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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이세계 최면물-70화 (70/414)
  • 대충 이세계 최면물 7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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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쏘아진 화살들은 순간 유리가 깨지는 것처럼 비산(飛散)했다가 대기 중에 떠 있는 바람 장막에 튕겨 난반사를 일으켰다.

    상상을 넘어서는 원거리 공격에 틸리아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자, 잠깐만. 이런 걸 어떻게 피해!?"

    틸리아는 그런 불평을 늘어놓으면서도, 화살의 궤도를 읽기 위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집중하다가

    몸을 움직여 피하고, 화염 분신을 만들어 교란하고, 이어서 추적해오는 화살을 검으로 쳐내며 저항했지만

    마지막 화살은 기어코 틸리아의 허벅지에 핏빛 선을 만들고 지나갔다.

    "큿!"

    "어, 언니!!"

    선혈이 튀자 디아나가 크게 당황했다.

    "이스티가 봐준 거 맞지?"

    나는 반대로, 상처가 너무 얕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노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스티 양은 국가 재앙 급 마수, 해를 가리는 로가웰의 거조(巨鳥)를 쏘아 떨어뜨린 공으로 다이아몬드 등급을 받은 헌터입니다.

    제대로 쐈다면 다리가 없어졌겠죠."

    내 생각도 같다.

    마물 대량 발생 때 오크 보스의 몸을 무자비하게 관통했던 그 위력이 없었다.

    "아마도, 데칼님이 하신 말씀을 고려하여 죽이지 않는 수준으로 조절하는 것 같습니다."

    반면 틸리아는 이스티의 실력을 가늠해 보더니 곧장 살수를 날리지 않았나.

    힘의 차이는 명백했다.

    "나, 나는 믿고 있었어! 이스티는 왕국에 일곱뿐인 다이아몬드 등급인걸."

    카렌이 감동한 듯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말했다.

    "벌써 이긴 것처럼 떠들지 말아 줄래?"

    틸리아의 도신이 더더욱 거세게 불타올랐다. 기세가 꺾일 법도 한데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상대와 역량 차이는 명백하다. 피도 흘리고 있으면서, 아직도 더 할 생각인가?

    그 투지가 상당히 돋보였다.

    "간다!"

    "……."

    이스티는 한숨을 쉬었다.

    "상처가 하나 더 늘어날 거야."

    틸리아가 지면을 박찼다. 이스티는 기다리지 않고 즉시 화살 두 개를 불러들여 연사 한다.

    놀라운 건 틸리아의 대응이었다. 멈추지 않고 달려가서 화살과 맞닥뜨리기 직전 도약해서 화살을 건너 뛰었다.

    만약 화살을 보고 뛰었다면 말이 안 되는 움직임이다.

    이스티가 화살을 시위에 걸쳤을 때 이미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화살을 넘긴 틸리아가 회심의 미소를 띠었다.

    "어떤 방향에서든 짓쳐 들어도, 화살인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잖아! 안 그래?"

    불타는 검이 휘둘러졌다.

    이스티는 제자리에서, 오히려 한 걸음 앞으로 나가더니 활대로 틸리아의 칼을 틀어막았다.

    "뭣…!?"

    나를 포함해, 모든 사람이 경악했다.

    "이, 이게…!"

    틸리아는 힘을 주기 위해 앞으로 발을 딛고 자세를 낮춘다.

    하지만 이스티가 한 손으로 쥔 활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정령과의 유대감은 인정하지만, 전투 기술이 부족해."

    "누군데 날 가르치려 들어?!"

    틸리아가 제 몸 보살필 생각까지 버리고 격노하며 밀어붙이자, 이스티의 활이 조금씩 밀려났다.

    하지만 그건 이스티에게 있어서 위기가 아니었다.

    이스티가 살짝 뒤로 물러나자, 너무 과한 힘을 준 틸리아의 동작이 무너졌다.

    이스티는 그틈에 공격할 생각이다.

    하지만, 틸리아의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내 검은 뒤를 조심해야 해. 엘프 씨…!"

    틸리아가 검을 휘두른 후 바닥에서 불꽃이 치솟는다.

    그러자 이스티는 틸리아의 허벅지를 사뿐히 밟고 도약해서 치솟는 불길을 뛰어넘었다.

    "아……!"

    그게 끝이 아니었다.

    공중에서 바람을 타고 휙 회전한 이스티는 아래를 보며 활을 겨누어, 틸리아의 어깨를 쏘아 맞히고.

    틸리아의 등 뒤로 깃털처럼 가볍게 내려앉았다. 공중에서 춤추는 것 같은 우아한 동작이었다. 벨라가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윽……!"

    틸리아는 순간 정신을 잃고 제자리에 무릎 꿇었다.

    저건 위험하네. 허벅지에 스쳤을 때랑 달리, 이번에는 화살이 완전히 박혔다.

    하지만 쏠 때의 인상에 비하면 그렇게 상처가 깊지는 않았는데, 이스티가 힘 조절을 한 흔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체는 어깨 밑으로 동맥이 지나가기 때문에, 제대로 쐈다면 확실하게 죽었다.

    그것을 죽음의 문턱 정도로 낮춰서 쏜 이스티의 섬세한 힘 조절도 대단했지만,

    "더 해!"

    그 어깨에 박힌 화살을 스스로 뽑아내고, 다시 일어선 틸리아도 대단했다.

    하지만 이스티는 미련 없이 활을 수거하고 맨손 상태로 돌아왔다.

    그러자 틸리아는 분한 듯 이를 악물었다.

    "아직 두 발로 서있는데 그만둔다는 거야? 엘프의 결투는 그렇게 미적지근한가 봐?"

    "처음 들어왔을 때 죽일 수도 있었어. 달링이 원하지 않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 그래서 봐줬을 뿐."

    "……."

    틸리아는 말문이 막힌 듯했다.

    이스티의 말에는 거짓이 없다는 걸 누구든 투명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 역시 뱅가드 가문의 진심 어린 사죄를 원해. 그래서 이 결투에 나섰어.

    데칼의 몸에 상처 입히는 건 누구든 내가 용서하지 않아. 그게 귀족이라도. 같은 엘프라고 해도."

    "그래……."

    틸리아는 검집에 검을 집어넣었다.

    패배를 인정할 때라고 깨달은 것 같았다.

    "내가 졌어. ……나도 아직 멀었네. 그냥 좀 강한 엘프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활 솜씨라면 나도 들은 적 있어."

    "……."

    "왕국의 위기를 구한 신들린 솜씨의 엘프가 있다는 말을."

    "언니!!"

    틸리아가 휘청거리자 디아나가 뛰쳐나와 그녀의 몸을 받쳤다.

    "아……. 잠깐 현기증 났을 뿐이야. 괜찮아."

    "치유사, 빨리 와요!"

    틸리아 쪽 가문 사람이 허겁지겁 그녀들 주위로 모여들었다.

    틸리아가 응급 처치를 받는 사이, 이스티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이스티!"

    카렌이 이스티를 부둥켜안고 기뻐한다.

    "다행이다! 이겨서 정말 다행이야. 오빠 몸에도, 이스티 몸에도 상처가 없어서 다행이야."

    그렇다.

    이스티는 내가 시킨 일을, 상처 하나 없이 완수했다.

    "잘했어. 이스티."

    역시, 내가 아끼는 엘프답다.

    "달링을 위해서 힘냈어."

    카렌과 포옹을 끝낸 이스티는 나한테 다가와 안겼다.

    나는 이스티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사랑하는 내 여자친구답다."

    "사랑해. 달링."

    이스티는 꼬옥 팔에 힘을 주어 나를 끌어안는다. 차갑던 무표정을 벗어 던지고 기뻐하는 얼굴이 귀엽다.

    속이 훈훈해지는 기분이었다.

    응급 처치를 마쳤는지, 죄지은 얼굴을 한 디아나와 마치 이긴 것처럼 개운한 표정을 한 틸리아가 다가왔다.

    "데칼. 내가 졌어."

    "음."

    "내가 사람을 몰라봤네. 데칼 곁에 있는 게 고고한 사냥꾼이라면, 집행관님은 「철벽의 심사관」베일 노아 경이지?"

    "그런 대단한 호칭으로 불릴만한 자는 아닙니다."

    노아는 자신을 낮추며 겸손함을 드러냈다.

    나는 귀족 이름을 함부로 불렀다고 뺨까지 맞았는데, 노아는 그 귀족에게 경이라고 불리다니.

    이 세상일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어쩌면 두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먼저 소개했다면 결투도 피해갈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 어느 쪽이든 뱅가드 가문은 결투를 걸었을 것이다.

    그녀가 말하는 정리란 가문의 명예가 걸린 문제니까.

    "데칼. 당신이 누구인지 궁금해.

    이 둘은 명예나 돈을 위해 움직일 사람들이 아니야. 고용하려고 시도한 가문은 많았지만 전부 실패했지.

    그런 두 사람이 한 사람을 섬기는 걸 보고 있어. 놀라운 일이야. 이제는, 데칼이 망국의 왕이라고 해도 놀라지 않을 것 같아."

    망국의 왕이라…….

    그 정도 명분이 있어야 이 두 사람을 동시에 데리고 있는 걸 납득할 수 있다는 말이다.

    속이 간지러울 만큼 기분이 좋았다.

    이것도 용사 후보 선출 기간이라는 시기가 적절하게 겹치지 않았으면 이루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여성들은 모두 그 사건을 중심으로 해서 만났다.

    긴급 임무를 지정한 헌터, 그 임무를 심사하는 심사관, 그리고 함께 긴급 임무를 헤쳐 나온 동료까지.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처음 소개했던 대로. 나는 단순한 모험가, 이제는 용사 학교의 후보생이 되러 갈 예정이지."

    "……음. 우리 무례를 사죄하고 싶어. 결투에서 패배했으니 할 말은 없어."

    디아나의 낯빛이 어둡다.

    자기 잘못이라고 자책하고 있을까?

    "죄송해요. 언니. 저 때문에 이렇게 심한 상처를……."

    "괜찮아. 이 정도는 좀 쉬면 나아."

    그러니까. 이 녀석은 사과할 대상을 잘못 알고 있다.

    나는 여전히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죄책감은 언니한테만 느끼고 있다.

    그냥 디아나의 세상에 나는 아무래도 좋은 사람인 것이다.

    짝.

    나는 손뼉을 쳐서, 두 사람의 이목을 나한테 모았다.

    "결투 결과는 나왔지. 이제부터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 나는 봐주지 않아."

    "음."

    틸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 마차에 파손 난 게 있다면 배상할게. 또한, 켈립을 치우는 일은 우리 사용인들에게도 명령해서 돕도록 하겠어."

    그녀 스스로 생각한 진심 어린 사과를 줄줄 읊는다.

    "아니지.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했잖아?"

    "……?"

    "정말 죄송하다면 성의를 보여야지. 무릎 꿇고 절해. 그리고 나한테 죄송하다고 빌어."

    "뭐……?"

    자매의 얼굴이 강한 적대감으로 물든다.

    그런 일은 마치 죽었다가 깨어나도 상상해본 적 없다는 듯한 태도가 날 즐겁게 한다.

    "입고 있는 옷을 전부 벗고 해줘야겠어."

    "이, 이, 죽어 마땅한 불한당이!"

    디아나가 노해서 소리쳤다.

    "네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아느냐!"

    디아나의 노성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방금까지 화냈던 것은 마치 장난이었던 것처럼 기백이 대단하다.

    소란을 듣고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뱅가드 가문의 사용인들이 조금씩 다가왔다.

    "신성한 결투를 우습게 알고, 그런 소리를 하다니!"

    "신성한 결투?"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뜨렸다.

    "결투를 우습게 아는 건 너야. 뭘 개운한 얼굴로 다가와, 아첨 몇 마디 내뱉고. 그대로 끝내려 하고 있지?

    싸우는 도중에 피를 쏟는 걸 겁내지만 않으면 용감한 투사인가? 아니지.

    결투에서 진 쪽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는다. 뱅가드 가문, 평생의 오욕을 여기서 만들어 줄 거야. 그게 이번 일의 대가다."

    "언니, 가만히 있지 말고 이놈에게 뭐라고 말씀해 주세요.

    아버님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이런……!!"

    디아나는 초조한 얼굴이었다.

    믿던 언니의 무력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고 있을까. 이제부터 디아나는 믿었던 언니에게 배신당한다.

    "아니, 데칼의 말이 옳아."

    "어, 언니?"

    "데칼이 그런 사죄를 원한다면 옷을 벗고 엎드려 절해야 해. 승부의 세계는 냉혹하고 지엄한 거야."

    "……무, 슨 소리세요!?"

    "언니가 그렇다잖아."

    "윽……!!"

    디아나는 감정이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는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다.

    "허나, 뱅가드의 영애가 살갗을 드러내는 건 죽음과 같은 각오가 필요한 행위야.

    디아나 대신 내가 하면 안 될까."

    "싫은데?"

    "……."

    디아나는 언니와 나의 대화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마치 현실에서 일어난 일이 아닌 것처럼.

    "너라면 해낼 수 있다는 걸 알아. 그러면 재미없지. 죽어도 싫다는 사람. 절대 하면 안 되는 사람. 이 사죄는 그런 사람에게 받아야 의미가 있다. 알겠어?

    디아나. 옷을 벗고 절하는 건 너 하나면 족하다."

    "우, 우욱……!"

    디아나는 갑자기 고개를 숙이고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엄청나게 충격을 받은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지. 틸리아?"

    "……."

    틸리아가 디아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어쩔 수 없어. 디아나. 우린 결투에서 졌어. 데칼이 하라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어."

    "아, 아아……. 언니. 저, 저는 싫어요. 지켜주세요. 제발…….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아요. 이런, 이런 추악한 자에게 살갗을 보일 바에는 죽는 것이……!"

    "……."

    틸리아는 애원하는 디아나를 냉철하게 노려봤다.

    "어쩔 수 없어. 디아나."

    "흐윽. 허억……."

    디아나는 상상도 못 한 궁지에 내몰려 과호흡까지 일으켰다.

    "결투의 대가를 치러야 해. 디아나. 하다못해 내 손으로 벗겨줄게."

    "아, 안 돼애…!!"

    틸리아는 이를 악물고, 디아나의 옷을 벗기려 든다.

    나는 즐겁게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무슨 짓이냐. 네놈들!"

    이번에는 또 뭐야? 뱅가드 가문 쪽에서 사람이 우르르 튀어나왔다.

    그들은 무장한 호위 병사들이었다.

    "무슨 짓이냐니. 패배의 값이 치러지는 걸 보고 있는데?"

    "허튼소리! 뱅가드 가문의 여자를 겁박하다니 겁이 없구나. 쓰레기 범죄자가!"

    "……."

    "다, 당신들……."

    디아나는 울먹이며 소리쳤다.

    "이 자들을 물리치세요! 나를 지켜요!"

    "디아나 님과 틸리아 님을 지켜라. 놈들을 떨어뜨려라!"

    "예!"

    호위 병사 수는 여덟 정도인가?

    정리해야겠다 싶어서 주머니에 넣은 손을 꺼냈을 때였다.

    검은 무언가가, 틸리아와 디아나를 지나서, 호위 병사들 앞을 가로막았다.

    그건 노아였다.

    노아는 어느새 꺼낸 검은 통파를 휘둘러, 접근하는 호위 병사들의 검을 하나하나 깨부수고 밀쳐 제압했다.

    "밀어붙여. 집행관 하나쯤!"

    노아의 검은 통파가 손목 움직임에 맞춰 회전한다.

    병사들은 아무도 노아의 뒤로 넘어오지 못했다. 노아는 제자리에서 발을 움직이지도 않고 병사들의 무기를 부수고, 갑옷을 깨면서 모조리 쓰러뜨렸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보통 집행관의 실력이 아니야."

    "물러서십시오. 뱅가드 가문은 결투에서 패했습니다. 데칼님은 정당한 대가를 받고 계십니다.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은 본디 집행관의 일.

    당신들 마음대로 데칼님을 범죄자 취급하는 건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노아. 잘했어!"

    노아는 내 마음을 잘 안다니까.

    최면까지 걸 필요도 없었다. 노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등으로 대답하며, 디아나는 그사이에 완전히 갇힌 꼴이 되었다.

    "아아……."

    틸리아가 디아나의 드레스를 벗기기 시작했다.

    디아나는 팔로 가슴팍을 가리고, 울먹였다.

    "일레시아 님. 빛으로 저희를 도우소서……. 빛으로……."

    기도까지 할 만큼 절박한가?

    나는 손뼉을 치며 환호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멈출 생각은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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