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98화 (98/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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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긋남

    서늘한 감옥에 앉아서 마음을 다잡고 있는 정훈의 귀에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점점 가까워져오는 발소리에 정훈이 마른침을 삼키며 소리 나는 곳을 바라봤다. 어느새 빛을 가리며 서 있는 새까만 목면을 입은 동창 요원들이 정훈이 갇혀있는 문을 벌컥 열며 소리쳤다.

    "나와라."

    "무…… 무슨 일이오?"

    정훈이 짐짓 어리숙한 표정을 지으면서 되물었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표정을 드러낼 수는 없었기 때문에 최대한 표정을 감추는 정훈이었다.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움직여라. 어서 나오라고 하지 않더냐!"

    잔뜩 겁먹은 얼굴로 뒷걸음질 치는 정훈을 쏘아보며 동창요원이 소리쳤고 곧이어 정훈을 거칠게 끄집어내는 그들이었다.

    "어…… 어찌 이러시오? 지난번에 모두 다 말하지 않았소? 나는 그저 내 물건을 도둑맞은 것뿐이오."

    "그거야 더 심문해 보면 알겠지. 조용히 따르거라."

    억울하다는 듯 울부짖는 정훈을 향해 동창요원 하나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동창요원들의 손에 이끌려 질질 끌려가는 정훈의 얼굴에는 어느덧 두려움이 어렸다. 마음을 다잡으면서 같은 말만 되풀이했던 그였지만 어제부터 이어지는 고문에 조금씩 몸도 마음도 지쳐만 갔다.

    불안한 눈빛으로 두리번거리는 정훈의 뒷모습을 보던 마상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맞은 편 감옥에서 힘없이 누워서 바라보던 그였다. 이미 몸은 넝마가 되었고 심한 고초를 당한 얼굴은 죽어버린 듯한 모습이었지만 불안해하는 정훈의 말투에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자신이 당한 것을 정훈도 똑같이 당하리라는 생각에 미소를 짓는 마상이었다.

    두 번 다시 오고 싶지 않던 곳으로 끌려온 정훈이 연신 두리번거리며 불안한 듯 두 눈동자를 굴렸다. 이미 한쪽 손은 너덜너덜해진 상황이었고 아직까지 얼얼하고 아린 고통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실수를 하지 않았지만 절로 몸이 떨려오는 그였다.

    수십 번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수만 번 마음을 다잡았지만 막상 다시 끌려오니 두려운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연신 마른 입술을 혀로 적셔보지만 그래도 방망이질치는 가슴과 절로 떨려오는 몸은 어쩌지 못 했다.

    "네 놈이 어찌하여 다시 끌려온 것 같으냐?"

    나직한 금무정의 물음에 정훈이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소…… 소인도 잘 모르겠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마상 그 놈이 제 야명주를 훔쳐갔을 뿐인데…… 혹 제가 재물을 탐했기 때문입니까? 이 황궁에 있는 환관들 중에서 재물을 탐하지 않는 이는 없지 않습니까? 아시다시피 저희가 재물이라도 마련해둬야 이 궁에서 살아남지 않겠습니까?"

    억울하다는 듯 금무정의 눈치를 살피며 답하는 정훈이었지만 그 말을 듣던 금무정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를 바라봤다. 그 눈빛을 접한 정훈의 몸이 자신도 모르게 떨려왔지만 애써 마음을 다잡는 그였다. 그런 정훈의 모습에 얼굴을 굳힌 금무정이 말을 이었다.

    "재물을 탐해서 너를 잡아들였다? 진정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냐? 그런 걸로 잡아들인다면 이곳은 환관들로 넘쳐날 것이다. 그런 일이 아님을 네놈도 잘 알고 있을 것 아니냐? 내서당에서 훈육생의 교육을 책임지던 유현의 오른팔이 아니었더냐? 그런 자가 내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다?"

    "……."

    "모르쇠로 일관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터. 좋은 말로 할 때 토설하거라."

    금무정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정훈을 쏘아보며 소리쳤다. 하지만 쉽게 굴복할 정훈이 아니었다. 이미 단단히 각오한 듯 다시 한 번 시치미를 떼는 정훈이었다.

    "정말 그것뿐입니다. 더는 말씀 드릴 것이 없습니다."

    "생각보다 고문의 강도가 약했나 보구나. 하긴, 아직 멀쩡한 것을 보면 네놈을 너무 배려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제 사정 봐줄 것 없다."

    금무정이 뒤에 선 인학을 향해 눈짓을 보냈고 인학이 고개를 끄덕이며 읍을 하고 정훈을 향해 다가갔다. 그런 인학의 얼굴은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는데 그 얼굴을 확인한 정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무공으로 보나 직위로 보나 내가 아삼 그 놈과 크게 차이가 없을 터인데…… 어찌해서 그놈은 공을 세우러 그곳으로 합류하고 나는 이곳에 있느냐 이 말이다! 심지어 전소평, 그놈에게까지 밀려서 고작 이런 놈이나 고문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못마땅한 듯 정훈을 노려보는 인학이었다. 앞에 있는 정훈 때문에 공을 세울 기회를 놓친 것만 같았다. 계속해서 버티고 있는 정훈이 마음에 들지 않는 그였고 그 분풀이로 정훈을 향한 고문은 더욱 악독해지고 거세져만 갔다.

    고통스러운 비명과 비릿한 혈향이 그곳에 가득 퍼지기 시작했다.

    "어떠냐? 이제 할 말이 생각났느냐?"

    고문을 중지시킨 금무정이 축 늘어진 정훈의 얼굴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하지만 여전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정훈이었다.

    "저는…… 정말…… 모릅니다. 억울…… 합니다."

    두 시진을 버텨내며 같은 말만 반복하는 정훈이었고 그런 정훈의 태도에 금무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뭘 그리 서 있는 것이냐? 어서 이 뻣뻣한 놈의 입을 열게 하지 않고!"

    잔뜩 굳은 얼굴로 자신을 향해 소리치는 금무정의 모습에 인학의 얼굴 또한 서서히 굳어갔다. 고문이라면 동창 내에서도 일가견이 있다 자부하는 인학이었고 실질적으로 그가 이곳에 남은 이유도 그런 고문을 행하기 위함이었다. 지금껏 그런 인학의 고문을 한시진이라도 견뎌낸 이는 하나도 없었지만 앞에 있는 정훈도 일반적인 환관이 아니었다.

    '독한 놈.'

    자신의 무능을 드러내는 것만 같아서 인학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어느덧 고문 도구를 다시 잡은 인학의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고 정훈의 입에서는 더욱더 고통스러운 신음이 새어나왔다.

    "괜한 일에 힘을 빼지 말아라. 네놈이 버틴다고 못 알아낼 우리도 아니지만 마상이란 자가 이미 토설했다. 지금껏 네놈이 한 말은 마상이란 놈이 내뱉은 말과 일치하는 점이 하나도 없으니…… 머리를 잘 굴려야 할 것이다. 숨긴다고 숨길 수 있는지는 두고 볼 일이겠지."

    날카로운 금무정의 눈빛에 정훈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하지만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는 듯 정훈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마상…… 그 놈이 뭐라 토설하였는지 모르겠으나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저 야명주를 도둑맞았을 뿐입니다."

    "독하구나. 지독한 놈이야. 그 지독함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겠지."

    금무정이 다시 한 번 인학을 바라보며 손짓을 보냈다. 하지만 인학이 막 정훈을 향해 다가갈 때, 갑자기 뛰어온 동창요원 하나가 금무정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고했다.

    "표국을 쫓았던 인원 중에 한 명이 돌아왔습니다. 번역인 아삼인데…… 중한 상처를 입은 채 홀로 살아왔습니다."

    "뭐라? 홀로? 지금 어디에 있느냐?"

    "상처를 돌보고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가보자. 앞장 서거라."

    놀란 금무정이 다급하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허둥지둥 사라지는 금무정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인학의 입가에 쓰디쓴 미소가 어렸다.

    '질긴 놈. 홀로 살아남았다라? 차라리 같이 죽어버렸다면…… 아무튼 운도 참 좋은 놈이구나.'

    홀로 살아서 돌아온 아삼의 소식에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인학이었다. 일전에 자신을 도와서 공을 넘겼던 아삼이라 고마운 마음도 있었지만 정화의 사람이라는 것이 알려지고 같은 번역의 직위에 올라서면서 다시 질시하는 감정이 싹트고 있었다.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온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홀로 살아오면서 세웠을 아삼의 공이 더욱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잔뜩 찌푸린 인학의 얼굴이 정훈에게 향했다. 그렇지 않아도 심기가 불편한 그였고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정훈의 행동은 자신의 무능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솟아오르는 질시의 감정과 치밀어 오르는 화에 정훈을 바라보는 인학의 눈에 분노가 어렸다.

    '어째서 나를 저렇게 바라보는 거지? 가만 저놈의 눈빛은……'

    자신을 바라보는 인학의 눈빛에 정훈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저 눈빛은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그 눈빛이었다. 예전에 자신이 사마택을 바라봤던 그 눈빛과 너무나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분노 가득한 그 눈으로 자신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인학의 모습에 당황한 정훈이 그를 바라보면서 횡설수설했다.

    조금씩 강도를 높여가는 인학의 고문에 자신도 모르게 떨던 그가 두려움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말을 내뱉었다. 자신도 그랬지만 이미 질시라는 감정에 눈이 먼 앞에 있는 인학이 무슨 짓을 벌일지 몰랐기 때문이다.

    "나…… 나는 정말 모르오. 한직으로 밀려난 나 같은 환관이 어찌 비급을 알겠소? 이 모든 게 마상 그 놈이 다 지어낸 것이오. 나는 정말 모른단 말이오."

    자신이 무슨 말을 뱉어내는지도 모른 체 인학의 눈빛을 피하기 바쁜 정훈이었고 그런 정훈의 말에 분노로 잠식된 그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비급? 비급이라고?'

    "나는 정말 아무 것도 모르오. 모두 마상 그놈이 지어낸 일이오. 믿어주시오. 제발."

    멈춰선 인학의 행동에 더욱 간절한 목소리로 애원하는 정훈이었다. 그리고 그런 정훈의 말을 곱씹던 인학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이자가 어떻게 비급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거지? 이제껏 비급에 대해 언급을 한 적은 없지 않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정훈을 살피던 인학의 두 눈이 빛났다. 다시 기억을 떠올려봐도 정훈에게 비급이라는 말을 사용한 적은 없었다.

    '역시 마상 그 자의 말이 맞았구나. 이 모든 게 다 정훈이라는 놈의 짓이었어. 허면 그 비급에 대해 알고 있는 이놈에게 중한 내용을 알아낸다면……'

    어느새 분노 가득했던 인학의 눈빛이 살기를 띠기 시작했다. 결심을 굳힌 듯 인학이 비장한 얼굴로 정훈을 향해 다가갔고 정훈의 여린 허벅지를 향해 막 쇠꼬치를 찌르려던 그때, 갑자기 들려오는 호통에 행동을 멈추고 뒤를 돌아봐야만 했다.

    "멈추거라."

    회색의 포자에 감색 괘자를 걸친 환관 하나가 제독인 오건휘를 대동한 채 그곳에 들어섰다. 이내 안에서 느껴지는 혈향과 보여지는 잔인한 광경에 인상을 찌푸린 그가 오건휘를 보고 고개를 숙이는 인학을 내려봤다.

    갑작스런 환관의 등장에 읍을 하고 고개를 올린 인학이 어리둥절한 채 낯선 환관을 바라봤고 그런 인학을 향해 환관이 낭창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자를 풀어 주거라."

    자신에게 하대를 하는 낯선 환관의 말에 인학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대동한 오건휘를 향해 그 의중을 물었지만 아무런 말도 없이 앞선 환관의 말에 따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오건휘였다.

    "하오나 이 자는 이번에 있었던 일에 중요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오건휘를 향해 정훈의 중요성을 피력하려던 인학이었지만 낯선 환관의 위엄 섞인 말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황명을 거역할 셈이냐?"

    '황명'이라는 말에 인학과 정훈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급히 고개를 숙이는 인학이었고 정훈 역시 그 소리에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황명이라니? 도대체 누가?…… 유현인가 아니면 송기득? 이제와서 왜?'

    두 눈을 굴리며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정훈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황제를 움직여서 자신을 빼준 이가 누구인지 궁금했지만 지금은 이곳을 벗어날 수 있단 생각에 안도할 수 있었다.

    반면, 다 잡은 물고기를 놓친 양 인학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환관을 따라 힘없이 나가는 정훈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인학이 긴 한숨을 토해냈다.

    '이제야 이 일의 배후를 잡았거늘. 내가 공을 세울 기회가 이렇게 날아가다니…… 황명? 황명이라…… 배후에 황제가 있었음인가? 허면 왜 교지까지 내린 거지? 말이 안 되지 않은가?'

    곰곰이 생각을 정리하는 인학이었지만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 인학의 머릿속에 '비급'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얼마 전에 얻었던 필사된 비급과 함께 이미 그 구결을 암기한 상황이었다. 자신의 무공을 끌어올릴 수단으로 생각했던 것이었지만 이제는 그 비급의 존재가 자신의 치부로 변할 거라는 생각에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괜한 짓을 벌인 것인가? 그 비급이 마상의 처소에서 나왔고 그것의 원래 주인이 정훈이라는 놈이라면…… 그리고 황제가 그 뒤에 있다면?'

    "후우."

    커다란 한숨을 내쉰 인학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비릿한 혈향을 뒤로하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는 그의 눈에 비틀거리면서 환관의 뒤를 쫓는 정훈의 모습이 가득 들어왔다.

    '유현의 힘이 황제를 움직인 것인가?…… 허면 마상은?'

    밖을 나온 인학이 마상이 투옥되어있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비급에 대한 욕심으로 이미 복잡한 상황에 발을 들인 상황이었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좋든 싫든 이 일의 진상을 알아야만 했다.

    다급히 뛰어든 인학의 행동에 놀란 동창의 요원들이 그를 뒤따랐지만 마상이라는 자는 황명이 없었는지 죽은 듯이 쓰러진 채 두려운 눈빛으로 그를 올려보고 있었다.

    '마상은 빼내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이지?'

    정훈이라는 놈만 빼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인학이었다. '황명'이라는 단어 하나로 모든 것이 꼬여버린 것 같았다. 멍하게 서있는 그를 걱정하는 동료들이었지만 그들의 말을 뒤로한 인학이 고심하며 걸음을 옮겼다.

    '마상의 처소에서 얻은 비급을 지금 밝히기에는 너무 늦었다. 의심을 피할 수 없겠지. 내가 얻은 이 비급은…… 누구도 몰라야한다. 아직까지 비급이라는 존재가 드러나지 않은 상황이니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두 놈을 살려둘 수는 없겠지. 내가 비급을 가진 것을 숨기기 위해서는 필히 그 두 놈을 죽어야한다.'

    순간 인학의 눈에 살기가 스쳤다. 황명으로 풀려난 정훈과 아직 투옥되어 있는 마상을 처리해야만 했다. 모두가 자신만의 생각을 가진 채 황궁의 밤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각자의 계획이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코멘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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