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69화 (69/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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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우

    멍하게 한 쪽 산을 바라보는 여인의 모습에 동창 요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정신이 나간 듯한 그 모습에 옆을 돌아봤지만 빠른 속도로 멀어져나가는 세 사람과 멀리 붉은 연기를 뿜어내는 것을 보고 다시 고개를 돌리는 그였다.

    "호패를 보이시오."

    "아. 뭐라고 했죠?"

    "호패를 보이라고 했소."

    '아삼'이라는 이름에 멍해있던 아희가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 뒤늦게 따로 챙겨둔 호패를 꺼내려고 할 때, 멀리서 느껴지던 거센 기파가 조금씩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부님.'

    천요희였다. 객잔을 뛰쳐나와서 관군들의 포위망을 힘으로 뿌리치던 그녀가 자신의 기운을 읽고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고 그 사실을 알아챈 그녀가 그곳을 바라봤다.

    앞선 여인의 굼뜬 행동에 인상을 찌푸리던 동창요원이 막 짜증을 터뜨리려고 할 때, 뒤에서 들리는 겁에 질린 비명소리와 다급한 움직임을 느낀 그가 급히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찢어질 듯이 크게 뜬 눈으로 벌어지는 상황을 바라봤다.

    수많은 관군들이 추풍낙엽처럼 휩쓸리고 있었다. 고작 열 명 남짓한 자들의 손에 떨어져나가는 그들의 모습에 놀란 그가 앞선 여인을 뒤로 하고 떨고 있는 관군들을 다독이면서 동료들에게 뛰어갔다.

    "화…… 활을 들어라. 활을 들어라!"

    커다란 외침과 함께 그곳을 막아선 서른 명 정도 되는 궁수들이 활을 들었다. 천천히 시위를 재던 그들이 앞에서 날뛰는 자들을 겨눴다. 쓰러져 있는 아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겨눈 활이 정확히 천요희와 그녀를 호위하는 자들에게로 향했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희이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삼이라고 불렸던 자를 만나봐야 하는데…… 사부님이.'

    지금 상황에서 다급해 보이는 쪽은 그녀의 사부인 빙마후 천요희였다. 아무리 고수라고 하지만 앞뒤로 몰려드는 적에 활까지 더해지면 위험해 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의 사부가 당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 옆에서 고군분투하는 수하들을 조금이라도 살리기 위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다음에…… 다음 기회에…… 다시 만나자.'

    마음을 굳힌 그녀의 기세가 바뀌었다. 폭발적으로 뿜어내는 기세와 함께 바닥을 박찬 그녀가 활을 든 자를 향해 뛰어들었고 그 주위에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 뒤를 따랐다.

    갑작스런 공격에 당황한 그들이 우왕좌왕할 때, 처음에 아희를 붙잡았던 동창 요원이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빼어든 군도를 휘두르는 모습이 사뭇 용맹했지만 가볍게 그 공격을 피한 아희의 장이 그의 가슴을 후려쳤고 피를 뿜으며 나가떨어지는 그가 싸늘하게 식은 채로 움직임을 멈췄다.

    그런 그녀의 뒤로 검을 빼든 자들이 혼란에 빠져 있는 관군들을 도륙했고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천요희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막아라. 저들을 막아라!"

    포위망 바깥쪽에서 나타난 새로운 무리들의 출현에 송상호와 방태옥이 소리를 쳤다. 뒤늦게 혼란을 수습하려 노력했지만 이미 활을 든 궁수들은 대부분이 목숨을 잃은 상태였다.

    "우선은 저들을 붙잡아야 해!"

    "알았어."

    눈빛을 주고받은 둘이 요원들을 모아서 새하얀 손을 휘두르는 아희에게 다가갔다. 당연히 그녀의 주위에 있던 자들이 그들을 막았지만 모두를 막아설 수는 없었다. 동창 요원들의 실력이 생각보다 뛰어났고 그 수도 배가 넘었기 때문에 한 명이서 두 명을 상대하면서 그들을 막아섰다. 다른 요원들이 사내들을 상대하는 사이에 송상호와 방태옥이 홀로 남은 아희를 향해 들이쳤고 꺼내든 군도를 휘둘렀다.

    "죽어라!"

    거력을 담은 도와 함께 달려드는 불나방 같은 자들을 보면서 미간을 찌푸린 아희의 몸이 순간적으로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신묘한 보법과 함께 어느새 그 뒤에 나타난 그녀가 그들을 향해 장을 날렸고 기겁한 그들이 바닥을 굴렸다.

    나려타곤(懶驢墮坤).

    무림인들이 수치스러워 사용하지 못한다는 초식이 그 두 사람에 의해서 재현되었다. 목숨보다 귀한 것은 없었고 그들의 순간적인 선택이 두 사람의 목숨을 살렸다. 뻗어진 아희의 장이 터져나가면서 주변의 공기를 얼렸고 바닥을 구른 두 사람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갔다.

    생각지도 못한 그들의 수법에 얼굴을 굳힌 그녀가 다시 일어선 두 사람을 향해 들이쳤고 급히 송상호가 뒤로 물러서면서 도를 휘둘렀지만 섬섬옥수 같은 하얀 손이 도신을 후려치면서 비어진 그의 복부에 그녀의 발이 꽂혀들었다.

    퍼억.

    가죽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튕겨져 나간 송상호가 피를 흘리며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옆에서 그 모습을 확인한 방태옥의 몸이 얼어붙었다. 싸늘한 눈빛이 그의 눈에 꽂혀들자 굳어버린 몸을 움직였지만 아희의 새하얀 손만 두 눈을 가득 채워왔다.

    "멈춰라!"

    아희의 장에 머리가 터지기 일보직전이던 방태옥의 목숨은 어느새 나타난 구영고가 뻗어낸 황금줄 포승줄에 의해서 구해졌다. 내력을 가득 품은 포승줄이 길게 늘어나면서 아희의 여린 손목을 감쌌고 그 힘을 이용해 달려든 구영고가 그녀의 가슴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순간적으로 휘청거리던 그녀였지만 날아오는 주먹을 막아서며 흔들리는 발을 고정시키면서 바닥을 쓸어 올렸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급히 공중으로 뛰어오른 구영고가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양 팔에 기운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가슴을 막은 팔위로 꽂혀드는 시린 한기를 머금은 장력에 그대로 튕겨져 나가면서 바닥을 굴렀다.

    절정을 바라보는 구영고가 창백한 얼굴로 바닥을 구를 만큼 아희의 무공은 대단했다. 이미 절정은 넘은 듯한 그 모습에 멀리서 수하로 보이는 자들을 상대하던 인학의 눈이 빛났다.

    '저 여인을 잡으면 확실하게 공을 세울 수 있다. 이미 많은 자들을 상대하느라 지쳤을 터.'

    앞선 상대를 아삼에게 맡긴 그가 바닥을 박차며 앞으로 뛰쳐나갔고 그 행동에 차라리 다행이라고 여긴 아삼이 기운을 끌어올렸다. 생각보다 상대하던 자의 무공이 뛰어났다. 동창 요원 두 명이서 힘겹게 막아서고 있었지만 아삼과 인학의 경우에는 과유불급이었다.

    서로의 뛰어난 기량이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가끔씩 보이는 상대의 빈틈에 결정적인 공격을 가하려고 할 때, 서로가 부딪쳤고 번번이 그 기회를 놓치고 있었다. 물론 서로 위급할 때 도움이 됐지만 맞선 자와의 싸움이 길어지고 있었다. 당연히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상대도 더욱 조심스럽게 둘을 대했다.

    인학이 뛰어나가자 혼자 남은 아삼의 공격이 더욱 매서워졌다. 일반적인 속도로 공방을 주고받다가 순식간에 펼치는 분뢰공은 상대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고 틈틈이 밟는 무영보법의 묘리에 당황한 상대는 물러서기에 급급했다. 그렇게 공방이 이어졌고 빈틈을 발견한 아삼의 도가 섬전처럼 휘둘러졌다.

    "크으윽."

    지급받은 날카로운 군도가 상대의 옆구리를 갈랐고 그 공격에 두 눈을 부릅뜬 상대의 눈에 불신이 어렸다. 하지만 그대로 물러설 생각은 없는지 박혀든 군도를 부여잡은 상대의 몸이 그대로 아삼을 향했고 그 무모한 모습에 눈살을 찌푸린 아삼은 급히 도를 버리고 뒤로 물러섰다.

    일반적으로 무인들이 보일 행동은 아니었다. 자신의 무기를 버리는 것은 금할 테지만, 그들과 아삼의 생각이 같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앞선 자를 처리하는 동안 고통스러운 비명소리와 함께 인학의 몸이 튕겨져 나가는 모습이 아삼의 시선에 잡혔다.

    호기롭게 나선 인학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상대가 될 수 없었고 결국 나려타곤의 수법으로 바닥을 구르면서 위기를 피하려 했지만 이미 그 수법을 한번 봤던 그녀가 그것을 놓칠 리가 없었다. 나려타곤의 수법으로 바닥을 구르던 인학이 아희의 내기가 어린 발에 걷어차이면서 멀리 떨어져나갔다.

    건문제의 잔당들과 연관된 친숙한 느낌의 여인.

    고민하던 순간도 잠시, 빠르게 그녀를 향해 다가선 아삼이 기운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익숙한 얼굴을 확인한 아희의 몸이 순간적으로 멈춰 섰다.

    '아삼?'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앳된 얼굴의 모습이 어릴 적 봐왔던 동생의 모습과 겹쳐졌다. 그 얼굴에서 배고픈 자신을 향해 먹을 것을 나눠주며 해맑게 웃던 그 모습을 떠올린 아희가 아련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무슨…… 생각이지?'

    순간 달려들던 아삼의 몸이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가졌다. 뻗어내던 장과 함께 기운의 흐름이 자연스럽지 못했고 주춤하는 순간 그의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

    제자의 모습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던 빙마후의 손속이 더욱 거칠어졌다. 거추장스러운 자들을 날려 보내며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만 했다. 뒤에서 계속 불어나는 관군과 함께 자신을 뒤쫓는 절정의 경지에 이른 황궁의 고수들은 나중에 큰 위협으로 다가올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교 내에서도 손가락에 꼽는 기재인 만큼 아희의 무공은 개중에 으뜸이었다. 달려드는 황궁의 고수들을 차례로 쓰러뜨렸고 그 모습에 흐뭇해하던 천요희의 얼굴에 다급함이 서렸다. 갑자기 달려드는 한 명을 보면서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는 제자의 모습이 눈에 가득 들어왔기 때문이다.

    "아희야!"

    크게 소리친 천요희가 멍하게 서있는 아희를 향해서 빠른 속도로 달려들었다. 이미 절정을 뛰어넘은 천요희의 속도는 섬전을 떠올릴 정도로 순식간에 그녀의 제자를 향해 움직였고 그런 제자를 향해서 장을 뻗고 있는 아삼을 노려봤다.

    하얀 피부를 가진 놈의 몸에서 예사롭지 않는 기운이 느껴졌고 기를 가득 두른 두 손이 자신의 제자를 향해 있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제자를 향해 살기를 품은 자를 용서할 수는 없었다. 아끼던 힘을 끌어내 다시 바닥을 박차자 튕겨진 몸이 불순한 의도를 가진 놈을 향해 빠르게 다가섰다.

    익숙한 듯 단전의 힘을 끌어올리자, 몸속을 빠르게 내달린 차가운 내력이 두 손에 모여들면서 투명하게 변해갔고 주변의 공기들이 쩍쩍 얼어붙었다. 극음을 지닌 기운들.

    소수마공이라고 불리는 절학이 자신의 손에서 펼쳐졌고 눈앞에 있는 괘씸한 놈을 향해 내뻗어졌다. 그 순간 생각지도 못한 소리와 함께 자신을 돌아보는 놈의 얼굴이 가득 들어왔다.

    "안 돼!"

    아희의 목소리였다. 제자의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자신을 돌아보는 앳된 얼굴을 바라본 천요희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아희와 닮았……다?'

    제자와 비슷한 이목구비를 가진 앳된 얼굴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급히 끌어올리는 기운과 함께 뻗어낸 장력을 피하려는 움직임이 그녀의 눈에 가득 들어왔다. 순간 모인 기운을 흩날리려고 노력했지만 이미 너무 늦은 상태였다.

    최대한 기운을 거둬들이면서 그 위력을 줄이려고 하자, 자신조차 감당할 수 없는 기운들이 역류했고 목구멍을 타고 비릿한 것들이 입안 가득 퍼졌다.

    '이런…… 늦었다.'

    그녀의 생각과 함께 손바닥을 타고 분출된 기운들이 앳된 아이의 팔을 타고 흘러들어갔다.

    빠각.

    가로막은 두 팔의 뼈가 부러지는 느낌이 자신의 손을 타면서 전해졌고 시린 한기를 가득 품은 장력에 적중한 아이의 몸이 하늘을 날았다. 끈이 떨어진 연처럼 날아오르는 그 모습과 함께 앞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희의 입에서 그 아이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설마 했던 것이 사실로 드러났다.

    "아삼. 아삼!"

    천요희의 무공을 배운 아희였다. 자신의 사부가 가진 무공의 위력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였기에 날아가는 동생의 모습에 더욱 처절한 목소리로 울부짖었고 천요희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표정이 지어졌다.

    '위력을 줄이려고 몸을 뒤로 뺐다. 반탄력이 느껴지는 것으로 봐서 적지 않은 공력을 가진 것 같았지만……'

    생각보다 실력이 있는 아이였던 것 같았다. 막아선 소수마공의 장력을 줄이기 위해서 몸을 뒤로 던지면서 모든 내력을 끌어 모았고, 스스로도 위력을 줄였지만 문제는 그 아이의 몸에 쏟아진 무공이었다. 바로 소수마공이었다.

    극음의 기운을 품은 그 공격에 적중 당했기 때문에 간신히 막아냈다고 하더라고 몸속에 남겨진 그 차가운 기운이 그 아이의 몸을 얼려버리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이대로 저 아이를 데리고 움직인다면?'

    아주 조금이라도 살릴 가능성이 있겠지만 너무 희박한 가능성이었다. 지금은 쫓아오는 자들을 피하는 것도 어려웠다. 스스로도 기운을 조절하느라 적지 않은 내상을 입었고, 제자인 아희도 온전한 정신이 아니었다. 옆에서 흐느끼는 아희의 모습을 본 천요희가 얼굴을 굳히면서 그녀의 혼혈을 짚었다.

    힘없이 쓰러지는 아희를 옆에 낀 천요희가 사뭇 진지한 말투로 수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이대로 벗어난다. 빠르게 비밀 분타로 이동한 후, 교로 돌아갈 것이다."

    "존명."

    천요희의 단호한 명에 주변에 붙은 자들을 떨쳐낸 그들이 빠른 속도로 그곳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과 반대되는 곳으로 삼청회라고 이름 지었던 건문제의 잔당들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그곳에는 상처 입은 자들이 신음을 흘리면 바닥을 뒹굴었다.

    ============================ 작품 후기 ============================

    코멘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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