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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이세계 최면물-10화 (10/414)
  • 대충 이세계 최면물 1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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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늦게 민망했는지 이스티는 내 눈을 피했다.

    격렬한 섹스의 후유증으로 온 몸이 나른하다.

    몸을 씻고 나오니 이스티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무슨 일이야?"

    "나, 왕국 성도로 돌아가야 해."

    "지금?"

    "응. 원래 나한테 맡겨진 일은 마른에 긴급 임무 지시를 전달하는 거였으니까.

    잘 끝마쳤다고 돌아가서 보고하지 않으면 안돼."

    얘기를 들어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보고가 끝나면 바로 돌아올게. 데칼 곁으로."

    나는 이스티의 볼을 쓰다듬었다. 이스티는 내 손에 얼굴의 무게를 맡기고 어리광 부린다.

    "그래, 잘 갔다와."

    "데칼도 같이 가면 좋을텐데."

    "아직 여기서 해야할 일이 남아있거든."

    딱히 왕국에 가야 할 이유도 없고, 샐릭한테 당하기만 하고 가는 것도 성미에 안 맞는다.

    "그러니 일을 끝마치면 다시 내 곁으로 돌아와. 이스티."

    "응! 빨리 돌아올게."

    이스티가 떠나기 전에 물어봐야 할 게 생각났다.

    "그런데, 왕국에서 맡긴 긴급 임무라는 게 뭐야? 차기 용사 선출은 뭐고?"

    "데칼은 용사 선출에 대해서 몰라?"

    이스티는 뜻밖인 듯 했다.

    "난 아주 먼 데서 왔거든."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사실을 감출 이유는 이제 없지만, 돌려서 말했다.

    아직 이스티에 대해 아는 게 많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엘프에 사랑스럽다는 것 빼면.

    "오래 전부터 왕국군은 마왕군이랑 싸우고 있어.

    용사가 될 사람들을 양성하기 위한 계획이 용사 후보 선출이야."

    "지금 있는 용사는 뭐야. 이미 있는 거 아니야?"

    "선출된 사람은 용사 님의 휘하에 들어가게 돼."

    아, 그럼 용사가 죽기라도 하면 아래에 있는 후보 중 한 명이 다시 그 자리를 채우겠군.

    이해가 된다.

    "그럼 긴급 임무는 엄청 어렵겠네.

    용사 후보를 할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만 뽑아내려고 하는 거잖아?"

    이스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강해야하지? 이스티만큼?"

    "나는 후보생들보다는 강해. 모험가 기준이라면 골드 상위권 정도."

    브론즈도 아닌 내가 할 수 있는 임무는 아닌 듯 하다.

    이스티의 도움을 받으면 가능하겠지만, 그냥 가능한가 아닌가의 여부지 그러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귀찮게 용사 후보같은 걸 왜 해?

    "용사에 대해 알고있는 거 있어?"

    "지금 용사 님? 신의 대리인으로 이 세계에 나타난 분. 무척 강하고 고결한 분이야."

    여신의 대리인, 역시 용사였구나.

    왕국 근처에는 얼씬도 않는 게 좋을 듯 싶었다.

    그리고 이 세계는 신이나 대리인의 존재가 가려져 있지는 않은 듯 하다.

    "대충 알겠어."

    "응. 이제 갔다올게. 밤에는 돌아올게."

    "그래."

    이스티는 가려다 멈칫하고 돌아섰다.

    또 할 말이 있는 듯 했다.

    "왜?"

    "···."

    이스티는 발돋움 하면서 목을 들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키스 해달라는 무언의 어필이다.

    입맞춤을 했더니, 이스티는 팔로 내 목을 감고 양 볼에 뽀뽀까지 한 다음에, 날 마주봤다.

    "데칼, 나한테 바라는 게 있으면 뭐든지 말해. 엘프 이스티의 이름을 걸고, 당신이 원하는 건 뭐든지 해줄게."

    "그게 엘프들 방식인가?"

    "응. 엘프는 순결을 준 사람에게 평생을 바쳐 헌신해. 나는 선조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어.

    하지만, 단순히 순결을 주었기 때문에 이러는 건 아니야. 데칼이니까 해주고 싶다고,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 그렇게 생각했어."

    "날 사랑해?"

    "사랑해."

    나는 다시 한번 입맞춤을 했다.

    이스티를 배웅하고, 나는 문득 옛날 생각에 잠겼다.

    암시로 거짓된 인식을 얻은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면, 그 사랑은 참인가 거짓인가?

    별 것 아니지만 그런 고민을 하던 시절도 있었다.

    물론 지금은 내 안에서 모두 결론이 난 이야기지만.

    "음?"

    물병을 꺼내려고 인벤토리를 열었는데, 「대왕 팔색 조개」가 스스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한번 꺼내볼까? 알록달록한 게 예쁘긴 하지만 엄청 크고 쓸모없어 보이는 조개였다.

    나무 바닥을 박살낼까봐 조심조심 천천히 내려놓는다.

    양팔 가득 안아야할만큼 부피가 큰데, 무게는 생각보다 무겁지 않았다.

    팔색 조개는 기묘한 빛을 뿜어낸다.

    보고 있었으나 별로 달라지는 건 없었다.

    "뭔데?"

    조개를 툭 발로 까봤다.

    그랬더니, 스테이터스같은 메뉴가 활성화되서 내 눈 앞에 나타났다.

    (팔색 조개성으로 이동하시겠습니까? Y/N)

    나는 홀린 듯 Y에 손을 댔다.

    갑자기 주변 공간이 왜곡되는가 싶더니, 어딘가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본 적도 없는 성 안에 와있었다.

    휑하고, 거대한 성의 홀.

    가신도 없고 왕도 없는 빈 옥좌.

    방금 물과 풀 여관에 있었는데, 갑자기 어디로 전이한 것 같았다.

    심지어 춥기까지 해서 나도 모르게 몸을 웅크렸다.

    그때.

    성 안에 있는 촛대에서 일제히 불꽃이 피어오르며, 주위가 환해졌다.

    빈 옥좌 위로 하얀 날개를 펼친 붉은 머리의 여신이 내려왔다.

    그 우아한 자태에 나도 모르게 할 말을 잃었다.

    "이제야 사용법을 알았나보네. 한참 기다렸어."

    "벨레이라."

    4급신 벨레이라. 나를 이세계로 보낸 여신이다.

    나한테 당한 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지 못마땅한 표정이다.

    "그러게 사용법을 가르쳐줬으면 좋았잖아?"

    "너같은 놈한테 하사하고 싶어서 내린 물건인 줄 알아? 그게 어떤 조개인데!"

    소중한 조개를 빼앗아서 삐진 듯 하다.

    사실 마지막에는 꽤 급했으니 아이템 사용 설명같은 걸 듣고 있을 여유가 없었지.

    "이게 다··· 이게 다! 네가 나한테 건 그 이상한 마법만 아니었으면!"

    "아, 최면?"

    "최면?"

    벨레이라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난 것 같았다.

    "그런 정신 나간 세뇌 능력에 「최면」같은 귀여운 이름을 붙여주는 건 너밖에 없을걸? 드래곤한테 강아지 이름을 붙이는 꼴이야."

    "왜 그렇게 화가 났어? 솔직하게 말해봐."

    「내가 묻는 말에 진실되게 대답할 것」

    그 키워드 때문에, 벨레이라는 속내를 감출 수 없다.

    "잘 때도 걸을 때도 계속 네 생각이 나서, 그래서 참을 수 없었어."

    "옳지, 잘 말했어."

    벨레이라는 눈을 질끈 감고, 몸 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수치심을 억누르는 듯 하다.

    엄청 화났을텐데 여신의 품위를 지켜냈군. 대단해.

    "방금 내가 한 말은, 진심이 아니야."

    "너는 내가 묻는 말에 진실되게 말할 수 밖에 없는데?"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안달이 난 이유는, 네가 마지막에 건 변태같은 암시 때문이잖아."

    마지막에 건 암시.

    그렇다. 이세계로 전이하기 전, 나는 이미 명령에 복종하라는 키워드를 넣었는데도 벨레이라한테 한번 더 암시를 걸었었다.

    벨레이라는 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했냐고 물어봤었고, 나는 대답했다.

    "여신을 노예로 만들 생각을 하다니, 천벌이 두렵지도 않아?"

    「내 노예가 되라」

    벨레이라는 이 암시때문에 명령을 받지 않아도 날 위해 행동하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난 벨레이라처럼 예쁜 여신이 내 노예가 되어서 기쁜데?"

    "윽···!"

    벨레이라는 팔짱을 끼고 홱 고개를 돌렸다.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걸 보니 기쁜 듯 하다.

    "방금 네가 한 말에 기뻐하고 있는 거 아니니까 착각하지 마. 어디까지나 네가 건 암시 때문이야."

    "그렇겠지. 아무렴."

    사실, 벨레이라는 잘못 알고 있다.

    그녀는 내가 자신을 노예로 만들어서 자발적으로 날 생각하게 되었다고 착각하는 듯 하지만.

    내가 건 마지막 암시는 「나한테 굴복당할 때 쾌감을 느낀다」였다.

    벨레이라처럼 자존심이 강한 여자에게 매우 치명적인 키워드다.

    이걸 마지막에 심어넣은 이유는 간단하다.

    명령해서 여신이 갖고 있던 아이템도 다 뜯고, 좋은 세계로 간다고 치자.

    그런데 명령이 끝난 후에 여신이 나한테 앙심을 품으면?

    그런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나는 내가 실험해본 몇 가지 키워드 중 하나를 활용하기로 했다.

    그것이  「굴복」

    자존심 강한 여신이 억지로 명령을 수행한다는 굴욕을 당했는데도 나한테 앙심을 품지 못한다.

    왜냐, 그냥 수치스럽기만 했던 그 이세계 전이 때의 상황을 벨레이라의 섹스 판타지로 만들었으니까.

    계속 떠올랐겠지.

    나한테 짓밟히고 굴욕 당하는 상상을 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기뻐하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어서, 그녀는 이렇게 생각하기로 한 것이다.

    「노예가 되라」는 암시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라고.

    하지만 내가 실제로 노예가 되라는 암시를 걸면, 벨레이라의 톡톡 튀는 매력과 개성이 없어진다.

    그래서 나는 지금 상황이 무척 즐거웠다.

    명령에 복종하라고 하면, 벨레이라가 속으로 기뻐하고 있다는 걸 비밀스럽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긴 대체 뭐하는 곳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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