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89화 (89/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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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始作)

    타다당. 타다당.

    커다란 폭죽 소리와 함께 새로운 한 해가 밝아왔다. 새로운 해를 맞이하기 위해서 여기저기 홍등이 걸렸고 액운을 좇기 위한 폭죽은 쉴 새 없이 터지고 있었다. 모두가 들뜬 이때 아삼은 조용히 방에 앉아있었다. 한 살을 더 먹는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단지, 안정적으로 규화보전의 한기를 끌어올릴 수 있는 시간이 가까워져 온다는 의미가 클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들뜬 분위기가 아무런 감흥도 주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유독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바로 화산에 있을 동생들이었다. 가족이라는 단어에 반응을 보이는, 스스로도 알 수 없는 행동을 보이던 자신의 몸이었기 때문에 그 문제점을 알고 어떻게든 풀어나가야만 했다.

    '그 아이들은 잘 지내고 있겠지? 괜히 그런 서찰을 보냈던가? 언제 한 번 찾아가 봐야겠구나.'

    모든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이때, 가장 생각나는 사람들은 그의 동생인 아호와 아영이었다.

    산 전체가 회색빛 화강암으로 뒤덮인 화산(華山)을 한 남자가 발걸음을 재촉하며 오르고 있었다. 멀리 깎아지를 듯 험준한 절벽에 당당히 서 있는 건물을 발견한 남자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어렸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내던 남자가 조심스레 산문 쪽으로 다가가자 그 앞을 지키던 청의 무복을 입은 자들이 앞으로 나오면서 그를 맞이했다.

    "나는 청해 표국의 표사로, 이것을 화산파에 있는 조충이라는 분에게 전해달라고 해서 이렇게 찾아왔소."

    그들을 바라보던 남자가 서찰이 담긴 봉투를 내밀며 말했고 그런 남자를 훑어보던 사내가 그 남자가 건네는 봉투를 받아들었다. 그렇게 자신의 소임을 다한 남자가 험준한 화산을 돌아보면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돌아서는 그의 발걸음은 가벼워보였다. 힘든 일을 끝냈다는 것보다 말로만 듣던 화산의 도인들과 그들의 경공을 확인했다는 사실이 더 기쁜 그였다. 마치 먼 곳에서 누군가 끌어당긴 것처럼 빠른 속도로 멀어져가는 도인의 경공은 듣던 대로 신묘해 보였기 때문이다. 한동안 주머니 걱정 없이 술을 얻어먹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그가 더욱 가벼워진 걸음으로 험준한 산을 내려갔다.

    전해 받은 서찰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조충이 침음을 삼켰다. 이내 낮은 음성으로 밖을 향해 소리쳤다.

    "거기 누구 있느냐?"

    그가 말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청색 목면을 차려입은 여인 하나가 들어와서 예를 올리며 말했다.

    "사부님, 부르셨습니까?"

    "그래. 은령아, 가서 아호와 아영이를 데려오너라."

    조충의 말에 은령이라고 불린 여인이 다시 한 번 예를 표하고는 방을 나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은령이라는 여인의 뒤를 따라 아호와 아영이 안으로 들어왔다.

    "사부님, 부르셨습니까?"

    아직 어린 두 아이였지만 제법 진지한 말투로 고개를 숙이면서 예를 표하는 아호와 아영이었다. 그런 두 사람을 따뜻한 미소로 내려 보며 조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선 거기 앉아라."

    "네. 사부님."

    동시에 답을 하는 두 아이의 말에 다시 한 번 조충의 얼굴에 웃음이 지어졌다. 과거 연이 닿아서 화산으로 데리고 온 두 아이였고, 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자신의 제자가 된 두 남매였다. 아직 어린 나이지만 생각보다 산 속 생활에 잘 적응하는 것을 내심 기특해 하던 조충이었다.

    그런 그가 두 아이를 부른 이유는 조금 전에 건네받은 서찰 때문이었다. 두 아이 앞에 온 서찰을 바라보던 그가 이내 웃음을 지우면서 두 아이를 바라봤다.

    "너희들은 아삼이라는 사람을 아느냐?"

    조충의 물음에 아호와 아영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놀란 듯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의 얼굴에 환한 미소와 함께 그리움이 묻어났다.

    "예. 제 형입니다."

    "친 오라버니의 이름이 아삼입니다."

    아호의 말에 옆에 앉은 아영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조충을 올려다봤다. 초롱초롱한 그 눈빛을 접한 조충은 두 아이의 말에 안도하며 말을 이어갔다.

    "너희에게 형이 있었더냐? 다행이구나. 부모를 그리 잃고 상심한 너희들을 어찌 위로해야 하나 걱정했는데…… 자, 받아라. 너희 남매에게 온 서찰이다. 아삼이라는 사람이 보냈더구나."

    환한 미소와 함께 서찰을 건네는 조충이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받아든 서찰을 가슴 깊이 품으며 서로를 향해 미소를 짓는 아호와 아영이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서는 두 사람의 뒷모습에 조충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은령아, 다행이구나. 저 아이들에게 형제가 있었다니……"

    "예. 사부님."

    따뜻한 미소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은령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이 말했다. 그런 은령을 향해 조충이 사뭇 진지하게 말을 이어갔다.

    "너도 알다시피 참 불쌍한 아이들이다. 자신들의 눈앞에서 부모의 죽음을 목격하지 않았더냐? 그 아픔은 아마 평생 지워지지 않고 저 아이들을 괴롭힐 테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네가 잘 돌봐주고 있겠지만, 앞으로도 저 아이들에게 좋은 사저가 되어 주도록 하거라."

    "예. 사부님."

    은령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아호와 아영에게 자꾸 눈길이 가는 그녀였다. 아마도 두 아이를 보면서 어렸을 때 아비와 헤어져야 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이 생각났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영아, 형이 우리를 잊지 않았나봐."

    서찰을 가슴에 꼭 쥐며 아호가 아영에게 말했고 그런 아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던 아영이 궁금한 듯 아호를 재촉하며 소리쳤다.

    "빨리 봐봐. 오라버니가 뭐라고 했는지!"

    그제서야 서찰이 생각난 듯 아호가 천천히 서찰을 열었다. 서찰 안에는 정갈하게 쓰인 서찰 하나와 누런 전표가 몇 장 들어 있었다.

    "그게 뭐야?"

    꺼내든 종이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던 아영이 아호에게 물었다. 그러자 난감하다는 듯 아호가 어깨를 치켜 올리며 말했다.

    "이건 서찰 같은데…… 이건 뭔지?"

    "서찰? 하지만 나는 아직 글을 모르는데. 너도 글을 읽을 줄 모르잖아. 오라버니가 뭐라고 썼는지 어떻게 알아?"

    실망한 듯 입술을 쭉 내미는 아영이었다. 아호 역시 깊은 한숨을 토해내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때, 조충의 방에서 나온 은령이 두 사람을 발견하고 천천히 다가갔다. 힘없이 앉아 있는 두 사람의 모습에 은령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그러는 거니? 혹시 안 좋은 소식이라도 들었어?"

    서찰을 받아들고 환히 웃던 아이들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진 것을 확인한 은령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아이들을 바라봤다. 그런 은령을 향해 아영이 힘없이 말했다.

    "좋은 소식인지 나쁜 소식인지도 모르는 걸요. 우리는 글을 읽을 수 없어서 오라버니가 뭐라고 쓰셨는지 몰라요."

    곧 울 것처럼 울상을 짓는 아영의 모습에 은령이 따뜻한 미소를 건네며 말했다. 침울해 하는 아영의 머리를 쓰다듬던 은령이 웃음을 보였다.

    "내가 읽어줘도 괜찮겠니?"

    "정말요? 정말로 읽어 주시겠어요?"

    두 눈을 크게 뜨며 되묻는 아호를 향해 은령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두 아이의 얼굴에 어느새 다시 환한 미소가 걸렸다.

    아호에게서 서찰을 건네받은 은령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두 남매에게 온 서찰의 필체가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문에 큰 뜻이 없던 그녀였지만 서찰에 쓰인 글이 명필이라는 사실은 손쉽게 알 수 있었다.

    놀란 듯 뚫어져라 서찰을 바라보고 있는 은령의 모습에 아호가 마른 침을 삼키며 물었다.

    "사저, 왜요? 형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요?"

    걱정스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호와 아영의 모습에 그제서야 정신이 든 듯 은령이 고개를 가로 저으며 서찰을 읽어가기 시작했다.

    '아호와 아영에게.

    그간 잘 지냈느냐? 부모님을 잃고 화산에 기탁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구나. 부모님의 비보는 가슴 아프지만 그래도 너희들이 무사하단 소식에 마음이 한결 놓였단다. 아무래도 너희끼리 생활하려면 필요한 것이 많을 것이다. 동봉한 전표는 필요한 곳에 쓰거라.

    이제 너희들을 지켜줄 사람은 없다. 부모님도 계시지 않고 나도 너희들의 곁에 있을 수 없구나. 안타까운 말이지만 너희들의 몸은 너희들 스스로 지켜야 한다. 화산이라는 곳에서 무공을 배우도록 해라. 그리고 힘들겠지만 서로 의지해서 살아남아라.

    구태여 나를 만나려고 찾아오지 않아도 된다. 나는 생각보다 잘 살고 있다. 연이 있다면 곧 보게 될 것이니…… 강건해진 너희들을 기대하마. 건강하게 잘 지내야 한다. 또 서신을 쓰마.'

    어느새 비장한 눈빛으로 서로를 응시하고 있는 아호와 아영의 모습에 은령의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아직은 어린 아이들이건만 저런 눈빛을 지녀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측은해지는 은령이었다.

    "아영아, 우리 형 말처럼 강해지자. 그래야 우리 몸도 지키고…… 부모님을 그렇게 만든 놈들에게 복수도 하자."

    고사리 같은 두 손을 꼭 쥐며 말하는 아호의 모습에 그의 손을 꼭 쥔 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두 아이의 눈에 비장함이 어렸다.

    "강해지는 것도 좋지만 우선은 글부터 배우는 게 좋지 않을까? 그래야 나중에 오라버니의 서찰을 읽을 수 있지. 그리고 답장도 쓸 수 있을 거고."

    비장한 두 아이의 모습에 은령이 짐짓 장난스레 말했다. 그제서야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은 아희가 은령의 팔에 매달리며 말했다.

    "사저, 사저가 도와 줄 거죠? 네?"

    "맞아요. 우리를 도와 줄 사람은 사저 밖에 없잖아요."

    자신의 양 팔을 붙들고 환히 웃는 아호와 아영의 모습에 은령이 따뜻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두 아이를 향한 마음이 동변상련인지 측은지심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냥 도와주고 싶었고 두 아이의 삶은 자신처럼 외롭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렇게 두 아이를 바라보던 사마은령의 얼굴에 그리움이 스쳤다.

    ***

    상의감을 나서 처소로 돌아가는 궁녀가 그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늘따라 왜 그렇게 손이 굼떴는지 해시가 가까워져서야 바느질을 모두 마칠 수 있었다.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은 성 안에는 개미새끼 하나 보이지 않았고 어두운 밤을 붉은 등불만이 밝히고 있었다.

    그런 어둠이 무서웠는지 다급히 걸어가는 궁녀의 발걸음 소리가 적막한 자금성을 가득 울리고 있었다.

    '홍화, 나쁜 년. 조금만 기다리면 같이 갈 수 있었을 텐데. 어우, 추워.'

    몰려오는 두려움을 이기려는 듯 궁녀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근처의 전각을 돌아서 옆으로 들어설 때, '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스쳐지나간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갑작스런 소리에 놀란 궁녀의 걸음이 멈췄고 뒤를 돌아봤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들린 소리였지만 아무런 모습도 보이지 않자 고개를 갸우뚱 거리던 그녀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사그락. 사그락.

    어느새 등불이 없는 곳에 접어든 그녀가 희미한 달빛에 의지한 채 길을 걸었지만 이전에 들렸던 그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다시 들려오는 이질적인 소리에 걸음을 멈춘 그녀가 뒤를 돌아봤지만 텅 빈 길 위에 바람만 불 뿐 인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빈 곳을 바라보던 궁녀가 갑자기 스며드는 한기에 잔뜩 몸을 움츠렸다.

    "어, 왜 이렇게 으스스하지?"

    매번 걷던 길이었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쌀쌀한 날씨도 날씨였지만 영문을 알 수 없는 한기에 몸을 움츠리며 다시 걸음을 재촉하는 궁녀였다. 고개를 숙이면서 종종걸음을 치던 그녀가 갑자기 자신의 머리 위로 드리우는 그림자에 고개를 들어서 앞을 바라봤다.

    "꺄아…… 우웁."

    놀란 그녀가 비명을 저질렀지만 채 그 소리가 울려 퍼지기도 전에 낯선 자의 손이 그녀의 입을 막아왔다. 발버둥 치면서 벗어나려고 노력을 했지만 섬섬옥수처럼 고운 그 손을 쉽게 뿌리칠 수는 없었다.

    커다란 눈으로 입을 막아온 자의 모습을 살피던 그녀의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

    '환관?'

    이 황궁에서 궁녀를 해할 존재는 없었다. 궁녀를 범한 자의 끝이 어떻게 될지는 궁에서 생활하는 자들 대부분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환관이라니,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놀란 눈으로 낯선 사람을 바라보던 궁녀의 눈이 다시 한 번 커다랗게 떠졌다. 이번에는 찢어질 것처럼 부릅떠진 눈이었는데 붉게 충혈 되어가는 것이 고통을 참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입을 가로막았던 손이 떼졌지만 비명을 토해내려고 벌린 그녀의 입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커억. 꺼어억.'

    몸 안을 파고든 이질적인 것과 함께 피가 그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몸속을 파고든 시리도록 차가운 손에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조금 전에 느껴졌던 한기의 정체를 깨달은 그녀가 고통스러운 듯 낯선자의 얼굴을 바라봤다.

    '저 사람은…… 분명히……'

    채 생각을 잇지 못하던 궁녀의 얼굴에서 생기가 빠져나갔고 탱탱했던 피부가 주름이 생기면서 쭈글쭈글하게 변했다.

    그림자에 삼켜진 궁녀가 힘없이 쓰러졌다. 목내이처럼 쓰러진 궁녀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그림자가 그녀를 둘러업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어느새 텅 빈 성안에는 다시 적막이 내려앉았다.

    ============================ 작품 후기 ============================

    코멘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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