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충 이세계 최면물 8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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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을 마치고 남자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나는 학생 수첩을 한 손으로 펼쳐서 지금까지 번 점수를 확인했다.
음, 아까 아바랑 식사할 때 3pt 썼고. 오후 수업 출석하면서 1pt 늘었으니까…….
총합 356pt. 앞으로 144pt 남았다.
야간 수업을 잘 받는다면 내일은 진급하기에 충분한 점수가 모인다.
점수가 충족되면 바로 늑대 급에 가는 건가?
"저기에 있다!"
뭐야? 후보생들이 나한테 몰려오는 줄 알고 바짝 긴장했다.
하지만 그들의 관심 대상은 내가 아니었다.
정원이 소란스럽다. 후보생들이 두리번거리며 빠른 걸음으로 돌아다니고 있다.
개중에는 날붙이를 든 채 뛰어다니거나, 혼성 그룹으로 움직이는 후보생도 있었는데 집행관들은 서로 얘기를 주고받을 뿐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이상한 광경이다.
조금 서둘러 기숙사에 있는 내 방에 오니 초조한 얼굴로 서 있던 아바가 나를 발견하고 뛰어왔다.
"데칼. 서둘러. 방금 긴급 지령이 내려왔어."
"긴급 지령?"
"고득점 하려면 놓칠 수 없는 기회야. 영혼병 한 마리당 30점이야!"
아무튼 서두르자는 아바에게 이끌려 다른 후보생들과 마찬가지로 바삐 움직인다.
그렇게 돌아다니다 보니 무슨 일인지 금방 알았다.
이건 멜브릿 주최 이벤트다.
아무래도 나는 긴급 임무랑 인연이 깊은 모양이다.
갑작스레 필드로 나와서 마물 사냥하는 꼴이 되었다.
"영혼병. 저기에 하나 있어!"
아바가 발견한 영혼병은 마치 소형 골렘 같은 생김새였다.
바윗돌 대신 화초 키울 때 쓰는 유리병 같은 것이 수족을 이루고 있는 골렘이었는데, 이음새는 영혼으로 보이는 반투명한 무색무취의 에너지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것을 향해, 손을 올리고.
"파이어…!"
영창을 하려다가 급히 멈췄다.
영혼병을 향해 몰려드는 후보생들.
그 후보생들을 향해 파이어 볼 같은 마법을 쓸 수는 없었다.
"아, 놓쳤다."
아쉬워할 틈도 없이 영혼병이 곳곳에서 나타난다.
"파이어 애로우!"
위력을 낮춰서 파이어 애로우를 쏜다.
하지만 영혼병은 파이어 애로우 한 방에 쓰러지지 않았다. 최소한 두 번은 맞혀야 하는데 그틈에 다른 후보생들이 치고 들어와서 영혼병을 낚아챘다.
"젠장!"
짜증 나네!
다른 녀석들 신경 쓴다고 고위력의 마법을 쓸 수 없다니.
아바는 어느새 하나 발견해서 뛰어갔다. 차라리 나도 뛸까? 붙잡고 패는 편이 빠를 것 같기도 하고.
이건 그냥 느낌만 그런 게 아니었다.
영혼병들은 마법 타격이나 원거리 공격에 강하고 근접 공격에는 취약한 면모를 보였다.
직접 때리러 돌아다니는 후보생들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그렇게 설정한 것 같았다.
십 분간 계속되는 영혼병 사냥에서, 단독 토벌은 하나 토벌 보조는 아홉.
어시스트는 영혼병을 건드리기만 해도 되고 3pt를 받을 수 있었는데, 긴급 지령으로 번 점수는 57pt였다.
"두 마리 간신히 잡았다."
아바는 어시스트는 없지만 두 마리를 온전히 쓰러뜨린 대가로 60pt를 벌었다.
나는 처음으로 좀 속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전한 힘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다 죽어버리라는 식으로 파이어 볼을 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알려줘서 고마워."
나는 먼저, 문 앞에서 날 기다려준 아바에게 말했다.
아바는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나도 실제로 해보는 건 처음이야. 예기치 못한 사태에 대응하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 간혹 실시한다고 들었는데……."
"마법 난사를 못 하는 게 아쉽네."
"오히려 제어 능력이 돋보였어. 불 마법 사용자가 다른 사람을 다치지 않게 하는 건 정말 중요한 거야. 신뢰의 문제라고 할까."
"신뢰의 문제?"
"불 마법사랑 파티를 짠다면, 여차할 때 질러버리는 사람이랑은 하고 싶지 않잖아?"
"아아."
무슨 말인지 알겠다.
"이상하게 불 마법사는 대부분 그런 성격이더라고. 우리 형만 해도……."
갑자기, 아바가 입을 다물었다.
"왜?"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벨라 생각이 났다.
불의 여신부터 그런 성격이니까, 불 마법 쓰는 애들이 난폭해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들보다 내가 낫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바는 모르지만 난 불 마법으로 사람을 죽인 적 있다.
그것도 아주 차분하게, 가지고 있는 MP를 모조리 쏟아 넣어서 박살을 내버렸지.
동료와 사냥할 때는 마법 취급에 주의한 건 사실이나 여차할 때는 그런 걸 신경 쓰지 못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모처럼 벨레이라의 가호를 듬뿍 받고 강력한 불 마법을 행사할 수 있는 몸이 됐는데
계속 파이어 애로우만 날리고 있으면 의미가 없잖아?
싸울 기회도 줄어들어서 파이어 볼 숙련도를 올릴 기회도 점점 줄어들 것이다.
"……흐음."
점수만 올려서는 안 되겠어.
무언가 개선이 필요하다. 이번 긴급 지령으로 깊이 깨달았다.
"아바. 혹시 마법을 자유롭게 연습할 수 있는 공간은 없어?"
"연습 공간? 아, 저쪽으로 쭉 가면 훈련용으로 개방된 연무장이 있어. 다른 시설과는 달리 상시 개방이야."
"흐음."
아바가 가리킨 곳을 눈어림으로 확인한다.
멀리서 보면 말 타고 다니는 후보생들이 보여서, 승마장이라도 되는 줄 알았는데.
"일단, 밥 먹으러 갈까? 점수도 꽤 벌었고."
"좋은 생각이야."
이벤트 영향인지 식당은 그날 보기 드문 호화 식단이 많이 보였다.
웃으며 떠드는 후보생도 평소보다 더 많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20pt짜리 스테이크를 시켰고, 아바는 전에 내가 나누어 준 5pt 고기 정식을 시켰다.
무슨 맛인지 궁금해서 주문했는데 그럭저럭 맛있었다.
팔색 조개 성에서 벨라가 조달한 신선한 등심이랑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다.
근데 이건 쇠고기가 아니겠지? 여기도 가축이 있을까?
잘 모르겠지만 뜬금없이 뛰어다닌 보람은 있었다.
나는 식사를 마치고 뜬 시간을 활용하기로 했다.
아바가 말한 연무장은 본관 근처에 난 널찍한 공터였다. 여기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멜브릿을 지구에 비유한다면 이곳은 그냥 사막이다. 흙바닥에, 위로 솟은 거라곤 훈련용 기물뿐이었다.
어떤 곳에는 표적판, 어떤 곳에는 허수아비, 그리고 울타리가 쳐진 곳에는 마상 시합 같은 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근처에는 마구간도 있었는데 척 봐도 영양 상태가 좋고 특정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안장이 올라간 준마들이 콧김을 씩씩 불고 있었다.
아쉽게도 내 인생은 승마와는 연이 없었기 때문에 흥미를 끊고 표적판이 있는 곳으로 갔다.
딱히 지루한 반복 연습을 하려고 여길 찾은 건 아니다.
무언가를 시험해보려면 이런 장소가 아니면 안 되기 때문에 온 것이다.
생각해보면 파이어 볼을 익힌 후로, 범위랑 파괴력을 제한해야 하는 상황은 무수히 많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파이어 볼."
나는 선영창으로 화염 구체를 생성했다.
시전을 마치고 화염 구체가 축구공 크기가 됐을 때부터 주변 사람들은 작열감을 느낀다.
그 정도의 열기를 내뿜고 있다는 말이다.
먼저 그것부터 해결해볼까?
"……."
바람의 정령으로 일렁이는 불길을 억누른다.
일찍이 이스티가 틸리아를 상대할 때 보여줬던 응용법이다.
정령이 부르는 바람이 화염 구체를 감싸는 얇은 막이 되어, 모양새를 가다듬는다.
이미 시전한 마법에 이게 무슨 쓸모없는 짓인가 싶지만…….
아바 말처럼, 불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에게는 함께 할 수 있다는 신뢰감 역시 중요하다.
이런 쓸데없는 낭비가 배려로 이어진다.
마치 화염의 기운을 응축한 것처럼, 열기를 가리는 데 성공했다.
"이대로 날리면……."
표적판을 겨냥해서 응축된 화염 구체를 날린다.
그런데 속도가 붙자 모처럼 씌운 장막이랑 충돌하면서 중간에 불길이 확 치솟았다.
"이런."
이러면, 오히려 불규칙한 폭발 때문에 더 위험할 수도 있다.
실패인가?
아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야.
이런 단순한 방법으로 불 마법의 단점인 피해 확산을 억누를 수 있다면 다들 진작 했겠지.
나는 몇 번, 같은 실험을 반복했다.
열기를 가리는 것 자체는 익숙해졌지만, 파이어 볼의 위력 그 자체도 경감되고 시간도 늘어나서 비효율적이다.
하지만 단서는 여기에 있다.
여파만 줄이면서 위력을 유지할 수 있다면…….
"아."
나는 집속 팔찌를 봤다.
언제부턴가 소비 MP를 늘려서 마법의 위력을 증대시키는 액세서리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면?
마법 자체가 갖는 부피도 줄일 수 있다면 어떨까?
정령술은 안 된다는 걸 알았으니 다음은 아이템을 시험한다.
"파이어 볼."
집속 팔찌가 미약한 빛을 뿜었다.
[유니크 스킬, 마법 응축을 익혔습니다.]
파이어 볼의 크기가 반으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열기는 그대로다.
팔찌 응용이 나한테 유니크 스킬을 선물해준 것 같았다.
"좀 더……."
나는 더더욱 정신 집중을 해서 파이어 볼 크기를 반의반, 손아귀에 쏙 들어올 크기까지 줄였다.
이제 위력을 시험할 차례다.
"가."
한계까지 응축된 파이어 볼이 훨씬 빠른 속도로 표적판을 향해 날아들었다.
쿵!
표적판이 크게 흔들렸다.
마법으로 보호되고 있는 듯 겉에는 흠집 하나 없지만, 오리지널로 쐈을 때와 비슷한……. 아니 오히려 더 강해진 것 같기도 했다.
나는 흥분을 느꼈다.
파이어 볼은 여전히 위험한 마법이지만 무궁무진한 응용의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파이어 볼."
다시 구체를 생성한 다음 바람의 장막으로 감싼다. 장막과 구체 사이에 생긴 이격거리 덕에 도중에 장막이 무너지는 일도 없어졌다.
파이어 볼은 놀랍게도 열기를 완전히 감춘 채로 표적까지 날아가서 폭발하고, 표적판을 불길로 휘감았다.
대성공이었다.
터질 때 주의는 필요하겠지만 위력을 온전하게 집중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건 집속 팔찌의 제대로 된 사용법을 깨닫자마자 얻은 성취였다.
역시나 신이 하사한 아이템.
사실 나는 템수저 마법사였던 것이다. 대단해!
정체성을 깨달은 나는 적극적으로 소형 파이어 볼을 연습했다.
해가 저물 무렵. 더이상 파이어 애로우는 필요 없겠다는 확신을 얻었다.
스테이터스 오픈.
이름 : 데칼
Lv : 151
상태
[HP] 10999/10999
[MP] 10198/12381
능력치
힘 1 마력 1 체력 1 민첩 1
벨레이라의 가호《진》
「원소 속성 중에서도 불을 지배하는 권능을 내리는 가호. 여신의 진정한 이해자만이 이 가호를 받을 수 있다」
(화염 피해 면역, 불 마법의 위력 상승, 모든 스킬의 숙련치 상승.)
여신의 대리인
「모든 언어로 소통하고, 모든 문자를 독해한다. 세계를 넘나들 자격이며, 신의 간택을 받았다는 증거이다」
(스킬 습득률 상승, 경험치 상승, 능력치 적용 배율 5배 상승)
바람의 정령(+5)
「가장 자유로운 정령이라 불리며 대기의 흐름을 바꾸고 바람을 따르게 하는 정령」
스킬
파이어 볼(★★) - 강한 위력을 지닌 중급 불 마법. 대상을 뼛속 깊이 불태운다.
파이어 인챈트(★★★) - 온갖 물건에 화염 속성을 부여하는 마법.
수색(★★☆) - 주의 깊게 살피고 관찰하는 것으로 흔적을 발견하고 분석하는 기술.
공간 도약(★) - 엘프의 유니크 스킬. 바람의 정령과 충분한 교감을 이룬 상태에서만 발휘할 수 있는 최상급 이동기이다.
마법 응축(☆) - 매우 드문 유니크 스킬. 어떻게 배우는지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공격 마법을 응축시킬 수 있다.
은폐의 장막 -[죄 없는 자의 반지]를 착용했을 때만 사용 가능한 은폐 마법. 몸을 가리는 은폐의 장막을 뽑아내서 숨을 수 있다.
응축은 집속 팔찌를 빼도 쓸 수 있지만 구태여 그렇게 할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팔찌의 서포트를 받고 있을 때가 가장 확실하다.
그 밖에도 파이어 볼을 장막으로 감싸는 작업이 도움 됐는지 정령 친밀도도 뚜렷하게 늘었다.
이만하면 됐다.
토끼급을 졸업할 준비가.
나는 야간 수업을 받기 위해 즉시 강의실로 이동했다.
야간 수업 출석은 2pt였지?
오늘 먹은 스테이크 값을 빼면 내 점수는 395pt.
노린 건 아니지만 질싸 7번이면 105pt로 딱 맞아떨어진다.
조교가 끝난 에카테의 농익은 보지를 맛보는 것도 이게 마지막.
진급하면 더는 그녀를 같은 강의실에서 만날 수는 없을 것이다.
긴급 지령의 영향인지 야간 수업을 들으러 온 학생은 나와 에카테를 포함해 세 명밖에 없었다.
잘됐다. 어차피 수업에는 관심 없으니까.
나는 에카테 바로 옆에 앉았다.
기본 암시는 여느 때와 같다.
즐거운 수업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