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197화 (197/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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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심(苦心)

    "동창의 제독 자리를 비워두고 대원정을 떠났다라…… 하! 이것들이 나를 능멸하려는 것인가? 숨어있는 우리들이 움직이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분명하다. 어설픈 명분으로 대원정을 떠난다고?"

    이전의 일들을 떠올리며 뇌까리던 왕진이 기가 찬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예전에 사용했던 방법을 또다시 되풀이하는 그들의 행태에 어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을 깔보는 듯한 그놈들을 모조리 찾아내서 도륙을 내고 싶었지만 아직까지 가진 힘이 미약했기 때문에 참아야만 했다.

    그렇게 화를 삭이는 왕진이었고 그런 왕진을 옆에서 바라보던 환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오나 공공. 아삼이라는 놈이 직접 항주로 향하지 않았습니까? 황제 폐하께서 그를 보낼 때 보인 그 표정은 대원정을 떠나는 것이……"

    말을 이어가던 환관은 날선 왕진의 눈빛을 알아채고 급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늦은 감이 있었다. 이미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변한 왕진이 그를 노려봤기 때문이다.

    "이놈이!"

    짜악.

    환관을 향해 손을 휘두르는 왕진이었고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왕진에게 말을 꺼냈던 수하의 고개가 돌아갔다. 입술 사이로 흐르는 피를 닦을 겨를도 없이 다시 고개를 돌리며 급히 머리를 조아리는 그였고, 그 모습에도 화가 풀리지 않는지 계속해서 손찌검을 해대는 왕진이었다.

    "네놈까지 나를 능멸할 셈이냐? 대원정? 뭐라? 자리를 비워? 고작 어린 황제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서 막대한 자금이 드는 대원정을 떠난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짜악. 짜악.

    연신 들리는 소리와 함께 그를 보필하던 환관이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피를 흘리며 바닥으로 쓰러진 그 모습을 확인한 이후에야 화가 가라앉았는지 숨을 고르던 왕진이 따라놓은 차를 들이키며 안정을 찾아갔다.

    "대원정으로 이목을 숨기고 나를 기만하려 함이겠지! 내가 그런 얕은 수에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아무리 아삼 네놈이 대단하다고 하나, 이번 일은 괜한 시간만 보내는 것이 될 거다. 나 왕진이 그렇게 우습게 보였다 이 말인가?"

    비릿한 표정을 지으며 뇌까리는 왕진이었다. 그런 왕진 앞에서 몸을 추스른 환관이 흘러나온 코피를 닦으며 자세를 곧추 세웠다. 그리고 그렇게 숨죽이며 눈치를 살피는 환관을 보며 딱딱한 어조로 말을 이어가는 왕진이었다.

    "지금보다 더 조심해야 할 것이다. 최대한 움직임을 자제하고 모습을 드러나지 말라고 이르거라."

    "예. 공공."

    읍을 하며 물러서는 수하를 보면서도 왕진의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자신을 기만하려는 아삼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빠드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이를 악 다문 그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아삼이라는 존재 하나로 숨을 죽여서 움직이지 말아야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

    정화가 이끌었던 대원정을 아삼이 이끌고 있었다. 커다란 보선의 선수에서 불어오는 해풍을 맞으며 서 있는 아삼의 얼굴은 밝게 펴 있었다. 이런 해방감과 자유로움은 예전에 환골탈태를 경험한 이후로 처음인 것 같았다.

    넓은 수평선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미미한 미소가 걸렸지만, 그의 뒤에 있는 전소평의 얼굴은 그와는 대조적이었다.

    전소평의 얼굴이 좋을 리가 없었다. 뱃멀미를 유독 심하게 하고 있는 그였기 때문이다. 최대한 멀미를 참아내며 아삼의 곁을 지키고 있는 전소평이었지만 그의 안색은 파리하게 질려있었다.

    "며칠만 더 가면 구항(舊港, 팔렘방)이라고 부르는 곳에 도착합니다. 그곳에서 선단을 멈춰서 보급을 하고 작은 교역을 이어가면 될 것 같습니다."

    - 교역이라니? 교역도 하는 것인가?

    "송구합니다. 정화 태감께서 함께 온 이들의 편의를 봐주기 위해서 해오신 일입니다. 따로 그들의 삯을 챙기려 하셨기에…… 불편하시다면 그 일을……"

    - 그랬던가? 알겠네. 그대로 시행하도록 하게.

    "예. 공공."

    마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아삼이었다. 이어 뒤에서 자신을 보필하는 전소평을 바라보던 그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 들어가서 쉬어라. 곧 죽을 얼굴을 하고 어떻게 나를 보필한다는 말이냐?

    "송구합니다. 제독 태감."

    - 곧 육지에 다다른다고 하니 거기에서 기력을 되찾거라. 딱히 위험한 일은 없을 것 같…… 지가 않구나. 흐음.

    "……."

    아삼의 말에 의아해 하는 전소평이었다. 이내 전소평이 주변을 둘러보며 이상한 점은 찾으려고 했지만 크게 이상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허투루 말을 꺼낼 아삼이 아니었기 때문에 내력을 끌어올리며 안력을 키웠고 그의 눈에 수평선 끝에 걸린 수많은 돛들이 가득 들어왔다.

    "저기 정체모를 선박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 속도를 줄이고, 대비할 수 있도록 전하라.

    "예. 제독 태감."

    - 마환! 저들이 누군지 아는가?

    아삼의 하명에 읍을 하는 전소평이 명을 수행하기 위해서 움직였고, 뒤에 있던 마환이 앞으로 나서며 천리경으로 아삼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봤다.

    한참을 그렇게 주시하던 그가 조금씩 드러나는 선박들의 모습을 확인하며 굳은 얼굴로 천리경을 놓고 아삼을 향해 보고를 올렸다.

    "인근에서 활동하던 해적들이 모두 모인 것 같습니다."

    '흐음. 해적들이 모두 모였다라?'

    갑작스런 그들의 등장에 의아해하는 아삼이었다. 그런 아삼의 기색을 살피던 마환이 말을 이어갔다.

    "아마도 정화 태감께서 돌아가신 사실을 전해들은 것 같습니다. 과거 진조의(陳祖義)라는 해적들의 수장을 처리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의 후예를 자처하는 자들이 남은 해적들을 모두 이끌고 앞을 막아선 것 같습니다."

    "……."

    "일전에 정화 태감께서 대원정을 오실 때는, 모두 몸을 숨겼던 자들입니다. 다시 이어지는 원정을 보고 더 이상 참지 못한 것 같습니다."

    - 해적들이라…… 따로 저들을 상대할 수 있는가?

    "모인 자들의 수가 너무 많습니다. 어느 정도 희생이 불가피해 보입니다만 우선 수기를 올려 다른 함선에 연락을 취하는…… 태…… 태감!"

    말을 이어가던 마환이 놀란 눈으로 아삼을 바라봤다. 점점 가까워지는 해적선들의 모습과 함께 선수에 있던 아삼이 바닥을 박차며 몸을 날렸기 때문이다.

    상당히 먼 거리를 건너뛰었지만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의 몸은 넘실대는 바다로 떨어지고 있었다. 뒤늦게 발을 받칠 만한 무언가를 찾는 마환이었지만 이어지는 아삼의 모습에 헛바람을 집어삼켜야만 했다.

    "등평도수? 그렇다고 해도 저렇게 먼 거리를……"

    간신히 육안으로 보이는 먼 곳에 많은 수의 해적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는 아삼이었다.

    넘실대는 바다를 밟으며 나아가는 그였고 아삼이 밟은 곳에서는 살얼음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흐릿하게 보이던 해적들과의 거리를 빠르게 좁혀 가는 아삼이었다.

    그 모습에 모여 있던 해적들이 질겁을 하며 화살을 날렸지만 그의 몸에 닿기도 전에 무언가에 튕겨져 나갔다.

    "저…… 저럴 수가 어떻게 저런 일이……"

    "귀…… 귀신이다! 사람이 아니야!"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겁에 질린 그들이 우왕좌왕했다. 아무리 화살을 날려도 그를 잡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을 피해내며 그들을 향해 접근하는 아삼이었다. 엄청나게 빠른 그 속도에 적응하지 못하던 해적들의 화살은 아삼이 지나간 이후에야 바다로 쏟아졌고 그렇게 화살을 피한 아삼이 한 배를 바라봤다.

    모여 있던 해적선들 중에서 가장 큰 배를 확인한 아삼이 기운을 끌어올렸다.

    파지지짓.

    손에 모이는 차가운 기운에 주변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동시에 뻗어진 아삼의 손에서 시린 한기가 터져 나왔다.

    급속하게 얼어버리는 주변의 공기와 함께 그 아래에 있던 바다까지 꽁꽁 얼어붙었다. 그리고 빠르게 날아간 아삼의 장력이 커다란 배의 선수를 부쉈고 기다란 얼음기둥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발아래 생겨난 얼음을 날려 보내며 양손에 잡힌 얼음 기둥을 휘두르는 아삼이었다. 발로 날려보낸 얼음덩어리가 그 배의 선수에 틀어박혔고 휘두른 얼음 기둥이 배를 부수기 시작했다.

    채 한 식경도 지나지 않아서 그 거대한 배가 기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새 뱃전에 올라선 아삼이 모여 있는 해적들의 수급을 베어내기 시작했다.

    올라선 아삼의 모습에 대항하려하는 그들이었지만, 아삼의 무공은 도저히 그들이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의 무공이 아니었다.

    이제는 대성을 눈앞에 둔 규화보전이었다. 다른 무공들의 성취도 더 올라갈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기 때문에 의미 없는 손짓에도 뼈가 부러지고 살이 갈렸다.

    그렇게 갑판에 나와 있던 해적들은 피를 토하며 나가 떨어졌다. 그리고 그 모습에 당황한 그들이 배를 버리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쿠우우우우.

    기묘한 소리를 내며 커다란 해적선이 가라앉았다. 동시에 그 배에서 벗어난 아삼이 다른 배를 향해 몸을 날렸고, 가라앉은 커다란 배의 영향으로 주변에 몰려있던 선박들이 빨려 들어가며 서로 부딪치기 시작했다.

    콰아앙. 콰아앙.

    연신 장력을 뿜어내는 아삼의 공격에 여기저기 부서진 배에 물이 차기 시작했다. 이내 천천히 가라앉는 배를 확인하고 나서야 다른 배로 움직이는 아삼이었다.

    "어…… 어떻게? 저럴 수가……"

    놀란 마환이 경천동지할 아삼의 무공을 바라보며 더듬거렸다. 그리고 그의 옆에 다가선 창백한 얼굴의 전소평이 이제는 새삼스럽지 않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앞으로 익숙해져야 할 것이네. 그만큼 우리가 대단한 분을 모시고 있는 것이지."

    "……."

    경악하는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하는 마환을 바라보며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던 전소평이 정신을 차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이내 그의 눈에 들어오는 한 사내를 향해 손짓을 하자, 부관이 그를 향해 다가왔고 그런 부관을 향해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명을 내리는 전소평이었다.

    "대 명의 앞을 가로막은 해적들을 소탕할 것이다. 곧 전투를 할 준비를 마치고 명을 기다려라."

    "충."

    크게 부복하며 답하는 부관의 모습을 확인한 전소평이 해적을 섬멸하는 아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언제 멀미를 했냐는 듯 환한 미소를 짓는 그의 얼굴에 자랑스러움이 가득 묻어났다.

    ***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무런 낌새도 없었다. 대놓고 드러내지는 못 하고 있지만 항주 근처에서 아삼의 흔적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그들이었다.

    '설마 정말로 대원정을 떠났다는 것인가? 아니지…… 아니야. 이미 한번 써먹은 방법을 다시 쓸 바보는 아니지 않는가?'

    아무런 흔적도 없다는 보고에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고심하는 왕진이었다. 이미 아삼의 무공을 잘 알고 있는 그들이었기 때문에 최대한 모습을 감추면서 그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그래서 더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 일에 진전이 없는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런 내 생각을 역으로 이용해서 대원정을 떠난 것인가? 항주뿐만 아니라 다른 항구들까지 인원을 보냈지만…… 하긴, 그놈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한다면 쉽게 찾지는 못 할 터. 당분간은 계속 지켜봐야 하는 것인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는 왕진이었다. 어린 황제를 대신해서 태황태후가 섭정을 펼치는 지금이 기회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 기회를 살리지 못 하면 그동안 대업을 위해서 자궁을 택하고 황궁에 잠입을 했던 자신의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우선은 그 어린 황제 놈을 구워 삶아놔야 하는 것인가? …… 당분간 돌아가는 추이를 지켜봐야겠구나.'

    그렇게 마음먹은 왕진이었지만 이어지는 사건에 다시 몸을 사려야만 했다.

    태황태후를 보필하던 부례감 유현이 동창에 잡혀 들어갔다.

    아삼이 없는 지금 첩형 자리에 있던 송상호가 유현을 잡아들인 것이다.

    태황태후를 보필하는 유현이었지만 그의 야심은 줄지 않았다. 동창에서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서 그의 명을 들을만한 인원을 집어넣으려고 한 그였다.

    아삼이 없었기 때문에 적기라고 생각한 유현이었고, 방태옥 또한 동창에서 그 영향력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성공하리라고 여겼던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방태옥이 그에게서 돌아선 상황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 일은 성공할 수가 없었다.

    동창의 수장이 없는 지금 조금씩 그 기반이 되는 세력을 갉아먹으려 했지만 송상호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 동안 그가 행한 비리의 증좌를 들고 그를 잡아들인 것이다.

    물론 아삼의 당부로 자중하라는 명을 받은 송상호였지만 유현의 행동은 도가 지나쳤다. 한 번에 너무 많은 인원을 동창에 들이려고 준비한 그였기 때문에 멍청하게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송상호는 그동안 모은 증좌와 함께 그를 잡아들였다. 어차피 다시 돌아올 아삼이었기 때문에 그가 없는 동안에 동창이라는 조직만은 잘 관리하리라고 생각한 송상호였고 철저하게 준비를 했다.

    태황태후의 사람이던 유현이 잡혀 들어갔지만 아무런 일도 없었다. 이미 그 증좌가 너무나 명백했기 때문에 권력의 정점에 선 태황태후도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더군다나 더 중한 일을 진행시키고 있는 상황에서 괜한 분란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유현을 버리는 그녀였다.

    유현이 그렇게 내쳐진 모습에 지레 겁을 집어먹은 왕진은 더욱 몸을 사렸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이 옳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태황태후의 심복인 그를 잡아들일 정도로 동창의 힘이 대단했지만, 아삼의 명이 없었다면 쉽게 움직이지 않았을 거라고 판단하는 그였다.

    '분명히 어딘가에 숨어서 그놈이 동창을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아니 몰래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 분명하다. 영악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어리석다고 해야 하나? 이렇게 쉽게 드러날 일을 대원정이라는 것으로 속이려고 하다니…… 설마? 진정으로 대원정을 떠났다는 말인가? 아니지, 아니야. 역으로 생각해서 우리를 끌어내려 함인가?'

    아삼이 명에 있는지 없는지 반신반의하며 고심하는 왕진이었다. 하지만 결국 내린 결론은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황궁에서의 일은 아무래도 단념하는 것이 좋겠구나. 대신…… 아삼 네놈이 자리를 비운 그 빈틈을 노릴 것이다. 두고 봐라! 곧 네놈들이 후회할 날이 올 것이다.'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경거망동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다른 식으로의 접근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왕진이었다.

    ============================ 작품 후기 ============================

    200회를 조금 넘어서 완결이 지어질 것 같습니다.

    아삼의 대원정부분은 건너 뛸 생각이었지만 조금 추가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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