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126화 (126/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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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초경사(打草驚蛇)

    잡티하나 없는 새하얀 백마 위에 하얀색 비단옷을 입은 사내를 필두로 검은 물결이 치듯 뒤에 수많은 인마가 늘어져 있었다.

    새하얀 비단에 황금빛 자수가 놓인 옷과 함께 검은 관모를 쓴 금무정이 검은 휘장을 휘날리며 앞장서며 말을 몰고 있었고, 아삼을 포함한 당두들이 그 뒤를 따랐다. 검은색 목면으로 통일 된 그들의 복장은 멀리서 보면 마치 검은 바람이 휘날리는 듯했고 모두의 눈에는 황명을 수행한다는 자부심이 가득 찼다.

    요란한 말굽소리와 함께 일사불란한 움직임은 보는 이로 하여금 숨을 멎게 만드는 기백이 넘쳐흘렀고 위엄가득한 동창의 모습에 모두가 길을 비키며 고개를 조아렸다. 그런 사람들의 눈에는 경외심과 함께 두려움이 가득했다.

    한낱 관리를 잡아들이기 위해 나서는 모습 치고는 조금 과한 면이 있었다. 비록 그 관리가 황궁이 있는 곳의 안위를 담당하는 자들 중로 하나로 그 위치가 중요했지만 그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첩형까지 나서지 않아도 될 일이었지만 일부러 보란 듯이 위세를 과시하는 그들이었고 이것으로 한왕에게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암묵적인 경고를 보내는 정화와 황제의 의중이었다.

    북경의 외곽을 향해 일사불란하게 다가오는 동창의 모습에 성루에서 그들을 발견한 수비군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어렸다. 조용히 그들을 주시하던 수비군 중 하나가 급히 어딘가로 뛰어갔고 이내 붉은 갑옷을 입은 사내가 다가오는 동창의 앞을 막아서며 소리쳤다.

    "멈추시오."

    "황명이다. 어서 길을 비켜라!"

    "…… 이곳은……"

    채 말을 잇지 못하고 비장한 얼굴로 막아서는 장수를 바라보던 금무정이 옆에 선 아삼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그 눈빛을 받은 아삼이 말에서 뛰어내리며 여타부타 말도 없이 사내를 향해 달려들었다.

    단숨에 좁혀진 거리와 함께 시린 빛이 번뜩였다.

    '낙화검.'

    순간 보인 섬광과 함께 그들을 막아서던 갑주를 입은 무장의 목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고 그 모습에 놀란 그들이 부랴부랴 길을 비켜섰다. 그리고 하얀 말 위에서 아무런 말도 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던 금무정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손속이 과하지 않은가? 그래도 우리 명의 장수이거늘…… 일부러 이런 분위기를 만드는 것인가? 흐음……'

    일부러 과한 손속을 보이는 아삼의 의중이 읽혀졌다. 황명과 함께 이번 일의 중함을 보이려는 그 모습은 따로 정화에게 언질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아삼 스스로 생각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중요한 것은 별다른 말도 없이 막아선 장수의 목을 베었다는 점이었다.

    파격적인 그의 행동이 순식간에 주변의 수비군들을 압도했고, 그들의 앞을 막아서던 그들이 놀란 모습을 보이며 길을 비켜섰다. 그리고 금무정이 위엄 가득한 목소리로 말 위에서 소리를 질렀다.

    "황명이라 하지 않더냐! 누구든 황명을 어기는 자는 용서치 않을 것이다!"

    위엄 가득한 그 목소리에 비켜서던 이들이 고개를 숙이며 부복을 했고 다시 검은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저 용무를 밝히고 도지휘첨사 임성화를 잡아들이면 그만인 일이었다. 하지만 일부러 일을 키워서 관인들이나 금의위에게 확실히 그들의 존재를 드높이고 각인시키려는 동창이었다.

    군이 주둔해 있는 성 안으로 들어선 그들을 도열해 있는 수비군들이 맞았다. 그 가운데 갑주를 입고 앉아있는 도지휘사 계명선이 자리에 일어나서 황제의 칙서를 향해 절을 올리며 예를 갖췄다. 그 뒤를 따라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북경의 수비군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확인한 금무정이 그들 사이에 섞여있는 임성화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죄인을 어서 꿇리지 않고."

    금무정의 호통에 동창요원들이 재빨리 임성화를 향해 다가갔다. 다가오는 그들의 모습에 무장을 한 수비군들의 몸이 움찔거렸지만 계명선의 눈짓과 다른 세 명의 도휘지첨사들의 만류에 모두가 움직임을 멈췄다. 다만 비통한 눈빛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고 끌려 나간 임성화가 금무정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저 놈의 갑주를 벗기고 무기를 회수하라."

    금무정의 명에 임성화의 옆에 선 동창요원들이 거칠게 임성화의 갑옷을 벗겨내기 시작했고 이내 하얀 목면만 입은 임성화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금무정을 바라봤다. 그런 임성화의 표정에 씁쓸해하던 그가 이내 표정을 지우고 칙서를 펼치며 그 내용을 읽었다.

    "짐이 그간 선정(善政)을 베풀 수 있었던 것은 청렴한 문무백관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짐을 보필해주었기 때문이다. 하여 늘 그대들에게 고마움을 가지고 있었던 바, 작금에 또다시 탐관오리들이 날뛰고 있다는 보고에 통탄을 금치 못하겠구나. 일어혼전천(一魚混全川)이라 했으니 이 명나라가 탐관오리로 물들기 전에 그 탐관오리를 색출해 일벌백계(一罰百戒)로 삼고자 한다. 도지휘첨사 임성화는 북경의 수비를 책임지는 자로 응당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 신명을 다해야하거늘 평소 백성들의 안위보다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매관매직을 일삼은 바, 금일 부로 그 관직을 박탁하고……"

    위엄 가득한 목소리로 칙서를 읽어가는 금무정이었지만 그 뒤에 시립해 있던 동창 중 한 명은 간신히 감정을 억누르면서 임성화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드디어 그 날이 왔다는 듯 떨리는 주먹을 꽉 쥐면서 임성화를 노려보던 그 사람은 바로 인학이었다.

    '이놈! 결국에는 그 자리에서 내려왔구나.'

    인학의 두 눈이 허탈해 하는 임성화의 얼굴을 좇았다. 모든 것을 다 잃은 듯한 그 모습은 마치 자신은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비춰졌고, 그 얼굴이 가증스럽다고 생각한 인학이 순간을 참지 못하고 살기를 뿜어냈다.

    뒤에서 느껴지는 그 살기에 앞에 있던 아삼이 뒤를 돌아봤고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인학이 급히 감정을 추스리며 고개를 숙였다.

    '이제 네놈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없어졌다. 네놈 스스로가 차버린 그 자리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곧 알게 될 것이야.'

    그렇게 노려보는 인학의 시선을 모르는지 이미 체념한 듯 힘없이 앉아있는 임성화의 얼굴에 자조의 빛이 어렸다.

    '매관매직이라…… 역모로 엮이지 않음이 다행인 것인가? 하긴 황제의 혈육과 관련된 일이니…… 이쯤에서 덮겠다는 뜻인가?'

    황명을 듣는 임성화의 입가에 쓰디쓴 미소가 걸렸다. 아우를 생각하는 홍희제의 우애가 존경스러우면서도 그 우매한 믿음에 실소가 흘러나오는 그였다. 이일로 한왕의 역모는 늦추어지겠지만 그렇다고 그가 쉽게 포기하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을 잘 아는 임성화였다.

    체념한 듯 힘없이 앉아있는 임성화를 바라보는 인학의 두 눈에 다시 살기가 어렸다. 하지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는 인학이었고 임성화를 향해 시선을 고정시킨 채 굳게 다문 입술을 깨물며 고심하기 시작했다.

    '네놈을 시작으로 다른 자들도 하나 둘씩, 고통 속에서 사라져 갈 것이다. 자궁(自宮)을 택하고 궁에 들어온 목적을…… 이제서야 이룰 수 있겠구나.'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임성화를 노려보는 인학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차가운 그 웃음과 함께 이상함을 느낀 임성화가 주변을 둘러봤지만 어느새 표정을 지우고 고개를 숙이는 인학이었다. 그 동안 복수를 하기 위해서 위로 올라서려고 그렇게 노력했던 그였지만 한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오히려 권력과 더 멀어지게 되었다.

    '어차피 팽가의 신뢰도 잃은 마당에 고작 잘해봐야, 당두까지가 내 한계일 것이다. 이 이상 올라서는 것은 힘들 것이야. 그렇다고 팽가 말고 다른 뒷배가 있는 것도 아니니…… 차라리 지방으로 내려가서 힘을 키우는 것도 그렇게 나쁜 선택은 아니겠지.'

    어느새 질질 끌려가는 임성화를 노려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인학이었다. 지금의 결정이 자신에게는 최선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

    정화의 처소로 들어선 아삼이 코끝 가득 들어오는 알싸한 향기에 정신을 일깨웠다. 차를 우리고 있는 정화를 향해 예를 올리는 아삼이 기품이 느껴지는 정화의 모습을 바라봤다.

    - 부르셨습니까?

    그런 아삼에게 자리를 권하며 찻잔을 건넨 정화가 우려낸 차를 따르며 따뜻한 미소로 화답했다.

    "그래. 이번 일도 잘 해냈더구나. 수고가 많았다."

    - 아닙니다. 응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전심어서의 사용이 더 이상 어색하지 않구나. 그래 언제까지 그것을 숨길 생각이냐?"

    "……."

    "그저 궁금했을 뿐이다. 답답함이 클 것 같은데, 그래도 드러내지 않은 것을 보면…… 그게 더 익숙하다는 뜻이겠지?"

    아무런 말없이 고개를 숙이는 아삼을 바라보며, 웃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정화가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서 아삼을 향해 내밀었다.

    "내 너에게 이것을 주고자 부른 것이다. 받아 두거라."

    정화가 내민 것을 받아든 아삼이 조심스럽게 그것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한 그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일전에 임성화의 장원에서 가져온 그 전표 몇 장이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낙양 상단의 전표가 아닌가? 왜? 이것을…… 나에게 이것을 주는 이유가 뭐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정화를 바라보는 아삼이었고 그런 아삼의 모습에 엷은 미소를 지어보이던 정화가 입을 열었다.

    "아삼아, 권력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사람이냐? 아니면 돈이냐?"

    정화의 뜬금없는 하문에 그의 의중을 알 수 없는 아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정화를 바라봤고 아무런 말이 없는 아삼의 모습에 씁쓸하게 웃던 그가 어느새 진지해진 눈빛으로 나직이 말했다.

    "권력을 얻기 위해서는 믿을 만한 인사를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믿고 부릴 수 있는 수하를 얻는다면 천군만마(千軍萬馬)를 얻은 듯 든든할 것이다. 허나, 사람만으로 일을 도모할 수는 없다. 이제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더냐? 무릇 권력을 얻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고, 권력을 얻어낸다면 저절로 돈이 따르게 되어 있다. 그래서 임성화 역시 그 자리를 물러나게 된 것이 아니겠느냐?"

    정화의 말이 옳다고 여긴 아삼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그런 아삼을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어가는 정화였다.

    "온전히 내어주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정직한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가끔은 요령을 피울 필요도 있다. 특히, 이 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의 이득도 취할 줄 알아야 하느니라."

    "……."

    정화의 가르침에 고개를 숙이는 아삼이었고 그런 아삼을 향해 미소를 보이는 정화였다.

    "받아 두거라.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일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전표를 챙기라는 정화의 말에 고마움을 느끼는 아삼이었지만 한편으로 불편한 마음이 크게 들었다. 마지막에 덧붙인 그 말에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확실히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절로 미간이 찌푸려지는 그였지만 그 표정을 숨기며 고개를 조아리는 아삼이었다.

    - 송구합니다.

    "되었다. 오랜만에 차나 함께 하자꾸나."

    고개를 숙이는 아삼을 향해 정화가 따뜻한 미소를 건네며 말했다. 그런 정화를 향해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인 아삼이 전표를 갈무리하며 그와의 대화를 이어갔다.

    "그래. 무공은 어떻더냐? 금무정이 평하는 걸로 봐서는 이미 경시할 수준이 아니라고 하던데……"

    - 공공께서 주신 분뢰공의 수련은 아직까지 그 끝이 어딘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을 제외한 다른 무공은 그저 우연찮게 얻은 것들뿐이라 드러내기가 부끄러운 것들 입니다.

    "허허허. 그랬더냐? 그렇다면 그런 무공으로 금무정을 놀라게 만든 네 재질이 보통이 아니라는 말에 되겠구나?"

    - …… 송구합니다. 소인의 뜻은 그것이 아니오라……

    "허허허. 농이다. 농이야. 나조차 분뢰공의 끝을 보지 못했음이다. 조급함을 가지는 것만큼 독이 되는 것은 없다. 다른 무공이라…… 하긴 너에게 분뢰공을 제외하고 건넨 무공이 없구나. 그건 한번 생각해 볼 문제다. 그건 그렇고……"

    - 하명…… 하십시오.

    말끝을 흐리는 정화의 행동에 무언가를 꺼려하는 듯한 느낌을 받은 아삼이 긴장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혹시나 자신에 대해서 더 알고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의 입을 주시하는 아삼이었고 진지한 그 눈빛에 웃음을 지어보이던 정화가 말을 이어갔다.

    "그렇게 진지할 필요는 없다. 흐음…… 요즘 들어 왕진이라는 환관이 황태자 마마의 곁을 지킨다고 하더구나. 다른 환관들은 그의 됨됨이를 칭찬하고 황태자 마마께서도 그의 학식과 언변에 흡족해 하시지만…… 능히 경계해야 할 놈이다."

    - 경계하라 하심은……

    "속에 구렁이를 감춘 놈이다. 관상으로 봐서는 나라를 말아먹을 흉상이다! 그자의 관상이 정확한지 그렇지 않은지는 알 수 없지만 지난 삶을 돌이켜 볼 때, 그런 자들의 처신은 그 끝이 좋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흉상?'

    "그런 그자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 너는 가진 재주가 많아 황태자 마마의 눈에 들기도 수월할 터. 가끔 너를 부르시거든 글을 적으며 왕진이라는 자를 잘 살펴보거라."

    - 명심하겠습니다.

    정화를 만나고 그의 처소를 나서는 아삼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궁에는 벽에도 눈과 귀가 있다고 하지만 자신의 일을 모두 알고 있는 정화의 능력에 간담이 서늘해지는 아삼이었다. 이내 정화가 마지막에 건넨 말을 떠올린 아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왕진이라는 자를 경계하라는 그 말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가까이에서 정화를 봐왔던 아삼이었다. 여간해서는 정화가 그런 말을 꺼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만큼 중요한 인물이던가?'

    정화가 따로 언급할 정도라면 보통 인사는 아닐 거라고 판단한 그가 '왕진'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며 걸음을 옮겼다.

    '앞으로 더 조심해야겠다. 차라리 정화 태감에게 모든 것을 다 밝힌다면……?'

    확신이 들지 않았다. 이내 떠오른 생각을 떨쳐내려는 듯 고개를 가로젓는 아삼이었다. 품에 넣어둔 전표를 쓰다듬으며 부족한 자금을 채웠다는 생각에 미소를 짓던 그가 따로 한 장을 떼어냈다.

    '일부는 화산으로 보내는 것이 좋겠어.'

    동생들을 떠올리며 품속에 전표를 갈무리한 아삼이 재빠른 걸음으로 전소평의 처소로 향했다.

    ============================ 작품 후기 ============================

    코멘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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