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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이세계 최면물-68화 (68/414)

대충 이세계 최면물 68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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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단의 마차 행렬과 마주쳤습니다.

서둘러 가는 중이라고 하는데, 우리 마차를 비킬까요?"

"음……."

눈어림으로 보니 짐마차가 열한 대는 있네.

재수도 없지. 어떻게 이 넓은 평원에 몇 없는, 가도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마차 행렬끼리 만나냐.

차라리 마차를 털어보겠다고 덤비는 도적 떼랑 맞닥뜨리는 게 더 가능성 있겠다.

그래도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

서두르는 것도 아닌데 먼저 가라고 해야겠다.

괜히 우리가 앞장섰다가, 저 긴 행렬을 뒤꽁무니에 달고 갈 생각을 하니 그게 더 피곤하다.

"양보하자. 먼저 가라고 해."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노아가 상대편 짐마차 선두에 있는 마부와 얘기를 나눈 뒤,

우리는 마차를 뒤로 물리고 상대가 먼저 지나갈 수 있게 배려했다.

그때였다.

"어엇!"

상대편 행렬 앞쪽에 있던 짐마차 바퀴가 주저앉더니 휘청하면서 짐칸에 있던 상자를 쏟은 것이다.

"윽……."

보면서도 눈을 가리고 싶어지는 광경이었다.

저게 무엇이든 간에 엄청난 손해라는 건 바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상자가 쏟아지면서 뚜껑이 열리거나 부서지고, 그 안에 있던 주먹 크기 반만 한 붉은 과일들이 충격으로 으깨져서 흙바닥을 빨갛게 물들였다.

"어이구, 이런!!"

마부가 경악했음은 물론이고 지켜보던 사람들은 다 탄식했다.

"오빠. 무슨 일이야?"

"앞서가던 짐마차가 싣고 있던 짐을 모조리 쏟았어. 과일 같은데."

카렌도 반대편 창으로 고개를 쑥 내밀고 확인한다.

"저거 켈립 아니야?"

"켈립이 뭐냐?"

"엄청 귀한 과일이야. 저렇게 많이 쌓아놓고 옮기는 것도 처음 봤는데. 바닥에 전부……."

카렌이 말하던 중에 갑자기 우리 마차가 흔들렸다.

"왜 이래?"

급정거 다음에는 급발진이냐? 우리도 엎어지는 거 아니야?

"대체 무슨 일이… 윽!!"

내가 튀어 오르면서 머리를 부딪치고 나서야 흔들림이 멎었다.

대체 뭐야? 엎어진 건 상대 짐마차인데 왜 우리 마차가 흔들리냐고?

나는 마차 문을 박차고 나왔다.

상황을 보자마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한눈에 알았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짙은 안개처럼 숨 막히게 깔린 과일 향기.

호흡 몇 번 했을 뿐인데 입안에서 묘한 맛이 감돌았다.

바닥에 처박힌 고급 과일, 「켈립」의 향이다.

그리고 이 향기는 말들을 미치게 했다.

가만히 있던 우리 말들이 통제를 잃고 과일 무더기로 직진해서, 교차로는 다중 추돌 사고가 난 것처럼 난장판이 되었다.

행렬에서 빠져나온 말과 자리를 이탈한 마차들이 정신없이 뒤엉킨 와중 말들은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켈립을 먹고 있었다.

뭐야. 이 답 없는 상황은?

이쪽도, 저쪽 행렬 사람들도 때아닌 만찬을 즐기는 말들을 망연히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데칼님. 죄송합니다. 충분히 거리를 두었어야 했는데."

노아가 말했다.

"이럴 줄 누가 알았겠어. 네 잘못 아냐. 어떻게 수습하지? 우선 말들을 물려야 할 것 같은데……."

말이 온순하게 따를 것 같지 않다.

대체 무슨 과일이길래 짐승들이 이렇게 날뛰어?

식사를 방해하면 시원하게 뒷발로 맞을 것 같다.

"……바닥에 엎어진 켈립을 청소하는 편이 빠르겠습니다."

노아의 말이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나를 슬프게 했다.

"이게 무슨 일이야!"

그때 젊은 여성의 앙칼진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녀가 상단 행렬의 주인이라는 걸 알았다.

걸치고 있는 옷부터 연회장 같은 데서나 어울리는 화려한 이브닝드레스였다.

인상을 잔뜩 구기고 신경질 내는 데도 귀한 곳에서 자란 여자애라는 걸 바로 알아봤다.

길이는 등까지 내려오는 꼼꼼하게 세팅된 분홍색 머리카락과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은 푸른 눈을 한 여자였다.

외모는 특등급이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어린 티가 났다.

상황이 개판이기는 하지만 감정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낸 모습이 숙녀가 덜 된, 철부지 소녀 같은 모습이다.

"아아! 켈립이. 아버님께 진상할 선물이!"

충격을 받고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소녀에게 사람들이 다가가 부축한다.

"디아나 아가씨! 진정하세요."

"진정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버님이 그렇게나 기대하셨던 물건인데! 누구예요? 이런 짓을 벌인 사람이!"

괜히 불똥 튈 것 같은 이 쌔한 느낌은 뭐지.

곧 디아나라고 불린 여자는 상단 사람을 모아 놓고 이런저런 얘기를 듣더니…… 노아와 나를 향해 일직선으로 걸어왔다.

시선이 창처럼 확 꽂힌다. 나랑 얘기하고 싶구나.

내가 그녀를 상단 행렬의 주인이라고 알아본 것처럼

저쪽도 나를 이쪽 행렬의 주인이라고 알아본 거겠지.

자연스럽게 우리는 마주 선다.

정말 바라지도 않던 상황이다.

디아나는 허리에 손을 얹고, 위협적인 태도로 나를 올려보며 말했다.

"당신. 이름이랑 가문을 밝히세요!"

이름은 그렇다 치고 가문?

노아가 무슨 눈치를 챈 듯 앞으로 나섰다.

"데칼님. 제가 얘기하겠습니다."

"집행관. 물러나요. 나는 지금 이 사람에게 물었어요."

노아가 집행관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본 걸 보니 성도 사람인가?

자기보다 나이가 두세 배는 많아 보이는 사람들을 턱짓으로 부리는 걸 보면 가문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나는 가능한 예의 바르게 말했다.

"이름은 데칼. 가문은 없고, 단순한 모험가입니다."

"하."

디아나는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나를 무시해도 되는 부류의 인간이라고 깨달은 것처럼.

팔짱을 끼고, 경멸하는 눈빛으로 날 훑어본다.

"모험가라고? 미천한 떠돌이 따위가 감히 뱅가드 가문의 행렬을 막아?"

"불행한 사고가 난 걸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유감?"

디아나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아예 나를 잡아먹을 기센데?

"우리 사람들이 말하기를, 당신들 말이 갑자기 뛰쳐나와 놀란 나머지 짐마차가 엎어졌다고 하는데.

이 말이 사실이라면 유감인 건 당신이야."

"……."

디아나는 우리 마차를 쓱 보더니, 말을 이었다.

"입은 꼴이나 마차를 보면 그냥 모험가는 아니고. 어디 몰락한, 이름 없는 가문인가 본데. 어떻게 배상할 생각이야?"

하아. 우리 말이 튀어나와서 놀랐다고?

마부가 거짓말로 둘러댄 모양이다.

"오해입니다.

그쪽 짐마차 바퀴를 봐요. 짐마차가 먼저 옆으로 쓰러졌고, 우리 말들은 그냥 과일 냄새에 이끌렸을 뿐입니다."

"오해? 시답잖은 소리 마. 네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이 일은 그대로 넘어갈 수는 없는 문제야."

"음……."

나는 내 관자놀이를 꾸욱 누르면서 말했다.

"이건 사고일 뿐입니다. 얼굴 붉히지 말고 해결합시다. 디아나 씨……."

착!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디아나가 갑자기 내 뺨을 때렸기 때문이다.

"내 이름을 부르는 걸 허락한 적 없어! 이 무례한 놈아!"

"……."

노아가 나와 디아나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디아나 님. 폭력은 사태를 악화시킬 뿐입니다."

"집행관 따위가 나한테 말대꾸를 해? 그 남자가 네 목숨보다 중요한가 봐?"

"달링!"

이스티가 나한테 달려왔다.

그리고는 내 뺨을 살펴보며 울상을 지었다.

"괜찮아."

"하지만…."

계집애 손 좀 맵네.

입안에서 폭죽이라도 터진 줄 알았다.

노아도 쩔쩔매는 걸 보면 어지간히 높은 사람인 것 같은데.

"노아. 나와."

"데칼님."

"좋게 해결할 생각은 없어졌으니까."

"나한테 손찌검이라도 할 생각이야? 날 건드리면, 너는 즉시 사형이야."

나는 지그시 디아나를 보았다.

이 일에 대한 사죄를 어떤 식으로 받으면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조용히.

"뭐, 뭐야."

디아나는 묘한 분위기에 위협을 느낀 듯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때였다.

"디아나!"

누가 디아나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다.

"언니!"

마차 행렬 가장 뒤에 있다가 뒤늦게 나타난 여자.

디아나의 친언니처럼 보였다. 분홍색 머리카락, 밝은 색채의 푸른 눈.

하지만 두 사람이 주는 인상은 전혀 달랐다. 동생 쪽이 그야말로 온실 속 화초라면 언니 쪽은 자유분방한 느낌이었다.

머리카락은 자연스럽게 길렀고 얼굴에는 화장기도 전혀 없었지만, 이목구비가 선명하고 피부 톤이 무척 맑아서 예뻤다.

여성치고는 170 이상으로 큰 키와 모델처럼 날씬한 몸매가 눈을 사로잡는다.

그녀는 엉겨 붙는 동생을 살짝 밀어내고 나에게 다가왔다.

"동생이 실례를 저질렀네. 미안해."

"……."

언니 쪽이 순순히 사과하자, 치밀어 올랐던 화가 조금은 가라앉았다.

그래도 넘어갈 생각은 없지만. 상황을 지켜봐야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언니, 이런 자들에게 사과할 필요같은 건 없습니다!"

"속상한 거 알아. 디아나. 그래도 갑자기 사람을 때리면 안 되지."

길길이 날뛰던 디아나가 움츠러들었다.

"죄송해요. 이 자가 제 이름을 주워듣고 함부로 부르기에 그만……."

맞은 사람을 보고 사과를 해야지. 언니한테 대고 말하는 거야?

어이가 없군.

"재밌네."

디아나의 언니는 이쪽을 쓱 훑어보고 말했다.

"집행관과 엘프를 데리고 다니는 모험가라.

귀족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 안된다는 거 몰랐어? 아니면 겁이 없는 건가?"

"할 말은 그게 다야?"

나는 시큰둥하게 답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보내주고 싶지만, 우리도 손해 본 게 있으니까.

당신네 말들이 우리 켈립을 집어먹은 이상, 뱅가드의 명예가 걸린 문제야. 무관계하다고는 할 수 없잖아?"

짐승이 마음대로 집어먹은 과일도 주인이 자기들이면 책임을 묻는다는 소리인가.

여자의 의도가 명백해졌다.

"우리더러 배상하라고? 바닥에 쏟아진 켈립인지 뭔지 하는 것에 대한."

"음~ 배상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모험가 수입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걸. 지금 시세로 6,800 골드는 하는데."

육천 뭐?

과일 주제에 뭐가 그렇게 비싸냐.

"사실, 그 정도 액수는 우리한테는 별거 아냐.

그냥 정리만 좀 했으면 해."

"정리?"

"응. 그러니까……. 당신네 말이랑, 마부 목 하나 내놓으면 얼추 맞을 것 같은데. 디아나. 그렇게 생각하지?"

"다 목을 떨궈야 해요. 이런 놈들."

"내가 살인마도 아니고, 그건 좀."

6800 골드를 잃은 대가로, 우리 말을 전부 죽이고 마부 하나한테 책임을 물어 끝내겠다는 뜻이다.

그 말을 듣고 좀 놀랐다.

나이는 나보다 어리거나 비슷한 정도에 불과한데 그런 끔찍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는 것이.

이런 느낌은 전이한 후로 처음이다.

정말 다른 세상 사람을 만난 기분. 나와 사고방식이, 자라오는 과정이 전혀 다르다는 게 피부로 느껴진다.

나는 저 나이 때 뭘 했지?

책임을 묻기 위해 사람이나 말을 죽여? 매일 같이 먹는 소나 돼지를 도축하는 것도 눈 뜨고 못 봤을 것이다.

나한테 이목이 모였다.

모두 내 말을 기다리고 있다. 뱅가드 가문의 잘나신 자매 말고도, 노아나 이스티, 카렌 또한.

하지만 긴장은 되지 않았다.

나는 최면술사. 남의 인생을 어그러뜨리는 말 몇 마디조차 간단하게 뱉어 왔다.

오직 내 즐거움을 위해서.

그래. 즐기자. 지금 나는 선물 상자에 막 손을 넣었을 뿐이다.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 두근두근함을, 이 자매가 나한테 선물해준 것이다.

"싫다면?"

"무슨 뜻이야?"

"우리가 가진 말이나 마부를 내주기는커녕, 너희가 진심으로 사죄하는 꼴을 보지 못하면 납득 할 수 없다는 뜻이지."

"아하하!"

언니 쪽이 호쾌하게 웃었다.

"와. 다른 세상에서 살다 온 사람인가? 나한테 그런 말 하는 사람 처음 봤어."

"이래서 촌사람은 무서워요. 아무것도 모르니까."

동생까지 짜증나게 거든다.

최면의 존재야 얘네는 모르니까 그렇다 치고.

무력 대 무력으로 봐도 이쪽이 훨씬 강할 것 같은데 뭘 믿고 이렇게 까불지.

솔직히 가소로운 기분까지 들었다.

"패기가 마음에 들어. 정식으로 소개할게. 난 틸리아. 틸리아 뱅가드. 멜브릿의 용사 후보생이지."

멜브릿이라면 용사 학교 아닌가?

"본인이 직접 이름을 밝혔을 때는 불러도 돼."

틸리아는 시원스럽게 말했다.

"설마 선배님일 줄이야. 나는 데칼이다."

"용사 후보생 선출 기간이었지. 그래서 집행관이 함께 있구나?"

"예. 데칼님은 긴급 임무 달성자입니다."

"좋아. 디아나. 내 칼 가져오라고 해."

"네, 언니!"

디아나는 신이 나서 가버렸다.

뭐, 이제부터 칼춤이라도 추려고?

"데칼. 이해 못 하겠다는 얼굴이네. 서로 의견이 갈렸지만, 원하는 게 있잖아. 그러면, 결투해야지."

"결투?"

곧 디아나의 명령을 받은 하수인 하나가 특이하게 얇은 양손검을 들고 와서 필리아 앞에 무릎을 꿇고 양손으로 건넸다.

그 검은 일본도처럼 검신이 휘어있었다.

"내가 이기면 당신네 말이랑 마부의 목숨을 받을게. 반대로 그쪽이 이기면, 원하는대로 사죄하겠어."

"……."

드디어 명쾌하게 정리가 됐군.

나는 기쁜 마음에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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