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151화 (15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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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날.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정화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하지만 이미 마음을 굳힌 듯 흡족한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이는 선덕제의 모습에 정화 또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6차례나 바닷길에 올랐던 정화였다. 그래서 그런지 바다가 지겹기도 했지만 가끔 끝없이 펼쳐진 대양과 짠 내 가득한 바람이 그립기도 했었다. 무엇보다도 좁은 황궁이 그에게는 답답하게 느껴졌지만 이미 반백이 넘은 나이인지라 선뜻 나서지 못하고 망설인 것도 사실이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겨있는 정화를 바라보며 걱정스레 묻는 선덕제였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선덕제의 말에 정화가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뜨며 황제를 바라봤다.

    "자네가 원정을 떠난다면 당연히 이 황궁이 비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그들이 준동했을 때 그들을 막아설 인사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생각해 보았는데…… 아삼을 동창의 제독으로 올리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간 그가 보여준 실력이라면 충분할 것 같은데……  어떤가? 이미 제독의 자리가 공석일 테니, 아삼 그라면 제독으로 적합하지 않겠는가?"

    선덕제의 말에 고개를 숙이며 난감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 젓는 정화였다.

    "아삼을 아끼는 폐하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오나, 동창의 제독으로 올리는 것은 신중을 기해야 할 것 같사옵니다."

    "신중을 기하다니?"

    "아삼을 제독의 자리에 올린다면 그 반발이 적지 않을 것이옵니다. 이제 약관을 넘기고 몇 해가 흐르지도 않은 나이에 제독이라는 자리에 올라선다면, 시기하는 이들이 더욱 늘어날 것이옵니다. 아삼 그 아이를 위해서도 좋지 않을 듯 싶사옵니다."

    "흐음. 질시라……"

    "이번 일도 어떻게 보면 너무 빠르게 올라선 아삼을 질시하는 마음에 벌어진 것일 수도 있사옵니다. 결과적으로는 그놈들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만…… 아무래도 제독이라는 자리에 올리는 것은 너무 이른 듯 싶사옵니다."

    "소신의 생각도 정화 태감과 같사옵니다. 비록 능력은 출중하나 아무런 공도 없이 제독으로 올리시는 것은 과한 듯 싶사옵니다."

    두 사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선덕제였다. 그 둘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여기는 황제였고 이내 진지한 눈빛으로 정화를 내려보며 다시 묻는 선덕제였다.

    "허면 동창은 어찌하는가? 제독으로 올릴 마땅한 인사가 있는가?"

    "폐하, 외람되오나 그대로 두는 것도 좋을 듯 싶사옵니다."

    "그대로 두라니? 허면 제독의 자리를 공석으로 두자는 말인가?"

    "예, 폐하. 제독의 자리가 비면 그 자리를 두고 동창 내에서의 세력 다툼이 심해질 것은 불 보듯 뻔할 것이옵니다. 오건휘까지 끌어들인 그들이라면 응당 다시 그들의 사람을 움직이지 않겠사옵니까? 그렇게 된다면 숨어있던 그들의 모습이 드러날 수도 있을 것이옵니다."

    정화의 말에 고심하던 선덕제가 이내 흡족한 듯 미소를 보였다. 그리고 그런 선덕제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잇는 정화였다.

    "그리고…… 아삼은 소신이 데리고 가겠사옵니다."

    정화의 말에 선덕제와 검교 수장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유능한 인사 한 명, 한 명이 아쉬운 이때, 아삼까지 대원정의 항해에 끼워 넣는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정화의 말에 아무런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두 사람이었고 부딪치는 세 사람의 눈빛이 빛났다.

    "흠…… 아삼이라…… 그라면 그 일을 맡겨도 충분히 해낼 수 있겠지. 허면 내 따로 아삼을 불러 이르겠네."

    "폐하, 송구하오나 아삼에게는 알리지 않는 것이 좋을 듯 싶사옵니다. 그 일은 이곳에 있는 폐하와 저희만 알고 있는 것이 좋을 듯 싶사옵니다."

    "그건 또 무슨 뜻인가? 숨은 속내라도 있는 것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선덕제였고 그런 선덕제를 향해 검교의 수장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폐하, 적을 속이기 위해서는 아군부터 속이라는 말이 있사옵니다. 아마도 정화 태감은 이것을 염두에 둔 듯 하옵니다."

    "맞사옵니다. 폐하. 아무래도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신중한 그놈들을 수월하게 속일 수 있을 것이옵니다. 아삼에게는 때가 되면 제가 따로 이르겠사옵니다."

    검교 수장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이어가는 정화였고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며 역시 고개를 끄덕이는 선덕제였다. 그렇게 다시 한 번 바닷길에 오르게 된 정화였다.

    ***

    그로부터 며칠 후, 정화의 처소에 들어선 전소평이 고개를 숙이며 예를 올렸고 그런 전소평에게 정화가 자리를 권했다. 이내 자리에 앉은 전소평이 심각한 얼굴로 정화를 향해 그동안 따로 알아오라고 했던 것들에 대한 보고를 올리기 시작했다.

    "공공의 하명대로 마교 쪽의 움직임을 주시하다가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새로운 사실이라? 그것이 무엇이냐?"

    두 눈을 빛내며 전소평을 바라보는 정화였고 그런 정화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답하는 전소평이었다.

    "예. 지난번 폐주의 잔당이 움직였을 당시, 그…… 일전에서 문 첩형의 이름을 불렀다는 여인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아삼의 이름을 부른 여인이라? 흠…… 기억이 나는구나. 그 일로 아삼이 의심을 받지 않았더냐? 그 여인이 중한 사람이더냐? 그 일을 거론하는 이유가 무엇이더냐?"

    기억을 더듬던 정화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고 그런 정화를 향해 은밀히 말하는 전소평이었다.

    "그 여인은 무림에서 빙마후라고 불리는 천요희의 제자라고 합니다. 이름은…… 아희라고 하옵고, 바로…… 문 첩형의 친 누이입니다."

    "……."

    전소평의 말에 정화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생각지도 못한 관계에 그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해갔고 그런 정화를 향해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가는 전소평이었다.

    "문 첩형에게 어렸을 때 팔려간 누이가 하나 있었는데 아마도 그 누이가 마교 쪽으로 흘러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봐서는 누이는 문 첩형의 존재를 아는 것 같으나, 문 첩형은 그 누이의 존재를 모르는 것 같습니다."

    "누이? 흐음. 누이라……"

    전소평의 말을 곱씹으며 미간을 잔뜩 찌푸리는 정화였다. 이내 고심에 빠졌던 정화가 전소평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그래, 수고했다. 허나…… 이 일을 아삼이 몰랐으면 좋겠구나. 내 말뜻 이해하겠느냐?"

    "처…… 첩형에게 알리지 말라는 말씀이십니까?"

    "……."

    "소…… 송구합니다. 공공."

    자신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 사실을 숨기라는 정화의 모습에 놀란 듯 그를 바라보며 되묻는 전소평이었다. 하지만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정화의 눈빛에 급히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응당 아삼에게 고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그였지만 정화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였지만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정화의 표정이 편치만은 않았고 떨떠름해 하는 전소평을 바라보면서 다시 당부의 말을 건네는 정화였다.

    "때가 되면 내가 다 말을 할 것이다. 그러니 너는…… 아삼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말거라."

    "예. 공공."

    "이만 나가보아라. 그리고 가는 길에 이곳으로 아삼을 불러오너라."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하명하는 정화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길게 읍을 하는 전소평이었고 이내 처소를 나가는 전소평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고심하는 정화였다.

    '아삼의 누이라? 그것도 마교라? 동생들은 화산에, 누이는 마교에…… 그리고 아삼은 황궁에 적을 뒀구나. 후우. 참 복잡하게도 얽혔구나……'

    긴 한숨을 토해내며 생각에 잠겼던 정화가 낭창거리는 환관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이내 자신의 처소 안으로 들어서는 아삼을 발견한 그가 따뜻한 미소로 안으로 들어서는 아삼을 반겼다.

    "왔느냐? …… 내 너와 긴히 논할 일이 있어 이리 불렀다."

    정화의 말에 고개를 숙이며 예를 올리는 아삼이었고 그런 아삼을 향해 자리를 권하며 나직이 말을 이어가는 정화였다.

    "폐하의 명으로 내가 다시 원정길에 나서게 되었구나."

    - 다시 대원정을 떠나시는 것입니까?

    "…… 그래. 그 대원정이다. 대외적으로 황제 폐하의 권위를 알리는 일이지. 이번 원정은 너와 함께 하고 싶은데 너의 생각은 어떤지 묻고 싶구나. 나와 함께 하겠느냐?"

    뜬금없는 정화의 제안에 당황한 듯 아삼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아마…… 이번이 내 마지막 원정이 될 것이다. 이미 반백이 넘은 내가 그 다음을 어찌 기약하겠느냐? 그래서 그런지 그 쓸쓸할 원정길을 너와 함께 하고 싶구나."

    "…….'

    애틋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정화의 눈빛에 말을 잇지 못하는 아삼이었다. 자유로움을 추구했던 자신이었다. 뱃길에 오르면서 넓은 세상을 보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그것보다는 이번 기회가 너무 아쉬웠다.

    이제 동창의 제독이었던 오건휘도, 같은 첩형이었지만 오랜 시간 정화의 곁을 지켰던 금무정도 동창이라는 곳에 없었기 때문이다. 따로 누군가가 동창의 제독으로 오지 않는 이상 자신이 그 조직을 쥐락펴락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아쉬운 마음이 든 아삼이었다.

    그런 그가 이내 머리를 흔들며 떠오르는 생각을 떨쳐냈다.

    '내가 언제부터 그런 것에 연연을 했던 거지? 금무정도 그렇고 오건휘도 그렇고 권력을 탐한 그 끝이 좋지 않았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만약 이대로 황궁을 벗어난다고 하더라도…… 무언가 얻을 것이 있을 것이다. 내가 갈망하던 것을 찾는 것이 될 터. 그래. 버리자.'

    이내 생각을 정리한 아삼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가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알게 된 정화가 따뜻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을 이어갔다.

    "무엇보다 너를 위해서라도 잠시 황궁을 벗어나 있는 것이 좋을 듯 싶구나. 이미 많은 척을 진 네가 아니더냐? 이번 기회에 잠시 숨을 고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 예. 공공. 공공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권력이라는 달콤한 그 유혹을 떨쳐낸 아삼이 기특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정화였다. 그리고 정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아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동창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내 아삼의 얼굴을 보고 머뭇거리던 정화였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여겼는지 침음을 삼키며 그런 그를 돌려보냈다. 새로 알게 된 사실과 주어진 일로 각자의 머릿속은 그렇게 복잡해져만 갔다.

    ***

    정화의 대원정이 결정되고 그 준비를 하느라 다시 한 번 황궁이 떠들썩해졌다. 황궁뿐만 아니라 온 나라가 들썩거렸다. 거의 8년 만에 재개되는 원정이라 그런지 그 준비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원정에 참가하게 된 아삼도 바쁘게 움직여야만 했다. 그만큼 규모도 거대했고 자신이 할 일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특히, 해가 바뀌면서 그는 더욱 분주히 움직여야만 했다.

    1431년 23세가 되는 나이가 바로 그가 생각하던 60년이 되는 그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규화보전을 온전히 익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날이었다. 새해가 되자마자 들뜬 마음에 운공을 시작하는 아삼이었고 차가운 내기가 몸속을 휘젓는 사실과 함께 달라질 자신의 몸을 생각하는 그였다. 하지만 그가 생각했던 것만큼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큰 마음을 먹고 운공을 하던 아삼이었지만 새삼스러울 것이 없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일주천하는 내기였고 미세하게라도 달라진 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 사실에 의아해하는 아삼이었고 대원정의 준비로 바쁜 와중에도 머릿속은 규화보전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 채워졌다.

    특히, 누구에게 쉬이 드러낼 사항도 아닌지라 속으로 전전긍긍할 수 밖에 없었다.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건가? 아니면 처음부터 내 생각이 틀렸던 것인가? 규화보전을 온전히 익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디에서 부터 잘못 된 거지?'

    이제는 생각만으로도 저절로 떠오르는 규화보전의 구결을 곱씹으면서 고민하는 아삼이었지만 특이한 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사실에 답답해하는 그였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고, 어쩔 수 없이 굳은 얼굴로 대원정을 준비해야만 했다.

    대원정의 준비로 상당히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거의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그 사이에 많은 준비를 하는 정화와 아삼이었다.

    송상호와 전소평에게 따로 지시를 내리는 정화였다. 대원정을 떠난다면 비어버릴 동창이었기 때문에 송상호와 전소평을 당두라는 자리에 올려야만 했다. 물론 기존에 당두로 있던 자들의 불만도 잠재워야만 했고 떠나면서 모종의 일도 준비시켜야만 했다.

    ***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친 정화가 선덕제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고했다.

    "폐하, 준비가 모두 끝났사옵니다. 폐하의 명을 받들어 대명의 위엄을 떨치고 오겠사오니 그간 강녕하시옵소서."

    감색의 비단옷에 관모를 쓴 정화를 한참 동안 바라보는 선덕제였다. 관모 사이의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보이는 정화의 모습에 선덕제가 차마 말을 잇지 못 했다. 그런 선덕제의 두 눈에 어느새 측은함과 함께 미안한 마음이 어렸다. 이내 감정을 추스른 그가 정화를 향해 따뜻한 음성으로 나직이 말했다.

    "또 다시 그 머나먼 길로 내보내게 해서 미안하네. 허나 이 일을 수행할만한 인사가 자네를 제외하고는 없네. 무사히 원정을 마치고 돌아오기를 내 간절히 기도하겠네. 선황의 보살핌이 있을 것이네."

    그렇게 선덕제와의 인사를 마친 정화가 비장한 얼굴로 말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의 뒤이어서 아삼을 비롯한 수많은 인원들이 말위에 올라탔다. 이내 정화를 필두로 긴 행렬이 항주로 향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 사내가 두 눈을 빛내며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대원정이라…… 그래. 쓸데없는 짓으로 그렇게 황제의 위엄을 떨쳐라. 그 사이 우리는 동창을 필두로 황궁을 집어삼켜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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