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62화 (62/204)

0062 / 0204 ----------------------------------------------

결단

"네 침상에 그들의 비리와 죄가 적힌 목록. 그리고 그 증좌들이 놓여 있었다?"

"예. 공공."

"흐음. 따로 짐작 가는 것이라도 있느냐?"

"저에게 그 물건들을 몰래 전해줄 자는 없사옵니다. 누군가의 농간이 아닐지."

송기득의 하문에 급히 고개를 조아리던 송상호가 불안한 표정으로 답을 했고, 송기득이 미심쩍은 눈초리로 앞에 놓인 증좌들을 들쳐봤다.

"흠. 어찌 생각하느냐?"

"소인은 그저……"

"너한테 묻는 것이 아니다. 이제 모습을 드러내라."

"……."

송기득의 말과 함께 하얀색 목면을 착용한 자가 모습을 보였다. 갑자기 나타난 그 모습에 기겁을 하던 송상호가 급히 고개를 조아렸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낯선 자가 송기득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공공을 뵈옵니다."

"되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증좌들을 토대로 은밀히 조사해 보면 그 진위는 쉽게 가려낼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허나, 문제는 이것을 건넨 자들의 의도겠지요."

"그렇겠지."

만태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송기득이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만태산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딱히 해가 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해가 될 일이 없다?"

"이곳에 적힌 자는 도찰원(都察院)의 정 칠품인 감찰어사(監察御史) 조유로 관리들 사이에서 그 원성이 자자한 자이옵니다. 그들의 의도가 어떻든 간에 이런 자를 처리한다면 딱히 우리에게 해가 될 일은 없어 보입니다."

"…… 흐음. 그런가?"

"이번 참에 다른 아이들에게도 작게나마 공을 돌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동창 내에서 입지를 높인다면 송 공공의 뜻을 더 펼치기 쉬울 것 같습니다."

"그런가? 좋네. 그렇다면 첩형인 자네가 적당한 인사를 추려서 처리하도록 하게."

"예. 공공."

고개를 숙여서 읍을 하는 낯선 자의 모습에 송상호의 눈이 빛났다. 첩형의 직에 있는 자는 자신도 처음 대했기 때문이다.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서 송상호를 바라보는 만태산이었고 눈이 마주치자 바로 고개를 조아리는 송상호였다.

같은 시각, 부례감인 유현에게도 방태옥의 보고가 올라갔다. 장인태감 송기득과 똑같이 비리가 적힌 증좌들을 들춰보던 유현이 앞에 있는 환관을 보면서 되묻고 있었다.

"흐음. 갑자기 나타난 이 치부가 적힌 증좌들을 어떻게 해야 할꼬?"

"공공. 은밀히 조사를 한 이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것 같사옵니다."

"은밀히 조사를 해?"

"예. 공공. 그 의도가 분명치 않은 증좌들이나 큰 해는 없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하급 현(縣)의 지현(知縣) 쯤이야. 별 탈 없이 성과를 올릴 수 있을 것 같사옵니다."

"……."

"고작 정 7품의 촌에 있는 관리일 뿐이옵니다. 공공께서 신경 쓰시기에는……"

마상이라는 태감의 말에 유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정훈이 황궁무고로 배속되고 마땅한 인사가 없어서 그 밑에 있는 놈을 끌어다 올린 것이었다. 꼼꼼한 유현의 성격상 저렇게 에둘러서 말하는 것을 가장 싫어했기 때문에 그의 얼굴이 펴질 줄을 몰랐다.

"닥쳐라! 이놈."

갑작스런 유현의 노성에 급히 몸을 숙이는 마상이었다. 구석에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방태옥도 고개를 숙이며 몸을 사렸고 그가 있음에도 노기를 거둬들이지 않는 유현이었다.

"고작 정 7품의 관리? 하아. 네놈은 정 2품이라도 된단 말이더냐? 폐하께서 내리신 관직을 어찌 그렇게 폄하할 수 있단 말이냐?"

"송구하옵니다. 공공."

"이익…… 내가 저런 인사를 데리고 있다니. 정훈의 반도 못 미치는 저런 반푼이 같은 놈을!"

"……."

"꼴도 보기 싫다. 썩 꺼져라!"

유현의 축객령에 급히 읍을 하고 사라지는 마상이었다. 그런 그를 노려보던 유현이 옆에 있던 방태옥을 바라봤다.

"너는 이 증좌들을 가지고 동창에 있는 당두 주조화를 찾아가거라. 내가 보냈다고 하고 꼼꼼히 조사해서 이상한 점이 있는지 확인해 보라고 하거라."

"예. 공공."

읍을 하고 나서는 방태옥의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던 유현의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갔다 왔는지 척하면 뜻을 알아먹던 정훈의 빈 공간이 크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방을 나서는 방태옥의 앞을 마상이 가로 막았다. 그 모습에 급히 읍을 하던 방태옥이 차갑게 느껴지는 시선에 몸을 움츠렸다.

"공공께서 뭐라 하시더냐?"

"…… 그게."

"네놈까지 나를 무시하는 것이더냐?"

"아. 아니옵니다. 증좌들을 동창의 당두에게 전해라고 하명하셨습니다."

"그래? 알겠다. 가 보거라."

마상의 말에 급히 읍을 하고 나서는 방태옥이었다. 정훈의 밑에 있던 마태감이라던 자의 행태에 눈살을 찌푸린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런 무능하고 속 좁은 자의 밑에서 계속 있어야 한단 말인가?'

내서당에서 정훈의 밑에 있던 마태감이라는 자가 그 빈자리를 꿰찼고 그의 됨됨이에 한숨을 내쉬는 방태옥이었다.

동창에 있는 세력이 출처를 알 수 없는 비리가 적힌 증좌를 입수하고 며칠이 지났다. 동창에 배속된 건물 내의 고문실로 끌려온 몇몇의 관리들이 의자에 묶인 채 겁에 질린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그런 그들 앞에 차가운 표정으로 그들을 노려보는 구영고가 눈을 빛내고 있었다. 구영고 옆에 선 인학과 송상호 그리고 아삼 역시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를 지켰다.

'생각보다 신중하게 움직였구나. 그래도 자백을 받는 자가 구 당두라면…… 적잖은 공이 돌아오겠지?'

자신의 앞에 선 구영고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인학이 엷은 미소를 지었다. 구영고에게 서책을 건넨 것은 인학으로서도 모험이었다. 어차피 자신의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윗선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일이었고 도움을 받아야 한다면 구영고가 적당하다 생각했다. 다행히 자신의 생각을 알았는지 팽가의 허락 하에 일이 진행된 것 같았다.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 인학의 눈길이 부담스러운 듯 일부러 헛기침을 한 구영고가 결박당한 관리들을 향해서 서책을 들어 보였다.

"이게 무엇인 줄 아느냐? 그간 너희들의 온갖 비리를 적어 놓은 치부책이다. 이리 확실한 증좌도 있으니 발뺌할 생각하지 말고 이실직고 하거라."

쩌렁쩌렁 울리는 구영고의 말에 관리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중 얍실한 입술을 가진 관리가 억울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게 무슨 말이요? 비리라니? 우리같이 한미한 벼슬아치가 저지를 비리가 뭐가 있겠소?"

"훗. ……그 말에 책임을 질 수 있겠더냐?"

구영고가 콧방귀를 뀌며 대물었다. 그러자 그 관리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억울함을 토로했다.

"억울하오. 억울하다마다…… 뭔가 착오가 있는 것 같소."

"착오? 착오라? 그거야 지금부터 차차 알아보면 될 일이지."

냉소를 짓던 구영고가 인학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인학이 앞으로 나섰고 송상호와 아삼도 관리들을 향해 다가갔다.

"아악! 크으윽."

어느새 여기저기서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새어나왔다. 채 한 식경이 되기도 전에 다들 피범벅이 된 채 축 늘어져 버리는 관리들이었다. 몇몇의 관리들은 타지를 당한 듯 손가락 몇 개가 잘려져 있었다. 그렇게 힘없이 늘어진 관리들에게 차가운 물이 뿌려졌고 이내 정신을 차린 그들을 향해 구영고가 소리쳤다.

"이제 너희들의 죄를 인정하겠느냐?"

없는 죄도 만들어낸다는 동창이었다. 지금껏 동창의 고문에 살아남는 이가 없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는 관리들이었다. 그 모습에 만족한 듯 구영고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흘렀다.

"여기 너희들의 죄목을 일목요연하게 써 놓았다. 다들 수결하도록 하거라."

구영고가 종이를 내보이며 소리쳤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인학이 종이를 들고 관리들에게 다가가서 힘없이 늘어진 관리들의 손가락을 들어 지장을 찍었다.

"마마, 이렇게 우리의 숙원이 조금씩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능글맞은 미소를 짓던 신문하가 왕소화를 바라봤고 입에 발린 소리로 그녀의 기분을 즐겁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쁜 내색을 보이지 않는 왕소화였다. 앞선 자의 그 능글맞은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 말처럼 기껏 곁가지 하나 자른 것 가지고 그렇게 호들갑 떨 필요는 없다."

"호호호. 마마, 첫 술에 배부르겠습니까? 이렇게 하나씩 해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우리의 숙원을 이룰 날이 오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숙원? 내 다시 한 번 이르지만 그 입! 함부로 놀리지 말거라."

"…… 송구합니다. 마마."

앞에 있는 신문하의 얼굴이 보기 싫은 왕소화였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서로의 목적이 같았기 때문에 당분간은 손을 잡아야만 했다.

능글맞은 신문하를 노려보던 왕소화가 축객령을 내렸다. 그녀의 눈빛에 섞인 불쾌한 시선을 읽었으면서도 다시 한 번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면서 그곳을 벗어나는 신문하였다. 그 불쾌한 웃음에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노려보는 왕소화였다. 이내 그 시선을 돌려서 허공을 바라보던 왕소화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다가올 듯 다가오지 않는 그 날이 언제나 올지, 아니 오기는 할는지…… 그리운 마음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애틋해졌고 이내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문향……"

붉은 그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이름과 함께 오늘따라 그날이 너무나 아득하게 느껴지는 왕소화였다.

어둠이 가득 찬 곳에 촛불이 일렁거렸다. 그리고 바닥에 부복한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두우복(頭牛服)을 입고 있는 사내가 흐릿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 그 당시에 나를 도왔던 자들이 동창에 잡혀 들어갔다. 이 말인가?"

"예. 폐하. 그들이 잡아들이는 자들 모두가 당시 폐하의 편에 섰던 자들이옵니다."

"재미있군. 내가 조직한 자들이 내게 충성했던 자들을 솎아내다니."

"……."

자조적인 황제의 뇌까림에 고개를 들어 용안을 바라보던 가영호의 고개가 다시 숙여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개를 숙인 상태에서 눈알을 굴리던 그의 귀에 다시 한 번 황제의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로 두어라."

"폐…… 폐하? 허나 그들은……"

"어차피 우리 명을 좀먹고 있던 자들이 아니더냐?"

"……."

"당시 나를 도왔다고는 하나, 이미 그 논공행상은 다 이루어진 상태가 아니더냐? 그 후에 벌어진 일들은 모두 자업자득이겠지. 오히려 동창에 있는 자들에게 상을 줘야 하지 않겠느냐?"

"폐하, 아무래도…… 모종의 일이 있는 것 같사옵니다. 저희 금의위가 따로 조사해 본 결과 수상한 정황을 포착했사온데 아직 그것이 확실하지 않아서……"

"되었다. 그대로 덮어 두거라."

단호한 황제의 말에 가영호의 고개가 다시 치켜 올려졌다.

"……."

"이와 관련된 일은 모두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 금의위는 따로 조사할 필요가 없다. 행여 따로 움직이려다 일을 그르치지 말고 그대로 덮어 두거라."

"……예. 폐하."

"그리고…… 네 사문에 따로 연통을 넣어야 할 것이다. 고수가 여러 명 필요할 터이니 미리 알고 있거라. 이제 그만 나가 보거라."

"예. 폐하. 소신은 이만 물러나겠나이다."

종종걸음으로 조심스럽게 그곳을 나서는 모습에 황제의 눈이 빛났다.

잠깐 동안 고심을 하던 황제의 입이 열렸고 그 소리에 밖에 있던 장인태감 송기득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르셨사옵니까? 폐하."

"이번 비리를 적발한 동창을 따로 치하할 것이다. 그리 알고 준비토록 하라."

"예. 폐하."

그렇게 부정과 비리를 저지른 관리들의 죄상을 밝혀낸 동창의 행태에 황제의 치하가 내려졌다. 대부분의 동창 내 세력들에게 그 공이 돌아갔지만, 부례감인 유현을 중심으로 한 방태옥과 몇몇의 요직을 맡고 있는 자들은 아무런 성과도 올리지 못 했다.

무언가 찝찝함을 느꼈기 때문에 대처가 늦을 수 밖에 없었고 그 짧은 시간에 다른 세력들이 성과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구영고를 위시한 다른 사람들의 입지가 동창 내에서 더욱 높아졌다. 아삼과 인학, 송상호 등의 아이들도 모두가 밝은 표정이었지만 방태옥은 그렇지 못했다. 유일하게 자신이 속한 곳만 몸을 사렸기 때문에 위축될 수 밖에 없었고 그 탓을 내심 유현에게 돌리는 그였다.

사소하고 작은 사건이 해결됐지만 그 사건이 거대한 폭풍을 몰고 오는 기폭제라는 사실은 소수의 몇 명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 작품 후기 ============================

코멘트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