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90화 (9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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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始作)

    온 성안이 어젯밤 죽은 궁녀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온몸에 피가 없어진 채 죽은 궁녀의 모습은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냈다. 누구는 무림고수에 의해 죽었다했고 누구는 귀신의 농간이라고 했으며 또 다른 이는 원한에 의한 살인이라고 했다.

    이미 수많은 구경꾼들로 북적이는 그곳에 동창과 금의위가 동시에 도착했다.

    "모두 물러서시오."

    당두 구영고가 구경꾼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금의위 정오품직인 천호 백두환이 금의위 군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어서 사람들의 출입을 막지 않고."

    백두환의 말에 금의위 군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을 물리친 그들이었고 그런 금의위를 향해 구영고가 얼굴을 잔뜩 구기며 소리쳤다.

    "이게 뭐하는 짓이냐? 어째서 우리까지 막아서는 것이냐?"

    금의위 군사들이 구경하는 사람들만 막은 것이 아니라 동창요원들의 앞도 단단히 막은 채로 서 있었다. 그 모습에 화가 난 구영고가 소리를 쳤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백두환이 이죽거리면서 말했다.

    "아. 미안허이. 우리 군사들이 뭔가 착각을 했나보네. 그리 넋놓고 보고 있으니 구경하고 있는 저 환관들과 다를 게 없지 않는가? 뭐 그렇다고 크게 다를 것도 없지만……"

    백두환의 말에 근처를 지키던 금의위 군사들이 키득거리며 비웃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구영고와 동창요원들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애써 분노를 억누르던 구영고가 백두환을 매섭게 노려봤다.

    "천호의 뜻이오? 금의위의 뜻이오?"

    "뭐라?"

    "내 그 품계가 낮아서 함부로 말은 못 하겠으나 지금 이리 동창을 대하는 것을 천호의 뜻이라고 여기고 고해도 되겠소?"

    "이…… 이놈이!"

    "좋소. 우리는 이대로 돌아가도록 하겠소. 허나 그 책임은 오롯이 천호가 져야 할 것이오. 우리 동창의 고문이 어떤지 직접 체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혼자 주억거리는 말에 천호인 백두환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동창을 적으로 돌릴 깜냥은 없었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물러서면서 죽어있는 시체를 확인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확인한 구영고가 비릿하게 웃어보였다.

    "뭣들 하는 것이냐? 당장 길을 비키거라. 네 놈들의 깜냥으로 해결할 일이 아니다."

    쩌렁쩌렁 울리는 구영고의 목소리에 금의위 군사들이 움찔거렸다. 보란 듯이 자신의 앞에 선 금의위 군사를 밀치며 당당하게 들어서는 구영고였고 그런 구영고의 모습에 동창 요원들 또한 힘 있게 밀고 들어왔다.

    '아삼이라는 놈. 그놈의 덕을 조금 본 것인가?'

    평소라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의 윗선을 데리고 와야만 했던 일이었다. 천호라는 직급이 낮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서로 대등해 보이던 금의위와 동창 사이의 알력관계는 이제 동창이 조금 앞서고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그 이유는 이전에 있었던 두 집단이 행했던 대결의 결과였다. 비록 그 끝을 보지는 못 했지만 금의위로 출전한 무당의 이대 제자가 죽음으로써 우위를 점하게 된 동창이었다.

    그렇게 동창과 금의위의 알력이 또 시작되었다. 사건 현장을 놓고 힘겨루기를 하는 동창과 금의위의 모습에 구경하던 환관과 궁녀들이 고개를 저으며 하나 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너무 익숙한 광경인지라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 시작이구먼. 어째 저들은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리는지? 정 태감, 계속 있을 것인가?"

    개기름이 잔뜩 낀 얼굴을 들이밀며 물어오는 환관을 향해 정훈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제 그만 가봐야지. 무고를 너무 오래 비웠네."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서는 정훈의 얼굴이 구겨졌다. 어젯밤 궁녀를 죽이고 그 뒤처리가 깔끔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으슥한 곳에 시체를 옮기려 했지만 번을 서던 금의위의 등장으로 전각의 담벼락에 대충 버리고 도망 온 것이 실수였다.

    '누군가 나를 본 자는 없겠지만…… 이것 참 불안하구나.'

    황궁무고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정훈의 얼굴에 근심이 서렸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과 함께 무고로 들어서서 탁자에 앉은 그가 그대로 엎드리면서 얼굴을 묻었다. 어느덧 정훈의 머릿속에 몇 달 전의 일이 떠올랐다.

    자신의 목숨을 노리던 송기득의 일이 있고 난 후,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던 정훈이었다. 그 날도 온몸이 땀에 젖은 채 잠에서 깨어난 정훈은 두려움에 더 이상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언제 또 자신의 목숨을 노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가슴이 벌렁이기 시작했고 두근대는 가슴을 누르려고 찬물을 마셔봤지만 그 두려움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이게 다 그 송기득, 그 놈 때문이다. 송기득! 네 이놈. 아니지 아니야. 유현 그놈이 나를 버리지만 않았어도 내가 이리 되지는 않았을 터. 또 마상 그 놈이 내 자리를 꿰차지만 않았어도 내가 조급하게 송기득 그 놈을 찾지도 않았을 것을…… 하아, 이 모든 것들이 다 그놈들 때문이다. 송기득, 유현, 마상!"

    으드득.

    이가 갈리는 소리와 함께 정훈의 눈에 핏발이 섰다. 어느덧 두려움이 분노로 바뀌었고 세 사람을 떠올린 정훈이 이를 갈았다. 그렇게 분노에 잠겨서 치를 떨던 정훈이 뭔가가 생각난 듯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내 베개 깊숙이 갈무리해둔 빛바랜 양피지 하나를 꺼내 든 그가 천천히 그것을 살피며 고심을 했다.

    송기득에게 쫓기던 그때 우연히 무고에서 찾아낸 비급이었다. 탁자 위에 조심스럽게 비급을 올려놓고 뚫어져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는 정훈이었다.

    '그놈들에게 복수를 하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 이미 내게 힘이 되어 줄 자는…… 없지 않은가?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이 비급뿐이구나. 하아.'

    크게 한숨을 쉰 정훈이 빛바랜 양피지를 바라봤다. 이미 한번 훑어봤지만 첫 장에 나온 내용이 너무 섬뜩해서 쉽사리 손이 가질 않았다.

    '남은 것은 이 비급뿐이다. 이것을 익혀서 힘을 길러야만 한다. 내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라도…… 이것을 익혀야만 한다.'

    비장한 얼굴로 비급을 들어 올린 정훈이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겼다. 한 자 한 자 유심히 살피던 정훈의 얼굴에 찌푸려졌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조금씩 평온함을 되찾았다. 구겨졌던 얼굴에는 어느새 엷은 미소가 지어졌다.

    '이거라면…… 나도 금방 고수가 될 수 있겠구나.'

    초심자도 쉽게 익힐 수 있다는 문장에 두 눈을 빛내는 정훈이었다. 비급을 가슴에 품은 정훈의 얼굴에 굳은 의지가 어렸다.

    그로부터 며칠 후, 고뿔에 걸린 듯 온몸에 힘이 빠진 정훈이 무고를 일찍 나서서 자신의 처소로 향했다. 느껴지는 한기에 힘없이 처소로 들어선 정훈의 두 눈에 자신의 방을 뒤지고 있는 어린 궁녀의 모습이 들어왔다.

    "지금 예서 뭐하는 짓이냐?"

    날선 정훈의 호통에 놀란 궁녀가 당황한 듯 눈을 굴리더니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는 그저 어질러진 방을 치우고 있었습니다."

    눈동자를 굴리며 어쩔 줄 모르는 궁녀의 모습에 정훈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그렇지 않아도 심기가 편치 않았는데 자신의 방을 뒤지고 있는 모습에 찝찝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당연히 앞에 있는 궁녀를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래? 헌데 너는 못 보던 얼굴이구나."

    "예. 궁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알았다. 내가 오늘은 피곤하니 그만 가 보거라."

    "예."

    귀찮다는 듯 손짓을 하는 정훈을 향해 궁녀가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그리고는 종종걸음으로 정훈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다음부터는 내 방을 정리할 필요가 없다. 내 직접……"

    투욱.

    지나가는 어린 궁녀에게 당부를 건네는 순간 그 궁녀의 소매에서 은자가 떨어져 내렸다. 순간 당황한 듯 그것을 감추려하는 궁녀의 모습에 재빨리 어린 궁녀의 손을 낚아챈 정훈이 그 몸을 뒤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궁녀의 몸에서 은자가 더 나왔고 그 모습을 본 정훈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청소를 했다? 허면 이것은 무엇이냐?"

    은자를 들어 보이며 추궁하는 정훈의 모습에 새하얗게 질린 얼굴의 궁녀가 납작 엎드리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송구합니다. 청소를 하다 보니 은자가 보이길래 저도 모르게 그만."

    "네 년이 감히 누구의 것에 손을 대는 것이냐? 함부로 남의 방을 들추는……"

    순간 화를 내려던 정훈의 머릿속에 몰래 숨겨놨던 것이 떠올랐다.

    '비급!'

    혹시라도 비급을 들키는 날에는 이곳에서 쉽게 살아나갈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는 정훈이었다. 천천히 궁녀의 얼굴을 살피던 그였지만 이미 겁에 질린 그 모습은 어린 궁녀가 비급을 발견했는지 쉽게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

    "혹, 다른 것들을 손댄 것은 아니겠지?"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제가 잠깐 실성을 했나 봅니다. 이 은자도……"

    "은자 말고! 다른 것을 뒤져봤더냐?"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정훈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던 어린 궁녀가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정훈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지금 네년까지 날 무시하는 것이냐?"

    "아…… 아닙니다. 소녀가 어찌……"

    짜악. 짜악.

    씩씩대며 어린 궁녀를 노려보던 정훈이 손을 높이 쳐들어 궁녀의 뺨을 내리쳤다. 붉어진 뺨을 어루만질새도 없이 여기저기 날아드는 정훈의 손찌검에 어느새 궁녀가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울부짖었다.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 것이니 부디 한번만 용서해주십시오."

    하지만 치솟는 분을 참지 못한 정훈의 손찌검은 더욱더 거세져만 갔다. 마치 그동안 당한 설움을 풀기라도 하는 듯 궁녀를 향해 매섭게 손찌검을 날리는 정훈이었다. 결국 참지 못한 궁녀가 정훈을 밀치면서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이…… 이년이!"

    도망가는 궁녀의 머리채를 잡아끄는 정훈의 두 눈은 이미 뒤집혀져 있었다. 궁녀를 놓치면 곧 자신의 행각이 알려질 것은 뻔한 일이었다. 궁내에 소문이 돌 거라는 다급함과 계속되는 손찌검에 그의 몸은 이미 흥분된 상태였다.

    자신도 모르게 궁녀의 머리채를 잡은 정훈의 두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잡은 궁녀를 거칠게 내동댕이친 정훈이 거칠게 문고리를 걸어 잠갔다. 그리고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는 궁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내기를 실은 주먹이 궁녀의 머리를 향해 날아갔고 이내 붉은 핏덩이를 쏟아낸 궁녀가 힘없이 꼬꾸라졌다. 계속해서 쓰러진 궁녀의 몸을 때려대던 정훈이 움직임을 멈추고 한참을 씩씩대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이윽고 그의 두 눈에 쓰러진 궁녀의 모습이 가득 들어왔다.

    '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그제서야 정신이 든 듯 정훈이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쓰러진 궁녀를 바라봤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기를 실은 것이었다. 단지 비급에 나온 글과 주의해야 할 것들을 떠올리며 짧은 운공만 했던 그였지만 며칠사이에 내기를 운용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비급이라는 것이 이렇듯 사람의 목숨을 쉽게 끊을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는 정훈이었다. 하지만 놀란 것도 잠시, 곧 들이닥친 한기에 몸을 떨어야만 했다.

    '왜 이러지? 왜 이렇게 갑자기 추운거지?'

    이까지 부딪치며 추위를 참아보는 그였지만 영혼까지 얼린 듯 매섭게 파고드는 한기에 다급히 침상으로 뛰어드는 정훈이었다. 겹겹이 이불을 둘러써보고 몸을 비벼댔지만 몸 안을 파고드는 한기는 가실 줄을 몰랐다.

    이대로 얼어 죽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자, 겁이 난 정훈이 계속해서 몸을 비벼댔고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비급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동남동녀의 뜨거운 피로 한기를 몰아낼 수 있다.

    '그래! 한기가 파고들면 뜨거운 사람의 피로 그 한기를 몰아낼 수 있다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뜨거운 사람의 피라니?…… 어찌 그런 일을……'

    머릿속에 떠오르는 글귀에 고개를 가로 젓는 정훈이었다. 아무리 한기를 몰아낸다고 하지만 사람의 피를 탐한다는 말에 거부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뼛속까지 파고드는 한기에 저절로 쓰러진 궁녀의 시체에 눈이 가는 정훈이었다.

    '일단은 내가 살고 봐야지. 이미 죽은 년인데…… 이대로 있다가는 얼어 죽고 말 것이야.'

    결국 두 눈을 질끈 감은 정훈이 힘없이 쓰러진 궁녀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죽은 궁녀의 시체에 손을 꽂고 구결을 떠올리며 운공을 하기 시작했다.

    얼음장처럼 하얗던 정훈의 두 볼에 새빨간 온기가 돌수록 죽은 궁녀의 두 볼은 쭈글쭈글해져갔다. 어느덧 목내이처럼 변한 시체는 여든이 훨씬 넘은 노파의 피부보다 더 쭈글쭈글해졌고 삐쩍 마른 채로 흉측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린 궁녀였다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변해버린 몰골에 그 시체를 바라보는 정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하지만 그와는 다르게 그의 몸은 언제 그랬냐는 듯 한기가 물러가고 따뜻한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렇게 궁녀의 시체를 둘러멘 정훈이 조심스럽게 처소를 나섰다. 이내 정훈의 발걸음이 궁내의 으슥한 곳으로 향했다.

    ============================ 작품 후기 ============================

    코멘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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