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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제
주고희의 일과에 맞춰서 하루를 시작하는 아삼이었다. 일어나서 하는 일이라고는 주고희의 곁에서 따뜻한 차를 올리거나 시간에 맞춰서 주전부리로 먹을 것을 준비하는 등 시중을 드는 그런 소소한 일들이었다. 그도 아니면 시중드는 환관들 틈에 끼어서 주고희의 곁에 서있는 일이 전부였다.
언제까지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정화의 명에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그 일을 이어가는 아삼이었다.
"마마, 왕진 들었사옵니다."
"들라 하라."
종종걸음으로 전각으로 들어서는 왕진의 모습에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지는 아삼이었다. 자신이 주고희의 곁을 지키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그를 알현하는 왕진이었고 그런 왕진의 얼굴에는 오늘도 천박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마마, 오늘은 소신이 마마께 재미있는 것을 진상하기 위해서 이렇게 찾아뵈었사옵니다."
"재미있는 것? 그래, 그것이 무엇이냐?"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왕진을 바라보며 하문하는 주고희였고 그런 주고희의 앞에 작은 상자 하나를 내밀며 답하는 왕진이었다.
"마마, 투실이라고 들어보셨사옵니까?"
"투실?"
"예, 마마. 이것이 투실이라는 것이온데 이렇게 귀뚜라미 두 마리를 작은 상자 안에 넣고 싸움을 시키는 것이옵니다. 한번 해 보시면 그 재미를 아시게 되실 것이옵니다."
말을 마친 왕진이 직접 투실을 시작했고 이내 호기심이 동한 주고희가 고개를 내밀며 상자 안을 들여다보았다. 왕진이 귀뚜라미의 뒷부분을 붓끝으로 살살 건드리며 싸움을 붙이자 서로를 향해 맹렬히 달려드는 귀뚜라미였고 그 모습에 주고희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어허허. 고놈들 참, 잘도 싸우는 구나."
그 모습이 재미있는지 얼굴 가득 미소를 짓는 주고희였다. 그리고 그런 주고희의 모습에 왕진의 입가에도 엷은 미소가 걸렸다. 이내 두 손을 비벼대며 주고희를 향해 아부를 하는 왕진이었다.
"마마, 이 놈들도 자리를 알아보는 것 같사옵니다. 마마를 알아보고 잘 보이기 위해서 이렇게 맹렬히 싸우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계속해서 주고희의 기분을 맞추는 그 모습에 멀리서 지켜보는 아삼의 미간이 잔뜩 일그러졌다. 간신의 모습이 있다면 바로 왕진의 모습과 같지 않을까 생각하는 아삼이었다.
"마마, 즐거워하시는 마마를 뵈오니, 시 한 수가 떠오르는데 한 번 봐주시겠사옵니까?"
"허허, 자네의 글을 볼 기회를 내 어찌 마다하겠는가?"
왕진의 제안에 흔쾌히 허락하는 주고희였다. 그런 주고희를 향해 고개를 숙여 예를 올린 왕진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붓을 들며 한 자 한 자 시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곧 글을 마친 왕진이 주고희를 향해 공손히 종이를 올렸다.
"좋군. 역시 자네의 글은 언제 보아도 좋아."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주고희였고 그 모습에 왕진의 얼굴에도 엷은 미소가 지어졌다. 이내 자만심 가득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는 왕진이었고 애써 그 눈빛을 외면하는 아삼이었다.
"이 글을 보니 생각나는구나. 아삼아, 오랜만에 네 글도 보고 싶구나. 한 자 적어주겠느냐?"
주고희의 요청에 아삼이 고개를 숙이며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지필묵이 놓여있는 탁자로 다가가서 붓을 들어 한 자 한 자 정성을 다해 쓰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기척에 못마땅한 듯 자신을 노려보는 왕진의 시선이 잡혔다.
"황제 폐하, 납시오."
갑작스런 환관의 외침과 함께 주고희와 왕진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내 채 준비를 하기도 전에 들어서는 황제의 행동에 기겁한 두 사람이 고개를 숙였고 뒤늦게 황제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아삼이었다.
"폐하! 폐하께서 이 누추한 곳까지 어인 일이시옵니까?"
상석으로 선덕제를 모시며 주고희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고 그런 주고희를 자신의 곁에 앉히며 선덕제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급작스레 황위를 잇느라 그간 황숙께 안부를 묻지 못했습니다. 저의 불효를 용서해 주십시오."
"불효하라니요? 어찌……"
황망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는 주고희였고 그런 주고희를 향해 나직이 말을 잇는 선덕제였다.
"아닙니다. 응당 이 황실의 어른이신 황숙께 인사를 올렸어야 했습니다. 앞으로도 잘 이끌어 주십시오. 그나저나 아삼이 붓을 들고 있는 것을 보니 제가 황숙의 즐거움을 뺏은 듯 싶습니다."
"아니옵니다. 이제 막 시작하려던 참이었사옵니다. 허면 폐하께서도 그 즐거움을 함께 하시겠사옵니까?"
"하하하, 그 즐거움을 어찌 마다하겠습니까? 응당 저도 함께 나눠야지요."
호탕하게 웃는 선덕제의 모습에 주고희가 아삼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고개를 숙인 아삼이 다시 붓을 들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행동도 오래가지 못 했다. 황제가 나타나고부터 이상한 기운이 그의 기감에 잡혔기 때문이다.
'이 은밀한 기운은……'
글을 써 내려가던 아삼이 순간 멈칫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살수지무를 통해서 묘하게 신경을 거슬리게 만드는 그 기운을 감지해냈기 때문이다. 왕진의 못마땅한 시선 너머로 무언가가 느껴졌고 슬쩍 그곳에 정신을 집중하던 그때, 느껴졌던 기운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달은 아삼은 마저 글을 써내려가면서 황제의 주위로 촉각을 곤두세웠다.
'이상하다. 황제가 왔을 때부터 흐릿하게 느껴지던 이 기운은…… 엄청난 고수가 의도적으로 자신의 기운을 숨긴 것이거나…… 아! 설마?'
글을 적으면서 고심하던 아삼의 뇌리에 정화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검교'의 고수라는 말을 떠올린 아삼은 그들이 황제의 곁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살수지무로 타인의 기운을 확실하게 읽어낼 수 있는 아삼이었다. 그런 아삼의 이목을 속이면서 황제의 곁을 지키는 그들의 모습에 새삼 황궁이라는 곳을 왜 구중궁궐이라 부르는 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겹겹이 쌓인 문처럼 그 끝을 알 수 없는 곳이 바로 황궁이었다.
'조금 느꼈다 싶으면 곧 사라지니…… 황제의 곁이 안전하다고 하는 이유가 이런 것이었나?'
선덕제를 향해 종이를 올리며 의아한 눈빛으로 황제의 주변을 살피는 아삼이었고 이내 시선을 거둬들였다. 뭔지 모르겠지만 황제의 주변을 지키는 듯한 미세한 움직임에 자신이 관여해서는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아삼의 움직임에 황제의 곁을 지키던 기운이 크게 출렁거렸다. 그리고 확실히 그 존재를 파악한 아삼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하하, 역시 명필이구나. 명필이야. 정갈한 듯 하면서도 한 획 한 획 힘이 느껴지는 것이…… 어째 네 글 솜씨는 더 느는 것 같구나."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아삼을 바라보는 선덕제였고 그런 선덕제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예를 올리는 아삼이었다.
'복잡했던 심경이 조금 풀리는 것이 글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인가?'
드러나는 음기로 곤혹을 치른 아삼이었고 한 단계 성장한 그의 경지와 함께 지금 쓰인 필체도 더 좋아졌다는 생각을 갖게 된 그였다.
아삼의 글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선덕제였고 그 모습에 왕진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갔다. 이내 날선 눈빛으로 아삼을 노려보는 왕진이었지만 환관의 투기에 마음을 쓸 아삼이 아니었다.
"황숙 덕분에 제 눈이 아주 즐거웠습니다. 허면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앞장 서 나가는 선덕제였고 그런 선덕제를 배웅하는 주고희였다. 그리고 그런 주고희의 뒤를 다른 환관들과 함께 황급히 뒤따르는 아삼이었다. 그렇게 주고희와 함께 선덕제를 배웅하던 아삼이 순간 느껴지는 이상한 기운에 바닥을 박찼다.
전각을 나서는 황제의 앞으로 아삼이 쏘아져나갔다. 순식간에 황제를 막아서는 그의 무례한 행동에 모두가 기함을 터뜨릴 때, 이미 그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야 할 궁녀가 달려들고 있었다.
뒤에서 느껴졌던 은밀한 기운이 이내 그 모습을 드러냈고, 그 모습을 확인한 아삼이 황제가 안전하다는 것을 깨닫고 궁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아삼의 모습에 날카로운 비수를 꺼내든 그 궁녀가 섬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시린 빛을 쏘아냈고 그 빛보다 더 빠른 손으로 비수를 든 손목을 후려친 아삼이 안으로 파고들며 장을 뻗었다.
'분뢰수.'
빠르게 틀어박힌 분뢰수가 비수를 꺼내든 흉수의 가슴에 틀어박혔고 커다란 파열음과 함께 피를 뿌리며 뒤로 날아가는 궁녀였다. 그 모습에 모두가 놀라워 할 때, 주변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다시 미간을 찌푸린 아삼이 궁녀가 놓친 비수를 쥔 채 황제를 향해 뛰어들었다.
"무슨 짓이냐!"
갑자기 달려드는 아삼의 모습에 놀란 주고희가 고함을 질렀고 그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던 아삼이 들고 있는 비수를 뿌렸다.
시린 궤적을 그리며 날아든 비수가 허공에 박혔고 투명하던 그곳에서 붉은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투욱.
가슴에 비수를 박은 채 쓰러진 그 시신에 선덕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런 황제의 표정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동분서주하며 뛰어다니는 아삼이었다. 통제되는 내기와 함께 흐릿한 잔영을 남기는 그 모습에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황제였고, 아삼이 움직이는 곳마다 드러난 살수들의 모습에 용안을 찌푸렸다.
그 사이 황제의 곁에 나타난 자가 다시 모습을 감췄고, 그 모습을 확인한 아삼은 남은 기척을 찾아내며 그들을 제압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아삼이 다가서기도 전에 독단을 깨물며 자결하는 그들이었다.
뒤늦게 다가선 아삼이 그들의 혈을 짚으며 그 목숨을 살리려고 했지만 치명적인 독은 그들의 몸을 무너뜨리고 난 이후였다.
흉수를 막아서는 아삼의 모습에 황제가 그를 치하했다. 이내 그 흉수들을 밝히라는 엄명과 함께 나타난 금의위를 대동한 채 돌아서는 황제였고 황명을 받은 아삼의 눈이 빛났다.
황제의 앞에 자객이 나타났다는 소식에 사색이 된 팽문호가 급히 정화의 처소를 찾았다. 황궁의 안위를 책임지는 금의위인지라 그의 실책도 피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인학의 일로 풍전등화의 처지에 놓인 팽가라 어떻게든 이번 일의 진상을 밝혀 그 화를 피해가야만 했다.
"어서 고하거라."
다급한 마음에 환관을 재촉하는 팽문호였고 뭔가 급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환관이 낭창거리는 목소리로 고했다.
"공공, 동지 어르신 드셨습니다."
"뫼시거라."
잠시 후, 들려오는 정화의 목소리에 기다렸다는 듯 전각으로 들어서는 팽문호였고 그런 팽문호를 향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아삼이 무심한 듯 스쳐 지나갔다. 스쳐가는 아삼을 눈으로 좇던 팽문호의 얼굴에 진한 아쉬움이 가득 실렸다.
'차라리 명민이의 말대로 저 아이를 택했었다면…… 속을 알 수 없는 저 아이보다 야망을 보이던 그놈을 쉽게 다룰 수 있을 거라고 여겼건만……'
아쉬운 마음에 긴 한숨을 토해내는 팽문호였다. 하지만 조용히 고개를 저은 그가 정화를 향해 다가가 예를 표했다. 이제와 후회한들 소용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무슨 일로 나를 찾아오셨소?"
짐짓 모른 체 팽문호를 향해 묻는 정화였고 그런 정화를 향해 다급하게 답을 이어가는 팽문호였다.
"공공께서도 소식을 들어 아시겠지요? 폐하의 앞에 나타난 자객들을……"
"방금 나간 아이를 통해서 들었소. 폐하께서 진상을 밝히라 동창에 명했다하더이다."
정화의 말에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팽문호였고 그런 팽문호를 향해 근심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 정화였다.
"허나…… 동창에서도 고심이 많은 듯 하더이다. 아무런 표식도 남기지 않아 그 정체를 알 수 없으니…… 사용한 무공을 보아서는 무림의 살수집단인 듯 하나, 동지도 알다시피 제 아무리 고강한 무공을 가진 살수집단이라 하더라도 황궁을 이리 쉽게 드나들 수는 없지 않겠소? 아무래도 내부에서 동조한 이가 있는 듯 싶소만?"
정화의 말에 미간을 잔뜩 찌푸리는 팽문호였다. 아무래도 황궁의 수비를 담당하는 금의위인지라 금의위로 향하는 시선을 돌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응당 금의위의 한축을 이루고 있는 팽가 또한 그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황궁의 수비를 책임지고 있는 황군과 금의위는 이번 일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오. 하지만 혹여 이번 일에 팽 동지(同知)까지 엮인다면 그때는……"
"……."
"그래서 말인데 이번 일을 가영호라는 그자와 엮는 것은 어떻겠소? 그동안 그자가 한왕과 은밀히 내통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하더이다. 실상, 그 사실은 금의위에서도 잘 알고 있지 않소?"
정화의 제안에 팽문호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하지만 이내 심각한 얼굴로 고심하는 그였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시간을 주려는 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정화였다.
'가영호? …… 가영호라? 그 자가 이번 일로 내처진다면 그것은 우리 팽가를 위해서는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금의위의 세가 줄어드는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닌가? 그렇지 않아도 동창에 서서히 밀리고 있는 이때에 그 세가 줄어들면 다시 올라서기 쉽지 않을 터.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우리 팽가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인가? 우선은…… 우리 팽가의 안전부터 도모하고 볼 일이다.'
결심을 굳힌 듯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팽문호였다. 아무래도 금의위보다는 가문인 팽가의 이름이 더 무겁게 다가오는 그였고 그런 그의 모습에 만족한 듯 엷은 미소를 짓는 정화였다.
'이것으로 아삼과 팽가와의 약조가 지켜진 것인가? 그 아이에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군……'
어쩔 수 없이 아삼을 주고희에게 보냈었던 정화였지만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이것으로 아삼에 대한 마음의 짐을 놓으려는 듯 아삼을 배려하는 정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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