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104화 (104/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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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자의 부탁

    채 반 시진도 지나지 않아서 두 눈과 입이 가려진 채 버둥거리는 환관 하나를 어깨에 둘러 멘 사내가 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내 조심스레 주변을 살피던 그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다시 후미진 구석에 위치한 전각으로 들어선 그 사내는 어깨에 둘러 멘 환관을 바닥에 내팽개치며 정화를 향해 예를 올렸다. 곧 자신의 소임은 끝났다는 듯 다시 모습을 감춘 사내를 확인하고 정화가 아삼을 향해 말했다.

    "풀어주거라."

    정화의 하명에 아삼이 환관의 눈과 입을 가린 검은 천을 벗겨냈다. 어둠이 걷히고 다시 되찾은 시력과 함께 두 눈을 굴리며 주변을 살피는 환관이었고 이내 앞에 선 아삼을 발견한 그가 매섭게 소리쳤다.

    "네 이놈, 네 놈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 줄 아느냐?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런 요망한 짓거리를 하는 것이냐? 황자마마께서 조금 아끼신다고 눈에 뵈는 게 없는 것이냐? 내 네 놈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어서 이것을 풀지……"

    아삼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호통을 내지르는 곽건이라는 환관이었다. 황궁에서 잔뼈가 굳은 그였다. 비록 동창이라고는 하나 자신을 이렇게 잡아오는 것은 신중을 기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정화의 후광이 있다는 놈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그런 점은 그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황당한 짓을 벌인 아삼이라는 놈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그였지만 이어지는 낯선 목소리에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네 놈이야말로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것이냐? 네놈 눈에는 저 아이는 보이고 나는 보이지도 않는 것이냐?"

    위엄서린 목소리에 놀란 곽건이 아삼 옆에 드리워진 그림자로 시선을 돌렸다. 어두운 곳에 있던 정화의 모습을 확인한 그가 당황하며 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절로 떨려오는 몸과 함께 깊숙이 고개를 숙인 곽건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송구합니다. 공공. 소신이 미처 정 공공을 알아보지 못 하여……"

    "되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데리고 왔으니 당황할 만도 하겠지. 내 너에게 긴히 물을 게 있어서 이리 불렀다. 너는 그저 아는 대로 답하면 되는 일이다. 알아듣겠더냐?"

    "…… 예, 공공. 하문하십시오."

    두 손을 공손히 포개며 고개를 숙이는 곽건이었다. 그도 정화라는 그 이름을 잘 알고 있었다. 황궁에서 실질적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환관. 장인태감이나 황후의 측근인 부례감이 있었지만 그들은 감히 정화라는 이름과 함께 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소인은 곽건이라고 합니다. 공공."

    "그래 곽태감, 네가 황자마마를 옆에서 보필하고 있다 들었다. 맞느냐?"

    "예, 공공. 소신은 황자마마의 수족과 다름없습니다. 모신 지 오래되어 황자마마의 눈빛만 봐도 황자마마의 의중을 다 알 정도입니다. 그런 저를 황자마마께서도 기특히 여겨 잘 봐주고 계시옵니다."

    마치 아삼과 정화에게 자신의 위치를 확인시켜주려는 듯, 한 자 한 자 강조하며 답을 하는 곽건이었다. 그 얕은 수가 눈에 보이자 그의 말을 듣던 정화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어렸다. 하지만 이내 그 미소를 지운 정화가 곽건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 수족과 다름 없다라? 허면 황자마마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알고 있겠구나?"

    "소신이 황자마마의 곁을 늘 지키기 때문에 모두 알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황자마마를 모시는 환관 중에 저 만큼 황자마마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이도 드물 것입니다."

    주고희와의 친분을 내세워 우위를 점하려는 곽건이었다. 은연 중에 자신이 주고희에게 중요한 사람임을 각인시킨다면 제 아무리 정화라고 하더라도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잘만하면 지금 이 상황을 빠져나갈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비록 힘이 없는 황자라고 하지만 정이 많은 그가 자신을 쉽게 버릴 것 같지는 않았고, 넷째 황자가 아니더라도 더 든든한 뒷배가 자신의 뒤를 봐주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것에 눈 하나 꿈쩍할 정화가 아니었다. 짐짓 모른 체하며 의중을 감춘 정화가 재미있다는 듯이 그를 향해 되물었다.

    "그렇구나. 그렇다면 근래에 황자마마께서 꽤나 고심하고 계시는 일이 생겼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겠구나?"

    정화의 물음에 순간 곽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직감적으로 자신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 챌 수 있었고 그 눈동자를 놓치지 않던 정화의 눈이 빛났다.

    "근심……이라니요? 황자마마께서 근심하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소신은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제가 가까이서 뫼신다고 하나, 황자마마께서 그런 세세한 것들을 말씀하지 않으실 분은 아니십니다."

    "네 이놈, 방금 네 입으로 황자마마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 하지 않았더냐? 헌데 황자마마께 근심이 생긴 것을 모른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네 말대로 황자마마를 모신 지 그렇게 오래되었다면 황자마마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을!"

    "송구합니다. 공공. 그만큼 가까이서 황자마마를 뫼신다는 뜻이었습니다."

    호통을 치는 정화의 모습에 급히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는 곽건이었다. 이미 정화는 황자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무슨 일로 자신을 찾는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최대한 정화의 비위를 맞춰야 자신에게 해가 없을 거라는 생각을 가지는 곽건이었다.

    머리를 조아리는 곽건의 행동이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리던 정화가 다시 나직이 물었다.

    "며칠 전 황자마마께서 중요한 물건을 잃어버렸다고 들었다."

    “……."

    "그것에 대해서 아는 바가 있느냐?"

    "…… 소인은 그것을 잘…… 모릅니다. 요 근래에 안절부절 못 하신 것 같길래 여쭤보았지만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그것 때문에 요즘 황자마마께서 근심이 크시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걱정스럽다는 듯 말끝을 흐리는 곽건이었지만 그의 눈은 몰래 정화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당연히 정화가 그 눈빛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아삼 역시 그를 주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뭔가 이상함을 느꼈고 다시 정화가 입을 열었다.

    "황자마마의 수족이라 자청하던 네놈이 아니더냐? 그깟 일도 알지 못하는 놈이 황자마마를 모신다? 지금 나를 능멸하는 것이더냐?"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공공. 소인이 어찌……"

    "이미 모든 사실을 알고 너를 데리고 온 것이다. 좋게 말을 할 때, 실토를 한다면 별다른 일은 없을 것이다."

    "……."

    정화의 말을 듣던 곽건의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결국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그 사실을 밝힌다면 이미 죽은 목숨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받은 돈도 돈이거니와 황자들 사이에 끼어서 아슬아슬하게 줄을 탔던 그였기에 지금에 와서 실토를 할 수는 없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어차피 황자마마들께서 내 뒤에 있는 이상, 그렇게 위험한 일은 없을 터. 아무리 정화라고 하나 황손을 거스를 수는 없겠지.'

    이내 마음을 다잡은 곽건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을 이어갔다.

    "송구하오나 공공. 저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저 황자마마의 근심을 안타까워하는 것 뿐입니다. 제 소임을 다 할 수 없어 심히 안타깝지만 마마께서는 별다른 언질을 주지 않으시니 저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사옵니다."

    "흐음. 끝내 벌주를 마시겠다는 뜻이렷다?"

    "…… 공공. 억울하옵니다."

    "모두 네가 자초한 것이니 억울해 할 것은 없다."

    울상을 짓는 곽건의 표정은 정말 억울하다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이미 어느정도 확신을 갖은 두 사람이었다. 비급을 잃어버린 일이 가볍지 않았기 때문에 뒤에 황손이 있다 하더라도 꼭 알아내야만 했다. 그리고 그런 황손을 무서워 할 정화가 아니었다.

    "어떤 황자인지는 모르겠으나…… 네놈을 살리자고 치부를 드러내실 것 같더냐? 네놈도 오랜 시간 황궁에서 생활했다고 하니, 내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잘 알터. 너나 나 같은 환관은 그 처신을 똑바로 해야 오래 살아남는다. 너는 그것을 잊어버렸으니…… 그 죄를 지금 받는 것 뿐이다. 모두 네가 자초한 것이니 누구를 탓할 수도 없음이다."

    그의 행동에 쓴 웃음을 짓던 정화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면서 그곳을 벗어났다. 적막한 공간에 아삼과 곽건 두 사람만 남았고 멍한 표정으로 바닥을 바라보는 곽건의 모습에 아삼 역시 마음이 좋지만은 않았다.

    '미련한 인사. 허어. 내가 그렇게나 멍청했다니. ……스스로 똑똑하다 여겼거늘! 황자들 사이에서 줄을 타면서 이득을 취했던 나다. 그런 내가! 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숙지해야만 했던 그렇게 간단한 사실도 잊어버린 채 이런 꼴을 당하다니…… 어리석었다. 어리석었구나, 곽건아.'

    스스로 자책하는 곽건이었지만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어야 미련한 목숨이라도 살릴 수 있을 거라는 판단에 마음을 다잡았지만 앞에 있는 아삼의 눈빛에 헛바람을 삼킬 수 밖에 없었다.

    차가웠다.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는 그 눈빛은 이전에 자신이 알고 있던 그 아이인지 착각이 일 정도였다.

    '동창에 있다던가?'

    동창이라는 조직에 대해서 많은 소문을 접한 곽건이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앞에 있는 아이는 그저 어리고 과묵한 아이라고 생각을 하던 그였다. 벙어리라서 과묵한 것은 당연했지만 속으로 그를 불쌍하게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앞에 있는 아삼이라는 어린 환관은 더 이상 불쌍하지도, 어려보이지도 않았다. 단지 눈빛만 접한 상태였지만 절로 몸이 떨려오는 곽건이었다.

    "……."

    둘만 있는 공간에 싸늘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원래 벙어리였던 아삼은 앞에 있는 자의 모습을 그냥 바라만 보고 있었고, 곽건 역시 아무런 말도 없이 그의 눈치를 살필 수 밖에 없었다. 이내 그 적막을 깬 사람은 다름아닌 아삼이었다.

    겉으로 들리는 방안은 적막이 고요했지만 곽건의 마음 속에는 생각하기도 싫은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 이제 어쩔 수 없소.

    "……."

    - 당신은…… 이곳에서 살아나갈 수 없을 것이오.

    "그…… 그게 무슨 말이냐?"

    "……."

    아무런 말도 없는 아삼의 모습에 불안해하던 곽건이 주변을 둘러봤다. 어두운 공간에는 촛불만 일렁일 뿐이었고 주위에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앞에 있는 아삼이라는 환관만 자신을 싸늘하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살아나갈 수 없다? 허, 그걸 말해주면서 나에게 진실을 묻는단 말이냐?"

    - 당신은…… 여기에서 죽을 거요. 다만…… 고통을 느끼느냐, 아니면 그렇지 않느냐 이 둘의 차이요. 그리고……

    "그리고?"

    - 당신이 거둔, 혼인을 한 처와 양자들. 그리고…… 당신의 부모. 당신의 가문이 어떻게 될지는 당신의 행동으로 달라질 것이오."

    "…… 이런 지독한!"

    아삼의 전심어서에 그 뜻을 이해한 곽건이 경악하듯 말을 꺼냈지만 미간만 좁힐 뿐 별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는 아삼의 행동에 고개를 떨궈야만 했다.

    한참을 그렇게 깊게 생각하는 곽건이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정확하게 인지한 상태였고 자신의 행동이 그의 가족에게 어떤 식으로 돌아갈지 따져봤다. 이내 깊게 한숨을 내쉰 그가 아삼을 바라봤다.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눈빛이었지만 그 안에 얼핏 독기가 엿보이고 있었다.

    "내가 지금 그 사실을 밝힌다고 해서…… 내 가족들이 위험하지 않다는 것이냐?"

    "……."

    "너희…… 아니, 정 공공의 뜻이 그냥 두고 방관하는 것이라면 나는…… 나는 어떻게 하라는 소리냐? 그냥 손을 쓰지 않는 것으로 끝내는 것이더냐?"

    - 몰래 다른 곳에서 살 수 있게 조치를 취해 주겠소.

    "…… 고맙…… 고맙소."

    아삼의 마지막 말에 진심을 담아서 머리를 숙이는 곽건이었다. 이내 그의 입에서 비급의 행방과 그것을 보낸 황자의 정체를 들을 수 있었다. 마지막까지 가족을 부탁하는 그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던 아삼의 손이 그의 사혈을 눌렀다.

    마지막까지 애절한 그 눈빛을 접한 아삼의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가족을 생각했던 그 마음이 이전생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내 그곳을 나선 아삼이 정화의 거처를 향해 움직였다. 그의 뒤로 은밀하게 움직이는 기척을 느끼면서 씁쓸한 표정을 지어보이던 그가 정화의 방에 들어서면서 그가 말한 내용을 정화에게 알렸다.

    "흠, 예상했던 대로 조간왕이 넷째 황자를 노린 것이구나. 비급을 조간왕에게 보냈다하니 너는 서둘러 그 뒤를 쫓도록 하거라.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곧 따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정화의 하명에 아삼이 고개를 숙이며 읍을 했다. 이내 다급히 자리를 뜨려는 아삼을 붙잡은 정화가 그를 바라보며 당부를 건넸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비급은 꼭 찾아와야 한다. 규화보전이 적힌 비급이니 내 말하지 않아도 그 중함은 네가 잘 알 것이다. 그리고 이 자들과 함께 하거라. 아무래도 너 혼자보다는 나을 것이다."

    정화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주변에서 느껴졌던 은밀한 기척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슷한 기운을 풍기는 여럿이 검은 목면을 입은 채로 정화의 앞에 부복을 했고 그런 그들을 향해 아삼을 도우라 명을 내리는 정화였다. 이내 아삼과 그들이 급히 정화의 처소를 나섰다. 비급을 보낸 그들을 잡으려면 빨리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다.

    정훈이 가지고 있던 마지막 비급이었다. 원래 하나였던 비급이 찢겨져서 나뉘었고 그 남은 비급을 고심 끝에 무고로 가져가서 숨긴 정훈이었다. 무고 깊숙이 숨길 수 없었던 그인지라 그의 손이 닿을 수 있는, 평범하면서도 잘 찾지 않는 서책 안에 그것을 숨겨뒀는데 우연찮게 넷째 황자인 주고희의 손에 들어가면서 일이 벌어진 상황이었다.

    그 경위야 어찌되었건 중요한 것은 규화보전이 적힌 비급의 확보였다.

    오문을 지난 아삼과 사내들이 재빨리 말에 올라탔고 이내 말의 옆구리를 차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자욱한 먼지구름을 일으키면서 아삼과 검은 목면을 입은 사내들의 모습이 멀어졌고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낯선 자들이 그들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이내 그들 중 떨어져 나온 다른 무리가 또 다른 동료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고 그들의 동료로 보이는 자들이 아삼과 정화가 보낸 사람들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렇게 자욱한 먼지구름 사이로 붉은 면포를 입은 사내들이 모습을 보이며 아삼의 뒤를 쫓았다.

    ============================ 작품 후기 ============================

    코멘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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