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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아삼 혼자서 뿜어내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기운이었다. 거대한 기운도 기운이었지만, 몸속으로 파고드는 치명적인 한기는 막아선 자들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천하의 정화도 그 기운에 진땀을 뺐다. 점점 고갈되어가는 내기와 함께 당혹감이 서린 얼굴로 아삼을 바라보는 정화였고 그 순간, 뿜어져 나오던 기운이 다시 아삼을 향해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뿜어낸 한기를 모두 흡수하려는 듯 엄청난 기운이 아삼을 향해 되돌아갔고 그 기운을 갈무리하면서 자연스럽게 서있던 아삼의 눈이 번쩍 떠졌다.
온 세상을 얼려버릴 듯한 시린 정광이 번뜩였다. 변해버린 세상과 생생하게 느껴지는 주변의 기운에 이전의 여운을 느끼던 아삼이 이내 그 감정을 떨쳐내면서 천천히 몸을 돌렸다.
경악과 경외.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빛에 아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미 멈춰버린 대선단과 모선의 주위로 커다란 공간을 만든 수많은 목선들. 거기에 주변의 바다를 꽁꽁 얼려버린 시린 한기까지.
자신으로 인해 벌어진 일들을 자각한 그가 씁쓸해했다.
'결국에는…… 이렇게 되는 것인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 시선들 중에서 유독 빛나는 눈빛을 확인한 아삼이 그 사람을 바라봤다. 그 상태로 그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송구한 듯 읍을 하는 아삼이었고 그런 아삼의 모습에 정신을 차린 정화가 경악해하는 그들을 향해 호통을 쳤다.
"무엇하고 있는 것이냐?"
"……."
"다시 선박을 움직여라.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것이냐?"
"아…… 아니옵니다. 공공."
날선 정화의 말에 급히 고개를 숙이며 읍을 하는 그들이었고, 이내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돛을 올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삼을 바라보던 정화가 그의 굳은 얼굴을 확인하며 몸을 돌렸다.
- 고얀 놈. 들어오너라.
차가운 그 말에 고개를 숙인 아삼의 얼굴에 난감한 빛이 서렸다. 자신이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내면 깊숙한 곳에서 만난 그 존재의 부탁에 쉽게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렇게 고심하는 아삼의 모습을 뒤로하고 안으로 들어서는 정화의 얼굴에는 따뜻한 미소가 어렸다.
"지금부터 이곳에 아무도 들이지 마라. 이 근처에 그 어떤 자도 얼씬거려서는 안 될 것이다. 알겠느냐?"
“예. 공공.”
정화의 하명에 읍을 하며 물러서는 환관이었고 그런 환관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아삼과 함께 선실로 들어서는 정화였다.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굳은 얼굴로 시립해 있는 아삼이었고 자리에 앉아서 그런 아삼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정화였다. 계속해서 고개를 들지 못하는 아삼의 모습에 씁쓸하게 웃던 정화가 입을 열었다.
"몸은 어떠하냐? 괜찮은 것이더냐?"
"……."
"죽을 죄를 진 것이냐? 왜 아무런 말도 없는 것이냐?"
- 송구하옵니다. 공공.
"……."
고개를 숙이는 아삼의 모습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정화였고 이내 선실에 다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한참을 그렇게 말없이 고심하는 정화였다. 그리고 그런 정화 앞에서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시립해 있는 아삼이었다.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이 정화의 질문으로 깨져나갔다.
"언제부터 였더냐?"
"……."
"규화보전…… 그 무공을 언제부터 익힌 것이더냐?"
- 송구하옵니다.
"설마 설마 했었다. 아니…… 이미 의심하고 있었다는 것이 맞겠지. 허나, 쉬이 믿을 수 없더구나. 규화보전이라니…… 그 규화보전이라니. 허허허."
"……."
정화의 말과 웃음에 두 눈을 크게 뜨는 아삼이었다. 정화가 이전부터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그였기 때문에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철저하게 감췄다고 생각했던 아삼이었지만 정화의 눈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왕호와의 대련에서 처음 이상함을 느낀 정화였다. 바닥이 흥건하게 젖어있을 이유가 없었고, 결정적으로 최근에 있었던 오건휘의 계략으로 숨어있던 자들이 드러나면서 주변에 떨어져 있던 녹아버린 얼음 조각으로 어렴풋이 짐작을 한 그였다.
규화보전이라는 비급을 필사했던 아삼이었기에 자연히 그에게 시선이 돌려졌지만, 몇백 년 동안 익힌 자가 없다는 무공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아삼의 내기였기 때문에 쉽게 단정 지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눈을 속일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괘씸하면서도 대견하게 느껴지는 아이였다. 이미 자신의 뒤를 잇게 만들려고 마음을 먹었고, 큰일을 맡기기 위해서 불안한 마음을 가졌던 그였지만 그가 익힌 무공의 정체를 알게 되자 한결 마음이 놓였다.
"너를 책망할 생각은 없으니 그렇게 불안해 할 필요는 없다."
따뜻한 미소로 자신을 바라보는 정화를 향해 고개를 숙인 아삼이 불안한 듯 물었다.
- 언제부터…… 아셨습니까?
"언제부터라? 글쎄, 나도 모르겠구나. 네가 필사를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는지 무당의 제자와 대련을 했을 때부터였는지 아니면 너와 연관 있는 자들의 시체를 확인할 때부터였는지…… 그저 어림잡아서 혹시나 하고 짐작했을 뿐이었다."
지난 일을 회상하는 듯 아련한 눈빛으로 먼 곳을 응시하는 정화였고 그런 정화의 말에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는 아삼이었다.
"설마 했다. 아무리 알 수 없는 양기가 충만한 너였다고 하나, 그 무공을 익힐 줄은 생각지도 못 했다. 그래서 짐작만 했을 뿐, 확신하지 못했다. …… 그저 이상하다고 여겼을 뿐이었다. 몰래 그 무공을 익히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철저하게 숨겼다니…… 꽤나 당돌한 놈이구나. 하하하."
- 송구합니다. 공공.
"놀랍구나. 규화보전을 익힌 자를 내 눈으로 확인하게 될 날이 올 줄이야. 너에게 따로 내릴 명이 있었는데…… 이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 싶구나."
흐뭇한 미소를 지은 채 아삼을 바라보는 정화였고 그런 정화를 향해 그저 고개를 숙이는 아삼이었다. 그런 아삼을 바라보던 정화가 진지한 눈빛으로 아삼을 바라봤다.
"이제 때가 된 것 같구나."
- 때라 하시면……
"이번 대원정의 목적은 대외적으로 황제 폐하와 대명의 위엄을 알리는 것이다. 그것과 더불어서…… 암중에 숨어서 명과 황실을 위협하는 세력을 뿌리뽑고자 함이다."
"……."
"물론 대원정을 떠나는 것은 온전히 내가 수행해야 할 일이다. 너는 따로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을 수행하면 될 것이야."
- 그렇다면 소인은 이번 대원정에……
"대원정은 나 혼자 떠날 것이다."
- 공공.
희끗한 머리를 보이는 정화의 모습에 걱정이 되듯 그를 부르는 아삼이었고 그 뜻을 읽어내고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보이는 정화였다. 그런 정화가 일어서면서 아삼을 내려봤고 품에서 무언가를 조심스럽게 꺼냈었다. 이내 그것을 펼쳐들며 위엄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동창의 첩형, 문아삼은 황명을 받들라."
위엄서린 정화의 목소리에 그대로 무릎을 꿇으며 앉는 아삼이었고 그 모습과 함께 계속해서 황제의 명을 읊는 정화였다.
"작금에 이르러 암중에서 모습을 감춘 자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황실의 안위를 위협하고 백성들의 분란을 조장하니, 그 행동이 도를 넘어선지 오래다. 그 세력의 규모가 경시할 수 없을 수준에 다다르니 더는 좌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위로는 황실과 아래로는 백성을 위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죄를 엄히 물을 것이다. 하여, 짐이 감찰패를 내리노라. 사특한 마음을 품은 그들을 철저히 조사하고 파악하여 발본색원(拔本塞源)하도록 하라."
허리를 숙이며 황명을 받드는 아삼이었고 그런 아삼을 비장한 얼굴로 내려보는 정화였다. 이내 감찰패를 건네며 황명을 전한 정화가 아삼을 향해 나직이 말했다.
"지금까지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서 숨어있는 자들의 뒤를 쫓고 있었다. 바로…… 원이라고 불렸던 잔당들이 그들의 정체다. 그들의 움직임을 포착하기 위해 뒤로 물러서면서까지 몸을 숨겼다만…… 이번에 있었던 일로 내가 나서는 바람에 그들이 또 다시 깊숙한 곳으로 숨어들었구나. 하여 폐하의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원의 잔당? 원의 잔당과 관련이 있었단 말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삼이었고 그런 그를 향해 계속해서 말을 이어가는 정화였다.
"그래서 이렇게 대원정을 떠나게 된 것이다. 숨어버린 그들을 다시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서는 내가 모습을 감춰야만 한다. 이미 뒤로 물러선 내가 다시 물러선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으니…… 대원정이라는 구실로 멀리 떠나있으려 함이다. 그렇게 빈틈을 보여서 그들을 일망타진하겠다는 것이 바로 황제 폐하의 의중이시다."
"……."
"나라는 걸림돌도 사라질 것이고, 동창이라는 탐스러운 미끼도 던져질 것이다. 동창의 제독과 첩형이라는 중한 자리가 비어있으니 이 기회를 놓칠 그들이 아니다. 필히 움직일 것이다. 황궁의 일은 너와 내가 믿을만한 자에게 모두 맡겨 두었으니 네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너는 이대로 은밀히 무림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움직여라."
- 무림이라시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묻는 아삼이었고 그런 아삼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는 정화였다.
"너도 지난번에 이상함을 느꼈다고 하지 않았더냐? 유명한 문파의 무공을 사용하나 그 무공에 깊이가 없었다고 했으니 너도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잠시 모습을 드러냈던 그들이 사용한 무공의 출처를 확인해야 할 것이다. 허니 너는 무림이라는 곳으로 가서 이 일을 조사해 보거라. 필시 뭔가 미심쩍은 것이 있을 것이다."
정화의 말에 고개를 숙이며 읍을 하는 아삼이었다. 그 복면인들이 사용했던 무공의 출처를 좇다보면 관련된 자들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심하는 그를 향해 다시 정화가 말을 이었다.
"이 배는 곧 천주를 지날 것이다. 그때 너는 이 배에서 내리면 될 것이다. 천주의 항구로 가면 전소평이 너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그와 합류하도록 하거라. 이번에 이 일을 잘 해결한다면 너에게 비어있는 동창의 제독 자리가 주어질 것이다."
마지막 정화의 말에 아삼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놀란 두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삼을 향해 정화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 놀랄 것은 없다. 아직 어리기는 하나 너라면 능히 잘 해낼 것이다. 이번 기회에 질시 어린 시선들을 피하고 공을 세우도록 하거라. 무림이라는 곳이 그리 녹록치는 않을 것이다. 비록 네가 규화보전을 익혔다고 하나, 그에 못지않은 무공들도 여럿 있을 것이니 조심하고 또 조심하거라."
- 예. 공공. 명심하겠습니다.
정화의 당부에 고개를 끄덕이며 읍을 하는 아삼이었다. 예전에 만났던 당새아라는 고수도 그렇고, 쉽게 생각할 만한 곳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 그럼 이만 나가보거라."
- 예. 공공. 강녕히 잘 다녀오십시오.
인사의 말을 건네고 이내 돌아서는 아삼을 바라보는 정화의 눈이 흔들렸다. 짧은 순간에 미간을 찌푸리며 고심을 거듭하던 그가 뭔가 결심을 굳힌 듯 막 문을 나서려는 아삼을 불러 세웠다.
"아삼아?"
자신을 찾은 정화의 목소리에 아삼이 뒤돌아서 다시 그를 바라봤다. 뭔가 불안해 보이는 그 시선에 다시 고개를 숙여 보이는 그였다. 그런 아삼을 한참동안 바라보던 정화였다. 고뇌하는 그 모습에 이상함을 느꼈지만 아무런 말없이 그를 지켜보는 아삼이었고 그 모습에 한숨을 뱉어내며 입을 떼는 정화였다.
"후우. …… 혹시, 예전에 너의 이름을 불렀다던…… 그 여인을 기억하고 있느냐?"
갑작스런 정화의 하문에 의아함을 느낀 아삼이 멍하니 정화를 올려봤다. 갑자기 그 여인에 대해서 묻는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금 뜬금없는 하문에 의아해하던 아삼이 정화를 보며 다시 확인하듯 물었다.
- 마교에 적을 뒀던…… 그 여인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헌데 공공께서 어찌 그 여인을……
"그 여인의 이름이…… 아희라고 하더구나. 혹, 생각나는 사람이 없느냐?"
"……."
정화의 말에 아삼이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이전까지는 알지 못하는 이름이었지만, 내면 깊숙한 곳에 있었던 그 어린 존재를 만나면서 그의 기억이 온전히 남게 되었고, 그제야 그 존재가 했던 말의 뜻을 깨닫게 된 아삼이었다.
'세 사람을 잘 보살펴 달라고 했던 말이…… 그 뜻이었던가? 누이? 누이라……'
다시 이어지는 정화의 말에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갖게 된 아삼이었고 결국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바로 네 누이다. 그 여인이 바로 어렸을 때, 헤어진 네 누이라고 하더구나. 아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던데…… 자세한 것은 천주에서 기다리고 있을 전소평에게 물어보면 자세히 알게 될 것이다. 이번에 무림으로 향하는 길에…… 네 누이와의 일도 잘 풀어 나갔으면 좋겠구나."
정화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는 아삼이었다. 그런 그의 머릿속으로 이전의 그 여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애처로운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던 아희의 얼굴이 아삼의 머릿속에 가득 들어찼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그였다.
'그래서 그랬던 것인가? 그래서 그때…… 그 놈이 동요하고, 내가 동요했던 것인가?'
그제야 이해된 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아삼이었다. 이윽고 다시 정화를 향해 예를 올린 아삼이 그곳을 벗어났다. 그리고 그런 아삼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정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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