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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목의 변(土木之變)
계속해서 이어지는 오이라트의 요청에도 명은 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의견을 일축해버렸고 그 사실에 당황해 하는 오이라트였다.
사실상 명의 확고한 태도라기보다는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는 왕진의 뜻이었다. 그들과의 무역이 확대되는 것도 있었지만, 일부러 그들이 요구하는 말의 가격을 후려치면서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고스란히 되돌려 주려고하는 왕진이었다.
자궁을 택하면서 원의 재건을 위해서 견마지로를 다했던 그였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그들의 냉대였고, 스스로 버림받았다고 판단한 왕진이 이제는 복수를 위해 나선 것이다.
장작 수십 년을 노력했던 그였지만 이렇다 할 결과를 얻지 못한 상황에서 버려졌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적대감을 갖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와 반대되는 입장에 서게 된 오이라트 족의 입장에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고작 씨 없는 환관 놈 때문에 우리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더군다나 그자는 옛 제국의 부활을 꿈꾸며 우리를 돕던 자라고 하지 않았더냐!"
"그것이…… 이미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해서 지원을 끊었던 것에 불만을 품은 것 같습니다. 명의 황실에서 주도적으로 일을 맡았던 자인지라 그때 생긴 불만을 지금 우리에게 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까짓 일로 이렇게 일을 크게 만들어? 씨 없는 놈의 성격이 괴팍하다고 하더니…… 고작 환관 놈의 말에 좌지우지 될 나라라면 그 국운이 다 했음이 뻔히 보인다. 부족의 전사들을 모아라."
"설마 명과 전쟁을 벌이려는 것입니까?"
"고작 환관의 말에 돌아가는 나라와 전쟁이라고 할 것 까지 있겠더냐? 우리의 힘을 보여준다면 다시 요구에 응할 것이다. 군을 모아라. 오이라트 족의 힘을 보일 것이다."
계속되는 요구를 무시하는 명의 행태에 분개하는 오이라트의 족장 에센이었다. 명이라는 거대한 제국의 힘을 잘 알고 있는 그였지만 방법이 없었다. 더군다나 지금 돌아가는 행태로 봐서 큰 희생은 없을 것 같았다.
몇 년 전까지도 간자들의 입에서는 명을 상대할 수 없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어린 황제를 대신해 섭정을 하던 때에 나왔던 말이었지만, 그 어린 황제가 자라서 고스란히 정사를 돌보자 이전보다 더 안 좋은 평들이 이어졌다. 이제는 해이해질 대로 해이해진 명의 황성이라는 소식이 간자들을 통해서 들려왔다.
왕진이라는 환관의 손에 놀아나는 경험이 없는 황제였기 때문에 전쟁을 벌이면 지레 겁을 집어먹고 몸을 움츠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잠깐의 무력시위를 보이면 곧 협상을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았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광활한 초원을 배경으로 치고 빠지는 식으로 싸운다면 어느 정도 가능성이 보였다. 초원으로 쉽게 들어올 그들이 아니었다.
호전적이었던 영락제도 실패한 대초원의 정벌이었기 때문에 더욱 자신하는 에센이었다.
1449년 정통제가 제위에 오른지 14년이 되는 해에 오이라트는 산서성의 변방을 공격했다.
***
"황제 폐하! 지금 변방의 오랑캐들이 산서성을 쳐들어왔다고 합니다."
"폐하. 소장이 그자들의 목을 쳐, 폐하의 위엄을 천하에 알리겠사옵니다."
"폐하! 소장을 내보내주시옵소서. 에센이라는 자의 수급을 가지고 오겠사옵니다."
산서성을 침범한 몽골족의 행태에 분개하는 중신들이었다. 그곳에 있던 장수들 모두가 너나 할 것 없이 앞으로 나서며 그들을 벌할 것을 주청했지만 무료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황제였다.
그런 황제의 옆에서 그의 심기를 읽은 왕진이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서며 말을 이어갔다.
"폐하! 주제도 모르는 오랑캐들을 친히 벌하시옵소서. 선황께서는 이른 나이에 몸소 전장을 겪으시며 이런 태평성대를 이루었사옵니다. 폐하께서도 선황의 가르침을 본받아 직접 군을 이끌어 미개한 오랑캐들을 벌하시옵소서."
"짐이 직접 군을 이끌란 말인가?"
"예. 폐하. 곧 바스러질 미개한 오랑캐를 상대로 그 위명을 드높이시면 후대에도 그 용맹함이 널리 전해질 것이옵니다. 폐하의 은덕으로 미개한 오랑캐를 일깨워 주시옵소서."
왕진의 간청에 흥미가 돋은 듯 무료했던 표정이 사라진 황제였다. 그런 황제의 모습에 왕진의 터무니없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이부와 병부상서가 앞으로 나서며 그의 의견에 반하는 말을 이어갔다.
"천부당만부당 하신 말이옵니다. 폐하. 어찌 그런 무지몽매한 자들을 벌하는데 황제 폐하께서 직접 나서려 하시옵니까? 맹호 같은 장수들이 즐비해 있사옵니다. 그들을 보내도 충분히 벌할 수 있으니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폐하."
"병부상서의 말이 옳은 줄 아뢰옵니다. 국정을 논하는데 사례감이 끼어드는 것은……"
"되었다. 모두들 그만 하라."
왕진의 행태를 꼬집으려는 이부상서 곽정이었지만 황제의 만류에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그런 중신들의 의견을 뒤로하고 왕진의 말에 관심을 보이는 황제였다.
'후대에 기록될 짐의 용맹함이라…… 그래. 선황께서 보이신 그 모습을 내가 이어가는 것이 당연하다. 왕진의 생각이 좋을 듯하군.'
중신들의 의견을 뒤로하고 결정을 내린 황제가 위엄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신료들은 들으라."
"예. 폐하."
"제국을 다스리는 천자가 미개한 오랑캐들의 침입을 좌시할 수만은 없구나. 백성들의 고통이 황성까지 들리는 듯하니, 짐의 마음이 무겁다. 하여, 대명의 천자인 짐이 친히 나서서 그들을 벌 할 것이다."
"하오나 폐하……"
"어허! 그 입 다물라. 이미 짐은 마음을 굳혔다. 병부상서는 병력들을 모으라. 대군을 이끌고 친히 나서서 대명의 위엄을 세울 것이다."
"…… 예. 폐하. 한치의 소홀함도 없이 명을 수행하겠사옵니다."
왕진의 간청으로 친정을 결정한 황제였다. 그렇게 모은 군사만 50만 명에 이르렀다.
50만 명의 군사 중에는 문신(文臣), 귀족(貴族) 등 전쟁과 무관한 이들까지 포함된 숫자였지만 그 규모만으로도 상대하는 적을 압도할 정도였다.
그렇게 대군을 이끌고 북진하는 황제였다.
***
북진하는 황제의 대군과는 별개로 항주의 항구에는 제법 큰 규모를 가진 선박이 들어서고 있었다. 별다른 깃발도 보이지 않는 평범한 상선처럼 보이는 배였지만 그 크기만은 보통 상선보다 커 보였다. 잠깐 이목을 끌었지만 이미 항주에는 그런 배들이 즐비해 있었기 때문에 이렇다 할 주목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그 평범한 배 안에 있는 자들 중, 한 명만 드러나도 모두의 이목을 끌 정도로 범상치 않은 신분을 가진 그들이었다.
항구에 다다른 배와 함께 갑판에서부터 다리가 내려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내린 몇몇 인원이 다가오는 관복을 입은 사내들을 멈춰 세웠다.
"멈추거라."
"…… 이게 무슨 경우요? 그것은 우리들이 해야 할 말인 것 같은……"
오히려 관인들을 멈춰 세우는 어이없는 그 행태에 이죽거리는 관병이었지만, 배에서 내린 그들이 내보이는 패에 부동자세를 취하며 눈치를 살펴야만 했다.
수많은 배가 드나드는 곳이었다. 그만큼 조심해야 함을 잘 아는 관인들이었고 이어지는 그의 말에 조심스럽게 배 위로 올라야만 했다.
"자연스럽게 행동해야 할 것이다. 우선 배에 오르거라."
"예? 예."
배 안을 수색하려는 듯 오르는 관인들이었고 그렇게 갑판에 이르자 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데리고 들어온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렇게 조심스러워하는 그 모습을 확인한 사내가 만족할 만한 웃음을 보이며 그들을 향해 당부하듯 일렀다.
"안으로 들어가면 지금보다 몇 곱절은 더 조심해야 할 것이다. 쉽사리 고개를 들어서도 아니 된다. 만에 하나라도 불경한 태도를 보인다면 그때는…… 치도곤을 당할 것이다. 비단 너희들만으로 끝나지 않음을 명심하거라."
"예? 예. 나리. 명심하겠습니다."
미소를 지우며 조심스럽게 엄포를 놓는 그 태도에 급히 고개를 조아리는 관인들이었다. 유명한 동창의 당두라는 사람이 조심해라고 할 정도면 황실과 관련된 자이거나, 그보다 더 윗줄의 사람이 안에 있다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덜덜 떨리는 몸을 겨우 진정시키며 선실로 들어서는 그들이었다.
화려한 의자에 앉아 있는 사내의 앞으로 여러명의 사내들이 절도 있는 모습을 보이며 시립해 있었다. 모두 평범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고 그런 그들의 기세에 눌린 관인들이 다급히 고개를 숙이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귀에 딱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국이 어수선 하구나. 무슨 일이 있는지 소상히 말해 보거라."
전소평의 물음에 숙인 고개를 든 관인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떨리는 목소리로 이어갔다. 평소라면 밑에 있는 이들을 시키겠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지금 북장의 오랑캐들이 변경에 침범하였습니다. 하여, 황제 폐하께서 친히 대군을 이끌고 그들을 벌하러 가셨습니다. 그리고 저희들은 혹시라도 있을지도 모를 불미스러운 일들을 막기 위해서 경계를 강화하고……"
- 친정이라고 했더냐?
"……."
갑자기 마음속에서 울리는 듯한 목소리에 놀란 그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뒤늦게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급히 고개를 조아리는 그였고 당황한 그 모습에 다시 묻는 아삼이었다.
- 황제께서 친정(親征)을 가셨냐고 물었다.
"예? 예. 황제 폐하께서 친히 군을 이끄신다고 하셨습니다."
"……."
갑자기 허공에 대고 주저리는 상관의 모습에 의아해하는 그들이었지만 무거워진 분위기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고개만 조아릴 뿐이었다.
그런 관인들을 뒤로하고 미간을 굳히는 아삼이었다. 별다른 소식을 접하지 못한 그인지라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런 그가 앞에 시립해 있는 전소평을 바라봤다.
- 네가 가서 어떤 상황인지 소상히 알아오너라. 저들은 당분간 이 배를 벗어나지 못해야 할 것이다. 아직은 조심해야 할 것 같구나.
"예. 제독 태감."
아삼의 명을 받은 전소평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리고 그가 아삼을 부르는 호칭에 놀란 관인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제독? 제독 태감이라면…… 동창의 제독이신가?'
순간 아삼의 정체를 깨달은 그들이 떨리는 다리를 부여잡으며 간신히 버텼다. 숙였던 고개를 더욱 조아리며 마치 절을 하듯이 버티는 그들이었고 전소평이 수하들을 움직였다.
그들을 배에 묶어두는 동안 빠르게 그곳을 벗어나는 전소평이었다. 아삼의 명을 수행하기 위해서 다시 하오문과 주변에 있을 동창들을 찾는 그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친정을 떠났다? 전쟁을 경험해 보지도 못한 황제가 친정을 떠나다니…… 중신들이 말리지 않았을 리는 없을 터. 흐음.'
텅 빈 선실 안에서 고심을 하던 아삼이 미간을 찌푸렸다. 석연찮은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직 어떤 상황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떠오르는 생각을 떨쳐내야만 했다. 괜히 지레짐작으로 선입견을 가지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9년이라……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구나.'
9년이라는 시간을 떠올린 그의 미간을 찌푸려졌다. 하지만 그런 그의 얼굴은 대원정을 떠나기 전보다 훨씬 좋아보였다.
새하얗던 피부는 바닷바람과 햇볕에 조금 탄 것 같았지만 예전보다 좋은 혈색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미간에 서려 있던 하얀 기운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캘리컷에 도착하고 몇 년간 극양의 무공을 익힌 아삼이었다. 규화보전의 음기에 대항하기 위해서 익히는 무공인 만큼 훨씬 더 힘든 일이었다.
극음의 기운을 가진 상태에서 극양의 기운을 키워야만 했다. 다른 기운을 배척하는 규화보전의 음기가 자신의 기운에 버금가는 반대되는 기운을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그렇게 극양의 기운을 익히기 위해서 날뛰는 규화보전의 음기를 제어해야만했기 때문에 더 힘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더군다나 온전히 알아볼 수 있는 구결도 아니었다. 원래 다른 언어로 된 구결을 번역하고 그것을 익혔기 때문에 시간이 더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구결의 유출을 막기 위해서 무공에 문외한인 학자들을 통해서 그 글을 따로 옮겼고 그 과정에서 제대로 된 뜻을 아는 것은 더욱 힘들어졌다. 어쩔 수 없이 막히는 것은 따로 언어를 익히면서까지 배워야만 했고, 극양의 무공을 익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만 했다.
지난 일을 돌이키며 쓰게 웃는 아삼이었다. 더 건강해진 몸과 함께 더 이상 규화보전의 음기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막상 돌아오고 나니, 이제 황궁에 묶인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답답한 마음이 드는 그였다.
'자유라……'
그동안 이전부터 갈망하던 그것을 근 몇 년 동안 만끽해왔던 아삼이었다. 그것을 다시 놓으려고 하니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깊은 생각에 빠져있던 아삼의 기감에 익숙한 기척이 잡혔다.
곧 전소평이 안으로 들어서며 그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알아온 정보들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에 소상히 그간의 굵직한 일들을 알아온 전소평이었고 그의 말을 듣던 아삼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모든 사건의 중심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한 인물이 이상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 황제 폐하의 총애를 받고 있다고?
"예. 그 권력이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로 막강하다고 합니다. 이번에 친정을 행하신 것도 왕진이라는 자의 주청이 있었다고 합니다."
- 우선 북경으로 움직여야 할 것 같다. 은밀히 움직일 것이니 채비를 하거라.
"바로 움직이시겠습니까?"
- 그래. 시간이 촉박할 것 같구나.
"예. 제독 태감. 바로 준비를 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는 전소평을 뒤로하고 선실을 나서는 아삼이었다. 멀리 보이는 수평선과 함께 짠 내를 품은 바람이 불어오며 그의 옷깃을 휘날렸다.
'바다라…… 언제 다시 오게 될지……'
햇빛을 반사시키며 빛나는 넓은 바다와 수평선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한 방향을 향해 있었다.
'언젠가 한 번 들려봐야 하는 것인가?'
씁쓸하게 웃는 아삼의 뒤에서 준비를 마친 전소평이 보고를 올렸고, 돌아서는 그와 함께 배에 타고 있던 자들이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거친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자금성을 향해 달려가는 아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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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