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충 이세계 최면물 49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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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로 돌아갔어…?"
"……."
검은색, 보라색, 파란색의 향연.
실력이 늘어나서 무언가 어레인지를 한 것 같은데… 불길한 기운밖에 나지 않는다.
설마.
지금까지 쌓인 신뢰를 배반하는 짓을 하겠어?
"잘 먹겠습니다."
카렌은 별 걱정 없이 시식을 시작하지만, 나와 이스티는 섣불리 식기에 손이 가지 않았다.
"이거, 야채 물 덜 뺐어."
"이 고기는 좀 설익은 것 같은데."
음….
일단 먹어보자.
내가 입에 음식을 넣는 걸 보고, 이스티도 따라서 먹었다.
……괴멸적인 맛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벨라!"
"응~?"
벨라는 평소처럼 거만하게 의자에 앉아서 쉬고 있었다.
"…만든 거 맛보기는 해봤어?"
"안 했는데? 맛없었어?"
"…벨라. 무릎꿇고 팔 든다. 실시."
"긋!?"
벨라는 강한 중력이 걸린 것처럼 무릎을 꿇더니, 팔을 들고 벌서는 자세를 취했다.
"마, 맛없었어?"
"몰라서 묻냐? 음식으로 장난친 거면 죽는다."
그런데 벨라의 얼굴을 보니 일부러 맛없게 만들었다거나 그런 건 아닌 듯했다.
정말 뜻밖의 일이 일어나서 놀라는 표정이다.
"조리할 때 뭘 한 거야?"
"하던 대로만 하니까 뭔가 재미없어서. 조금 변화를 주려고 했는데……."
맙소사.
악의를 갖고 행한 일이 아니라니 더욱 참담한 심정이다.
"점심 기대했는데…."
"너무하네! 배운 레시피도 떨어지고, 그런데 계속 밥 만들어 달라고 하고, 질릴까 봐 나름대로 신경 쓴 내 배려인데…."
으윽.
울컥해서 쏟아내는 벨라의 말들이 얼마 없는 내 양심을 긁어댄다.
"알았어. 미안해. 팔 내려."
"……알면 됐어!"
응?
벨라가 앉아있던 자리 구석에, 빈 과자 봉지가 보였다.
"동작 그만."
"윽!?"
벨라의 안색이 창백해진다.
"너, 맛은 봤냐?"
"당연히! ……안 봤어."
"귀찮아서 힘을 뺐다. 맞지?"
"……네."
잘 보니 벨라가 앉아있던 자리 근처에 읽다 만 만화책도 보였다.
저런 건 어디서 구한 거야?
어휴. 전문 요리사로 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는데, 실망스럽다.
승부욕 있고 손재주가 좋으면 뭐 하겠어? 제멋대로 굴던 여신님 기질은 여전하다.
"전문 요리사는 다른 애한테 맡겨야겠다.
저녁은 실망하게 하지 마?"
벨라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게으름 피운 건 따로 벌 받아야지?"
벨라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뭐, 뭔데?"
기뻐하는 표정 감추려고 애쓰기는.
……가만. 이 녀석은 벌 받는 걸 기뻐하잖아. 이러면 오히려 역효과 아닐까?
어쩌면 마음속 깊은 곳에는 벌 받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서 대충하는 걸지도 모른다.
"안 되겠다. 넌 벌 받으면 기뻐할 것 같고."
"기뻐할 것 같아?!"
"……표정 관리나 하고 그런 말 해라."
이미 반쯤 기뻐하고 있으면서.
"웃."
즐거운 생각이 났다.
"좋아. 힘든 일 하는데 보상 얘기를 안 한 내 잘못도 있으니.
점심에 실망하게 한 걸 저녁에 만회하면, 벌로 숨 멎을 것 같은 질식 섹스해 줄게."
"숨 멎을 것 같은… 질식, 섹스…."
벨라가 꿀꺽 군침을 삼켰다.
"할래?"
"할래! 기다려 봐. 지금부터 준비할 테니까! 저녁 기대해!"
"그, 그래."
벨라는 사람이 바뀐 것처럼 의욕을 활활 불태웠다.
역효과가 안 나면 좋겠는데.
식탁으로 돌아오니, 카렌은 자기 음식을 거의 다 먹어가고 있었다.
"레이라가 뭐라고 했어?"
"저녁에 만회하게 해달래. …새로운 시도를 해보려다가 그렇게 됐나 봐."
"……어쩔 수 없네."
사유를 듣고 납득한 듯, 이스티는 조금씩 음식을 입에 넣었다.
귀찮아서 성의 없이 마무리했다는 점은 덮어 주자. 그런 말 했다간, 이스티라고 해도 대노할 것 같고.
팔색 조개 성에 필요한 인원.
우선은 요리를 잘하는… 아니, 주기적으로 맛있는 식사를 안정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쉐프가 필요하다.
하지만 딱 맞는 인재를 찾아낼 수 있을까?
요리는 불과 칼, 위험한 걸 다루며 체력도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전문 요리사는 남자가 훨씬 많은 것으로 아는데.
불의 여신이 요리를 못한다는 것도 참 웃긴 일이다.
아니, 배우는 속도를 보면 못한다고 단정 짓기도 참 애매하다.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도장으로 가서 공간 도약 훈련을 계속했다.
카렌과 나는 공간 도약의 숙련도를 높이기 위해 온종일 시간을 쏟아부었다.
카렌의 목표는 나처럼 도약을 두 번 하게 되는 것이었지만, 끝내 따라잡히지는 않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다.
잘난 척하는 게 아니라 내 스킬 숙련도는 남들보다 빠르게 상승한다.
주방 일을 맡은 내 노예, 전 여신 벨레이라의 가호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난 김에 스테이터스를 열었다.
이름 : 데칼
Lv : 129
상태
[HP] 6877/6877
[MP] 8871/8871
능력치
힘 556 마력 787 체력 551 민첩 501
벨레이라의 가호《진》
「원소 속성 중에서도 불을 지배하는 권능을 내리는 가호. 여신의 진정한 이해자만이 이 가호를 받을 수 있다」
(화염 피해 면역, 불 마법의 위력 상승, 모든 스킬의 숙련치 상승.)
여신의 대리인
「모든 언어로 소통하고, 모든 문자를 독해한다. 세계를 넘나들 자격이며, 신의 간택을 받았다는 증거이다」
(스킬 습득률 상승, 경험치 상승, 능력치 적용 배율 5배 상승)
바람의 정령(+1)
「가장 자유로운 정령이라 불리며 대기의 흐름을 바꾸고 바람을 따르게 하는 정령」
스킬
파이어 볼(★☆) - 강한 위력을 지닌 중급 불 마법. 적을 불태운다.
파이어 인챈트(★★★) - 온갖 물건에 화염 속성을 부여하는 마법.
수색(★★☆) - 주의 깊게 살피고 관찰하는 것으로 흔적을 발견하고 분석하는 기술.
공간 도약(★) - 엘프의 유니크 스킬. 바람의 정령과 충분한 교감을 이룬 상태에서만 발휘할 수 있는 최상급 이동기이다.
짐작대로, 배운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공간 도약 스킬의 숙련도가 이미 별 하나다.
정령을 포착하는 감각을 익히는 건 스킬 숙련도랑 크게 상관없었겠지만 이제부터는 카렌과는 성장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이제 저녁 먹으러 갈까?"
"응!"
"……."
이스티는 말이 없었다.
"이번에는 괜찮을 거야. 따끔하게 말했거든."
"그랬으면 좋겠는데…."
이스티는 점심의 충격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듯하다.
점심에는 나도 거의 먹지 못했기 때문에 무척 배가 고픈 상태였다.
"이스티, 식사 거르면 안 돼! 건강 나빠져!"
카렌이 엄한 태도로 말하자, 이스티도 간신히 발을 뗐다.
이게 무슨 도박도 아니고 먹을 때마다 식탁을 걱정해야 한다니.
하지만 막상 도착했더니 괜한 우려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식탁에 이미 준비된 음식들은, 향도 비주얼도 모두 최상급 수준이었다.
"와!"
언제 쉐프 옷으로 갈아입었는지 깔끔하게 머리를 묶은 벨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어. 방금 내왔으니, 식기 전에 들어."
"잘 먹겠습니다!"
카렌이 복스럽게 음식을 먹기 시작하자, 나도 충동질이 들어 음식을 먹었다.
그리고 정말 놀라서 식기를 떨어트릴 뻔했다.
"같은 사람이 만든 거 맞아?"
"……맛있어."
이스티 입에서도 맛있다는 말이 나왔다.
간도 완벽하고, 고기 익힘 상태도 더할 나위 없다. 잘 구워내면 다행이다 싶은 수준에서 향신료까지 써서 향을 입히다니, 꼭 다른 사람처럼 돌변한 것 같다.
"어디, 면은…."
면 요리도 훌륭하다.
너무 익히지도 않았고, 덜 익히지도 않은 딱 좋은 상태. 소스도 면에 잘 붙어있어서 훌륭한 맛이었다.
"도리어 화가 나는데. 이렇게 할 수 있는데 점심에 그건 뭐였던 거야?"
벨라가 움찔하며 어깨를 떨었다.
"그, 그건!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니까. 어디까지나 맛의 시행착오로…."
결국 퀄리티를 높이는 데 성공했으니까, 시행착오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몇 번 실패하기는 했지만 벨라는 특훈 기간 동안 세 명, 아니 네 명분의 식사를 훌륭하게 잘 만들었다.
"잘 먹었어. 벨라."
"나도."
"저도요!"
"주인님이 야단쳐 준다고 하니까 더 열심히 해버렸지 뭐야♥"
"……."
카렌과 이스티의 시선이 나한테 푹 박혔다.
"그래. 벌 받을 만한 퀄리티였어."
"후후후."
벨라가 주먹을 꽉 쥐며 기뻐한다.
벌이라는 단어를 상으로만 바꾸면 자연스러운 대화인데, 어딘가 묘하게 어긋난 느낌이 좋다.
"주인님. 어떤 벌을 줄 거야?"
"침실로 가자. 아, 매번 객실을 썼는데. 혹시 성주가 머무는 방 같은 건 없어?"
"당연히 있지. 팔색 조개성 3층 우측 복도 끝에, 가장 경치가 좋은 방이 있어. 방도 넓고, 침대도 커."
"좋아. 다 같이 가자."
벨라가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다 같이?"
그러다, 바로 무언가 깨달은 듯 웃었다.
"아아♥ 주인님한테 상 받는 애들이구나?"
"……."
"……."
이스티랑 카렌은 부정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주인님. 여자들한테 준비할 시간도 줘야지. 예쁘게 단장하고 싶을 거 아냐."
"아아. 좋은 지적이다. 노예야."
"흐흥. 당연하지."
"다들 준비하고, 벨라가 말한 방으로 와. 기다리고 있을게."
나는 먼저 일어나서 벨라가 말한 성주의 방으로 갔다.
이세계에서 물과 풀 여관에서 지내다가 처음 팔색 조개 성의 객실로 갔을 때를 기억한다.
깨끗한 방, 푹신푹신한 침대. 현대에 살고 있을 때보다 더 호사를 누린 것 같다. 팔색 조개 성은 정리정돈은 신경 쓰지 않고 지내도 되는 호텔 같은 느낌이었다.
성주의 방에 들어갔을 때 나는 한층 더 놀라움을 느꼈다.
대단한 사람을 위한 침실. 나는 그런 걸 한 번도 직접 보거나 경험한 적이 없다.
스위트 룸 정도는 이용해본 적 있지만……. 이 장소는 위업을 이룬 사람이 머물기에 적합한 방처럼 보였다.
벨레이라가 여신으로서 자신의 권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방에 아주 잘 드러난다.
방 장식이나 가구는 전체적으로 어두운 계통의 붉은색. 우아한 고급 침대도 있었고, 고풍스러운 의자랑 테이블도 있었다.
한눈에 본 전경은 방보다 더 넓은 곳을 보여준다. 벽면 하나를 통째로 사용해서 밖이 보이도록 뚫어놓은 구성.
다가가서 손으로 짚어보면, 통유리가 아니라 무언가 보이지 않는 막이 형성되어 있었다.
직접 만져보기 전까지는 무언가가 이 사이에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바깥이 생생하게 보였다.
무수한 별과 달이 뜬 하늘.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울창한 숲과 거인의 등처럼 굽은 산맥.
뒤를 돌아보면 벽에는 박제한 곰 머리가 보였다.
벨레이라는 자신의 위엄을 돋보이게 하는데 박제한 맹수가 어울린다고 생각했을까?
"들어가도 돼?"
카렌의 목소리였다.
카렌은 뽀얀 어깨를 드러낸 가벼운 차림새로 찾아왔다. 방금 씻고 나온 듯 카렌의 피부와 붉은 머리카락은 보기만 해도 촉촉함이 느껴지는 듯했다.
"들어와."
나는 카렌을 방 안으로 들여보냈다.
박제된 곰 머리를 보고 흠칫하더니, 곧 전경을 보고 마음을 빼앗긴 듯 멍하니 있었다.
"경치 좋다. 여기."
"나도 그렇게 생각해."
"……."
"왜 그렇게 뻣뻣하게 서 있어? 편하게 앉아서 기다려."
"나머지 둘이 올 때까지 서 있을래."
"긴장하기는."
평소 하던 걸 할 뿐인데.
하지만 그런 멋없는 말은 하지 말자. 나도 그 정도 배려는 할 줄 안다.
안 하고 뻔뻔하게 굴 때가 더 많지만.
이번에는 누군가가 정중하게 문을 노크한다.
"들어와. 이스티."
이스티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이스티는 우아하다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린다. 눈처럼 하얀 백금발 머리카락, 섬세한 속눈썹.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웃는 얼굴보다는 무표정이 더 많았던 이스티는, 이제 날 보면 눈웃음부터 짓는다.
사랑에 빠진 엘프다.
"달링."
"응? 평소처럼 입고 왔네?"
이스티는 하얀 미니 원피스를 입고 왔다.
"교복 입고 올 줄 알았는데."
"그건 특별한 이벤트니까…."
하긴, 나도 오롯이 이스티한테 집중할 수 있을 때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이스티가 교복을 입고 왔다면 혼자서 엄청나게 돋보이기도 했을 테고.
"들어갈게."
벨라는 통보하는 식으로 짤막하게 말하고 문을 벌컥 열었다.
"뭐야. 주인님의 품평회야? 나란히 서 있고."
"그건 아닌데. 어쩌다 그렇게 됐네."
벨라는 자신감 넘치게 이스티 옆에 섰다. 둔부를 가리는 역할을 거의 하지 못하는 슬릿 드레스를 입고, 자신의 몸매에 자신감이 넘치는지
언제나 모델처럼 자신만만한 스탠스. 자기 매력을 믿어 의심치 않는 도발적인 표정. 내가 잘 아는 벨레이라다.
셋이 서 있는 걸 보고 나는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어쩌다 셋을 모아놓게 됐는데, 너무 좋잖아?
비현실적인 공간에 비현실적인 미인 셋.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건 현대에서도 아주 극히 일부의, 재력과 명예를 가진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
차례대로 좆집, 애인, 노예다.
아직 길다고는 할 수 없는 이세계 행보였지만 무척 훌륭한 성과라서, 나 자신을 칭찬하고 싶은 기분이 든다.
"어떻게 하지?"
카렌이 말했다.
"오빠는 한 명인데 우리는 셋이니까."
"그런 것도 몰라? 주인님이 마음에 드는 한 명을 안을 때 나머지 둘은 주인님의 기분을 보조하는 거야! 그렇지? 주인님."
"어디서 그런 것도 알아 왔냐."
"기본이지."
카렌은 빨개진 볼을 손으로 누르며 말했다.
"오빠가 힘들지 않을까요? 세 명이면…."
힘들어도 해야만 할 때가 있는데, 지금이 바로 그때다.
"벨라. 누워."
"나, 나부터?"
벨라는 먼저 선택받을 줄은 몰랐는지 허둥지둥했다.
"벌 받는 주제에 가장 느리게 기어 온 벌이다."
========== 작품 후기 ==========
〈대충 이세계 최면물〉이 성실 도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1단계로 접어드는 날입니다.
기념으로 열심히 써서 꽉꽉 채운 실한 분량으로 3연참 준비해왔습니다.
추천 주시면서 함께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