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152화 (15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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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흩날리는 새하얀 눈과 함께 항주에 도착한 그들이었다. 이내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이 아삼의 코끝을 간지럽혔고 끝없이 펼쳐진 대양이 그의 두 눈에 가득 들어왔다. 그리고 그 위로 바다를 가득 메우고 있는 목선의 엄청난 수와 그 규모에 아삼의 입이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바다 위에 떠있는 목선의 수는 헤아릴 수 없었고 그 크기 또한 범상치 않았다. 무엇보다도 지금 항주에 떠있는 배가 대원정을 떠나는 전부가 아니었다. 천주에서 수십여 척의 함선들이 대기하고 있는 상태였고, 그 천주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 먼저 항주로 들어선 그들이었다.

가장 커다란 모선과 함께 도열해 있는 수많은 선박과 부두 앞에 대기하고 있는 많은 인원들이 그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몇 백은 가뿐히 넘길 그 수가 정화를 향해 고개를 숙였고 그 모습에 아삼은 절로 몸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그 대원정인가?'

도열한 선박의 모습을 바라보며 새삼 자신의 옆에 선 정화라는 사람이 크게 느껴지는 아삼이었다.

길이만 49장, 폭이 20장에 달하는 모선이었다. 이런 모선과 비슷한 거선만 62척에 달했고 9개의 비단 돛은 200명이 당겨야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모든 선원들이 하루에 소비하는 식량만 쌀 100가마나 되었고 함대에는 상아, 향신료, 비단, 도자기 등 진귀한 것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놀랐느냐? 하긴 뱃길로 나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니 모든 것이 신기하겠구나."

멍한 표정으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아삼의 옆으로 다가온 정화가 부드럽게 말했고, 그런 정화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아삼이었다. 이내 뭔가가 걱정되는 듯 미간을 찌푸린 아삼이 정화를 향해 전심어서로 말했다.

- 공공. 오랜 시간을 그렇게 황궁을 비워도 괜찮을는지요? 동창의 수장 자리 또한 공석이니 아무래도 다툼이 심상치 않을 것 같은데……

"걱정하지 말거라. 일부러 그리 만든 것이다."

태연한 정화의 말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삼이었고 그런 아삼을 향해 얄궂은 미소를 짓는 정화였다.

"때가 되면 일러줄 것이다.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아삼의 어깨를 두드리며 무심히 지나치는 정화였고 그런 정화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아삼이었다. 뭔가 숨은 뜻이 있는 것 같았다. 그 사실에 호기심이 동했지만 기다리다보면 알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 그였다.

어느덧 준비를 끝낸 그들이 커다란 포구에 도열한 상태로 정화의 명을 기다리고 있었고 보고를 올리는 관원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인 정화가 가장 커다란 모선에 올랐다. 그리고 그의 뒤를 아삼이 따랐다.

"출항하라."

정화의 위엄가득한 명에 선원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이내 작은 선박들이 노를 저어서 대양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와 연결된 커다란 모선이 그들의 힘에 이끌려 바다로 끌려 나갔다.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지자 붉은 비단의 돛이 펼쳐졌고 이내 비단 돛이 불어오는 해풍에 커다랗게 부풀어 오르며 커다란 배를 움직였다.

그 육중한 선체가 바닷물을 가르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모선을 선두로 그 뒤를 말을 가득 실은 마선(馬船)과 식량을 실은 양선(糧船), 식수를 실은 식선(食船)이 뒤따랐다. 그리고 그 뒤를 수많은 목선들이 뒤따랐다.

넓은 대양과 함께 주변을 가득 채운 수많은 선박의 위용에 그렇게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아삼이었다. 그런 아삼의 모습을 처음 보는 정화의 얼굴에도 어느덧 미소가 번졌고 그렇게 바다로 떠나는 그들이었다.

***

아삼을 실은 모선이 항주에서 천주로 향했다. 항주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처음 맞이하는 선박의 잠자리에서 일어난 아삼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자신이 머문 선실에 하얀 서리가 잔뜩 끼어있었기 때문이다.

'뭐지? 배 위는 원래 이런 것인가? 아니면 겨울이라서 그런 건가? 그다지 춥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변을 살펴보는 아삼이었지만 별다른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특별히 자신의 몸에서 이상한 내력의 흐름을 느낀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저 추운 겨울의 날씨로 서리가 낀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엄습해 오는 불안감을 완전히 떨칠 수는 없었다. 가슴 한 켠에 찝찝한 마음을 간직한 채 밖으로 나서는 아삼이었다.

아침에 눈뜨면 제일 먼저 선실을 둘러보는 것이 일과가 되어 버린 아삼이었다. 지난 이틀 동안 비슷한 현상이 계속 일어났고 그 현상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지만 쉬이 이런 궁금증을 물을 수도 없었다. 원래 그럴 수도 있는 현상을 굳이 전심어서로 물어본다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그가 잠든 곳에 하얀 서리가 내려앉아 있었고 날이 갈수록 강도를 더해가는 듯한 방안의 한기에 아삼의 얼굴이 펴질 줄을 몰랐다.

답답한 마음에 갑판을 찾은 아삼이었다. 관모의 끈과 어깨에 두른 휘장이 시원하게 불어오는 해풍에 펄럭거렸고, 그 바람과 넓게 펼쳐진 바다의 모습에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씩 풀려가는 것을 느끼는 아삼이었다.

자유에 대한 갈망.

동창을 온전히 발아래 둘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규화보전을 익힐 수 있게 된 그날이 오지 않은 것에서 부터 비롯된 불안감이 뻥 뚫린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씻겨 내려갔다. 풍랑에 넘실대는 파도가 선체에 부딪치며 부서지듯 그렇게 그를 붙잡던 집착과 아쉬웠던 느낌들이 부서져나갔고 어느새 자유로움을 느끼는 아삼이었다.

자연스럽게 감겨진 그의 눈과 자연스럽게 서있는 그의 몸이 마치 자연의 한 부분인 양 세상에 녹아드는 것 같았고 깊게 숨을 들이마신 아삼에게 대자연의 기가 빨려 들어가는 듯 했다.

천천히 시작된 그 흐름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고, 작았던 그 움직임이 몸집을 불려나갔다. 작았던 기운의 유동이 커져만 갔고 조금씩 그 움직임이 널리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커다란 기운의 유동을 느낀 정화가 이상함을 느끼고 갑판으로 튀어나왔다. 그리고 선수에서 자연스럽게 서있는 아삼의 모습을 보면서 눈을 빛냈다.

이내 모든 기운이 그에게 빨려가듯 요동치기 시작했고, 곳곳에서 이상함을 느낀 고수들이 밖으로 뛰쳐나왔다. 모두의 시선에 모선의 선수로 향했다. 그곳에는 눈을 감고 있는 아삼이 휘장을 펄럭이며 자연스럽게 서 있었다.

- 모두 물려라. 지금부터 함부로 움직이는 자들은 그 누구라도 목을 칠 것이다.

정화의 명과 함께 모선에서 깃발이 올라갔다. 그와 동시에 모선을 중심으로 모여 있던 선박들이 천천히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고 모선을 중심으로 반경 수십 장 안이 텅텅 비었다.

조심스럽게 돛을 내리며 항해를 멈추게 만든 정화였고 계속해서 눈을 감고 대자연을 느끼는 아삼의 모습에 모든 인원의 움직임을 통제했다.

- 그 누구도 소란스럽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갑판으로 나오는 자는 없어야 할 것이다. 그 누가 되었든, 저 아이를 방해하는 자는 용서치 않을 것이다.

절로 아삼의 상태가 중하다는 것을 알아챈 정화였다. 평생에 있어서 한 번 오지 못할 만큼 중요한 순간이라고 여기는 그였고 조금씩 변해가는 아삼의 모습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는 정화였다.

우연찮은 순간에 깨달음을 얻게 된 아삼이었다. 이미 몸속에 자리 잡은 내공은 그 균형을 맞춘지 오래였다. 복잡했던 머릿속이 그의 변화와 나아감을 방해하고 있었고 자신이 갈망하는 것을 맞이했다고 느낀 그 순간, 막아섰던 모든 것이 풀려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시작된 호흡법과 몸속에 쌓이는 대자연의 기운에 잠들어있던, 숨겨놨던 기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더 이상 감출 생각도 감출 수도 없는 규화보전의 음기가 드러나면서 절로 그 구결이 아삼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단전에 쌓였던 기운들이 깨어나며 전신을 내달렸고 거침없이 달리던 기운들이 규화보전의 구결에 따라 모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비어있던 혈들을 자극하면서 충만하게 채우던 그 기운들이 이내 막혀있던 곳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움직인 기운들이 백회로 몰려들었다. 단단히 막힌 그곳을 서성이던 기운들이 조금씩 그곳을 갉아먹기 시작했고 점점 커가는 힘과 함께 철옹성처럼 단단히 틀어 막힌 그곳을 두드려댔다.

쿠웅. 쿠웅.

커다란 소리가 온몸을 울리고 그 충격에 몸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모여든 기운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차가운 음기가 막힌 백회를 꽁꽁 얼려버릴 듯 시린 한기를 토해냈고 단단하게 얼어버린 그곳에 몰려선 진기들이 부딪치기 시작했다.

얼어버린 얼음이 충격을 받으면 부서져버리듯 그렇게 금강석처럼 단단하던 백회에 작은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틈을 비집고 모여들었던 아삼의 기운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파사삭.

얼음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막혔던 그곳이 뚫리면서 새하얀 빛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생전 경험할 수 없는 그 신묘한 느낌과 함께 남은 진기들이 그 여세를 몰아서 남은 혈들을 향해 쏘아져나갔다.

음기로 얼리고 충격으로 부수면서 막혔던 혈들이 그렇게 부서져나갔고 뚫려버린 혈을 다른 기운들이 가득 채우며 충격으로 입었던 상처들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상처 난 혈들이 다시 내기로 치유되면서 더욱 단단해져만 갔고 그 크기도 더욱 넓어졌다.

내달리던 기운들로 혈맥도 더욱 넓어지고 단단해지면서 더 큰 기운을 빠르게 움직일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임독과 양맥이라는 곳이 뚫리자 막대한 기운이 그의 몸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양의 거대한 대자연의 기운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 기운과 함께 시린 음기가 아삼의 몸 곳곳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아삼의 몸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우두득. 우드드득.

뼈가 뒤틀리고 근육의 위치가 바뀌어갔다. 조금 더 이상적인 몸으로 변해가기 시작했고 이전에 입었던 중한 상처들의 흔적이 조금씩 지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깊숙이 잠들어있던 무언가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어렴풋이 느꼈던 이질적인 것의 정체가 온전히 드러났다. 내면 깊숙한 곳에서 마침내 마주한 그 모습에 아삼이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 아삼?'

'…….'

어린 자신의 모습이었다. 이곳으로 처음 와서 웅덩이에 고인 물로 처음 접했던 자신의 얼굴이었다. 죽었다고 생각한 몸의 주인이 내면 깊숙한 곳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서로를 확인한 두 존재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는 두 존재였다. 내면 깊숙한 곳에서 느껴지는 시간이 억겁이라는 세월이 흐른 것 마냥 길게 느껴졌고 마침내 그 둘의 입이 열렸다.

'네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이지? 뭘 원하는 거냐? 미련이 남은 것인가?'

'…….'

'나를 이곳으로 부른 이유가 있나? 너는…… 왜 아직 존재하는 것이지?'

숨어있던 아삼의 존재를 향해 쉴 새 없이 되묻는 그였다. 하지만 이렇다 할 답 없이 찬찬히 그의 모습을 느끼는 존재였다. 다시 적막이 내린 듯 조용해졌고 서로를 바라보던 두 존재가 말없이 서로를 느낄 뿐이었다. 마침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던, 숨어있었던 그가 입을 열었다.

'저도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 그동안 숨어서 내 행동을 지켜봤던 건가? 알 수 없는 떨림과 그 감정들은 모두…… 네 의지였겠지?'

'…… 그건.'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다시 몸을 되찾겠다는 건가? 아니면……'

'아니요. 이 몸의 주인은 오롯이 당신인 걸요. 이미 저는 없는 존재지요.'

'…….'

이미 사라졌을 존재가 내면 깊숙한 곳에서 다시 그 존재를 드러냈고 그 사실에 의아해하는 그였다. 자신의 몸을 다시 되찾을 생각이 없다는 것이 어린 모습을 하고 있는 존재 자체에서 느껴졌고, 그 사실에 다시 나타난 이유를 알 수 없었던 그가 혼란스러워했다.

그리고 혼란스러워 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어린 그가 힘겹게 의사를 전달했다.

'다만 부탁이 있어요.'

'…… 부탁?'

'부탁이요. 부탁. 남아있는 내 동기들…… 가족들을 부탁해요.'

'가족?'

'죽어있던…… 사라질 제 존재를 붙잡는 유일한 이유였어요. 가족이라는 짐을 놓으면 이제 미련이 없을 거예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어요. 그 사실을……'

'…….'

'그리고 느낄 수 있었어요. 나만큼 당신도 그들을…… 아끼고 있다는 사실을.'

'…….'

'그 세 사람을 보살펴 주세요.'

'…….

모든 뜻을 전달한 그 존재가 시린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둘만 있었던 공간이 빛으로 가득 채워졌고 그 눈부심과 함께 하얗게 변해버린 공간에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아삼이었다.

시린 빛이 뿜어짐과 동시에 아삼의 몸에서도 변화가 시작되었다.

파사사삭.

주변을 얼려버릴 듯한 시린 한기가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모선의 선수에서 시작된 차가운 기운이 점점 그 범위를 넓혀갔고 뿜어지는 그 기운에 바닷물이 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기이한 모습에 경악한 정화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 기운은…… 설마!'

천천히 시작된 그 기운의 움직임이 이내 근방을 가득 채우듯 뿜어져 나왔고 모선 전체로 퍼져나가는 그 기운에 정화가 급히 기운을 끌어올렸다. 이대로 놔둔다면 원정을 시작하기 전에 배가 부서져나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기운을 끌어올린 정화의 장심에서 강렬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자신과 주변을 어우르는 그 기운이 아삼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를 막아섰고 두 사람의 기운이 부딪치기 시작했다.

파지지직.

뿜어낸 정화의 정심한 기운과 아삼의 한기가 대치했다. 막아내는 기운까지 얼려버릴 듯 새하얀 서리가 끼었고 그 기운을 막아내는 정화의 이마가 땀으로 흥건하게 젖었다.

'지독한 한기다. 설마설마했는데…… 후훗.'

혹시나 했던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석연찮게 여겼던 것들이 맞춰지면서 풀리기 시작했고 정화의 얼굴에 흐릿한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그런 미소도 잠시 뿜어져 나오는 시린 한기에 절로 인상을 찌푸린 그가 기운을 더했다. 그것으로 모자랐는지 근처에 있던 다른 고수들이 남은 기운들을 막아서기 시작했다.

모두가 경악한 눈으로 평온하게 서있는 아삼을 바라볼 뿐이었다.

============================ 작품 후기 ============================

코멘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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