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202화 (20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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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목의 변(土木之變)

    닦달하는 황제는 뒤로하고 기막을 유지한 채, 황세웅의 몸을 살피는 아삼이었다. 이미 살펴본 바로 황제는 별다른 이상이 없어보였다. 단지 용안만 찌푸린 채 아삼을 향해 넋두리를 늘어놓을 뿐이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런 황제의 말을 듣는 와중에도 옆에 선 황세웅의 몸을 살피던 아삼이 가볍게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서 뻗어 나온 지풍이 황세웅의 몸에 부딪쳤고 막혀있던 그의 혈도가 순식간에 풀렸다. 다시 내력을 움직일 수 있게 된 황세웅이 놀란 눈으로 아삼을 바라봤지만 대수롭지 않은 듯 그를 향해 환단을 하나 건네는 아삼이었다.

    - 운기를 하는 것이 좋겠다.

    - 예. 제독 태감.

    아삼의 전심어서에 전음으로 답을 하는 황세웅이었다. 이내 가부좌를 틀며 자리에 앉은 그가 천천히 내력을 돌렸다. 운기를 하는 그 모습에 그의 근처를 지키는 아삼이었고 뜬금없는 그의 행동에 용안을 구긴 황제가 노한 듯 황세웅을 노려봤다.

    "이 무슨 추태더냐! 감히 짐 앞에서……"

    - 이곳을 빠져나갈 것이옵니다. 따로 소신이 운기를 하라 명했으니 노여움을 거두시지요.

    "…… 이곳을 빠져나가다니? 군은 오지 않은 것인가? 저 오랑캐들을 물리치지 않았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대는 어떻게 이곳에 올 수 있었지?"

    - 폐하의 안위를 위해 소신만 따로 움직였사옵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왕진이 분명히 군을 이끌고 온다고 했다. 그들을 몰아내고 짐의 위엄을 다시 세우겠다고 다짐을 했단 말이다!"

    "……."

    그렇게 다시 왕진을 찾는 황제였고 그 모습에 답답해하는 아삼이었다. 총명했던 그가 이렇게 변한 것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음인가?'

    자신이 없던 시간동안 총기가 흐려진 황제의 모습을 보면서 씁쓸해하는 아삼이었다. 그리고 아삼의 굳은 표정을 확인한 황제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아무리 오랜만에 보는 제독이라고 하나, 짐에게 이 무슨 불경한 태도인가!"

    "……."

    "짐을 향한 그 표정의 의미는 무엇이란 말이더냐! 이렇게 잡힌 짐이 우습더냐? 감히……"

    -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그저 폐하의 안위가 걱정되었던 것이옵니다.

    "…… 되었다. 그 불충은 후에 따로 벌을 할 것이다."

    "……."

    황제의 말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아삼이었다. 이 상황에서 더 말을 늘어놔봤자 달라질 일은 없었다. 황궁에서 오랜 시간을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도 조심하지 못하고 표정을 드러낸 실책을 저질렀지만, 이런 격한 반응을 보이는 황제의 태도도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제독은 짐의 안위를 지켜라. 이대로 왕진이 군을 이끌고 오기를 기다릴 것이다. 선황께서 내리신 무공으로……"

    - 왕진이라는 자는 돌아오지 못 할 것이옵니다.

    "뭐라? 왕진이 오지 못 한다? 그 무슨 말인가? 그대가 어떻게……"

    - 그자가 원의 잔당을 이끌던 수장이었사옵니다. 혼자 도망가려는 것을……

    "닥쳐라! 도망가다니. 왕진은 그럴 인사가 아니다.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그를 모함하는 것이냐? 그의 자리가 탐나는 것인가? 아니면 짐을 능멸하려는 생각인가!"

    "……."

    분기 어린 황제의 말에 말을 잇지 못 하는 아삼이었다. 표정을 감추려 고개를 조아린 그가 침음을 삼켰다. 그 사이 운기를 마친 황세웅이었고 그가 일어나자, 아삼이 황제를 향해 당부하듯 말을 건넸다.

    - 이대로 이곳을 빠져나갈 것이옵니다. 황 검사(僉事)의 등에 업히시면 나머지는 신이 알아서 처리하겠사옵니다.

    "…… 그대가? 그대의 무공이 대단하다고 하나, 저 많은 군사들을 상대할 수 있겠는가? 그저 이곳에서 벗어나지 않고 명의 군사들이 올 때까지 짐을 지키면서 기다리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는가?"

    - 최선을 다할 것이옵니다.

    "……."

    무덤덤하게 말을 하는 아삼을 믿을 수 없는지 떨떠름해 하는 황제의 모습에 고개를 숙이는 아삼이었다. 그런 아삼의 모습에 황제가 마지못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뒤늦게 혈혈단신으로 그곳을 찾아온 아삼의 충성스러운 행동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앞에 있는 아삼이 자신을 도울 거라는 선황의 당부를 떠올린 황제가 황세웅을 향해 다가갔다. 그런 황제를 조심스럽게 업은 황세웅을 보고 기운을 끌어올리는 아삼이었다.

    - 이대로 이곳을 벗어날 것이다. 폐하의 안위에만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예. 제독 태감."

    황세웅의 말을 들은 아삼이 그대로 천막을 벗어났다. 그들이 사로잡은 황제를 감금한 곳이었다. 천막의 주변을 삼엄하게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갑작스런 움직임에 놀라며 창끝을 겨눴지만 빠르게 움직인 아삼이 그들을 목숨을 끊었다.

    순식간에 천막의 앞을 지키던 두 명의 경계병이 쓰러졌다. 그런 그들을 뒤로하고 아삼이 근처에 있는 다른 병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잔영도 남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아삼이었고, 그 모습을 확인하던 황제의 눈이 부릅떠졌다. 동창의 제독인 아삼이 그렇게 자신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놀라운 움직임을 보이는 아삼의 모습에 그나마 진정이 됐는지 황세웅의 등에 업혀서 주변을 둘러보는 황제였다.

    그 사이, 쓰러진 자들의 몸에서 도를 빼낸 황세웅이 급히 아삼의 뒤를 따랐다. 아무런 말도 없이 빠르게 움직이며 주변의 병사들을 쓰러뜨린 아삼은 황제를 말이 모여 있는 곳으로 이끌었다. 세 사람이나 됐기 때문에 말을 타고 그곳을 벗어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멀리 가기도 전에 아삼과 일행의 모습을 확인한 병사들의 커다란 외침이 병영을 가득 울렸다.

    "적이다! 적이다! 명의 황제가 탈출했다."

    이윽고 주변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하면서 일련의 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확히 기마들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아삼을 가로막는 그들이었고 그 모습에 긴장한 듯 마른침을 삼키는 황세웅과 황제였다. 하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아삼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서 그들을 노려볼 뿐이었다.

    '에센이라는 족장은 이곳에 없는 것인가?'

    황제가 있는 곳에서 타이시라고 불리는 이들의 수장이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한 아삼이었다. 드리고 이번 기회에 그를 확인할 요량이었다. 이들의 수장을 잡으면 전쟁이 쉽게 끝날 거라고 생각했지만 타이시라고 불리는 이들의 수장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토목보에서 황제를 잡은 그들은 북경으로 진격을 한 상황이었다. 명의 황제는 따로 후방에 감금해서 볼모로 잡아놓고 움직인 그들이었지만 그 사이에 아삼이 들이닥쳤다. 그리고 황제를 지키기 위해서 남은 군들 중 일부가 아삼의 앞을 가로 막은 것이었다.

    "설마…… 이곳에 혼자서 들어온 것은 아니지?"

    "어떤 미친 작자가 혼자서……"

    "……."

    아삼과 황제의 앞을 가로막은 오이라트의 병사들도 지금 상황에 할 말을 잃었다. 고작 고수 한 명이 나서서 황제를 구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주변을 둘러봐도 별다른 병력이 보이지 않았고 자신들을 무시했다는 생각에 화가 난 듯 병사들이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이어지는 아삼의 행동을 확인한 그 누구도 그런 생각을 계속 가지고 있을 수는 없었다. 왜 그 혼자서 황제를 구하러 왔는지 수긍이 갔기 때문이다.

    멈춰선 아삼을 향해 창을 쥔 병사들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손에 쥔 창을 내지르기도 전에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대로 절명한 것이다.

    하나 같이 머리에 무언가가 박혀든 채로 죽어있었고 그것이 작은 얼음조각이라는 사실에 경악하는 그들이었다.

    그렇게 경악하는 그들을 향해 아삼이 뛰어들었다.

    그의 손짓에 바닥에 나뒹굴던 창들이 떠올랐다. 그대로 떠오르는 창들이 공중을 날아서 오이라트의 병사들을 향해 날아갔고 쏟아진 창에 꿰인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동시에 허공섭물로 바닥에 나뒹굴던 도를 집어든 아삼이 기운을 흘러 넣으며 그것을 휘둘렀다.

    이렇다 할 초식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도를 휘두를 때마다 백색의 도강이 쏟아졌다. 그리고 그 공격에 적중당한 자들의 수급이 떠오르며 그대로 가로막던 진형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휘두르는 도격과 날아드는 도강에 모여든 병사들의 몸이 갈가리 찢겨나갔다. 그렇게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상대들이었지만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황제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계속되는 잔인한 살육에 결국 참지 못하고 헛구역질을 해대는 황제였다.

    "우웩! 우웩!"

    힘들어하는 황제의 모습에 아삼이 미간을 찌푸렸다. 고작 이런 모습도 참지 못하는 자가 그 많은 대군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이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 어서 황제를 모셔라. 전마를 빼앗아서 이곳을 벗어난다.

    "예. 제독 태감."

    아삼의 명과 함께 빠르게 움직이는 그들이었다. 계속해서 헛구역질을 해대는 황제를 둘러업고 경공을 펼치는 황세웅이었다. 그도 고수라고 불리기에는 충분했지만 조용히 아삼의 뒤만 따라갈 뿐이었다. 나름 무공에 자신이 있던 그였지만 태양 앞에 선 반딧불이처럼 아삼과 비교하면 초라해 질뿐이었다.

    그렇게 말을 확보한 그들이 병영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일부러 다른 대군과 부딪치지 않도록 북쪽을 향해 방향을 잡은 그들이었지만 일련의 무리들이 그들을 가로막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근처를 정찰하던 무리들이 귀환하면서 그들과 부딪친 것이다.

    얼떨결에 막아선 그들이 앞을 가로막았고 그들에게 백색의 도강이 떨어져 내렸다.

    콰과광.

    쏟아낸 도격과 함께 커다란 광풍이 몰아쳤다. 그들을 가로막던 무리들이 말과 함께 찢겨나가고 뿌연 피안개가 주변을 가득 채웠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살피던 황제가 경천동지할 아삼의 무공을 확인하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대로 저들을 죽여라. 우웁…… 짐을 욕보인 저들을 모두 도륙하거라. 제독의 실력이면 가능하지 않는가?"

    - 황제 폐하의 안위가 우선……

    "아니다. 이대로 물러서면 짐의 위신은 바닥으로 떨어진다. 제독의 힘으로 저들을 모두 도륙하라. 그 이후에 황궁으로 귀환을 할 것이다."

    고집을 부리는 황제의 모습에 인상을 굳히는 아삼이었다. 옆에서 황세웅이 그의 심기가 불편함을 깨닫고 황제를 이끌려고 했지만, 오히려 말에서 내린 황제는 무엄하다고 호통을 칠뿐이었다.

    "무엇하는 것이냐! 어서 황명을 받들라."

    황제의 행동에 마지못해 말에서 내려오는 아삼이었다. 그런 그들의 뒤로 일련의 기병들이 따라붙었고 그 모습에 놀란 황제가 황세웅의 도움으로 말에 올라탔다.

    "크흠. 제독은 저들을 벌하고 쫓아오거라. 짐은 뒤에서 그대의 위용을 지켜볼 것이다."

    - 알겠사옵니다.

    쫓아온 무리에 덜컥 겁이 났는지 말을 타고 뒤로 물러서는 황제였고 그런 그를 따라서 황세웅이 뒤따랐다. 그리고 그렇게 움직이는 황세웅의 귀에 아삼의 전심어서가 꽂혀들었다.

    - 황제를 모셔라. 그대로 이곳을 벗어나되, 바로 황궁으로 향하지는 않아야 할 것이다.

    - 허면……

    - 최대한 시간을 끌어라. 산서성에서 멀리 떨어진 청해성의 도지휘사를 찾아가서 황제의 안전을 도모하라. 남은 일은 내가 모두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 …… 예. 제독 태감. 명 받들겠나이다.

    고개를 숙이며 멀어지는 황세웅이었고 그런 그의 모습을 고개를 돌리는 아삼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기대에 못 미치는 황제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다시 몸을 돌린 아삼의 눈에 겁에 질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병사들의 모습이 가득 들어왔다. 기마를 타고 달려온 그들의 손에는 활이 들려있었다.

    제법 떨어진 곳에서 아삼을 향해 활을 겨누는 그들이었고, 이내 수많은 화살들이 하늘을 가득 채웠다.

    공기를 가르며 쏟아지는 화살의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동시에 떠오르는 수많은 화살을 확인한 아삼의 발이 바닥을 굴렀다.

    쿠웅.

    커다란 진각과 함께 솟아오르던 모래들이 그의 몸을 가렸고, 동시에 아삼의 손이 그 모래들을 향해 뻗어졌다. 그렇게 뻗어진 아삼의 손에서 시린 한기가 쏟아지며 주변을 얼렸고 공중으로 떠오른 모래들이 얼어붙으면서 커다란 방패를 만들어냈다.

    후두두두둑.

    곳곳에 꽂히는 화살이 전방을 가리는 방패에 튕겨서 방향을 잃었다. 그리고 뒤를 바라본 아삼의 눈에 황제와 황세웅의 표정이 가득 들어왔다.

    - 지금 움직여라!

    일부러 황제까지 들을 수 있게 전심어서를 날리자, 그 소리에 말을 몰아가는 두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확인한 아삼이 바닥을 구르던 화살을 발로 차내며 황제와 황세웅의 말을 향해 쏘아냈다. 동시에 황세웅을 향해 전심어서를 날렸다.

    - 낙마에 대비하고 황제를 붙들어라. 그대로 이곳을 벗어나야 할 것이다.

    갑작스런 아삼의 전심어서에 의아해 하는 황세웅이었지만 바로 이어지는 구슬픈 소리에 말의 등을 박차야만 했다.

    히이이이잉.

    그대로 꼬꾸라지는 자신과 황제의 말이었다. 미리 대비한 황세웅이 낙마하는 황제를 낚아채면서 바닥으로 내려섰다. 동시에 아삼의 명을 상기시킨 그가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그곳을 벗어났다.

    '이미 총기가 흐려졌으니 이대로 제위를 지킨다면…… 다른 자들만 힘들어질 뿐이다. 스스로 힘든 일을 겪으면 뭔가 달라진 점이 보이겠지.'

    일부러 황제를 힘들게 만들려는 아삼이었다. 고된 여정에서 여러 백성과 사람들을 만나며 뭔가를 깨우치길 바라는 그였고, 이내 마음을 다잡은 그가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무인들을 바라봤다.

    화살도 통하지 않는 그의 무위에 당황한 병사들이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노려보던 아삼이 한숨을 내쉬며 기운을 뿌렸다.

    시린 한기와 뜨거운 양기가 뿌려지며 그를 쫓았던 자들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이미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그의 손에 수많은 병사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갔다.

    뒤를 쫓아온 자들이 모두 쓰러지고 황량한 바닥에 피가 강을 이뤘다. 비릿한 혈량이 바람에 날리자 정신을 차린 아삼이 그 참상을 확인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게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오이라트의 병사들을 바라보던 아삼의 얼굴에 씁쓸한 감정이 떠올랐다. 이렇게 저들을 처리하는 것이 그로서도 좋을 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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