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144화 (144/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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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혈세혈(以血洗血)

    금무정의 처소를 나선 고기현의 얼굴이 점점 굳어갔다. 잔뜩 굳은 얼굴로 고심하며 자신의 처소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던 그가 갑자기 멈춰섰다. 고개를 가로 저으며 흔들리는 눈빛으로 금무정의 처소를 돌아본 고기현이 크게 한숨을 내쉬면서 이내 눈을 감았다.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하지만…… 누군가 나를 감시하고 있을 터. 당분간은 조심해야한다. 자연스럽게 만나서 말씀드리는 것이 좋겠구나.'

    고민을 하는 듯한 그 모습에 은밀히 숨어서 지켜보는 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고 뭔가가 내키지 않는 듯 다시 금무정의 처소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고기현이 이내 힘겹게 발걸음을 뗐다.

    그로부터 며칠 후, 잔뜩 굳은 얼굴의 고기현이 아삼의 처소 앞에 멈춰 서서 기감을 살폈다. 소공단의 공능인지 확연히 늘어난 내공과 함께 기감도 확장되었음을 알고 있는 그였지만 자신을 감시하는 누군가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를 뛰어넘을 정도의 고수가 있다는 것이겠지? 나를 끌어들였지만 쉽게 믿을 수는 없을 터.'

    이내 마음을 정리한 그가 아삼의 처소로 들어섰고 그를 기다리는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며 아삼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그였다. 이제 번역으로 올라선 그였기에 송상호와 전소평과는 동등한 지위였고 고개를 숙이는 그 모습에 자리를 권하는 아삼이었다.

    따로 불편한 것과 필요한 사항들, 특이 사항을 말하는 자리였다. 더 이상 황궁 밖으로 움직이는 일은 없을 거라는 아삼의 말과 함께 지금 흘러가는 사안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는 그들이었다. 그렇게 대충 대화가 마무리 지어질 때, 눈치를 살피던 고기현이 아삼을 향해 전음을 날렸다. 혹시나 하고 전음을 보내는 그의 행동에 아삼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 긴히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갑작스런 고기현의 전음과 심각한 말투에 송상호의 말을 흘려들으며 고기현을 바라보는 아삼이었다. 말을 하라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아삼이었고 그 눈빛에 그를 향해 금무정과의 일을 소상히 고하는 고기현이었다. 그리고 고기현의 이야기를 들은 아삼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결국 움직이는 것인가?'

    심각한 얼굴로 고심하던 아삼이 의아한 눈빛으로 고기현을 바라보며 전심어서로 물었다.

    - 헌데 나에게 알리는 연유가 무엇이냐? 금무정의 제안을 뿌리치기 쉽지 않았을 것인데……

    귓가를 파고드는 아삼의 전심어서에 그를 바라보는 고기현이었다. 이내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그였고 갑자기 이상해진 분위기에 말을 이어가던 송상호가 눈치를 살피며 말을 아꼈다.

    - 계속 이어서 말을 해라. 자연스럽게 행동해야 할 것이다.

    송상호에게 눈짓을 보내며 전심어서를 보내는 아삼이었다. 그리고 그 뜻에 따라서 계속 말을 이어가는 송상호였지만 분위기는 차갑게 식어있었다. 금세 이상해진 분위기였지만 내색을 하지 않는 그들이었다.

    - 저는…… 첩형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첩형의 손을 잡았는데 어찌 그 손을 놓겠습니까? 한번 잡은 손을 놓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를 먼저 필요로 하신 분은 첩형이시며 제게 기회를 주신 분도…… 첩형이십니다.

    - 알겠다. 따로 생각이 있는 것이냐?

    - 금 첩형에게는 손을 잡겠다고 밝혔습니다. 사실……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 저였기에 그렇게라도 그들의 정보를 알아온다면……

    - 네가 위험할 수도 있는 일이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그 일을 그만 두는 것이 좋을 듯 싶다.

    - 지금 옆에 있는 다른 두 사람에 비해서 떨어지는 저입니다. 저도 첩형께 조금이나마 힘이 되고 싶습니다. 역으로 거짓 정보를 흘릴 수도 있으니 허락해 주신다면 이대로 그 일을 수행하고 싶습니다. 금 첩형이 저를 부른 것을 보면…… 대외적으로 보이는 제 위치를 알 수 있었습니다. 저도 첩형께 미력하나마 힘이 되고 싶습니다.

    "……."

    고기현의 말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고심하는 아삼이었다. 생각보다 금무정의 행동이 더욱 치졸하게 느껴졌고 새삼 고기현의 행동이 고맙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기현을 이용하는 마음을 쉽게 버리는 것도 힘이 들었다.

    고심하던 아삼이 이내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

    - 조심해야 할 것이다. 너에게 달라붙은 눈이 있을 수도 있으니 지금처럼 부르지 않는다면……

    - 누군가가 따라붙은 것 같습니다. 제 실력으로는 그를 잡아낼 수 없어서…… 보고가 늦었습니다.

    생각보다 신중하게 행동한 고기현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는 아삼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있는 곳을 주시하는 듯한 낯선 기척을 느낀 아삼이 마음을 굳혔다.

    그간 빠르게 첩형까지 올라선 아삼을 몰래 주시하는 시선이 많아졌다. 그 사실을 알고도 일부러 대처하지 않고 놔둔 아삼이었다. 그 사이에 끼어있는 익숙한 기운은 황제의 근처에 있던 기운과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일부러 모른척하는 아삼이었지만 지금 고기현과 함께 나타난 기척을 그냥 둘 마음은 없었다.

    '운신을 자유롭게 만들려면 껄끄러운 자들은 내가 처리해 주는 것이 좋겠지. 다른 자들에 대한 경고도 보낼 겸.'

    - 기다리고 있어라.

    세 사람에게 전심어서를 보낸 아삼이 자리를 벗어났다. 순식간에 사라진 그의 모습에 모두가 놀라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고 살짝 열린 문을 보며 급히 기척을 살폈다.

    살수지무의 공능으로 주변의 기척을 살핀 아삼이 낯선 기운을 찾아내며 무영보법을 밟아갔다. 짧은 순간에 방을 나선 그가 한쪽 담 아래에 숨어서 자신의 방을 주시하던 자를 찾아냈고 빠르게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바로 눈앞에 아삼이 나타날 때까지 그 기척을 느끼지 못한 낯선 자가 목을 조이는 악력에 놀란 눈으로 앞을 바라봤다.

    "처…… 첩형. 끄으윽!"

    졸린 목 사이로 간신히 말을 내뱉는 낯선 자였고 그 모습을 확인한 아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손에 잡혀서 들린 자의 모습은 동창에서 몇 번 본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법 기운이 큰 그가 아무런 뒷배도 없다는 사실에 송상호의 입에서 접촉을 하자는 말이 나왔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손에 잡힌 것으로 봐서 금무정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미 많은 놈들이 금무정의 사람으로 굳혀진 것인가?'

    생각을 마친 그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를 노려봤다. 주변에 있는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는 것이 느껴졌고 몇몇 기운이 동요하는 것을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은 그가 터질 듯 붉어진 얼굴로 바둥거리는 자를 바라봤다.

    "끄으윽!"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던 그자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는지 아삼을 향해 기운을 실은 주먹을 뻗었고 가볍게 그 공격을 막아낸 아삼이 붙잡은 손에 내력을 더했다.

    금세 축 늘어지는 그 몸과 함께 주변을 한 번 둘러보던 아삼이 손을 털며 다시 안으로 들어섰다. 대범한 그의 행동에 주변에서 느껴지는 기운들이 순식간에 물러서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

    - 이제 너에게 붙는 놈이 더욱 신중해지거나, 없어질 것이다. 네 뜻이 확고하다면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굳이 위험한 일을 자초할 필요는 없다.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다.

    - 명심하겠습니다.

    자신을 염려하는 아삼의 뜻을 이해한 듯 고개를 숙이며 읍을 하는 고기현이었고 그런 고기현의 행동에 의아함을 보이는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둘에게 굳이 말을 해줄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아삼이었다. 그저 남은 일들을 마저 논의하고 그렇게 그들을 내보낸 아삼이었다.

    '정화 태감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보이는 것인가? 금무정…… 귀찮은 일을 만드는군.'

    다시 자신의 방으로 들어서는 고기현의 얼굴에도 만족한 듯 미소가 흘렀다. 아무래도 아삼을 택한 자신의 선택이 옮았다 생각하는 그였다.

    '이제 시작인 것인가? 안간힘을 써봐도 이상하다는 것만 눈치챈 나인데…… 역시 첩형이신가? 앞으로 더 조심해야겠구나.'

    새삼 아삼의 무공과 그 마음 씀씀이에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느낀 고기현이었다.

    ***

    다급한 얼굴로 금무정의 처소에 들어선 당두 고천홍이 금무정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예를 올렸다.

    "무슨 일인가?"

    "고기현을 감시하던…… 명운정이 죽었습니다."

    "…… 죽다니?"

    "갑자기 처소에서 뛰쳐나온 첩형이 그의 목을 부러뜨려서…… 죽였다고 합니다."

    "……."

    고천홍의 말에 금무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제법 요긴하게 쓸 생각이었던 자였다. 그렇게 허무하게 죽었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대범하게 그를 처리한 아삼의 행동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고기현을 감시하라고 붙였는데…… 첩형에게 죽임을 당한 것으로 봐서, 그 눈을 속이지 못한 것 같습니다."

    "…… 예사 놈은 아니었다. 괜히 첩형의 자리에 올라선 것이 아니겠지. 생각지도 못한 일에 아까운 인재가 죽었구나. 그래. 고기현 그자는 뭐라고 하더냐?"

    "간단하게 그곳에 있었던 일을 보고했고, 갑자기 뛰쳐나간 첩형이 그자를 죽이고 다시 들어왔다고 합니다. 자신을 의심할 수도 있다고 말을 전하는데……"

    "흐음. 그놈이 아삼에게 밝히지 않은 것인가?"

    "정황상으로 그런 낌새는 느껴지지 않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

    "…… 우선 그놈에게 사람을 붙이지 말거라. 우리가 믿고 있다는 것처럼 보여도 좋을 테지."

    "허면……"

    "언젠가 써먹을 날이 오겠지. 내 말 한마디에 주인을 바꿀 놈은 아닐 것이다. 그 상황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만…… 결국 아삼이라는 놈의 세를 줄일 수 있을 것이 아니더냐?"

    "……."

    금무정의 말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고천홍이었다. 앞에 있는 금무정이 괜히 첩형이라는 직위에 앉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자신이 모시는 사람에게 절로 고개를 숙이는 그였다.

    ***

    다시 들어선 고천홍의 얼굴이 한껏 상기된 모습을 보였다. 그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 금무정이었고 그런 금무정을 향해 황급히 답하는 고천홍이었다.

    "첩형,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혹 송숭이라는 자를 기억하십니까?"

    "좋은 소식? 송숭?"

    좋은 소식이라는 말에 얼굴을 활짝 피면서도 이어지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금무정이었다.

    "예. 바로 한왕의 책사였던 자입니다. 그때 황제 폐하의 황군과 일전을 벌였을 때, 먼저 도망간 놈이지요. 헌데 그 놈이 한왕의 복귀를 꿈꾸며 병력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정황을 포착했습니다."

    "뭐라? 지금 그놈은 어디에 있는 것이냐?"

    제법 놀랐는지 큰 소리로 되묻는 금무정이었고 그런 금무정을 향해 답을 하는 고천홍이었다.

    "북경과 멀지 않는 산서성에는 오대산이라고 불리는 산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은밀히 남은 병력들을 끌어 모으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지금 바로 사람을 보낼까요? 이번 기회를 잘 살린다면 큰 공을 세울 수 있을 듯 한데……"

    금무정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을 잇는 고천홍이었고 그의 말을 천천히 곱씹으며 생각에 잠기는 금무정이었다. 이내 한참을 고심하던 금무정이 비장한 얼굴로 입을 뗐다.

    "그래. 그 말대로 이번 기회를 잘 살린다면 공도 세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눈엣가시를 잡을 수도 있겠구나."

    "눈엣가시라면? 혹시……"

    "오대산으로 아삼을 보낸다!"

    고개를 끄덕이며 단호한 얼굴로 말하는 금무정이었고 그런 금무정의 말에 놀란 고천홍이 두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아삼을 보낸다니요? 첩형의 뜻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혹여 그놈이 송숭 그자를 잡는다면 그때는…… 일전에 한왕의 역모에서도 큰 공을 세운 자입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으나 그놈의 능력이 뛰어나지 않습니까?"

    행여라도 아삼이 송숭이라는 놈을 잡아들일 수도 있음을 걱정하는 고천홍이었지만 그런 그를 바라보며 비릿한 미소를 짓는 금무정이었다.

    "걱정 말거라. 그놈이 공을 세울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아직까지 동창에서의 영향력은 내가 더 크지 않느냐? 같은 첩형이라고는 하나 내 뜻을 거역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송숭이라는 자가 있는 오대산에는 소수의 인원만 보낼 것이다. 단, 아삼 쪽 인사는 없어야 하겠지. 행여라도 성공한다면 그 공은 나누면 될 것이고, 만일 실패하거나 다친다고 해도 우리 쪽에 손해는 없지 않겠느냐?"

    그제야 이해가 간 듯 고개를 끄덕이는 고천홍이었고 그런 그를 향해 계속해서 말을 잇는 금무정이었다.

    "그리고 아삼이라는 놈과 함께하는 인사들도 쓸모없는 곁가지들로 꾸려야겠지. 그래야 아삼에게 도움이 안 되지 않겠느냐? 그렇게 되면 아삼 그놈 혼자서 고군분투할 것이고 제 아무리 무공이 뛰어난 놈이라고는 하나 혼자서 어찌하겠느냐? 그것은 나라도 힘이 들 것이다."

    "…….“

    "하하하하."

    생각만으로도 즐거운지 박장대소를 터트리는 금무정이었다. 아직 제대로 아삼의 무공을 확인해보지 못한 금무정이었다. 아니 정화조차도 아삼의 무공을 확실히 모르고 있었고 아삼 스스로도 일부러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자신의 계책에 자신만만해 하는 그였다.

    "하오면…… 송숭 그자에게 미리 언질을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웃고 있는 금무정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의견을 말하는 고천홍이었고 그 말에 구미가 당긴 듯 금무정이 되물었다.

    "언질을 주다니?"

    "아무래도 준비를 하고 맞이한다면 아삼 그자가 상대하기 더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첩형의 계책이 더 빛을 발할 것입니다."

    고천홍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는 금무정이었다. 이내 두 눈을 빛낸 금무정이 고천홍을 향해 은밀히 속삭였다.

    "그래. 그게 좋겠군. 네 생각대로 진행시키거라. 송숭 그자에게 곧 동창이 들이닥친다고 알려라. 나는 아삼 그자를 끌어들이겠다. 이만 나가보거라."

    금무정의 하명에 고개를 숙이며 읍을 하는 고천홍이었다. 이내 처소를 나서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금무정의 얼굴에 싸늘한 미소가 흘렀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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