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63화 (63/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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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단

    어둠이 내려앉은 자금성, 날쌘 몸놀림의 여리여리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땅을 박차고 전각 위로 날아올랐다. 몸을 바짝 낮춰서 주변을 살피던 그 그림자가 다시 깃털처럼 가볍게 지붕 위를 날았고 주변에 숨어있던 강대한 기운을 품고 있던 자들이 그 기척을 눈치 챘지만 일부러 막지 않았다.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한 듯 다시 한 번 주변을 살피던 그림자가 어둠 속에 몸을 맡겼다.

    "왔느냐?"

    새까맣게 어두운 전각 안, 우직하고 낮은 음성으로 한 남자가 어둠 속에서 몸을 드러낸 그 그림자를 내려 보았다. 그와 동시에 어둡던 곳에 불이 켜졌고 자신을 내려 보는 그 눈빛을 확인한 그림자가 재빨리 무릎을 꿇으면서 예를 올렸다.

    "그래.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났느냐?"

    "예, 폐하. 공영미인 왕씨가 후궁첩지를 받자 여기저기에서 줄을 대려하고 득달같이 달려들고 있사옵니다. 그리고 공영미인 왕씨 또한 그들이 내민 손을 마다하지 않고 있사옵니다."

    가만히 그 말을 듣고 있던 황제의 눈빛이 빛났다. 이제 정리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다시 몽골이 준동하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친정을 생각하던 그였기 때문에 그들을 박멸할 수는 없지만 힘을 빼놔야만 했다.

    "그렇겠지. 또 다른 사실은?"

    "폐하, 혹시 방효유를 기억하시옵니까?"

    "방효유? 그 자에 대해서 묻는 연유가 무엇이냐?"

    금화의 입에서 '방효유'라는 말이 튀어 나오자 영락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 이름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영락제의 머릿속에 한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방효유.

    건문제의 스승이자 당대 최고의 학자로서 존경받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연왕 제거론의 주역으로 영락제와는 처음부터 섞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제위에 오르게 된 영락제였지만 그렇다고 그를 놓을 수도 없었다. 당대 존경받는 학자가 자신의 편에 서 준다면 자신이 왕위에 오른 명분을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위에 오른 자신을 찬양하는 글을 쓰라고 명을 내렸지만 '연적찬위(燕賊簒位, 연나라 도적이 황위를 찬탈하다)'라는 네 글자가 돌아왔고 끝내 자신을 거부한 방효유의 십족을 멸한 영락제였다.

    그런 방효유를 앞에 있는 금화라는 궁녀가 거론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왜 지금 그 이름을 내뱉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영락제였다.

    "공영미인 왕씨가 방효유와 관련이 있는 듯 하옵니다."

    "방효유와 관련이 있다니? 조금 더 소상히 말해 보거라."

    굳어진 얼굴로 자신을 내려 보는 황제의 용안에 급히 고개를 숙인 금화가 천천히 왕소화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수십 년 전에 북경에 문재라는 이름의 상인이 있었다. 그는 작은 상단을 꾸리면서 이곳저곳 장사를 다녔는데, 산둥지방으로 상행을 가던 중 막 부모를 여읜 고아 여자 아이 하나를 발견했고 이를 불쌍히 여긴 그가 그 여아를 거둬들였다. 똘망똘망한 눈망울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 그 아이를 거뒀는데 차차 자라면서 그 미색과 총명함이 남달랐기에 이를 어여삐 여긴 그는 그 여아를 아들 중에 가장 어린 막내 아이의 배필로 정했다.

    막내아들의 이름은 문향이었고, 그 문향이라는 아이 또한 문에 특출난 재능을 보였다. 그 총명함이 널리 알려졌고 후에 최고의 학자로 존경받던 방효유의 제자로 들어갈 수 있었다.

    "허면 그 고아라던 여자 아이가 혹…… 왕소화더냐?"

    "예. 폐하. 그 아이가…… 공영미인 왕씨이옵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황제가 그 말을 끊고 다급히 묻자 그 물음에 금화의 답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제서야 상황을 이해한 황제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럼 그 문향이란 자는 방효유의 십족이 멸해졌을 때 함께 화를 입었겠구나. 그래서 왕소화가 내게 칼을 품게 된 것이고……"

    "황공하옵니다. 폐하. 아무래도 정혼자의 복수를 하기 위해 황궁으로 들어온 것 같사옵니다. 그래서 폐주의 잔당들과도 쉽사리 손을 잡은 것 같사옵니다."

    금화의 말을 들은 영락제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사방이 적의에 가득 찬 이들 뿐이구나. 어쩔 수 없겠지. 이 또한 내가 만든 업이니……"

    탄식을 내뱉던 황제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런 영락제의 눈치를 살피던 금화가 다시 입을 떼었다.

    "그리고……"

    "또 고할 것이 있느냐?"

    "하북 팽가의 양자라는 자가 공영미인 왕씨의 손을 잡고 있사옵니다."

    "뭐라? 하북 팽가?"

    뜻밖의 말을 듣고 놀란 황제가 되물었다. 그런 황제를 향해서 고개를 조아리는 금화였다. 그녀 스스로도 그 가문을 언급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고 그 말을 전해들은 황제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고심을 하던 황제와 함께 침묵이 내려앉았고 다시 황제의 중후한 목소리가 그곳을 가득 울렸다.

    "팽가라…… 우선은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거라. 내 너를 본 지 수십 년이 넘었으니 경거망동하지 않을 거라 믿는다만 그래도 조심하도록 하거라. 아직은 그들이 너의 정체를 몰라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사옵니다. 폐하."

    자신을 향해 예를 올리며 다시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금화의 뒷모습을 믿음직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황제였다. 공영미인 왕씨인 왕소화를 보필하던 궁녀도 결국 황제의 사람이었다. 제위전에도 기재라고 불렸던 영락제였다. 황궁에서 일어날 어지간한 일들은 모두가 그의 눈 안에 있었다. 실제로 그의 눈을 벗어나 있는 것은 극히 드물었고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들이었다.

    어둠을 틈타 처소로 돌아온 금화가 재빨리 야행복을 벗고 궁녀의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명경으로 다가가서 옷매무새를 가다듬기 시작했다. 명경에 비친 갓 20살을 넘긴 듯한 앳된 자신의 모습에 금화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금화가 궁에 들어온 지도 벌써 40년이 넘었다. 10살을 갓 넘긴 그때 들어와 지금껏 지냈으니 자신의 반백을 궁과 함께 한 것이었다. 영락제의 옆에서 황제를 모시던 그녀가 왕소화의 궁녀로 들어가게 된 것은 모두 영락제의 명 때문이었다.

    주안술을 통해 20대의 얼굴을 갖게 된 그녀의 정체를 왕소화는 알지 못했다. 왕소화뿐만 아니라 영락제와 그를 옆에서 보필하는 자들을 제외한 그 어느 누구도 그녀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자신의 정체를 철저하게 숨긴 채 왕소화의 동태를 살피는 금화였다.

    ***

    화려한 단청에 붉은 쌍룡이 새겨진 태화전 앞에 선 정화가 옆에 있는 환관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고개를 숙인 환관이 태화전 안을 향해서 낭랑한 목소리로 고하였다.

    "폐하, 정화 태감 들었사옵니다."

    "들라하라."

    태화전 안으로 들어선 정화가 자신을 바라보는 황제를 향해서 예를 올렸다. 그런 정화의 모습을 바라보던 황제가 옆에 선 장인태감 송기득을 향해 나직이 말했다.

    "내 정화와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다들 물러가도록 하라."

    "예. 폐하."

    영락제의 명에 송기득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리고 태화전에 시립해있던 환관들과 궁녀들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그 눈짓에 시립해있던 환관들과 궁녀들이 조용히 태화전을 나섰다. 마지막으로 태화전을 나서던 송기득의 눈과 정화의 눈이 부딪혔다. 급히 눈을 돌리는 송기득이었지만 자신만만한 정화의 눈빛이 못마땅한 송기득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폐하의 신임을 받는다고 의기양양한 꼴이라니…… 저런 놈을 독대하는 이유가 뭐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궁금증을 억지로 억누르며 조용히 태화전을 나서는 송기득이었다.

    "물러가라!"

    허공에 대고 위엄있는 목소리를 내뱉는 황제의 명에 주변에서 암중으로 호위하던 자들도 거리를 벌렸다. 어느새 주변이 조용해지자 정화를 가까이 부른 황제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가 맡아주었으면 하는 일이 있네."

    "예, 폐하. 하명하시옵소서."

    심각한 황제의 태도에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정화가 읍을 하면서 답을 했고 그 모습을 믿음직스럽게 바라보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후궁 중에 이번에 첩지를 받은 왕소화라는 아이가 있네. 그 아이가 내게 역심을 품고 있다더군."

    "……."

    "지금껏 그저 지켜봐왔으나 이제는 슬슬 정리를 해야 할 것 같네. 곧 몽골로 원정을 떠나야 하는데 언제까지 끌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 아이의 뒤를 봐주는 자들이 폐주의 잔당들인 것 같으니 자네가 동창을 움직여서 이 일을 정리해 주게."

    "예. 폐하."

    "그리고 하나 더……"

    말을 맺지 못하며 머뭇거리는 황제의 모습에 명을 받던 정화가 긴장한 듯 침을 삼켰다. 황제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뭔가가 있다는 것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이번 일에 건문제의 잔당을 제하고도…… 하북의 팽가도 관련이 있는 듯 하네."

    "하북 팽가라면…… 팽문호 말씀이십니까? 그자는 금의위의……"

    놀란 정화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그의 행동에 씁쓸하게 웃던 황제가 말을 이어나갔다.

    "그 사람은 모르는 일이겠지. 알고도 막지 않을 사람이 아니지. 후사를 이을 아이에게 일을 일임한 것 같더군. 그리고 그 아들놈의 실책인 게지. 가문을 말아먹을 실책."

    "허면 팽가를……"

    "허허허. 그럴 수는 없지 않겠는가? 자네도 알다시피 팽문호는 지금껏 나에게 충성을 바쳐왔네. 지금의 금의위를 반석에 올려놓은 것도 팽문호의 역할이 컸지. 고작 양자 하나 때문에 하북 팽가를 내치기에는 너무 매정하지 않은가?"

    "양자라 하시면……"

    "전각대학사(殿閣大學士)를 지냈던 이인후의 손이라고 하더군. 그 아이가 왕소화라는 아이와 손을 잡은 것 같네. 팽문호, 그에게는 내 따로 언급을 할 것이니 이번 일에 하북 팽가는 관여하지 않은 걸로 해 주게."

    황제의 명에 정화가 읍을 하고 태화전을 빠져나왔다.

    황제를 알현하고 처소로 돌아온 정화가 두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어느덧 생각이 정리된 듯 눈을 뜬 그가 조용히 누군가를 불렀다.

    "게 있느냐?"

    정화의 부름에 환관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고 그 환관의 얼굴을 확인한 그가 나직이 말했다.

    "지금 가서 동창의 첩형 금무정과 아삼이라는 아이를 데려 오거라. 은밀히 데려와야 한다."

    정화의 명에 읍을 하던 환관이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사내가 사라진 지 얼마되지 않아 첩형인 금무정이 전각 안으로 들어서며 정화를 향해 예를 표하였다.

    "정 공공을 뵈옵니다. 부르셨습니까?"

    "어서 오시게. 오랜만이네. 자네와 긴히 논할 일이 있어서 이리 불렀네. 우선 자리에 앉게."

    금무정이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번에는 아삼이 전각 안으로 들어섰다. 정화를 향해 예를 올린 아삼이 자리에 앉아있는 금무정을 발견하고 놀란 듯 움찔했지만 이내 그 기색을 감춘 채 다시 그를 향해 예를 올렸다. 갑작스런 아삼의 등장에 금무정 또한 놀란 듯 정화를 바라봤다.

    "이 아이는 아삼이라고 하네. 자네도 아는지 모르겠지만 이번에 동창에 들어간 신입요원일세."

    놀란 금무정을 향해 정화가 말했고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던 금무정이었다. 예전에 사마택의 명으로 직접 이 아이에 대해서 조사를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신도 이 아이를 알고 있습니다. 헌데…… 어찌 이 아이까지 부르신 겁니까?"

    자신과 함께 아삼을 부른 이유가 궁금한 금무정이었다. 정화와 죽은 사마택을 제외하고는 자신과의 정확한 신분을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도 그가 정화의 사람이라는 것은 황궁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지 못했다. 숨겨야 할 자신까지 드러낸 채 부르는 일이라면 그만큼 급한 일이라고 판단한 그가 정화를 바라봤다.

    "자네가 맡아줘야만 하는 일이 있네. 그리고 앞으로 저 아이를 이끌어줘야 할 것이네."

    "……일이라시면?"

    "황명이네. 폐주의 잔당이 이 황궁에 모습을 드러냈네. 동창에서 이번 일을 맡아줬으면 하네. 첩형인 자네가 적합하겠더군. 이번 기회에 깨끗하게 정리하라는 폐하의 명이시네."

    "폐주의 잔당이라 하시면……"

    "공영미인 왕씨. 왕소화라는 후궁과 신문하라는 환관 놈이네."

    정화의 말에 아삼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왕소화라면…… 인학, 그 아이가 손을 잡은 그 후궁이 아닌가?'

    커다래진 눈을 굴리며 생각에 잠긴 아삼이었다. 그런 아삼의 표정을 놓치지 않던 정화가 아삼을 향해 전심어서를 날렸다.

    - 너도 알고 있었더냐? 이 일에 팽가가 관련된 것을……

    갑자기 머릿속에 울리는 소리에 당황한 아삼이 정화를 빤히 바라봤다. 이내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그가 고개를 조아리면서 그동안 수련했던 전심어서를 사용했다.

    - 소인은 그저 팽인학이라는 아이가 그 후궁과 손을 잡은 것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 후궁마마와 폐주의 잔당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몰랐습니다. 팽가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팽인학 그 아이가 그저 후궁의 후광을 얻기 위해서 손을 잡은 것으로만 알고 있을 것입니다.

    아삼이 사용하는 전심어서에 놀란 정화였지만 일부러 내색하지는 않았다. 자신마저 어렵게 배운 수법을 짧은 시간 내에 비슷하게 흉내내는 그 모습에 다시 한 번 그의 눈이 빛났고, 팽가와 관련된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침묵하고 있는 정화의 모습에 금무정이 심각한 얼굴로 되물었다.

    "허면 소신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 후궁을 잡아들이게. 그리고 그 후궁과 관련된 폐주의 잔당들도 이번 기회에 모조리 잡아들이게. 그리고 하나 더."

    "또 분부하실 일이 있으십니까?"

    "이번 일에 아무래도 팽가가 엮인 것 같네. 하지만 팽가를 살리라는 폐하의 명이 계셨으니  염두에 두게."

    "예. 알겠습니다. 공공."

    단호한 표정으로 금무정이 길게 읍을 했다. 그런 금무정을 향해 정화가 서책 하나를 건네면서 나직이 속삭였다.

    "잡아들일 명단이네. 은밀하고 신속하게 처리해야 할 것이네."

    비장한 얼굴로 당부하는 정화의 말에 금무정이 부복했다. 그 모습에 아삼 역시 부복을 하면서 눈치를 살폈다.

    - 너는 이 일을 은밀하게 팽가에 알리거라. 어차피 그들은 이 일에서 빠질 터. 그들에게 빚을 지우면 더 이상 너를 귀찮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그와 팽가와의 관계에 대해서 알고 있는 정화였다. 이제 자신의 사람으로 여기는 아삼을 챙기는 그였고 은밀한 정화의 전음에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는 아삼이었다.

    ============================ 작품 후기 ============================

    코멘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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