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65화 (65/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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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본(拔本)

    왕소화의 물음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금화였다. 그런 금화의 모습에 왕소화가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훗, 내가 어리석었구나. 이 구중궁궐에서 함부로 사람을 믿었다니…… 그것도 폐하의 사람이었던 궁녀를. 나를 살려준 이유는……"

    자조 섞인 뇌까림에 말을 잇지 못하는 금화였다. 몇 년이라는 시간을 같이 보낸 왕소화였다. 비록 모습은 20대의 모습이었지만 이미 반백살을 넘게 산 그녀였고, 앞에 있는 왕소화를 자신의 딸처럼 여겼던 그녀였다.

    비록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남처럼 느껴지지 않던 그녀였기에 마음을 되돌리기를 바랐다. 하지만 복수를 바라보고 황궁에 들어온 그녀가 쉽게 포기할 리는 없었다.

    슬픈 눈을 보이는 왕소화의 모습에 막 입을 떼려던 금화가 갑자기 들려오는 왕소화의 웃음소리에 깜짝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눈물을 보이면서 한동안 소리를 내어 웃던 왕소화가 이내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끝까지 어리석었구나. 나를 도와준 게 아닌 것을…… 그저 배후를 캐기 위해 날 살려둔 것이었음을 이제야 깨닫다니. 아아…… 문향."

    먼 곳을 응시하며 한 남자를 그리워하던 왕소화가 힘없이 두 눈을 감았다. 감았던 왕소화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고 그 모습에 괜히 마음이 저려오는 금화였다.

    순간, 감았던 눈을 번쩍 뜬 왕소화가 침상에 숨겨둔 옥잠을 꺼내들었다. 그 끝이 날카로운 옥잠을 부여잡은 그녀가 자신의 가슴을 찌르려고 손을 들어 올리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들어섰다.

    피잉.

    청량한 소리를 내며 날아오는 무언가가 그녀의 손을 때렸고 그대로 손에 쥔 옥잠을 떨어뜨리는 왕소화였다. 그리고 금화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편히…… 가기를 바랐건만.'

    떨어진 옥잠을 바라보던 금화의 눈에 안타까움이 번졌다. 앞으로 고초를 겪을 왕소화의 모습에 그녀의 두 눈이 붉게 변했다.

    "이것이 어찌 된 일이냐?"

    동창요원들을 대동하고 들이닥친 금무정이 재빨리 왕소화의 혈을 점했다. 움직임을 멈춘 왕소화와 함께 몰래 한숨을 내뱉은 금화가 고개를 숙이면서 말을 이어갔다.

    "마마를 노린 자객들인 것 같은데, 이게 무슨 영문인지는 저도 잘……"

    쓰러진 자들을 바라보던 금무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모두들 일수에 목숨을 잃은 듯한 모습이었다. 자신 못지않은 어쩌면 자신보다 뛰어난 무공을 가진 자에게 당한 모습에 굳은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던 그의 시선이 금화라는 궁녀에게 머물렀다.

    "네가……"

    - 폐하의 명이시네. 모르는 체하게.

    '육합전성(六合傳聲)을 사용하는 고수라니.'

    사방에서 들려오는 듯한 소리에 주변을 둘러보던 금무정의 시선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금화에게 멈췄다. 이내 조금 전에 들려온 육합전성의 뜻을 눈치 챈 그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금화에게 다가가서 그 혈을 짚었다.

    - 일반적인 궁녀가 시체를 보고 오롯이 서있는 경우는 없지요.

    금무정의 전음에 쓰게 웃은 금화가 허투루 짚는 혈에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져 내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확인하던 금무정이 쓰러진 자들을 확인하며 얼굴을 굳혔다.

    '이들은 동창에 속해있던 자들이다. 신문하를 쫓던 자들이 늦었을까?'

    "살아남은 두 여인을 연행토록 하거라. 자해할 위험이 있으니 각별히 주의하고 나머지는 시신을 수습한다. 조 당두의 지휘 하에 요원 셋이 남아서 처리하고 나머지 두 명의 당두와 요원들은 나를 따르라."

    첩형 금무정의 명령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그들이었다. 명을 받은 당두와 요원들이 쓰러져있는 시체를 수습하고 남은 자들이 전각을 벗어났다.

    ***

    신문하를 추포하기 위해서 움직인 자들은 이미 비어진 전각을 보고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특히 같은 첩형인 금무정의 명을 받은 만태산의 얼굴은 사정없이 구겨져 있었다.

    '그놈에게 명을 받는 것도 억울한 마당에 이자를 놓친다면…… 모든 것이 내 책임이다!'

    떠오른 생각과 함께 같이 온 요원들을 닦달하는 만태산이었다. 가진바 무력은 절정에 다다른 그였지만 다른 실력들은 상당히 부족했다. 그가 첩형의 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송기득의 도움 때문이었다.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었지만 모두가 쉬쉬할 뿐이었다. 그런 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것에 대한 자격지심이 심했고 그런 감정은 그의 성격을 더욱 괴팍하게 만들었다.

    "뭣들 하는 거냐! 어서 그놈들의 흔적을 찾아라!"

    다그치는 만태산의 말에 당두와 요원들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도망간 자들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던 그들 중 한 명이 궁의 북쪽으로 향하는 문에 남아있는 흔적을 발견했다.

    "여기 뜯겨진 옷자락이 있습니다. 직위가 높은 환관의 소매 부분인 것 같습니다."

    한 당두의 외침에 그곳으로 달려든 만태산의 미간이 좁아졌다. 안력을 더해 주변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이질적인 무언가가 들어왔다. 주변 경관과는 섞일 수 없는 하얀색 무언가를 확인한 그가 크게 뛰어 오르면서 그 앞에 내려섰다. 표홀한 그 신법과 함께 아래에 놓인 것을 집어든 그의 눈이 빛났다.

    바닥에 떨어진 것은 은자 오십 냥짜리 전표였다.

    제법 큰 액수의 전표와 북으로 향하는 문에 걸린 옷자락.

    상황을 유추하던 만태산의 입에 호선이 그려졌고 어느새 그의 시선이 이번 일의 중심이 된 후궁이 있는 황궁의 북쪽으로 향했다.

    모두의 시선이 북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에 있던 몇몇은 지금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을 잡으러 온다는 사실을 알고 도망간 자가 궁의 북쪽으로 향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전표 주변으로 몰린 요원들을 확인하던 아삼은 뜯겨진 옷자락이 걸쳐있는 문을 향해 다가섰다. 천천히 그 문을 살피던 아삼이 움직이는 동선을 생각하면서 걸쳐진 옷자락을 바라봤다.

    '뜯겨진 부분이 매끄럽다. 칼로 자른 듯한데?'

    그런 그의 옆으로 몇몇 당두와 신입요원들이 다가왔고 천천히 옷자락을 살피는 아삼의 행태에 그들의 시선도 그곳으로 쏠려다. 그런 그들의 시선을 인식한 아삼이 뒤를 돌아보자 모두가 서로를 바라보며 의문을 토해냈다.

    "이상하군. 북쪽으로 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

    구영고의 의문에 옆에 있던 당두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윽고 찢어진 옷자락을 바라보던 주조화라는 당두의 눈이 빛났다.

    "칼로 잘린 옷자락이네. 우리의 눈을 돌리기 위함이야."

    주조화의 말에 주변에 있던 모두가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만태산이 뒤에 있던 그들을 불러 모았고 확신에 찬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북쪽이다! 우리는 이대로 북쪽으로……"

    "의도적인 흔적입니다. 우리들의 이목을 속이려는……"

    "닥쳐라! 고작 당두 주제에 내 말을 가로 막는 것이냐? 지금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이더냐?"

    "그…… 그것이."

    만태산의 호통에 주조화가 말끝을 흐렸다. 노기를 띤 그 모습에 주변의 요원들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이내 머쓱한 그가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 사이 전표가 놓인 근처에 깊게 파인 발자국을 바라보던 아삼이 눈을 빛냈다. 궁내에서 경공을 사용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특히 환관들이 머무는 전각에 이렇게 깊은 발자국을 낼 정도의 경신술을 사용하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발자국이 향한 방향과 함께 동선을 떠올린 아삼이 눈에 익은 구영고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응? 무슨 일이냐?"

    갑작스런 아삼의 행동에 놀란 구영고가 그를 바라봤고, 아삼이 가리키는 손가락과 함께 발자국을 확인한 그가 상황을 파악하고 만태산을 향해 보고했다.

    "아무래도 이는 이목을 돌리기 위해 일부러 드러낸 흔적 같습니다. 저쪽에 찍혀있는 족적으로 보아 아무래도 오문 쪽으로 향한 것 같습니다."

    "지금 너도 나를 무시하는 것이더냐?"

    "그것이 아니오라…… 그쪽으로 가는 것을 대비해도 나쁠 것은 없다고 판단되어 첩형의 의중을 묻는 것입니다."

    구영고의 말을 듣고 생각에 잠긴 만태산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럴 가능성도 있었고 아무래도 팽가의 사람이라고 알려진 구영고는 유현의 사람인 주조화보다 대하기가 껄끄러웠기 때문이었다.

    "좋다. 너와 주 당두 둘이 신입 요원들 몇을 이끌고 오문 쪽을 향하거라. 나는 다른 이들과 궁의 북쪽을 향하겠다."

    "예. 첩형."

    결국 만태산의 명이 내려졌고, 아삼을 비롯한 똘똘한 아이들을 꾸린 구형고가 오문을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멀어지는 그 모습을 보던 만태산은 굳어진 얼굴로 남은 요원들을 이끌고 황궁의 북쪽으로 향했다.

    시간이 촉박했다. 계속해서 달려가는 신문하였지만 무공을 익히지 않은 그의 몸은 굼떴고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무거운 발을 놀리고 있었다. 옆에서 그를 보필하던 신영용은 그런 그의 모습을 어쩔 수 없이 바라만 볼 수 밖에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그를 업고 빨리 오문을 나서고 싶었지만 아직은 황궁 안이었다. 환관을 업고 움직이는 모습은 다른 이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그저 노쇠한 신문하를 재촉할 수 밖에 없었다.

    "멈추시오. 무슨 일이요?"

    "……."

    오문으로 나서기 전에 거쳐야 하는 문 앞에 금의위 복장을 한 두 사내가 앞을 지키고 있었다. 동이 트기 전이라 황궁을 나서거나 들어오는 일은 드물었다. 그 규모가 대단한 자금성인 만큼 사이사이에 그 문을 지키던 금의위가 그들을 막아섰고 횃불을 비추면서 얼굴을 확인했다.

    "나는 동창의 당두 신영용이다. 지금 태감을 모시고 바삐 수행할 일이 있으니 어서 그 문을 열어라."

    "……동창?"

    동창의 당두라는 말에 막아서던 두 금의위의 얼굴이 굳어졌다. 실상 동창이 생겨나고 그들에게 가장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게 된 세력은 바로 금의위였다. 감찰과 함께 황제의 손과 발이 되었던 그들이었지만 동창이 생겨나고 독점적으로 가졌던 특별한 권한들이 나눠졌기 때문이다.

    "아직 동도 트지 않는 시간에 어디를 가는 거요?"

    "그건 너희들이 알 것 없다."

    "우리는 문을 지키는 금의위요. 맡은 바 소임을 다하는 것뿐이니 협조해 주기 바라오."

    "이익…… 비켜 서거라. 시급을 다투는 일이다."

    "흥! 따로 전달받은 사항이 없으니 우리도 이대로는 물러서기 힘드오."

    "시급을 다투는 일이라고 하지 않았더냐? 어서 문을 열어라."

    강압적으로 나오는 신영용의 태도에 움찔한 두 금의위였지만 그럴수록 더욱 반감이 들었다. 어차피 동창인 저들과 대립을 한다고 하더라도 금의위 내에서는 오히려 잘했다고 할 것이었기 때문에 더욱 막나가는 감도 있었다.

    그런 둘을 보는 신영용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와 함께 온 신문하의 얼굴을 보던 그가 뒤따르던 환관을 향해 눈짓을 건넸다. 그리고 그 눈빛을 받은 남은 두 환관이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갑자기 달려드는 이들의 행태에 기겁한 둘이 허리에 차고 있던 도를 빼들었지만 무공을 익힌 환관들의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하지만 문을 지키는 두 금의위도 그렇게 호락호락 당하지만은 않았다. 쳐들어오는 단검을 막아낸 그들이 뒤로 물러서며 이 사실을 알리려 할 때, 근처에 있던 신영용이 움직였다.

    허리춤에 비껴서 찬 군도가 '스르릉.'소리를 내면서 뽑혀짐과 동시에 시린 빛이 번쩍였다. 그리고 그 앞을 막아서던 두 금의위의 목에 붉은 실선이 그어졌다.

    쿠웅.

    그대로 쓰러지는 두 금의위를 바라보던 신영용의 입에서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다급한 마음에 급하게 끌어올린 내기가 그의 몸에 무리를 줬고 인상을 찌푸린 그가 남은 두 환관을 향해 나직이 말했다.

    "이대로 오문까지 이동한다. 공공을 모셔라."

    신영용의 말과 함께 두 환관이 막아선 문을 열어젖혔다. 활짝 열린 문과 함께 조심스럽게 신문하의 팔짱을 낀 둘이 움직이려 할 때, 일련의 무리들이 다가오면서 그들을 향해 암기를 던졌다.

    티디딩. 티잉.

    뽑아든 군도로 암기를 쳐내던 신영용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상황에 멍하게 서 있는 두 환관을 본 그가 그 앞을 막으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고 그제서야 움직이던 그들이 신문하를 이끌었다.

    "멈춰라!"

    커다란 외침과 함께 빠른 속도로 뛰어나간 주조화가 그 뒤를 쫓았지만 신영용이 휘두르는 도에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신영용! 네놈도 폐주의 잔당이었더냐?"

    "흐음. 아무리 양자라고 하나 아버님이 가시는 길이니 나도 따를 수 밖에……"

    침음을 삼키며 내뱉는 신영용의 말에 뒤에 있던 인학이 움찔거렸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던 아삼의 입에 쓴웃음이 걸렸다. 그와 친분이 있는 건지 굳은 표정으로 주조화가 그를 바라봤고, 그 표정을 바라보던 신영용의 눈빛이 빛났다.

    "쳐라!"

    갑작스런 그의 외침과 동시에 같이 움직였던 신입 동창요원들 중에 둘이 남은 동기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아삼의 옆구리로 살기를 머금은 주먹이 꽂혀들었다.

    ============================ 작품 후기 ============================

    코멘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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