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충 이세계 최면물 1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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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흥."
여신은 기고만장하게 팔짱을 낀 채로 미소지었다.
"지금 걸로 증명됐어. 만에 하나라도 저 여자애가 죽은 게 싫은 거지? 이 협박은 유효 한거야."
최면이 안 걸리네.
혹시 마물한테 안 걸린다고 했을 때 조건을 따로 조사해본 건가?
"벨레이라. 팔굽혀펴기 백 회 실시."
"앗!?"
벨레이라는 엎드려서 팔굽혀펴기를 시작했다.
"시, 싫어! 그만둬! 이런 짓 하면 땀 나잖아. 힘들고···! 읏! 끄으응!"
이미 건 암시를 어떻게 하지는 못하는군.
그건 다행이다.
"내 최면을 어떻게 막았지? 말해."
"끙···! 신들은··· 의식을 나눠서 분신체를 만들 수 있어. 그러면 안 통하지 않을까 하고···. 확신은 없었어."
"마물에게 안 통하는 거랑은 상관없고?"
"그건 진짜 모른다고··· 끄응! 히, 힘들어."
열 번도 못 하고 우는소리나 하고.
최면이 무조건 걸리는 게 아니라는 건 고블린한테 걸었을 때 알았지만 이건 좀 불쾌하다.
아니, 내가 너무 오만한가?
신들에게도 무조건 걸릴 거라는 생각은.
"이 방법을 다른 신에게 알려 날 해치려고 생각한 적은?"
"그런 적 없어."
"왜지?"
"너를 죽이려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니까."
"팔굽혀펴기 그만."
마지막 말은 묘한 애증이 느껴진다.
암시에 의해 나온 말이니 믿어도 되겠지.
뭐 여신도 원래 사람이었다고 하니 언제까지나 믿을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종합해보면 벨레이라는 나를 죽일 만큼 미워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스티의 목숨을 놓고 저울질해서라도 자유의 몸은 되고 싶어 한다.
이렇게 볼 수 있다.
"암시를 풀어. 그러면 네 사랑스러운 노예는 무사할 테니까."
"널 믿겠어? 내 최면을 피해가기 위해 뒤에서 몰래 수작질이나 하는 녀석을."
"누가 누구보고 비겁자 취급이얏!"
이건 좀 어려운 문제다.
나는 벨레이라에게 「내 명령에 복종하라」는 키워드를 넣기는 했지만,
트랜스 상태에서 「이스티를 해치지 마라」고 명령하는 것보다는 확실하지 않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트랜스 상태에서 하는 말은 인간의─여신까지 포함하면 지적 생명체의─ 깊은 내부 의식에 침투하여,
온갖 복잡한 요인들이 뭉쳐서 작용을 일으킨다.
즉, 딴생각을 못 한다.
하지만 우선 명령에 복종하게 만든 다음, 트랜스 상태를 풀고 겉으로 드러난 의식에 명령을 할 경우.
여신은 일차적으로 내 명령에 강제로 응하고 있다는 걸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반발심을 불러일으킨다.
이스티에게 해가 될만한 행동은 하지 말라고 명령해도
부하를 시켜서 이스티가 있을 법한 곳을 공격하게 해놓고 모른 척 한다든지.
이런 식의 자신을 속이는 로직에 무효화 될 가능성이 있다.
"애초에 내가 네 암시를 풀어주려면 분신체인지 뭔지를 회수해서 다시 내 최면에 걸려야 할 텐데.
그러다 더 심각한 암시를 맞으면 어쩌려고?"
"어차피 상호 간의 신뢰 없으면 못 하는 거래잖아?"
"나를 믿겠다?"
"그래. 믿을 수밖에 없잖아."
"나는 널 어떻게 믿고."
"내가 진심인지를 물어봐. 나는 네 물음에 거짓말 못 하지?"
머리 좀 썼는데?
진실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으니까 나도 여신을 믿을 거라는 뜻인가.
"진심이야?"
"여신 벨레이라의 이름을 걸고. 거짓 없이 거래에 임하겠어."
"근데 싫어."
"큭···!!"
"팔굽혀펴기 실시. 그만두라고 할 때까지."
"아앗!?"
"미쳤다고 내가 이스티를 저울에 걸겠어?"
"그러면 나는···."
"애초에 왜 그렇게까지 해서 암시를 풀고 싶은데?"
"말이라고 해? 나는 여신, 사람에게 속박당하고, 구, 굴복··· 당해서는 안 돼. 여신은 언제나 아름답고 우아해야 해."
"그래? 그럼 그것만 해소되면 문제 없는 거지?"
벨레이라는 힘겹게 팔굽혀펴기를 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뭐, 무슨 말이야···?"
"아까 넌 이스티를 두고 노예라고 했는데. 이스티는 노예가 아니야.
정확히는 지금 내 여자친구 포지션이지."
"어···?"
"첫 노예는 네가 하는 거야. 벨레이라. 더이상 신경 쓰지 않게 해줄게."
"우, 웃기지 마!"
"난 진심이야."
여신을 타락시키는 계획은 잠시 미루어 놓았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여기서 무너뜨려 주지.
나는 팔굽혀펴기 하는 벨레이라에게 다가갔다.
"일단 노예한테 이름부터 지어줘야겠지?
4글자는 너무 기니까. 벨라로 하자. 넌 이제 벨라야. 나의 노예, 벨라."
"닥쳐···! 모욕은 적당히 해. 4급 신을 우습게 봤다간."
"벨라. 나한테 엎드려 절해."
"윽!?"
벨라는 그대로 나한테 엎드려 절했다.
"넌 인간 문화에 대해 잘 아는 것 같아. 이 자세가 무슨 의미인지 알지?"
"알고 있어. 구···굴욕이야."
벨라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게 끝인 것 같지?"
나는 한쪽 신발을 벗고 맨발로 벨라의 머리를 콱 짓밟았다.
"으읏!"
벨라는 강제로 바닥에 이마를 박았다.
"나한테 짓밟힌 기분이 어때?"
"당연히 최악··· 거, 거기가 뜨거워지고 이상한 기분···. 큿!"
"거기가 아니야. 정확히 다시 말해봐."
"밟혔을 때, 보지가, 뜨거워지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
"그게 네 천성이야. 알았어? 나한테 교환을 걸어? 여신은 아름답고 우아해?
암시 없이, 최면 없이, 그게 너의 본성이야."
"그럴 리 없어."
당연히 내가 암시로 박은 천박함이지만.
그녀는 알 턱이 없다.
"그러면? 지금 짓밟힌 채로 좋아하는 네 속마음에 물어봐. 정말 너는 아름답고 우아할까?"
"···! ······!!"
"본성을 거스르지 마. 가장 자연스럽게 있는 것이 행복한 거야. 넌 내 노예 여신이 되려고 태어난 거지."
"그런 심한 말···."
"기분 좋았지?"
"조, 좋았어. 더 말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어때? 그게 네 진심이야. 이제부터 선언한다. 「저는 당신의 순종적인 보지 여신입니다. 더 밟아주세요.」"
"저는··· 당신의···."
벨레이라의 머리를 꾹꾹 밟는다.
"순종적인 보지 여신··· 입니다···. 더 밟아주세요."
나는 쪼그려 앉아서 벨레이라의 머리카락을 틀어잡고 고개를 들게 했다.
벨레이라는 확 불타는 듯한 시선으로 날 노려봤다.
"그런 꾸며낸 말로 날 묶을 수 있을 것 같아?"
말은 그렇게 하지만, 벨라의 어투는 진심으로 협박할 때에 들어가 있던 가시가 전혀 없어졌다.
속으로 무서운데 어떻게든 약해 보이기는 싫은. 그런 종류의 발악처럼 보였다.
"그건 지금부터 물어보면 알겠지."
벨라의 얼굴빛이 창백해졌다.
"하지 마···! 들여다보지 마!"
"네가 지금 떠올린 걸 말해, 벨라."
"벨라는 사실 주인님 전용의··· 보지 노예 여신이··· 되고 싶어요. 많이, 귀여워해 주세···요···."
이런 말을 하면서, 날 죽일 듯이 노려보는 벨라의 표정은 최고였다.
짓밟고 몰아세운 보람이 있었다.
굴복 암시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강화되버린 것이다.
이제 확인하자.
내 물음에 진실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는 그녀에게.
"벨라, 아직도 암시를 풀고 싶어?"
"풀고 싶지 않아. 이제 그런 생각 하지 않아. ······주인님의 노예가 좋아."
"아직도 이스티를 해치고 싶어?"
"주인님의 여자친구를 해칠 수는 없···어."
"잘했다. 내 노예."
내가 머리를 쓰다듬자, 벨라의 험악한 얼굴은 점차 풀어졌다.
대신 좋아하는 걸 마냥 인정하기는 싫다고 말하는 듯한 좀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지만,
나는 그런 모습이 좋다.
내 질문에 강제로 속마음을 털어놓고, 굴욕적인 경험을 하는 여신이.
"이제 일어나."
벨라는 일어나더니, 조금 전 일은 없었던 것처럼 팔짱을 끼고 서서 말한다.
"흥··! 이런 말장난으로 날 길들였다고 생각하지 마. 두고 봐. ···다음에도 꼭 찾아올 거야."
노예 선언을 한 여신님은 도망치듯 사라져버렸다.
다음에도 꼭 찾아온다니 기대되네.
"데칼? 이야기 끝났어?"
이스티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오래 기다렸지?"
이스티는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조금 봤어."
"음···."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소리가 너무 커서, 무슨 일인가 하고."
하긴, 아무리 넓은 드레스 룸이라지만 같은 방에 있는 이스티가 못 들을 리 없지.
"달링이 원하면 나도 할 수 있어."
"뭘?"
"짓밟히거나, 욕 듣거나··· 욕은··· 너무 심하면 싫지만···."
"···너한테 그런 거 안 시켜."
"원한다면 괴롭혀도 참을게."
내가 여신을 모질게 대하는 걸 보고 단단히 착각했나보다.
"그래? 그럼 이것도 참아볼래?"
나는 이스티를 마구 간지럽혔다.
"응햑!? 아히, 그만햇."
장난으로 부드럽게 넘길 수 있었다.
그 와중에 최면이니 암시니 하는 위험한 말들은 물어보지도 않네.
그녀에게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믿는 사람일 테니까, 당연한 이치겠지만.
그러니까 나는 이스티의 가장 순수한 얼굴을 볼 수 있다.
"마음에 드는 옷은 골랐어?"
"···달링이 골라주면 좋겠어."
"내가?"
"안돼···?"
그렇게 물어보면 안 될 것도 되게끔 만들고 싶다.
노출이 너무 심한 건 거르자. 둘만 있을 때면 몰라도 그런 걸 입고 걷게 할 수는 없다.
지금처럼 활동성이 좋은 미니 원피스가 좋겠는데.
눈에 띄는 걸 찾았다.
"이거."
"데칼 마음에 들어?"
"응, 입으면 예쁘겠네."
"그러면···."
"아, 속옷은 이걸로."
"이건··· 조금 야한데."
"입어줘."
나는 이스티에게 보채서, 약간 야한 속옷과 미니 원피스를 입히는 데 성공했다.
"어울려?"
"아주 예뻐."
이스티는 내 말을 듣고 배시시 미소지었다.
우리는 팔색 조개 성에 왔을 때처럼 손을 잡고 물과 풀 여관으로 돌아왔다.
다른 세계인데 시간은 거의 비슷하게 흐른 듯싶다.
그럴 수 있나 의심스럽기는 한데, 깊이 생각하는 건 관뒀다.
이스티랑 함께 식사하고 물과 풀 여관을 나선다.
묘하게 오늘도 길드 건물 앞이 시끄러웠다.
뭐지? 이스티는 내 옆에 있는데.
호기심에 이끌려 다가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