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79화 (79/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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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투

무고 앞을 서성이던 정훈이 초조한 듯 손톱을 깨물며 깊이 고심을 하고 있었다.

'왜 아직까지 연통이 없단 말인가? 이미 연락이 올 때가 훨씬 지났을 터인데. 그 날, 분명히 내 묘책을 마음에 들어 했는데……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장인태감인 송기득을 만나고 돌아서면서 다시 자신을 찾을 것이라 확신했던 정훈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송기득에게서는 어떠한 연통도 오지 않았다. 대충 대략적인 것만 두루뭉술하게 알린 정훈이었고 나머지 세세한 사항들은 송기득이 자신을 부르면 손 볼 요량이었지만 결국 송기득은 정훈을 부르지 않았다.

며칠을 기다리다 지쳐서 불안한 마음에 무고를 나서는 정훈이었다. 곰곰이 생각에 잠겨서 걷던 정훈이 발밑에 있는 문지방에 걸려서 휘청거렸다. 전각의 앞을 드나드는 문의 지방에 걸린 그가 휘청거리자, 그 앞을 지키고 있던 금의위의 소기(小旗) 한명이 급히 정훈의 팔을 붙잡았다.

"괜찮으십니까?"

자신의 행동이 무안한 듯 미소 지으며 소기에게 붙잡힌 팔을 슬그머니 빼는 정훈이었다.

"흐음. 괜찮네. 고맙……"

소기의 행동에 호의어린 말을 건네려던 정훈이 소기의 얼굴을 바라봤고 정훈의 눈과 소기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낯선 소기의 모습에 정훈이 그 얼굴을 위아래로 훑자 급히 고개를 돌리면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소기였다. 그 모습을 의아해하던 정훈이 하지 못했던 말을 마저 건네면서 걸음을 옮겼다.

"고…… 고맙네."

"…….'

정훈의 말에 목례로 답을 하는 소기가 다시 문의 앞을 지켰다.

'이상하군. 저 소기는 처음 보는 얼굴인데…… 매번 이 시간에 번을 서던 그 소기가 아닌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한 번 소기의 얼굴을 바라보는 정훈이었지만 그의 눈을 피해서 고개를 돌리는 소기였고 뭔가 이상한 느낌에 정훈이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정훈의 행동에 앞을 지키던 소기가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초조해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포착한 정훈이 이상한 낌새에 걸음을 멈췄다.

'무고를 지키는 금의위의 소기가 모두 바뀌었나? 주변에 있는 자들도 왜 다 낯선 얼굴들뿐이지? 가만…… 그동안 몇몇 소기들이 바뀌었어도 한 두 명만 바뀌었지, 이렇게 동시에 모두 바뀐 적은 없었는데……'

그제서야 뭔가를 떠올린 정훈의 얼굴이 굳어졌다. 잔뜩 굳은 얼굴로 주변을 살피던 정훈이 급히 발걸음을 돌려 무고로 향했다. 넘어지려던 자신을 붙잡은 소기의 옆을 스치듯 지나간 정훈의 발걸음이 점점 더 빨라졌고 그의 발이 어느새 무고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숨을 헐떡이며 무고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정훈의 뒤를 따라 검은 복면을 뒤집어 쓴 사내 몇 명이 쫓아 들어왔다. 그 모습에 기겁한 정훈이 무고의 문을 박차며 안으로 도망치듯 들어갔다.

"쫓아라."

앞장서던 복면인이 그의 뒤를 따르던 복면인들을 향해 짧게 소리쳤고 복면인들이 무고 안으로 도망간 정훈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 발자국 떼지 못하고 움직임을 멈춰야만 했다. 갑자기 나타난 장 천호와 그의 수하들이 그들의 앞을 막아섰기 때문이다. 예사롭지 않은 장 천호의 눈초리에 정훈의 뒤를 쫓던 복면인들의 몸이 움찔거렸다.

"웬 놈들이냐?"

매서운 눈초리로 복면인들을 쏘아보는 장 천호였지만 그의 물음을 무시한 복면인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앞을 막아선 자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느새 무고 앞은 복면인들과 장 천호. 그리고 그의 수하들이 각자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서로 부딪쳤다. 최대한 소리를 줄이려는 그들이었지만 소리가 새어나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앞을 지키는 금의위의 소기들은 이렇다 할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이 그저 앞만 주시하고 모른 체를 하는 그들의 행태에 암중에서 무고를 지키던 장 천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떤 자의 소행인지는 모르나, 그 행태가 너무 노골적이지 않은가?'

또 다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장 천호였다. 하지만 그의 걱정과 달리 이미 무고로 들어서는 길은 모두 통제된 상황이었다. 그만큼 철저하게 준비를 한 송기득이었지만 정훈의 눈치를 간과한 것이 그의 실책이었다.

아무리 한직으로 좌천된 그였지만 수십 년의 황궁 생활로 나름 굵었던 동아줄을 잡았던 정훈이었다. 그 시간동안 궁에서 살아남고 승승장구했던 그가 무공도 없이 그렇게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잘 굴러가는 머리와 눈치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훈을 끌어내릴 계획은 처음부터 삐거덕거렸고 미리 눈치를 챈 정훈의 행동은 무고를 지키는 자들과 그를 해하려하는 자들의 충돌을 야기 시켰다.

밖에서 들려오는 격검 소리와 고통을 참아내면서 새어나오는 신음 소리에 잔뜩 겁을 먹은 정훈이 풀려버린 다리로 기다시피 무고의 안으로 들어섰다. 언제 들이칠지 모르는 그들의 행태에 더욱더 무고 깊숙이 숨어드는 그였다. 어느덧 막다른 곳에 다다른 정훈이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몸을 숨기려고 노력했다.

최대한 몸을 웅크리면서 자신의 모습을 감추려고 노력하던 그가 빛이 들어오지 않는 그늘 속으로 숨어들어갔고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온 정신을 귀로 집중시켰다. 여전히 밖에서는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살아남기 위해서 상황을 파악하려고 노력하던 정훈의 얼굴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송기득…… 이 놈. 네놈마저도 나를…… 젠장, 어쩌다가 내 신세가 이리 됐단 말인가? 조급한 마음에 너무 안일하게 생각 했던가? 하아.'

밀려오는 자괴감에 힘없이 고개를 떨구는 정훈이었다.

유현의 밑에서 모든 것을 이룰 것만 같았다.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던 유현의 밑에서 조금씩 입지를 다져갔다면 최소한 그와 같이 황후의 사람으로 부귀영화를 누렸을 테고 더 높은 곳까지 바라봤을 거라고 생각을 했지만, 죽은 사마택의 한 마디에 그의 꿈도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이제는 다시 돌이킬 수도 없었다. 유현에게 돌아가기에도 너무 늦었고, 자신의 입을 막으려는 송기득의 행위를 막아줄 바람막이도 없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신의 신세가 너무 비참하다고 느껴지는 그였다.

'어쩌다가 내 신세가 이렇게 처량하게 됐을꼬. 끈 떨어진 연처럼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곤두박질치고 있는 내가 어떻게 복수를 한단 말인가?'

자조 섞인 웃음을 지으며 딱딱한 책장에 자신의 머리를 찧는 정훈이었다. 어쩌다 자신의 목숨 하나 지킬 수 없게 되었는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비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의 한심함을 스스로 벌하는 듯 그렇게 책장을 향해 머리를 찧어대는 정훈이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탓하던 그때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부딪친 책장의 한 귀퉁이가 떨어져 나갔다. 갑작스런 상황에 놀란 그가 급히 그곳을 바라보자 바닥에 떨어져나간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책장의 한 쪽이 부서진 줄 알았다. 그 와중에 덜컥 내려앉은 가슴을 부여잡은 그가 무고를 지키던 무인들에게 들킬 것을 염려하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다행히 기척은 없었고 아직까지 밖에서는 침입한 자들과의 싸움이 지속되고 있었다.

불안함에 흔들리던 그의 눈이 어느덧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변했고 떨어져나간 조각을 바라보던 그가 매끄러운 그것을 보고 눈을 빛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만든 공간인가?'

조심스럽게 그것을 주워든 그가 그 틈을 들여다봤고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책장 아래에 은밀하게 숨겨진 공간 안에는 빛바랜 죽통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무언가 들어 있을 법한 죽통을 발견한 그가 재빨리 그것을 주워들었다.

'이게 뭐지? 이런 곳에 숨겨놨다는 것은 설마……'

비밀스러운 곳에 숨겨진 비급이라고 생각한 그가 안을 살펴보려고 했지만 밖에서 들리는 소리가 점차 줄어드는 것을 확인하고 급히 바지춤을 풀면서 떨어져 나간 책장의 조각을 다시 맞췄다. 쌓인 먼지를 일부러 옷자락으로 쓸면서 기어들어간 흔적을 만들었고 풀어 내린 바짓단과 함께 죽통을 사타구니에 끼웠다.

거세 된 흔적과 함께 그 주위를 덮고 있던 속옷으로 단단히 죽통을 고정시킨 정훈이 다시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면서 일부러 바닥을 기듯이 구석으로 숨어들어갔고, 흔적을 지운 후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이제 내게도 기회가 찾아 온 것인가? 아직 하늘이 나를 버리지 않았음이야.'

갈무리해둔 죽통을 느낀 정훈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했지만 떨려오는 몸을 주체 할 수는 없었다. 믿었던 유현에게 버려지고 자신의 몸을 의탁하려했던 송기득은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황궁의 무고, 그것도 은밀하게 숨겨진 무언가를 발견한 이상 흥분되는 마음을 주체할 수 있다는 것이 더 이상한 상황이었다. 갑자기 갖게 된 희망에 가슴이 방망이질 치기 시작하는 정훈이었다.

"괜찮은가?"

구석에서 한껏 몸을 웅크리고 잘게 떨고 있는 정훈을 향해 어느새 상황을 정리한 장 천호가 다가와서 물었고, 기척도 없이 갑자기 나타난 장 천호의 모습에 바짝 긴장한 정훈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비급을 손에 넣은 것이 알려진다면…… 죽은 목숨이다. 절대 들켜서는 아니 될 것이다.'

마음은 흥분을 가라앉혀야 된다고 마음먹은 정훈이었지만 한껏 고조된 흥분을 어쩌지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정훈이 되물었다.

"그…… 그들은……"

"다 처리했네.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다른 이유로 떨고 있는 정훈의 모습에 이번 일로 놀랐을 거라고 짐작한 장 천호가 주변을 둘러봤다. 혹시나 다른 마음을 먹고 주변의 비급을 빼돌렸을 가능성도 충분히 고려해 봐야 했기 때문이다. 별다른 흔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에 주저앉아있는 정훈의 몸을 향해 손을 뻗는 장 천호였다.

그 손길에 움찔거리는 정훈이었지만 차마 그 손을 뿌리치지는 못했다. 정훈을 일으켜 세우던 장 천호가 자연스럽게 그의 소매를 훑었고 가슴 안 쪽을 확인했다.

'하긴 이 인사가 그 상황에서 다른 마음을 먹기는 힘들었을 테지.'

별다른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한 장 천호가 잔뜩 움츠린 상태로 눈치를 살피는 정훈을 바라봤다. 다리가 풀렸는지 비틀거리며 걷는 그 모습을 대수럽지 않게 바라본 그가 수하를 움직여서 뒤처리를 하기 시작했고, 그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정훈이었다.

어느덧 무고에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찾아온 적막에 조용히 의자에 앉아서 정리하는 장 천호와 그의 수하들을 바라보던 정훈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얗게 질린 듯한 정훈의 모습에 그를 먼저 돌려보낸 장 천호가 마저 일을 마무리 지었고 그런 무고를 뒤로 하고 자신의 처소로 향하는 정훈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처소로 돌아온 정훈이 주변을 살피며 굳게 문을 닫았다. 그리고 바지춤을 풀면서 갈무리한 죽통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심호흡과 함께 오래된 죽통의 뚜껑을 들춰내자 얇은 양피지 한 장이 떨어졌고 조심스럽게 그것을 받아든 그가 말려진 양피지의 겉에 적힌 글을 바라보며 미간을 구겼다.

"후우."

크게 한숨을 내뱉던 그가 묶인 양피지를 풀면서 조심스럽게 그것을 넘겼다. 공기 중에 날리는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함께 두 눈에 가득 들어오는 글귀에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내 두 눈을 질끈 감은 그가 손에 들린 양피지를 꽉 쥐었다.

처음에 보였던 조심스러움과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던 그의 입에서 다시 한 번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 이것은…… 정녕 하늘의 뜻이던가? 이것이 내 손에 들어온 것은 하늘의 뜻이 여기에 있단 말인가!'

굳어진 정훈의 미간에 내천 자가 새겨졌다. 구겨진 양피지를 쥔 손이 떨려왔고 그렇게 한참을 힘을 주던 그의 손이 천천히 펴지기 시작했다. 이내 감은 눈을 다시 뜨자 서슬 퍼런 안광이 그의 눈에서 흘러나왔다.

결심을 굳힌 듯 차갑게 내려앉은 눈으로 양피지를 바라보던 정훈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것을 익히겠다. 이미 내게 다른 방법은 없으니. 내 이것을 익혀서 기필코……  너희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내가 느낀 이 감정, 분노! 그대로…… 되돌려 주마. 아니 그 몇 곱절로 갚아주마. 기다려라. 이 놈들!'

굳게 다짐하는 정훈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차갑게 가라앉은 방안에 그의 손에 들린 양피지만이 요사스러운 기운을 뿜어내는 듯 했다. 천천히 그 양피지를 바라보는 정훈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 작품 후기 ============================

코멘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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