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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투
폐주의 잔당이 잡히고, 동창의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황궁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 앉았다. 황실에 불만을 품고 있는 또 다른 세력인 마교와 폐주의 잔당이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일이 점점 더 심각해져만 갔기 때문이다.
동창이 주도적으로 이끈 일이 실패로 돌아가자 황궁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무거워졌지만 반대로 그들의 경쟁자 격인 금의위 내의 분위기는 조금 들떠있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금의위 내에서도 한 전각의 분위기는 더욱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화려한 단청과 붉은 기둥이 세워진 금의위 처소에 팽문호가 관자놀이를 눌러대면서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두 눈을 감은 팽문호의 미간이 꿈틀거리면서 깊은 주름이 졌고 이내 감은 눈을 뜬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렇게 조용한 거지? 도대체 폐하의 의중이 무엇이란 말인가? 팽인학 그놈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우리 팽가를 그냥 두는 연유가 무엇일까? 지금까지 보였던 나의 충정?…… 그런 것에 연연하실 분은 아닌데. 아직은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신 겐가?'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던 팽문호가 고개를 돌려서 태화전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답답한 마음에 황제가 있는 곳을 바라봤지만 여전히 황제의 의중은 알 수가 없었다. 도무지 풀리지 않는 의문과 꽉 막힌 가슴에 다시 한숨을 내쉬려는 그때, 그가 있던 처소 안으로 누군가 들어섰다.
가영호였다. 자신과 같은 동지(同知)의 직위를 가진 무당파 출신의 무인. 영락제가 정난의 변으로, 3년간의 전투 끝에 수도 난징에 입성할 수 있게 도와준 공로로 팽문호와 함께 동지(同知)의 직위를 수여받은 그가 고심하며 앉아있는 팽문호를 바라봤다.
그 시선에 아무렇지 않은 듯 표정을 감춘 팽문호가 들어서는 그를 바라봤다. 그런 팽문호와 눈을 마주친 가영호가 말을 건네며 자리에 앉았다.
"여기 있었는가?"
가영호의 물음에 팽문호가 자신을 찾은 연유를 알 수 없다는 듯이 의아해하며 바라보자, 그 시선을 접한 그가 헛기침을 해대며 말을 이어갔다.
"커흠. 내 자네와 긴히 상의할 일이 있어서 이리 찾았네."
"상의할 일이라니?"
예상하지 못한 가영호의 말에 팽문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서로 같은 동지의 직위에 있으나 한 번도 뜻을 같이 한 적이 없던 두 사람이었다. 오히려 금의위에서 서로의 입지를 높이기 위해서 경쟁하는 사이였기 때문이다.
"자네도 알다시피 이번에 폐주 잔당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동창이라는 환관 놈들이 아주 곤혹스럽게 되지 않았는가? 공을 탐하려고 뒤늦게 연통을 넣은 저놈들이 이번 일을 책임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
"…… 사족을 달지 말게."
"커흠. ……그래서 말인데 이번 기회에 우리 금의위의 입지를 공고히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공고히 하다니?"
"말 그대로 저들에게 우리의 위치를 똑똑히 각인시켜주자는 말일세. 그간 무서운 기세로 올라오는 동창 때문에 금의위의 세가 위축된 것도 사실이지 않나? 이번 기회에 우리 금의위의 입지를 높여서 누가 더 우위에 있는지 확실하게 각인시켜 놓자는 말이네. 다시는 우리 금의위의 권위를 넘보지 못하게 하자는 말이지."
황궁 내에서 금의위와 동창의 알력다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번 일만 하더라도 먼저 공을 세우기 위해서 금의위를 견제하느라 중요한 인사를 놓친 상황이었다. 그 실정을 잘 알고 있는 팽문호가 가영호의 말에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공을 세운다면…… 팽인학, 그놈이 벌였던 짓을 어느 정도 상쇄시킬 수 있을까?'
어느 정도 가능성을 점친 팽문호가 조금씩 긍정의 뜻을 비췄다. 지금은 조금이라도 황제의 눈에 들만한 일을 찾아내야만 했다. 자신의 의견에 동조한 듯한 팽문호의 반응에 미소를 짓던 가영호가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일전에 내서당에 교육을 보냈던 백호(百戶) 위수창이 가지고 왔던 내용을 기억하나?"
"위수창? 아! 그 폐주의 잔당과 마교에 관해서 토설하게 만들었다던 그 백호가 아닌가?"
"맞네. 그때부터 계속 마교와 관련된 자들을 솎아내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았었나? 그 결과가 대충 나왔네. 산서 지방에 있는 마교의 분타를 한 곳 알아냈네. 그곳을 습격해서 공을 세우는 것이 어떻겠는가? 폐주의 잔당이 마교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으니 그들을 일시에 타진한다면 다시는 근본 없는 환관 놈들이 우리 금의위의 위치를 넘보지는 못할 것이네."
자신만만해 하는 가영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팽문호였지만 만약 실패했을 경우도 생각해봐야만 했다. 마교라는 곳이 분타라고 하지만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가영호의 말을 곱씹어보던 팽문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허나 만약 실패한다면 더 큰 화를 자초하지 않겠는가? 때로는 가만히 있는 것이 더 나을 때도 있는 법이네만."
팽문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이미 그 위세가 한 풀 꺾인 동창인데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없다 생각하는 팽문호였다. 팽인학 그 아이의 일도 걱정이었지만 황제의 묵인이 있는 지금은 괜히 공을 세우기 위해서 나서는 것보다 자중하는 것이 더 좋을 것도 같았다.
"어찌 실패를 먼저 생각하는가? 이번 폐주의 잔당을 제대로 뿌리뽑지 못 해서 폐하의 심기가 불편한 것은 자네도 들어서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폐하의 심기를 조금이라도 덜어드리는 것이 우리 신하된 자들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마교의 본진을 습격하자는 게 아닐세. 그저 조그마한 분타를 습격하자는 것이네. 그 정도는 우리 금의위의 힘만으로도 충분하네."
자신만만한 얼굴을 보이는 가영호였다. 두 눈을 빛내며 자신을 바라보는 가영호의 모습에 팽문호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심했다.
'가영호의 말처럼 금의위의 입지를 세우기에는 지금이 적기다. 이번 일을 잘 해낸다며 팽인학 그 아이의 실수를 조금이나마 만회할 수도 있을 것이야.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실패한다면…… 흐음.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내가 나서지 않아도 쉽게 물러설 위인이 아닌데……'
아무 말없이 생각에 잠긴 팽문호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그 앞에 있던 가영호의 얼굴이 잔뜩 굳어졌다. 신중한 인사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오늘따라 그 신중함이 답답함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내 참지 못한 그가 팽문호를 향해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뭘 그리 망설이는가? 이렇게 좋은 기회가 다시 생기리라는 보장도 없네. 자네가 꺼린다면 이번 일은 나 혼자……"
"자네의 뜻대로 하게. 허나 너무 쉽게 생각하지는 말아야 할 걸세."
"……알겠네. 내 알아서 준비 하겠네."
팽문호의 말에 가영호의 얼굴에 만족한 듯한 미소가 흘렀다. 자신만만한 얼굴로 환하게 웃어보이던 그의 모습에 불안함을 느낀 팽문호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자네의 생각이니 자네가 알아서 인사를 꾸리게."
"그래도 되겠는가? 나야 좋지만…… 아차. 내 정신 좀 보게. 자네에게 그럴 겨를이 없지. 미안하게 됐네."
"……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가?"
"이번 일은 내가 다 알아서 할 터이니. 자네는 팽가의 일에 전념하시게."
"……."
"어리석은 양자를 들인 일도 모두 가문의 잘못이겠지. 비록 황제 폐하께서 아무런 언질도 없으셨지만 쉽게 생각해서는 아니 될 말이지. 고생하시게."
"지금 나를 능멸하는 것인가!"
"어허. 그럴 일이 있겠는가? 누가 천하의 팽문호를 업신여긴단 말인가? 난 그저 걱정이 되어서 하는 소리였네. 그렇게 역정을 낼 일이 아니네."
"……."
"크흠. 괜한 말을 꺼낸 것 같구만. 나는 도지휘사(都指揮使)께 이번 일의 인가를 받고 인사를 꾸리겠네."
얄궂은 미소를 흘기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가영호의 모습에 그를 노려보는 팽문호가 주먹을 꽉 쥐었다. 분을 참아내는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고 손바닥을 파고든 손톱에 붉은 피가 맺혀들었다.
'도문이라는 곳에서 어찌 저런 인사가 나왔단 말인가? 마교의 분타라고는 하나 쉬이 볼 일이 아닌 것을. 생각이 있는 자라면 철저한 준비를 마치겠지. 자신들의 사람으로 채울 테지만 나로서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을 터. 성공한다면 금의위의 입지가 서니 나로서도 나쁘지 않으나, 만에 하나라도 실패한다면 우리 팽가는 영원히 내쳐질 수도 있음이다. 차라리 이렇게 한 발을 빼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그늘진 얼굴로 다시 한 번 태화전으로 시선을 돌리는 팽문호였다. 팽문호의 입에서 다시 한 번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흐뭇한 얼굴로 앉아 있는 가영호를 향해 금의위 정사품직의 진무사 이정혁과 정오품직 부천호 유병덕이 고개를 숙이며 예를 올렸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지금 당장 솜씨 좋은 백호와 시백호를 추려서 산서로 가거라. 가는 길에 관에 협조를 구해서 관군을 이끌고 빠르게 움직여야 할 것이다."
뜬금없는 하명에 이정혁과 유병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로를 바라봤다. 그런 그들을 향해 가영호가 진중한 어투로 말했다.
"폐주의 잔당과 손을 잡은 마교를 벌할 것이다. 산서에 있는 마교의 분타를 습격할 것이니 철저히 준비해야 할 것이다. 명심하거라. 이번 일에 실패는 없다. 금의위 내에 있는 우리 쪽 인사들을 모조리 투입해야 할 것이다."
"명 받들겠습니다."
유병덕과 이정혁이 군례를 올리고 재빨리 전각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가영호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흘렀다.
'이번 일만 잘 해결된다면 궁내에서 금의위의 입지뿐만 아니라 저 팽가의 콧대를 꺾을 수 있을 것이야. 이제 곧 이 금의위가 내 손으로 들어 올 날이 멀지 않았음이야.'
팽문호의 예상 그대로 자신의 사람들만으로 습격대를 꾸리는 가영호였다.
반 시진이 지난 후, 준비를 마친 금의위의 백호와 시백호 30여명이 붉은 전포 차림으로 시립해 있었다. 그리고 그들 앞에 은빛 갑주 차림의 부천호 유병덕과 그 위에 선 진무사 이정혁이 비장한 눈빛으로 그들을 내려봤다.
"빠르게 움직여야 할 것이다."
"예."
"출발한다."
말에 올라탄 이정혁이 칼을 들어 올리며 소리쳤고 그 뒤를 이어 유병덕과 30여명의 금의위들이 재빨리 말에 올라타면서 이정혁의 뒤를 따랐다.
요란한 말발굽소리와 자욱한 모랫바람만이 도성을 가득 채웠다. 떼를 지어서 지나가는 금의위의 모습에 사람들이 분주히 옆으로 비켜섰다.
바람을 가르며 달리던 말들이 산서성의 깊은 산자락에 멈춰섰다. 그리고 그들 뒤로 기백은 가뿐히 넘을 관군들이 시립했고 멀리 보이는 자그마한 장원을 바라봤다. 이정혁의 손짓에 그 많던 관군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채 반시진도 지나지 않아서 그 분타라고 말하던 장원의 주변을 포위했다.
"지금부터 잔악무도한 마교도들을 소탕한다. 한 놈도 살려두지 말거라."
위엄 있는 이정혁의 하명에 수많은 관원들이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다. 이내 허리춤에서 칼을 빼든 이정혁이 옆에 선 유병덕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공격하라!"
말이 끝나자마자 앞에 있는 장원 안으로 용감히 뛰어드는 유병덕이었다. 이내 유병덕의 뒤를 따라 30여 명의 금의위와 남은 관원들이 일제히 칼을 빼들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마지막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정혁이 곧바로 그들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곧이어 장원 안은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고통으로 신음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런 소리도 잠시, 곧 두려움에 떠는 처절한 비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안으로 들어간 금의위와 관원들이 되려 물러서며 눈치를 살폈다.
"후…… 후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점점 우리가 밀리고 있습니다. 이대로는."
어느덧 절반도 못 미치는 수하들의 모습에 유병덕이 불안한 얼굴로 이정혁을 바라봤다. 제 아무리 황제를 호위하는 금의위라고 하지만 무림에서 이름 높은 자들을 상대하기는 힘들어보였다. 특히 그 유명한 빙마후가 있는 이곳은 범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격이었다.
실의에 빠진 아희를 이끌고 천요희가 물러선 마교의 분타가 공교롭게도 금의위가 쳐들어간 그곳이었다.
"몰살이라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리더냐?"
마교를 습격하러 간 이정혁 일행이 몰살당했다는 소식에 가영호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수하를 잃었다는 슬픔보다 한낱 마교의 분타에 당한 치욕에 더 이가 갈리는 그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만만하게 이 일을 추진했던 자신을 한심스럽다는 듯 바라보고 있는 팽문호의 시선이 눈에 거슬렸다.
"그렇게 자신만만해 하더니 이 무슨 일인가?"
"……."
"아무래도 이번에는 자네가 성급했던 것 같네. 당분간은 몸을 사리면서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는 것이 좋을 것 같네."
"자…… 자네라니? 우리가 한 일이 아닌가?"
슬그머니 발을 빼려는 팽문호의 말에 가영호가 되물었고 그런 가영호의 모습에 비릿한 웃음을 보이던 팽문호가 말을 이었다.
"우리라니? 이번 일은 자네의 생각이었네.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또 하나, 자네의 사람들로만 이 일을 도모해놓고 이제와 책임을 나누려는 것은 너무 뻔뻔하지 않는가? 만약 그들이 공을 세웠다면 자네가 그때도 지금처럼 '우리'라 했겠는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하는 팽문호의 모습에 가용호의 얼굴이 구겨졌다. 할 말을 찾지 못하던 그가 차오르는 분노를 애써 참아내며 팽문호를 매섭게 노려봤다.
그 시선을 받은 팽문호는 이전에 가영호가 그랬던 것처럼 개의치 않은 듯 웃어 보이며 전각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