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88화 (88/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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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력의 흐름

    아무런 말도 없이 앞에 있는 전소평만 바라보는 아삼이었다. 스스로의 출신을 밝히면서 자신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 그의 태도에 아삼은 가만히 그의 눈을 들여다봤다.

    간절함을 띤 눈빛이었지만 확신은 없었다. 앞에 있는 전소평의 행동이 계산된 연기라면 그것은 그것대로 곤란한 상황이었다. 쉽게 전소평을 믿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그가 자신에게 꽤 중요한 인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가지는 아삼이었다.

    '하오문 출신이라…… 하오문이 전소평의 뒤에 있는 건가?'

    아삼의 눈빛은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무섭도록 차가운 눈빛이었다. 마치 자신을 가늠하는 듯한 아삼의 눈빛에 가늘게 떤 전소평이 그의 눈을 바라보면서 애절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믿어줘. 아니! 그냥 가까이에서 지켜만 봐 줘. 나도 이런 내가 믿음직스럽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 당연히 믿을 수 없겠지. 아니, 네가 믿는 기색이라도 비췄다면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일은 없었을 거야. 내가 먼저 너를 버렸을 테니까."

    "……."

    "내가 스스로 내 정체를 밝히고 네 곁에 머무르려는 이유는…… 네가 제일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하오문에서도 내가 정화 태감의 사람으로 남아있어야 위험을 피해갈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야. 나 역시 그런 생각이고."

    앞에 있는 전소평이 꽤 쓸모 있는 사람 같았지만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궁금한 아삼이었다. 뜬금없이 자신에게 사정하는 이 모습은 지금껏 봐왔던 그의 모습과 많이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난번에 겪어봐서 잘 알고 있었지만 전소평은 생각보다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었다. 눈치도 빠른 그였기 때문에 아무리 자신이 정화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갑작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 아삼의 기색을 읽었는지 눈치를 살피던 전소평이 그를 바라봤다.

    "누구에게나 밝힐 수 없는 사정은 있기 마련이야. 나 역시 그렇고. 하오문의 지시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내 생각도 지금은 정화 태감의 사람이 되고 싶고, 그 안에 들어가고 싶어.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적대하지는 않을 거야. 원하는 일이 있으면 나를 통해서 해결해도 상관없어. 아니 그렇게라도 부려지는 것은 내게 좋은 일이겠지."

    "……."

    "네가 필요한 정보는 쉽게 얻을 수 있을 거야. 자잘한 일은 나를 시켜. 대신 정화의 측근과 접선을 했다고 보고할 수 있게만이라도 허락을 해 줘."

    전소평의 마지막 말을 들은 아삼의 미간이 좁아졌다. 하지만 그의 말을 되짚어보던 그가 좁혔던 미간을 펴고 씁쓸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훗, 내가 뭐라고……'

    그동안 정화라는 배경에 힘입어서 자신을 어렵게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당연하다는 듯이 느껴졌던 아삼이었다. 전소평의 말을 듣고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은 자신이 아닌 바로 정화의 사람이라는 것임을 깨달았고 그 사실에 자조하는 그였다. 그리고 그런 아삼의 모습에 눈을 빛낸 전소평이 진실 된 목소리로 말했다.

    "절대 너를 적대하는 일은 없을 거야. 맹세할게. 지금은…… 사정을 밝힐 순 없지만 네 도움이 필요해. 정화 태감의…… 아니, 네 허락이 필요해. 네가 정화 태감에게 알려도 상관없는 일이야. 다만, 하오문에게 내가 너랑 접선하고 있다는 사실만 보여준다면 그걸로 평생 네게 고마워하며 살 수 있을 거야. 물론 일전의 일로도 네게 고마워하고 있어."

    전소평의 태도를 지켜보던 아삼은 그가 조급해하는 것을 알았다. 무슨 이유에서 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의 뒤에 있는 정화라는 이름이 필요한 것 같았고 반드시 이번 일을 성사시키려는 듯한 의지가 돋보였다.

    곰곰이 생각을 하던 아삼이 다시 한 번 전소평을 바라봤다.

    하오문이 뒤에 있는 유능한 자.

    앞으로 있을 황궁의 생활에서 상당히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정화에게도 따로 정보를 알아내는 방법이 있을 것 같았지만 하오문이라는 유명한 문파에 미치지는 못할 것 같았다. 어차피 원정을 떠났던 그였기 때문에 그런 조직의 크기도 크지 않을 거라고 판단한 아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바라본 천소평의 얼굴이 환해졌지만 이어지는 아삼의 행동에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구석에 있는 지필묵을 찾아든 아삼이 자신의 의사를 밝혀왔기 때문이다.

    전심어서를 통해서 의사를 전달할 수도 있었지만 되도록이면 그 사실은 숨기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우선은…… 정화 태감의 의중을 살펴보겠다고? 고…… 고맙다. 아삼. 정말 고마워. 지난 일과 함께 이번에도 네게 신세를 졌다. 조금 전에 한 말은 그냥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아니야. 언젠가 네 일을 도울 수 있다면 그때 이 빚을 갚을 수 있을 거야."

    호언장담을 하는 전소평의 행동에 쓰게 웃은 아삼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공교롭게도 동창이라는 세력을 주도하자는 인학의 말과 함께 전소평이라는 새로운 조력자가 생겨나는 것 같았다.

    '딱히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나도 적대할 필요는 없겠지. 정보라…… 내가 가장 부족한 것들 중에 하나로군. 과연 전소평을 믿을 수 있을까? 남은 것은 내 몫인가?'

    ***

    그 글만 봐서도 힘이 느껴지는 현판에는 '사황련'이라는 단어가 쓰여있었다.

    사파를 대표하는 단체로 무림에 사파 무인들의 의견을 대신 전하는 가장 유명한 곳 중 하나였다. 물론 성정이 폭급한 사파의 무인들을 대표하기 위해서라면 그들을 힘으로 억누를 수 있을 정도로 강한 힘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이 넘쳐나는 곳이 바로 사황련이었다.

    그런 사황련의 중심부에 위치한 전각에는 두 남자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한 사람은 사황련의 련주인 은무강이었고 또 다른 사내는 사황련의 장로이자 독고화연의 아버지인 독고패였다.

    무거운 침묵만이 가득했던 전각에는 노기 가득한 독고패의 음성이 울려퍼졌고 그 목소리를 듣고 있던 은무강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화연……이가 죽은 이유는 모두 사운풍, 그놈 때문이오. 내 당장 그놈을 잡아서 사지를 찢어죽이고 말겠소."

    살기 가득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다짐하듯 읊조리는 독고패였다. 그런 독고패를 다독이며 은무강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독고 장로, 이 일이 어찌 의동생의 잘못이겠습니까? 화연이를 잃은 독고 장로의 슬픔은 잘 알겠으나 그만 그 화를 거두시지요."

    "련주도 잘 알다시피 화연이 그 아이가 사운풍 그 자가 아니었다면 이 사황련을 떠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오.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이 자랐던 아이요. 그런 아이가 그놈 때문에 이곳을 벗어났고 그 일로…… 그런 꼴이 되어서 돌아온 것이오."

    "……."

    독고패의 말에 은무강의 얼굴에도 그늘이 드리웠다. 자식을 가슴에 묻은 자에게 지금 뭐라 한들 위로가 되지 않았고 독고화연도 자신과 남이라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애꿎은 사람에게 화살이 날아가는 것은 막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은무강이었다. 그것도 자신의 의형제인 사운풍이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그 활의 시위가 당겨지기 전에 수습을 해야만 했다.

    "화연이를 잃은 마음을 내 모르는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애꿎은 원한을 만들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운풍이를 마음에 품고 스스로 떠난 화연입니다. 그 결과가 잘못되었다하여 운풍의 잘못은 아니지요. 스스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노기를 가라앉히시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시지요."

    "허나 그놈이 없었다면……"

    "화연이도 제게 남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운풍이에게 따질 수야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화연이도 바라지 않을 테지요."

    "……."

    은무강의 말에 독고패가 침음을 삼켰다. 은무강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차오로는 화에 그대로 감내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독고패였지만 떠오르는 딸아이의 모습과 사운풍의 얼굴에 그저 독고화연이 그렇게 된 이유가 사운풍 때문인 것만 같았다.

    련주의 의동생인 사운풍이 은무강을 만나기 위해서 사황련에 들렀을 때, 사운풍을 본 독고화연의 가슴에는 연모의 정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자유로이 떠돌고자했던 사운풍은 그런 독고화연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떠났다.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던 사운풍을 원망하던 독고화연이었지만 끝내 그를 잊지는 못했다. 이미 마음속으로 들어온 그를 쉽게 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사운풍을 찾아서 사황련을 떠난 독고화연이었고 그녀가 다시 사황련으로 돌아왔을 때는 죽음이라는 것과 함께였다.

    며칠 사이에 흰머리가 더 늘어난 독고패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은무강의 얼굴에도 수심이 가득했다. 자신이 련주를 맡고 있으나 아버지처럼 믿고 따르던 독고패였다. 그런 독고패의 슬픔을 나누지 못하는 자신이 한없이 작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때, 독고화연의 일을 알아보러 간 사내가 련주전으로 들어와서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그 모습에 기다렸다는 듯 은무강이 몸을 일으키면서 사내에게 물었다.

    "그래, 알아낸 것이 있는가?"

    "예, 련주님. 객잔에서 싸움을 벌였던 정파의 무인을 확인했습니다. 성현조라는 자로, 그에 대해서 알아냈습니다."

    사내의 말에 옆에 있던 독고패가 두 눈에 살기를 띠며 되물었다.

    "성현조?"

    "예. 정파의 중소문파인 '성가장' 출신으로 가주의 여동생인 성소현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헌데……"

    "또 다른 것이 있느냐? 그게 무엇이냐? 말해 보거라."

    "그것이…… 아무래도 그자가 황보세가와 관련이 있는 듯합니다."

    "황보세가?"

    뜬금없는 사내의 말에 은무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성현조가 황보가경의 서자라고 합니다. 원체 바람기가 많은 자로 유명했지 않습니까? 그 황보가경이라는 자가……"

    "대단한 놈이군. 천하의 색마가 정파라는 허울을 뒤집어쓰고 계집질을 해대고 있으니."

    "크흠."

    독고패의 신랄한 말에 민망한 듯 헛기침을 내뱉는 은무강이었다. 그런 은무강의 모습에 스스로 내뱉은 말이 멋쩍었는지 계속해서 말을 해보라고 눈짓을 보내는 독고패였다. 그 모습에 고개를 숙인 사내가 말을 이어갔다.

    "성현조라는 자는 외탁을 했는지 그 생김새가 여리여리한 것이 쉽게 황보세가를 떠올릴 수 없는 모습입니다. 다만 얼굴은 호남형으로 황보가경의 얼굴을 담고 있습니다. 황보세가의 무공은 익히지 못했는데 대신 성가장의 검을 익혔습니다. 다만 그 성취가 낮지 않은 것 같습니다."

    "……."

    "황보가경의 씨인 것이 분명했지만 황보가에는 들어서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것 때문에 성가장에서 황보가에 항의를 했지만…… 그 안주인이라는 여인이 당가의 여식으로……"

    "되었다. 그만 나가보거라."

    사내의 말을 끊은 은무강이 심각한 표정을 지어보이면서 손짓하며 말했다. 생각지 못한 자들이 튀어나왔다. 황보세가와 연관이 있다는 말에 은무강의 얼굴이 점점 굳어져만 갔고, 그런 은무강과는 상관없다는 듯이 두 주먹을 불끈 쥔 독고패가 화를 삭이며 읊조렸다.

    "성현조라? 네 이놈……"

    "어찌 하실 생각이십니까? 분한 마음 잘 알겠으나 신중을 기하시지요. 황보세가와 연관된 자입니다. 비록 황보세가의 사람은 아니라고 하나 쉽게…… 건드릴 수 없음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상관없습니다. 황보가경 그 색마가 뿌린 씨가 어디 한 둘입니까? 그 중 하나를 건드린다고 어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막말로 황보가경 그 자에게 한을 품은 여인이 한 둘입니까? 제가 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여자들의 한에 얼어 죽을 인사입니다."

    "……."

    "딸아이를 잃었습니다. 련주와 함께 자랐던 그 딸아이가 싸늘하게 식어서 돌아왔습니다. 이대로 그냥 둘 수는 없습니다. 황보세가보다 더한 것들이 뒤에 있더라도 가만히 두지 않으렵니다. 암요. 그래야지요. 화연이와 관련된 자들은 모조리 찾아내서 그 죄를 물을 것입니다."

    "그리 간단히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자칫 잘못하면 이 무림에 피바람이 불 수도 있습니다. ……정사대전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은무강의 말에 독고패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정사대전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가볍지는 않았다. 어차피 정파와는 적대적인 관계지만 전쟁으로 번진다면 그때는 수습하기도 힘들었고 자칫 잘못 하면 련이 흔들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조금 더 알아보고 움직임을 결정하도록 하시지요. 화연이 역시 저와 남이 아님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 흉수가 드러난다면 제가 나서서 그 아이의 넋을 위로해 주겠습니다."

    "…… 크윽."

    은무강의 말에 결국 분을 삭인 독고패가 고개를 끄덕였다. 련에 매인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수십 년 전에 은금표의 배포에 반해서, 은성신의 자태에 반해서 사황련의 일을 돌보기 시작했고 장로라는 신분을 가지게 된 그였지만 지금은 그 직위가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화연이의 복수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신세라니…… 차라리 그놈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야 함인가? 하아.'

    일의 단초를 제공한 사운풍의 모습을 떠올린 독고패의 인상이 딱딱하게 굳었다. 오늘따라 장로라는 직함이 자신의 어깨를 무섭게 누르는 것 같아 입맛이 쓰디 쓴 독고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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