다고 해야겠다.

    수업 출석이나 불참으로 생기는 감점과 득점이 사라진 대신에

    곰급은「본관」으로 이동해서 각자 필요한 시설을 이용하고, 필요하다면 수업을 받고,

    일정 주기에 교사 참관으로 행해지는 평가를 통해 자신의 점수를 올리는 것 같다.

    그렇다면 토끼급 늑대 급에서 솎아내기를 하고

    곰급부터는 멜브릿 본관에서 지낸다고 보면 될 것 같았다.

    그곳에는 곰급 이상의 여 후보생들이 모이겠지.

    사실상 지금까지 만날 수 없었던 모든 여 후보생과 마주칠 가능성이 커졌다고 보면 된다.

    긴급 지령 덕분에 목표에 쉽게 다다를 수 있다.

    이제부터 단숨에, 내 여자의 수를 늘려나가고 싶다.

    가볼까?

    나는 방을 나서서, 멜브릿 본관으로 들어갔다.

    멜브릿 본관 1층. 유동인구는 대부분 곰급 이상의 후보생들.

    이 시간에 본관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멜브릿의 선별 시스템에서 선택받은 인간들이라 할 수 있다.

    여 후보생도 남 후보생도 다 자신감이 넘치는 얼굴이다.

    나는 중앙을 뚜벅뚜벅 가로질러 걷다가, 전에 봤던 석상이 눈에 띄어 고개를 들었다.

    "……."

    13m 정도는 되나?

    예쁜 여자 조각상이다. 멍하니 그걸 보고 있었더니, 코끝을 간지럽히는 향기가 났다.

    "그 석상.

    빛의 신 일레시아를 조각한 거라고 해요."

    고개를 돌렸다가 심장이 멎을 뻔했다.

    눈앞에 그녀가 있었다.

    그날 나무 밑에서 날 보고 있던 여성. 학생회장 시아.

    "저도 이 석상을 좋아해요."

    "……."

    나는 시아의 미모에 압도되어,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마음의 준비도 없이 갑자기 다가오면 놀라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 정도로 시아는 아름다웠다. 성스러움까지 느끼는 부드러운 녹색 눈과 마주쳤을 때 몸이 마비된 것 같았다.

    최면을…….

    최면을 걸어야 해.

    내가 오른손을 움직이려고 했을 때였다.

    시아는 갑자기 내 손목에 살포시 손을 얹어, 부드럽게 막고는.

    내 손에는 시선도 주지 않고 날 바라봤다.

    "알고 있으신가요?

    신께서는 모든 걸 굽어살피고 계신다는 것을."

    "……."

    지금…… 막은 건가?

    내 의도를 알아차리고서?

    "너는 누구야?"

    "멜브릿의 학생회장, 시아입니다.

    그쪽은, 데칼 님이시죠?"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자정, 도서관에서 만나요.

    하지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오세요."

    "마음의 준비……?"

    "대책 없이 오면 안 돼요."

    "……."

    대책이라니. 무슨……?

    시아는 수수께끼 같은 말만 남기고 가버렸다.

    손목에 남은 부드러운 온기가 심장까지 옮겨와 따끔따끔 찌르는 것 같았다.

    이 여자는, 역시 무언가가 있다.

    그녀가 빛의 신 일레시아인가?

    00 시, 도서관.

    대책이라고 하니 뭘 말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저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이후 잠깐 홀린 듯 서 있었다는 굴욕감이 내 몸을 지배했다.

    그 여자가 내 밑에 깔려 앙앙 허덕이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충동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

    00 시 도서관.

    오늘이라도 당장 간다.

    "왜 그렇게 서 있어? 무서운 얼굴로."

    누가 날 보며 말했다.

    디아나와 닮은 얼굴. 하지만, 블레이저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쿡쿡 웃고 있을 때부터 누군지 알아봤다.

    틸리아 뱅가드. 디아나의 언니다.

    "우리 학생회장님한테 무슨 말이라도 들었어?"

    "데이트 신청받았어."

    "농담은. 데이트는커녕, 학생회장이 누구한테 먼저 말 거는 것도 처음 봤는걸."

    "너는 나한테 왜 말 걸었는데?"

    "본관 처음이지? 아, 긴급 지령했다고 들었으니까 두 번째? 세 번째인가?"

    "처음인 셈 쳐."

    틸리아는 묘하게 친근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알려줄게.

    본관 어떻게 이용하는지. 오늘은 나랑 같이, 전투 훈련하자고."

    "전투 훈련……."

    벌써 결투할 생각으로 기대하는 것 같다.

    멜브릿 특성상 자기 무기를 소지하고 있는 사람이 적지는 않지만 틸리아가 차고 있는 장검은 단연 눈에 띈다.

    당장 베러 달려들 것 같아서 겁난다.

    "당장은 아무것도 안 해. 질색하기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애 잡고 괴롭혀봐야 재미없잖아?"

    뭐, 키워서 잡아먹겠다고?

    아예 나를 육성해줄 생각인 것 같다.

    "안내해줄까? 응?"

    자매라는 걸 잠깐 잊고 있었다.

    장난스럽게 웃는 틸리아의 얼굴에서 디아나의 귀여운 면모도 보여서, 흠칫했다.

    남자처럼 털털하게 행동하기는 하지만, 디아나가 성장하면 이렇게 될까 상상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좋아. 부탁해."

    이것도 인연은 인연.

    곰급에 올라와 틸리아와 겨우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 즐기지 않으면 손해다.

    "곰급부터는 너무 수업 참여에 열 올리지 않아도 돼.

    본관에 있는 시설은 자정까지 이용할 수 있으니까, 자유롭게 쓰면 되고."

    "괜찮네."

    자유라는 말.

    어쨌든 점수 압박에서 벗어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좋다.

    "시험 떨어지면 강등당할 수도 있지만 말이야."

    ……안심하자마자 훅 치고 들어오는군.

    "지금은 시험 기간 아니니까 느긋하게 있으면 돼.

    도장으로 가자. 내가 자주 이용하는 곳이야."

    틸리아를 따라서 걷는다.

    2층으로 올라가서 다른 방들을 구경한다.

    확실히 방마다 다른 설비를 갖추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틸리아는 복도 모퉁이를 돌다가 멈춰 섰다.

    나도 따라서 멈춘다.

    "언니!"

    "디아나."

    "어디 가세요? 아……."

    디아나가 날 보며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데칼이랑 훈련하려고.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아서 안내하는 길이야."

    "……그렇, 군요."

    디아나는 드물게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디아나도 힘내."

    "네."

    디아나를 지나친다.

    신경 쓰여서 뒤돌아봤더니 디아나도 날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디아나는 허둥지둥하며 가버렸다.

    ……뭐지?

    같이 가고 싶다면 그러면 될 것을.

    "다른 곳에도 도장이 있지만, 이쪽이 가장 사람 없는 곳이야."

    "남몰래 죽여도 되는 장소를 찾는 건 아니지?"

    "아하하!"

    틸리아는 내 농담이 취향이었는지 크게 웃으며, 날 손바닥으로 쳤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이제 원한 같은 거 없다니까? 아직 결판내야 할 게 남았을 뿐이지."

    그러니까 그걸 결투로 갚고 싶다는 거잖아.

    나는 틸리아 따라서 도장이라고 불리는 시설에 도착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까, 신발장이 나온다.

    "신발 벗고 들어와."

    "……."

    정말 도장이 있네.

    움직임에 방해되는 게 없도록 하기 위함인지 걸리적거리는 게 하나도 없다.

    한쪽 벽면에는 동작 확인을 위한 거울. 벽에는 온갖 연습용 무기들이 즐비하고, 몇몇 후보생들이 혼자 무기를 휘두르거나

    뜻 맞는 사람끼리 함께 훈련하고 있었다.

    넓기도 참 넓었다.

    여기서 뜬금없이 춤춰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것 같다.

    "데칼. 무기 쓰는 거 있어?"

    "딱히 없는데."

    "그럼……."

    틸리아는 벽에 걸린 연습용 목검 중 하나를 골라서 나한테 던졌다.

    반사적으로 받기는 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헤맨다.

    이걸 들고 싸우자고?

    "난 마법사야.

    이런 건 필요 없어."

    "마법사니까 더더욱 훈련해두면 도움이 되지 않겠어?"

    그건…… 맞는 말이기는 하다.

    나는 붙어서 싸우는 일에 익숙지 않다.

    신체 능력을 앞세워 일방적으로 때리는 건 몇 번 해봤지만, 서연이 파고들기라도 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하겠지.

    누군가가 지켜주지 않는 이상은.

    뭐, 랭킹 5위께서 날 단련해주시겠다는데 한 번 믿고 해볼까?

    "할 마음이 들었나 보네.

    강하게 해줄까? 상냥하게 해줄까?"

    …….

    여자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 신선한데.

    "강하게 해줘."

    남자가 자존심이 있지.

    "으, 악!?"

    나는 5초 뒤에 날고 있었다.

    뭘 맞았는지도 모르고 날아서, 한 바퀴 빙글 돌고 바닥에 엎어졌다.

    "커헉!"

    아픔보다 민망함이 앞섰다.

    멀리서 훈련하던 후보생들이 이쪽을 돌아보는 게 괜히 신경 쓰인다.

    일어났더니, 틸리아가 킥킥 웃고 있었다.

    이 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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