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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始作)
궁녀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여기저기에서 자신들의 동료가 사라졌다고 알리는 자들이 나타기 시작했다. 몇몇의 희생자가 더 있다는 소문과 함께 이 모든 게 폐주의 저주 때문이라는 해괴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꼬리에 꼬리를 문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면서 궁내의 분위기는 더욱더 흉흉해져갔다.
"폐주의 저주라니…… 이 무슨 얼토당토 않는 얘기란 말인가! 그저 한낱 궁녀의 시체 가지고 궁내에 이런 말들이 나돌다니……"
굳은 얼굴의 황제가 신료들을 향해 소리쳤다. 목내이처럼 변한 시체로 인해 왕위를 뺏긴 폐주까지 들먹이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영락제였다.
"당장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시오. 당장!"
결국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한 황제의 교지가 내려지면서 동창과 금의위의 손길은 더욱 분주해졌다.
황제의 교지가 내려짐으로써 바빠진 이가 비단 동창과 금의위뿐은 아니었다. 그 소식을 들은 정훈 역시 노심초사해하며 고심을 하느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자네 그 이야기 들었는가? 이번 일의 진상을 밝히라는 폐하의 교지가 내렸다네."
"교지라니?"
동료 환관의 말에 정훈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목내이처럼 변한 궁녀의 시체 때문에 '폐주의 저주'라는 소문이 돌고 있지 않나? 그러니 황제 폐하께서도 더는 방관하고 계실 수는 없으셨던 게지…… 아무튼 이 황궁이 다시 한 번 시끄러워질 것 같네."
놀란 듯 커진 두 눈으로 멍하니 동료 환관을 바라보는 정훈이었다. 한 번의 실수로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때 조금만 더 신중하게 궁녀의 시체를 처리했다면 이번 일을 초래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자신의 머리털을 쥐어뜯고 싶은 정훈이었다.
"자네…… 어찌 그러는 건가? 어디 아픈 것인가?"
새하얀 얼굴로 멍하게 서 있는 정훈을 향해 동료 환관이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제서야 정신이 든 듯 정훈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 아니네. 나는 이만 무고로 돌아가야겠네.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워서……"
황궁무고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정훈의 발걸음이 어느덧 그 속도를 더해갔다. 초조한 듯 무고로 들어선 정훈이 자리에 앉지 못하고 이리저리 서성였다.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폐하의 교지에 동창과 금의위까지 나섰으니 곧 내가 드러나는 것은 시간문제일 터. 이거야 원, 괜한 걸 욕심내다 내 명을 재촉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무고를 왔다 갔다 하며 긴 한숨을 토해내는 정훈이었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장 천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인가? 어찌 저리 안절부절 못하는 거지? 혹 그때 그 충격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인가? 저런 새가슴을 가지고 지금껏 어떻게 이 험한 황궁에서 버텼는지. 쯧쯧.'
저번에 있었던 습격으로 불안해한다고 생각한 장천호가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심스럽게 바라보는 장천호의 시선을 알지 못한 채 그저 자신의 앞날이 깜깜하기만 한 정훈이었고 어떻게든 이번 일을 해결하려 고심을 거듭하였다.
반나절을 넘게 고민해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생각이 없었다. 힘없이 처소로 들어선 정훈이 초초한 낯빛으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런 방도도 생각나지 않는다. 왜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단 말이냐? 내가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비책을 생각해 내야만 한다. 어떻게든!'
정훈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비급을 손에 넣었을 때만해도 하늘이 자신이 돕는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일이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을 보고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치기어린 복수심에 괜한 일을 저지른 것이야. 그냥 가만히 있었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터. 이게 모두 그놈들 때문이다. 이런 우라질!'
갑자기 이 모든 게 후회되는 정훈이었다. 하지만 넋 놓고 후회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어떻게든 이 일을 수습해야만 했다. 초조한 듯 손톱을 깨물며 연신 눈동자를 굴리던 정훈의 눈빛이 갑자기 번뜩였다.
일의 원흉이 된 놈들에 대한 원망에 그놈들의 모습을 떠올리던 그 때, 좋은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순간 떠오른 자신의 계책이 마음에 드는 듯 다시 그것들을 세세하게 그려보더니 뒤늦게 웃음을 보이는 정훈이었다.
'우선은 저들의 시선을 궁 밖으로 돌려 시간을 벌어야한다. 이번 일만 잘 해결된다면 나에게 다시 기회가 생길 것이야.'
비장한 눈빛을 보인 정훈의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느새 쥐어진 두 주먹에 그의 의지가 보였고 쌓여진 기운이 그곳을 향해 내달렸다. 상황이 이지경이 되었지만 차가워진 몸은 뜨끈뜨끈한 피에 대한 갈망을 불러 일으켰다.
그로부터 며칠 후, 궁내가 또 다시 발칵 뒤집혔다. 이번에는 내서당에서 훈육 중이던 어린 환관이 목내이처럼 쭈글쭈글해진 모습으로 발견됐기 때문이었다. 이전에 궁녀가 발견된 그 모습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모두를 물리거라."
첩형 금무정이 대동한 동창의 요원들을 향해 명했다. 그리고 그 명을 받은 동창의 요원들이 몰려든 구경꾼들을 쫓아내기 시작했다. 어느새 시체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고 그들이 없어진 것을 확인한 금무정이 다시 한 번 명을 내렸다.
"주변을 샅샅이 뒤져라. 작은 것 하나라도 놓쳐서는 안 된다."
날선 금무정의 명령에 동창 요원들이 막 주변을 살피려 할 때, 막 당도한 금의위 천호 백두환이 금의위 군사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어서 시체를 보존하지 않고."
백두환의 명령에 금의위 군사들이 시체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보란듯이 시체를 막고 있는 금의위의 모습에 금무정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이곳은 우리가 알아서 할 터이니 동창은 그만 가 보시지요."
"저번 궁녀의 시체를 금의위에서 맡았으니, 이번 시체는 우리 동창이 맡는 것이 어떻겠소?"
"이왕 우리가 손을 댔으니 이번 일은 우리가 해결하겠습니다."
금무정의 말에 거절의 뜻을 밝히는 백두환이었다. 정중하게 말하는 자신의 태도에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버티고 서 있는 백두환의 자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금무정이었지만 애써 미소 지으며 다시 한 번 그를 설득하고 나섰다.
"이번 사안의 중함은 내가 다시 말하지 않아도 잘 아실 거라 생각하오. 황제 폐하의 교지가 내려진 중한 일에 이렇게 쓸데없이 알력만 다툰다면 금의위나 동창이나 그 모양새가 보기 좋지 않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아니겠소? 지난번은 우리 쪽에서 한번 양보했으니 이번에는 금의위에서도 한발 물러서 주는 것은 어떻겠소? 새로 알게 된 사실이 있다면 지체 없이 금의위에게도 통보해 드리리다. 우선은 이 일을 해결하는 것이 시급하지 않겠소?"
황제의 교지까지 내려진 중한 일이었다. 이런 일에 금무정의 말처럼 알력다툼만 벌인다면 그 끝이 좋지 않을 것이 뻔했고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백두환이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백두환이 금의위 군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모두들 돌아간다."
백두환의 명령에 금의위 군사들이 그곳에서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금무정이 백두환을 향해 고맙다는 눈짓을 보냈다.
"약속은 반드시 지키시길 바랍니다. 우리도 새로 알게 된 사실이 있다면 동창에 통보해 드리겠습니다."
"알겠소. 새로 알게 되는 것이 있다면 통보해 드리리다."
금무정의 다짐을 받아낸 백두환이 금의의 군사와 함께 되돌아갔다. 멀어져가는 금의위의 모습에 그가 다시 한 번 동창요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시체뿐만 아니라 주변까지 샅샅이 뒤지거라. 사소한 것 하나라도 주의 깊게 살펴야 할 것이다."
"예."
둘로 나뉜 동창 요원들이 시체와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잠시 후, 시체의 외향을 살피던 동창 요원 하나가 시체의 품속에서 삐져나와 있는 뭔가를 발견하고는 두 눈을 빛냈다.
"죽은 환관의 품에서 이것이 나왔습니다."
한 동창 요원이 금무정에게 서찰를 내밀며 말했다. 뜻밖의 물건에 의아해하는 금무정이었지만 동창 요원이 건넨 서찰을 살펴보던 그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서찰의 내용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모두들 서둘러라. 그렇다고 놓치는 것이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쩌렁쩌렁한 금무정의 말에 동창 요원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그런 요원들을 한번 훑어보던 금무정이 옆에 선 구영고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이제부터 이곳은 네가 맡거라.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작은 단서 하나라도 놓쳐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만큼 중한 일이다. 황제 폐하가 주시하는 일이니 확실히 해야만 한다. 알겠느냐?"
"예. 첩형."
고개를 조아리는 구영고를 뒤로 하고 금무정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손에 든 서찰을 쥐며 어디론가 급히 향하는 금무정의 모습에 구영고가 남은 요원들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멀어지는 금무정의 모습을 멀리서 힐끔 바라보던 정훈의 얼굴에 안도하는 표정이 지어졌다.
다급히 사라지는 금무정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구영고가 동창 요원들을 향해 힘차게 소리쳤다.
"두 눈 크게 뜨고 하나, 하나 세심하게 살피거라."
구영고의 말에 동창 요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살피기 시작했다. 떨어진 낙엽까지 하나씩 들추면서 어떻게든 단서를 찾으려 애쓰는 그들이었다.
그때, 시체를 살피던 전소평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변을 살피는 아삼을 바라봤다. 뭔가 심상치 않는 전소평의 모습에 아삼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것이…… 시체가 좀 이상해."
"시체가 이상하다니? 무엇이 이상하다는 말이냐?"
전소평의 말에 어느새 다가온 구영고가 그에게 물었다. 미심쩍었지만 확실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일부러 아삼에게만 작게 말하던 전소평이었지만 구영고가 묻자 당황한 듯 자신 없는 말투로 답을 했다.
"그것이…… 피부는 이렇게 쭈글쭈글한데 몸속은 차갑습니다. 마치 음한 장력에 맞은 듯 음기가 침범한 상태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차갑다? 외형만 봐서는 흡사 흡성대법에 당한 것 같은데…… 내부는 차갑다라?"
전소평의 말을 들은 구영고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음기'라는 말에 호기심이 동한 아삼이 전소평의 옆으로 다가가서 시체를 살펴봤다. 말라비틀어진 외형과 함께 그 안에 몰래 내기를 살짝 흘러 넣으면서 살펴보던 아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시체의 안에서는 상당히 친숙한 내기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규화보전의 음기인가?'
시체에서 미세하게 남아있는 내기였다. 이미 살수지무로 다른 기운을 읽는데 익숙해진 아삼이었고 목내이처럼 변한 시체에 있던 차가운 그 기운을 읽어낸 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설마…… 나 말고 규화보전을 익힌 이가 존재한단 말인가? 아니면 규화보전이 아닌 다른 무공의 음기인가?'
어린 환관의 시체에 손을 댄 상태로 생각에 빠진 아삼이었다. 그만큼 그에게 익숙한 기운이었다. 자신의 몸속에 있는 그 기운과 너무나도 닮아있는 그 기운에 고심하는 그의 어깨를 뒤에 있던 구영고가 잡아왔다.
뒤늦게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아삼이 표정을 감추면서 일어났고 그 모습을 본 구영고가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그를 바라봤다.
"뭐라도 발견했느냐?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는 것을 보면…… 무언가 이상한 것이라도 있느냐?"
구영고의 눈빛에 고개를 저은 아삼이 별다른 의견을 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 모습에 눈살을 찌푸리는 구영고였다. 혹시라도 뭔가 알아낸 것이 있는 듯한 눈치였는데 그것을 밝히지 않는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 구영고의 시선을 무시한 아삼이 다른 곳을 둘러봤다. 조금이라도 관련된 단서를 찾아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너무나 익숙한 기운이다. 만에 하나 이 기운이 규화보전과 관련된 음기라면 최악의 경우에…… 나까지도 엮여들어갈 수 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진상을 밝혀야만 한다.'
심각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아삼이었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시체에 남아있던 희미한 기운은 규화보전의 기운이었다. 차갑고도 끈적한 그 기운이 자신의 내기에 반응을 보였고 그런 사실을 다시 되뇌던 아삼은 그 기운이 규화보전의 음기라고 확신을 했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변한 아삼은 구영고의 지휘에 따라서 주변을 살폈고, 다른 요원들과 함께 다른 궁녀들을 찾아다녔다. 그들은 근래에 들어 모습을 감춘 동료의 행방을 알려온 궁녀들로, 모두 확인한 결과 그동안 사라진 사람들이 꽤나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취아라는 궁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때에 별다른 일은 없었더냐?"
"그때 당시에…… 정훈 태감께서 자신의 방에 있는 은자가 사라졌다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자신의 방을 치운 궁녀가 누구냐고 물어왔었는데……"
"그 궁녀가 취아라는 그 궁녀였단 말이냐?"
"그…… 그렇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 은자를 가지고 황궁을 빠져나갔다고 생각했습니다. 종종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사라진 궁녀의 행방을 찾기 위해 이것저것 묻던 동창의 요원들이었고 그 사이에 있던 아삼은 정훈을 떠올리면서 그를 만나야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비단 그뿐만 아니라 다른 요원들도 그런 생각을 가졌지만 그들을 소집하는 명이 내려졌고 어쩔 수 없이 그 부름에 응해야만 했다.
다른 당두의 명에 의해서 추려진 몇몇의 인원이 진위를 묻기 위해 정훈을 찾아 나섰지만 별다른 의심점을 찾을 수는 없었다. 이미 그것에 대한 답을 마련해 놓은 정훈이었고 그의 계획은 그렇게 맞아들어갔다.
진위를 묻기 위해서 그를 찾은 동창의 요원들 사이에 아삼이 없었다는 사실이 정훈에게는 엄청난 행운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리가 없는 정훈은 생각보다 잘 들어맞는 자신의 계책에 자부심을 가지면서 다음 일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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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멘트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