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충 이세계 최면물-81화 (81/414)

대충 이세계 최면물 8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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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은 남자 기숙사.

내 룸메이트가 만에 하나라도 여자일 가능성은 당연히 없었다.

침대에서 기어 나온 남자는 깡마른 체격에 어딘가 병든 것 같은 친구였다.

눈이 마주쳤으면 무슨 얘기라도 할법한데 그냥 꾸벅 고개를 숙이고 일어나서 나갈 준비를 한다.

그러다, 나갈 때가 되어서야 그가 말했다.

"……밥 먹으러 갈래?"

"그래."

다크서클이 턱 밑까지 내려올 것 같은 룸메이트와 함께 기숙사를 나섰다.

"난 데칼이야. 너는?"

"……아바. 아바 로운."

얘도 귀족 가문이야?

아니……. 애초에 생각을 달리해야지. 나나 카렌처럼 가문이 아예 없는 사람이 드물다고 봐야 할 것이다.

나는 아바를 따라서 십 분가량 건물과 건물 사이를 잇는 회랑을 걸었다. 그러자 점차 여학생들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무척 흡족하다.

어디서 이렇게 예쁜 애들만 골라왔는지 평균적으로 외모 수준이 정말 높다. 눈 호강하네.

"조심해."

아바가 앞서 걸으며 말했다.

"뭘?"

"……여 후보생들을 이유 없이 3초 이상 쳐다보면 감점이야."

"……."

그게 무슨 소리냐고 하려다가, 남자 집행관들이 매의 눈으로 날 보고 있다는 걸 깨닫고 움츠러들었다.

장난 아닌데?

아바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기서는 점수가 모든 것이야. 집행관들이 어디서든 감시하고 있어."

"아무리 그래도 쳐다본 것 정도로……."

"수첩 뒷면을 봐."

나는 시키는 대로 수첩 뒷면을 펼쳐봤다.

데칼

총합 -1pt

···수업 외 시간에 여 후보생들을 바라봄. -1pt

진짜냐?

내가 모험가 생활하며 힘들게 벌었던 영혼이 이런 일에 쓰이고 있다니?

"저길 봐."

"베일 노아 경이다."

노아가 위풍당당하게 뜰을 가로지르고 있다.

그녀가 나를 봤을까?

응?

"……."

노아가 집행관이랑 몇 마디 얘기를 나누더니, 내 수첩에 있던 감점이 삭제되었다.

총합 0점으로 돌아왔어.

모든 집행관을 억누를 수 있는 위치에 간다고 했었지. 그래, 노아의 조력은 시작되었다.

나는 기분 좋게 아바와 식당에 들어섰다.

벌써 많은 후보생이 테이블에 앉아 식사하고 있다. 사춘기 애들만 모아놓은 것도 아니고

집행관들이 감시하는 통에 혼성 그룹이 거의 없었다. 여자는 여자들 따로. 남자는 남자들 따로. 아주 철저했다.

이제야 노아가 했던 말이 와닿기 시작했다.

수첩에 잠깐 감점 목록이 나왔을 때 본, 수업 외 시간이라는 말.

그 시간 외에는 여 후보생들과 사적인 접촉은 어렵다는 것……. 왜 이런 답답한 방식을 고수하고 있을까?

사실 그러지 않을 뿐이지

학교 입장에서 남자와 여자가 붙어 있으면 안 될 이유를 억지로 만들면 갖다 붙일 이유는 엄청나게 많다.

그래서 그냥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뭐 먹을래? 너무 비싼 건 말고."

아바가 말했다.

"뭐가 맛있어?"

"우동이랑 유부초밥."

"그럼 그걸로. 얼마 주면 돼?"

"여기서는 식사 비용도 점수로 지불해. 오늘 왔으면 점수가 없을 테니, 내가 살게."

"점수로 산다고?"

정말로 벽에 걸린 메뉴에 우동· · · 1pt라고 쓰여있었다.

나는 아바와 함께 앉아 식사했다.

"고마워. 잘 먹을게."

"누구나 처음에는 다 놀라. 멜브릿은 다른 데서는 보기 힘든 시스템을 갖추고 있으니까."

"감점당하면 밥도 굶어야 해?"

"정 어려울 때는 밖에 나가서 사 먹어."

외출 금지라는 말은 없었지.

"하지만, 수업에 불참하거나 취침 시간에 기숙사에 없으면 자동 감점…….

밖으로 나돌수록 점점 멜브릿에 있기 힘들어져."

"……."

정말 지독하군.

수업 이외의 환경에서도 자유를 제한받고 감시받는다는 점이 그렇다.

나는 어느 정도 집행관의 눈길을 피할 수 있지만 다른 후보생들이 느끼는 압박감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저기 좀 봐."

남 후보생들이 술렁거린다.

나는 직감적으로 식당에 카렌이 나타났다는 걸 알았다.

모두 보고 있을 때 슬쩍 끼어서 카렌을 본다.

감점의 위협이 있어도 카렌의 제복 차림은 일순간 남자들의 시선을 독차지했다.

윗옷이 작은 거 아냐? 젖가슴의 볼륨이 장난 아니다. 스커트 밑으로 나온 건강한 허벅지도 꼴린다.

룸메이트를 잘 만났는지 카렌은 벌써 스티아를 포함한 여 후보생들 무리에 섞여 있었다.

이제 슬슬 위험하다. 시선을 거두고 식사에 전념한다.

"……으으."

아바는 몸서리를 쳤다.

"왜 그래?"

"방금 그 붉은 머리 후보생…… 봤어?"

"음. 꼴리는 젖탱이였지."

"……아니, 나는 정말 질색이야."

"슬렌더 취향?"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가슴이 너무 크면 무섭잖아. 크기가, 가슴으로 맞으면 아플 것 같을 때부터 무서워."

"……."

아바는 진짜 무서운 듯 떨었다.

사람마다 여자 취향은 조금씩 차이가 있다지만 표현 참 독특하네.

맞으면 아플 것 같을 때부터 무섭다니.

카렌의 젖탱이로 맞는 내 모습을 상상해봤다.

음…… 다음에 한 번 해달라고 해야지.

"나는 옆에 있던 금발 후보생 정도가 딱……."

아바는 쑥스러운 듯 자기 취향을 밝히며 헤헤 웃었다.

"스티아 말이지."

"알아?"

"시험 볼 때 같이 있었거든.

나는 여자라면 다 좋아. 예쁘기만 하면 작아도 커도 상관없어."

"얼굴은 중요하지."

역시 남자끼리 하는 얘기 중 여자 얘기만큼 가까워질 수 있는 화제도 별로 없는 것 같다.

감점의 위협이 있어도 매력적인 암컷을 스캔하는 남자들의 본능은 건재하다.

아까처럼 대놓고 빤히 구경하면서 걷지만 않으면 될 것 같다.

많은 사람이 카렌과 스티아를 봤기 때문에, 감점 처리는 자연스럽게 피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 만족할 생각은 없다.

수업 시간을 제외하면 여 후보생들이 이렇게 많이 모이는 공간은 식당이 유일할 터.

그 소중한 시간에 후보생들을 구경할 수도 없다니, 애가 탄다.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나는, 아바에게 질문했다.

"아바. 멜브릿의 학년은 어떻게 나뉘어?"

"학년은 따로 없어."

"그럼 수업은 다 함께 받나?"

"점수별로 나뉘어서 등급을 매겨. 0점부터 500점은 토끼급. 천 점까지는 늑대 급. 천 오백점 까지는 곰 급. 그 이상은 용 급으로 나뉘어서 수업을 받아."

모험가 등급이랑 비슷하네.

모험가가 은이나 금 다이아 같은 가치가 있는 귀금속으로 등급을 나누었다면 멜브릿은 짐승으로 나누었다.

오늘 막 입학한 나와 스티아, 카렌은 토끼급에 해당한다.

"……정말 점수가 모든 것이었군."

"이제 알았지? 멜브릿에서 무사히 졸업하고 싶다면 얌전히 있는 것이 제일이야. 눈에 띄는 행동을 하거나 예쁜 후보생한테 눈독 들이는 사람은 오래 가지 못해."

"흠."

"데칼이 그렇다는 건 아니야. 나는 벌써 룸메이트를 네 명이나 보냈거든……."

어쩐지, 뼈 있는 조언이다.

아바가 괜히 앞뒤 모르는 나한테 겁을 주려고 그런 말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밥도 사주고 친절하게 멜브릿의 시스템에 대해 알려 주었다. 아바한테는 솔직히 고맙다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잘 알았어. 고마워."

"……나는 낮잠 잘게. 오후 수업은 15시부터 시작이야."

아바는 옷을 벗고 슬금슬금 자기 침대로 기어들었다.

나도 침대에 누워 생각을 정리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멜브릿의 특색을 파악하기에는 충분했다.

수업 외 시간에는 철저하게 이성간 교류가 금지되어 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여 후보생들을 3초 이상 쳐다보면 감점 처리가 될 정도.

당연히 공개적으로 사귄다든지 손을 잡고 걷는다든가 하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

밤에 의심 가는 행동이라도 하는 순간 집행관한테 머리가 터진다.

남 후보생 중 불순한 의도를 가진 자가 있다면 벌써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나한테 멜브릿의 보안은 대수롭지 않다.

하지만 캠퍼스에 쫙 깔린 집행관들에게 일일이 최면을 걸면서 타깃이 될 여자를 찾아서 돌아다니는 건 너무 비효율적이다.

그런 짓을 했다간 노아도 날 구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겉으로는 성실한 학생인 척 순응하면서 평가 점수를 올리는 건 나한테 무척 쉬운 일이다.

지금까지 만난 멜브릿 내의 타깃을 살펴보면

0점에는 스티아, 카렌이 있을 것이고 함께 올라가는 입장이다.

스티아한테 최면을 걸어서 타락시키는 건 무척 쉽다. 같은 점수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보다 명백히 상위 점수대에 포진한 여자들.

중간쯤에는 디아나가 있을까? 상위권에는 틸리아가. 그보다 더 최상위인 용 급에는 1위 헤르카 필리오테와 2위 네리스 리케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위에 학생회장으로 신임받는 시아가 있다.

점수를 순조롭게 올려서 최종적으로 최상위권에 있는 여자들에게 최면을 건다.

그때까지 수업 시간 외에는 눈에 띌 만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좋아.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고 때를 기다린다.

침대 뒷면 패널에서 경쾌한 새소리가 울렸다.

15:00~18:00 오후 수업 시간입니다.

멜브릿 후보생들은 본관으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0~500점···

아바가 말했던 것처럼 점수별로 수업을 받는 공간이 나뉜다.

만약 나뉘더라도 같은 건물을 쓰면 최상위권 여자들이랑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희미한 기대를 품었는데, 약도를 보자마자 기대는 배신 당했다.

0~500점은 아예 본관 건물을 사용하지도 못한다. 한참 떨어진 다른 건물로 가라는 지시가 쓰여 있었다.

본관에 가려면 최소한 늑대 급은 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아바. 나는 먼저 갈게."

방문을 열고 나오자 수첩에서 소리가 났다.

방에서 수업 참여 얘기를 들은 것만으로 1포인트가 들어와 있었다.

만약 제시간에 없었다면 이건 감점이었겠지.

나는 눈어림으로 기억한 약도를 떠올리며 제 2관으로 이동했다.

영혼 그래픽(가칭)으로 보았을 때는 본관에 비해 허접한 건물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멜브릿은 이세계 기준으로 본다면 어딜 가나 훌륭했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잇는 회랑을 걸어, 제 2본관으로 들어가자 벌써 여러 후보생이 보였다.

여기서 또 방이 나뉘는 건가?

A5에서 봤을 때 내가 가야 할 강의실은 가장 우측이었다. 설마 그것도 지정이 된 건가?

강의실은 백 명이 들어와도 너끈히 수용할 수 있을 만큼 넓었는데 사람이 날 포함해서 서른 명 정도밖에 없었다.

공간을 이렇게 활용하는 이유가 뭘까?

수업 내용이 다르기 때문인가.

내 추측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확신으로 바뀌었다.

스티아와 카렌이 오지 않는다.

아마 제일 먼저 와 있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둘인데.

무장한 후보생도 없고, 다들 나처럼 빈손이었다.

"……."

수업 시작 십 분 전부터 힘이 빠진다.

카렌도 없고 스티아도 없다니. 그런 일이 있어도 되는 거야?

교사는 이스티가 아닐까?

헛된 희망이었다.

들어온 건 희끗희끗한 머리를 한 풍채가 좋은 남성이었다. 무척 고집스러울 것 같은 인상이다.

"원하는 자리에 모여 앉아라. 혼자 떨어져 있지는 말고. 나는 보호 마법과 이론을 가르치는 론웰이다."

론웰은 후보생들 눈은 쳐다보지도 않고 말을 계속 이었다.

"너희들 중 반은 가진 점수가 없겠지. 내 수업에서는 감점을 받지 않으면 다행일 정도이니 집중해서 듣도록 해라.

점수가 음수가 된 후보생은 며칠 버티지 못하고 나가게 되어 있으니."

협박인지 경고인지 잘 모를 태도로 쏘아붙인 후, 론웰의 수업이 시작되었다.

솔직히 뭐라고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마나가 어쩌고, 순환이 어쩌고 하는데 전이 때부터 마법을 자연스럽게 다뤄온 나랑은 정말 인연이 없는 내용이었다.

"하아……."

절로 한숨이 나온다.

그러자 론웰이 나를 가리켜 말했다.

"거기, 검은 머리한 후보생. 이름이 뭐지?"

……나?

"데칼 입니다."

"다 알고 있으니까 한숨이 나온 거겠지?"

으윽. 잘못 걸렸다.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면 앉아도 좋다. 오히려 가산점을 주지. 데이툰 왕국 초대 대마법사의 이플레 님의 마법이 뭐였는지 말해 봐라."

"윽…!"

하필이면 내가 알 리도 없는걸.

내가 대답을 못 하자 론웰은 씩 웃으며 비아냥거렸다.

"기본 중의 기본인데. 마법으로 후보생이 된 자가 그것도 모르나? 자네 얼굴은 다음 수업 땐 없겠군. 앉게."

"……."

태도 불량 - 3pt, 수준 미달 -10pt, 복장 불량 - 2pt

총합 - 14p가 되었다.

내려간 점수를 보니 속이 쓰라리기 시작했다.

이 세계의 가장 상식에 가까운 문제조차 나는 모른다. 다른 세계에서 살다 왔기 때문에.

그런데 복장 불량은 뭐지?

다른 남 후보생들은 블레이저코트의 단추를 전부 잠근 상태였다. 나 혼자 풀어놓은 상태였고.

이러니 요주의 대상으로 보고 있었군.

론웰 태도가 가시 돋치기는 했으나 괜한 트집은 아니다. 자기 직무에 충실할 뿐.

그저 짜증이 났다.

당연히 스티아와 만날 줄 알았는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대로 지적질 받은 채 수업이 끝날 쯤 점수 조작만 하고 돌아갈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여 후보생들을 쓱 둘러봤다.

스티아 만큼 예쁜 여학생이 있었으면 당연히 내 관심 대상이었을 것이다.

허나 없다.

안경녀 정도만 되도 좋으니까. 이제 아무 여자나 좋아…….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구석에 있는 음침한 여자한테 눈이 갔다.

……뭐지.

너무 움츠리고 있길래 저런 게 있는지도 몰랐네.

하지만 나는 그 음침한 여자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제 정문에서.

……그래. 맞아.

기분 나쁜 마녀 복장을 하고 있었던, 검은 머리카락을 종아리까지 닿도록 기른 그 여자다.

제복을 입고 있지만 길어도 너무 긴 그 머리카락 때문에 기억이 났다.

그녀 역시 나처럼 0점 신입생에 마법사였다.

나는 흥미가 솟았다.

"거기 너!"

론웰이 나를 가리켜 말했다.

"다른 후보생 구경이나 할 거면 나가는 게 어떤가?"

"……."

적절하군. 론웰의 불호령 덕분에 후보생들의 의식이 모여들었다.

딱.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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