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204화 (완결) (204/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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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궁을 떠나서(완)

    "…… 황궁이 갑갑해서 싫다하시면 무림을 일통해 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무림일통?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

    "그저 제독께서는 가능하시지 않을까 하여…… 충분히 가능하시지 않겠습니까?"

    "실 없는 소리를 하는구나."

    "하오문이 제독 태감을 돕고, 마교와 화산의 출중한 고수가 함께 하지 않겠습니까? 매형은 마교의 교주이지 않습니까? 누이는 유명한 마후고, 어린 두 동생들은 정파의 떠오르는 기둥이라고 불리니…… 제독께서 마음만 먹으신다면 황궁도 돕지 않겠습니까? 더군다나 제독 태감께서는 천하제일이 아니십니까?"

    "요즘 들어서 네 정신이 이상해지는 것 같구나."

    말도 되지 않는다는 듯 일축하는 아삼이 그대로 돌아섰다. 선수에 나와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이었지만 점점 이상한 말만 내뱉는 전소평의 말에 이야기를 끝내는 아삼이었다.

    그런 그를 뒤로하고 선실로 들어가려는 그때, 이상한 기척이 그의 기감에 잡혀들었다. 이내 미간을 찌푸린 아삼이 전소평을 바라보며 한 쪽 구석을 가리켰다.

    "네 실 없는 소리가 이상한 놈들을 불러들였구나."

    "그건 무슨 말씀이십…… 흐음."

    희미하게 자신의 기감에 무언가가 잡히는 것을 느끼는 전소평이었다. 그런 그가 그대로 돛대의 위로 뛰어오르며 주변을 살폈다.

    망망대해에 넓은 수평선만 그의 시야에 가득 들어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수평선의 끝에서 몇 대의 선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선박들이 빠르게 다가오는 것을 확인한 전소평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점점 가까워질수록 그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고, 갑판 위에 나와 있는 놈들의 모습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낯선 갑주와 무기를 착용한 놈들이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왜구들인 것 같습니다. 아마도 해적질을 하려고 이쪽으로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대비를 하라고 전해라."

    "제가 나서겠습니다. 제독께서는 가만히 지켜보시지요."

    "……."

    자신만만해 하며 말을 마친 전소평이 다가오는 해적선을 주시하더니 천천히 기운을 끌어올렸다. 해적선과 그들이 탄 배와의 거리가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그대로 뛰어오르는 그가 넘실거리는 바다의 위를 밟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삼의 입에 진한 호선이 그려졌다.

    출렁이는 바다에 발목까지 빠지는 경신법이었지만 제법 표홀함을 보이는 전소평이었다. 조금 어설픈 등평도수의 수법으로 해적에게 접근한 전소평이 기운을 가득 실은 주먹을 내질렀다. 끌어올린 내력과 함께 거친 폭음이 터져 나오며 다가오던 해적들을 막아 세우는 전소평이었지만 그 해적선을 부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제독께서는 그렇게 쉽게 때려 부쉈는데…… 나는 아직 멀었음인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해적들의 화살을 피해내며 바다 위를 걷는 그였지만 점점 줄어드는 내기와 함께 힘이 부치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처음부터 배 위로 올라갔어야 했나?'

    그렇게 자신의 행동을 자책하던 그때, 누군가가 빠르게 그를 향해 다가왔다.

    - 뱁새가 황세를 쫓으려다가는 가랑이가 찢어진고 하더구나. 제 무공의 특성도 모르는 인사가 화경은 무슨 화경이라더냐!

    - …… 송구합니다.

    주춤거리는 전소평의 옷깃을 잡아채며 그를 뒤로 내던지는 아삼이었다. 그렇게 다시 뒤로 물러서던 전소평의 몸이 정확히 바다에 떠 있는 얼음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그런 얼음조각을 발견한 전소평이 반색을 하며 그것을 박차고 다시 배 위로 올라섰다.

    '저렇게 얼음을 밟고 움직이셨으니…… 그렇게 수월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인가? 이걸 생각하지 못 했구나.'

    새삼 아삼이 익힌 무공을 떠올린 전소평이 자신이 익힌 형강권을 생각하며 씁쓸해 했다. 자신의 무공에 자신감이 붙었던 그였기 때문에, 이전에 아삼이 보인 모습을 똑같이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스스로의 부족함만 느끼게 된 그였다.

    자신을 대신해서 왜구들의 배를 공격하는 아삼의 모습에 쓴 웃음을 짓는 전소평이었다.

    일장에 파도가 치고 일검에 바다가 갈렸다.

    경천동지 할 그 무공에 남아있던 놈들의 배가 터져나가기 시작했고, 천근추의 수법으로 해적선의 선수를 크게 기울인 아삼이 갑판을 박차며 몸을 띄웠다. 쏜살처럼 빠르게 올라선 아삼의 몸이 하늘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장력과 검강을 쏟아냈다.

    그의 공격에 왜구의 해적선이 산산조각 나며 부서져나갔다. 여기저기에서 들리는 비명과 함께 아비규환으로 변해버린 그곳이었지만 아삼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리고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전소평의 입에서 경악하는 음성이 터져 나왔다.

    "허…… 허공답보?"

    하늘에 떠서 오롯이 아래를 내려다보는 아삼의 모습을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전소평이었다. 새삼 자신과 아삼의 격차를 다시 떠올린 전소평이 자신의 못난 행동을 자책하며 배를 움직였다.

    다가오는 배와 함께 그대로 계단을 내려오듯이 허공을 밟으며 배로 내려서는 아삼의 모습에 고개를 조아리는 전소평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향해 아삼이 입을 열었다.

    "약탈을 일삼는 놈들이니 따로 구할 자들은 없을 것 같다."

    "예. 제독 태감. 그럼 이대로 배를 움직이겠습니다."

    이전보다 공손해진 전소평의 말에 웃음을 보인 아삼이 확인하듯 되물었다.

    "그래. 이 항로가 조선으로 가는 항로가 확실한 것이냐?"

    "예. 제독. 하오나, 그 작은 나라를 보러 갈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냥…… 한 번 가보려 함이다. 그냥 들리고 싶구나."

    "……."

    어쩐지 쓸쓸함이 묻어나는 그의 말에 말을 잇지 못하는 전소평이었다. 옆에서 그를 보필하던 그였지만 그의 삶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모든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었을 테지만, 굳이 이렇게 떠도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긴, 이렇게 다른 세상을 찾아서 움직이는 삶도 그리 나쁜 것은 아닐 테지만……'

    한편으로는 수긍이 갔지만 그래도 아까운 것은 아까운 것이었다. 어렵사리 얻은 그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대단하게 느껴졌지만 많은 아쉬움이 남았다.

    그런 그가 앞에 있는 아삼을 향해 괜히 투덜거리듯 말을 이어갔다.

    "그 높은 자리를 두고 왜 이렇게 고생을 자처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 누가 나를 따라오라고 했더냐?"

    "……."

    "너는 그 자리에 남아서 부귀영화를 누렸으면 될 일이 아니더냐?"

    "소인은 단지 제독을 따를 뿐입니다. 송 아무개처럼 탐욕스러운 놈이 아닙니다. 그 좋은 자리를 마다하고 제독을 보필하는 이 충정을 알아주실지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되었다. 네놈도 그곳에만 앉아있을 인사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몸이 근질근질했으니 나를 따라나서려고 하지 않았더냐?"

    "……."

    아삼의 핀잔에 대꾸를 하지 못하는 전소평이었다. 그간 그를 따라서 대원정까지 쫓아간 그인지라 정착해서 안정된 삶을 꾸리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지만은 않았다.

    이미 큰 여행을 거치면서 새로운 문물과 사람을 만나는 기쁨을 알게 된 그였기 때문에 자청해서 아삼을 따르는 것이었다.

    그렇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전소평의 모습에 환한 웃음을 지어보이는 아삼이었다. 그렇게 웃음을 보이는 아삼의 모습이 싫지만은 않은지 같이 웃어 보이는 전소평이었다.

    이렇게 같이 움직이면서 밝아진 아삼의 모습을 많이 본 그였다.

    '그 누가 있어서 제독의 이런 표정을 나보다 많이 접하겠는가?'

    심지어 황제조차 이런 모습을 확인할 수 없다는 사실에 새삼 뿌듯해하는 전소평이 다시 아삼을 바라봤다.

    "조선에서도 전심어서를 사용해야겠지요?"

    "글쎄다. 나도 그것이 궁금하구나."

    "혹시 조선어도 익히신 겁니까?"

    "흐음. 모르겠다. 그나저나, 전심어서는 어떻게 되었느냐? 아직까지 진전이 없는 것이냐?"

    "……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는 전소평이었고 그런 전소평을 놀리듯 말을 이어가는 아삼이었다.

    "자질이 떨어지는 것이지. 쯧쯧쯧. 그게 무에 그리 어렵다고…… 채 반년도 걸리지 않고 익힌 나와는 천지차이구나."

    "하아. 제독과 저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미 무공이 극을 달하신 분과 이제 화경에 든 저를 비교하려 하십니까?"

    "화경이라는 경지도 낮은 경지는 아니지 않더냐?"

    "그래도! 태양과 반딧불이를 비교하시는 격입니다."

    "내가 전심어서를 익힐 때에는 지금의 너보다 더 낮은 경지였었다."

    "예. 그러시겠지요. 어련하셨겠습니까?"

    "……."

    "제독께서는 겸손이라는 것을 익히셔야겠습니다."

    "하하하."

    전소평의 말에 웃음을 터뜨리는 아삼이었다. 계속되는 여정으로 상당히 가까워진 두 사람이었고 아삼 역시 가끔씩 이런 식의 농담도 할 수 있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렇게 웃는 아삼의 모습이 싫지만은 않은지 마저 말을 이어가는 전소평이었다.

    "조선에 가면 인삼이라는 것을 잔뜩 얻어와야겠습니다. 조선의 인삼이 그렇게 약효가 뛰어나다고 하지 않습니까? 수리 상단의 현 상단주가 관심을 보이던데 그들과 거래를 할 수 있겠습니까?"

    "인삼이라…… 굳이 내가 그런 거래에 끼어들 필요가 있겠더냐? 다 자기네들 알아서 살아가는 것이지. 더군다나 네가 인삼이 필요할 이유가 있더냐?"

    "이제 건강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불어 조선의 여인들의 미색이 출중하다고 하니, 내심 기대가 됩니다."

    "하하하. 조선의 여인이라?"

    전소평의 말에 웃음을 터뜨리는 아삼이었다. 그리고 그런 아삼의 웃음에 깃든 의미를 눈치챈 전소평이 발끈해하며 대거리를 했다.

    "그 웃음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저라고 그런 여인들을 내자로 맞이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이렇게 이 나라, 저 나라 떠돌면서 참한 내자를 들이는 것이 제 마지막 꿈입니다."

    "하하하. 사내구실도 못하는 놈이 무슨 소리더냐?"

    "…… 다른 환관 놈들도 모두 내자를 들이긴 합니다."

    아삼의 말에 입을 빼쭉이며 대거리를 하는 전소평이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기어들어갔다. 그저 붉어진 얼굴로 아삼을 흘겨보며 불만을 표출할 뿐이지만 개의치 않는 아삼이었다.

    이제는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까지 없어진 아삼이었기 때문에 전소평은 그저 속으로만 화를 삭일뿐이었다.

    그렇게 어색한 침묵이 계속 이어졌지만 그런 어색함을 참지 못 하고 다시 말을 꺼내는 사람은 바로 전소평이었다. 과묵한 아삼이었기 때문에 먼저 말을 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였다.

    크게 한숨을 내쉰 그가 떨떠름한 말투로 아삼에게 물었다.

    "후우, 조선을 들리신 이후에는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글쎄다. 생각해 보지 않았구나."

    "그럼 다시 캘리컷이라는 곳으로 가는 것이 어떻습니까?"

    "캘리컷? 왜? 그곳에 일이 있느냐?"

    "봐뒀던 참한 처자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그곳에 있는 왕국의 공주가…… 제독께 마음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참에 그 공주와 혼례를 치르시는 것도……"

    "실 없는 소리 하지 마라. 다시 해적 놈들이 나타날까 두렵구나!"

    전소평의 말을 일축하며 선실로 들어서는 아삼이었다. 당황하는 듯한 그 모습을 처음 보는 전소평이 그런 아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내 그를 따라 선실로 들어서는 전소평이었다.

    당황하는 아삼의 모습은 흔한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에 조금 더 봐둘 요량이었다.

    그렇게 배를 타며 곳곳을 누비는 두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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