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61화 (6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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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단

    붉은 기둥에 황금빛 문양이 새겨진 중화전으로 들어선 정화가 영락제를 향해 예를 표했다. 그런 정화를 보면서 얼굴 가득 미소를 지은 영락제가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시게. 그래 여독은 다 풀렸는가?"

    "예, 폐하. 폐하께서 보살펴주신 덕분에 다 풀렸사옵니다."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하는 정화를 향해 영락제가 친히 의자를 권하면서 말을 이어갔다.

    "그곳에 앉게. 오늘은 오랜만에 자네와 한 잔 하고 싶어 불렀으니."

    "하오나, 어찌 소신이……"

    "괜찮네. 내 꼭 명을 내려야 앉을 것인가? 지난날을 추억하면서 그렇게…… 한 잔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할 수 없다는 듯 자리에 앉은 정화를 향해 친히 술잔을 내미는 영락제였다. 황제의 행동에 황공하다는 듯 두 손으로 공손히 술잔을 받아드는 그 모습에 씁쓸하게 웃던 황제가 술잔을 들었다.

    "자, 한 잔 하게나."

    단숨에 술잔을 비우는 영락제를 따라 정화도 술잔을 비워냈다. 그렇게 몇 순배의 술잔이 돌자 영락제가 긴 한숨을 토해냈다.

    "후우. 모두 물러서라!"

    "예. 폐하."

    갑작스런 영락제의 하명에 근처에서 느껴지던 기운들이 빠르게 중화전에서 멀어졌다. 그 모습에 당황한 정화가 황제의 얼굴을 바라보자 다시 술잔을 비운 황제가 말을 이어갔다.

    "흠…… 내가 이 제위에 오른 지도 벌써 수십 년이 흘렀네. 이제 하루하루가 다른 걸 보니 나도 많이 늙었어."

    "폐하, 어찌 그리 약한 말씀이 하시옵니까?"

    걱정스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정화를 향해 쓸쓸한 미소를 짓는 황제였다.

    "내 몸은 내가 잘 아네. 이제 슬슬 뒷날을 준비해야 할 때가 왔어. 한 나라의 군주로 한 평생을 살았으니 내 무슨 여한을 남기겠는가?……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가고 난 후가 걱정이네."

    긴 한숨을 토해내는 영락제의 근심어린 모습에 조용히 경청하던 정화의 고개가 미미하게 끄덕여졌다.

    "내가 가고 나면 분명 둘째와 셋째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네. 어떻게든 이 자리를 탐하려 하겠지. 이전에 내가 했던 것처럼. 약해빠진 황태자가 잘 대적할 수 있을지 벌써부터 걱정이네."

    "폐하, 그동안 황자마마들을 덕으로 감싸주신 황태자마마가 아닙니까? 잘 해내실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정화의 말을 들은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앞에 있는 충신의 말도 맞겠지만 권력이라는 마물을 잘 모르는 정화였다. 이미 그것에 홀려서 조카를 폐했던 그였기에 그 속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열망하던 자들의 행태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황제였다.

    "아닐세. 호시탐탐 황태자 자리를 노려온 그 놈들이네.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는가? 봉지로 가라는 내 명을 거역하고 어떡하든 북경에 남아 기회를 노렸던 둘째와 병석에 누운 친족을 독살하려고 시도하고 그 혐의를 형들에게 씌우려했던 셋째를…… 그런 그 놈들을 내가 어찌 믿겠는가?"

    깊게 그늘 진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는 영락제의 모습에 정화의 미간도 같이 좁아졌다.

    황태자인 장남 주고치는 마음이 너그럽고 덕망도 있어서 문신들의 신임을 받았다. 하지만 몸이 약한 장남인지라 영락제의 고심은 깊어만 갔다. 주저하는 영락제의 모습에 무장들은 둘째 주고후를 황태자로 책봉하기를 원했다. 정난의 변 당시에도 선봉장으로서 큰 공을 세웠던 그인지라 무술이 뛰어난 주고후와 무장들과 죽이 잘 맞았던 것이다. 하지만 무식하고 간악한 성정의 주고후를 잘 알고 있는 영락제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사실 영락제의 마음에 드는 사람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주고치의 아들 주첨기(朱瞻基)였다. 문무 모두 뛰어난 손자를 볼 때마다 젊었을 때 자신을 보는 것 같아 흡족했던 영락제는 늘 주첨기를 데리고 다닐 정도로 매우 아꼈고 그 때문에 주고치는 황태자가 될 수 있었다. 몸이 약한 것이 걸리기는 했지만 주고치가 황태자가 되어야 주첨기가 제위를 이을 수 있기 때문에 장남을 후계자로 삼은 영락제였다.

    하지만 주고후나 주고수는 영락제의 뜻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떻게든 황태자 자리를 가지려 탐냈었고 결국 영락제에 의해 주고후는 강제로 봉국으로 쫓겨났었고 주고수 또한 음모를 꾸미다 발각되어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황태자 주고치가 영락제에게 빌어서 무마된 일이 있었다.

    "황태자가 알아서 잘 해낼 테지만 그래도 노파심에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네. 자네가 그 아이에게 힘을 실어 주겠는가? 자네가 동창을 맡아주는 것은 어떻겠는가?"

    갑작스런 제안에 깜짝 놀란 정화가 얼른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폐하, 소신이 어찌……"

    "사양하지 말게. 내가 믿을만한 사람은 자네밖에 없네."

    "하오나 폐하, 동창의 제독 자리는 소신에게 맞는 자리가 아니옵니다. 지금까지 원정을 떠나 궁의 사정에 밝지 않거니와 그렇게 큰 집단을 이끌고 갈 능력이 저에게는 없사옵니다. 무릇 한 집단을 이끌려면 적재적소에 알맞은 인재를 배치하여야 하는데 오랫동안 궁을 떠나 있었던 소신이 어찌 상황의 경중을 따질 수 있으며 인재를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응당 궁의 사정에 밝은이가 이끌어야지요."

    극구 사양하는 정화의 모습에 영락제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한숨을 토해냈다.

    "자네는 늘 그랬지. 그래서 더욱 자네를 믿는 것인지도 모르겠어. 자네 말에도 일리는 있지만…… 그렇다면 누구를 앉히는 게 가장 좋겠는가?"

    "그것이…… 사실 소신은 사마택이라는 자가 그 자리에 적합하다고 여기고 있었사옵니다. 허나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지라……"

    말끝을 흐리는 정화의 모습에 영락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 자의 능력은 나도 인정하나 그 자는 사마가의 사람이 아닌가? 내 이번에 사마가의 역모를 사해줬다고는 하나, 나에게 반기를 든 집안의 사람을 가까이 둘 수는 없지 않는가? 하물며 동창의 수장으로 놓기에는 그 출신이 의심스럽지 않은가?"

    "폐하, 그는 이미 궁에 들어왔을 때부터 폐하께 충성을 맹세했던 사람이옵니다. 그 자에게 역심이 있었다면 먼저 소신이 그를 내쳤을 것이옵니다. 사마택만큼 충성스럽고 우직한 사람도 찾기 힘들 것이옵니다. 소신은…… 그 자의 죽음이 안타까울 뿐이옵니다."

    "흐음."

    진심 섞인 정화의 말에 사마택이라는 자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는 황제였다. 중한 일에 쓴 사람이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자신에게는 계륵 같은 존재였지만 정화의 말에 다시 그 자의 모습을 떠올리던 황제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쓸쓸해 보이는 정화의 모습에 괜히 마음이 불편한 듯 말을 돌리는 영락제였다.

    "오건휘, 그 자는 어떤가? 자네 사람이라면 그자 역시 동창 제독에 어울리지 않겠는가?"

    "폐하, 동창을 이끌어갈 수장이라면 대담하면서도 뚝심이 있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옵니다. 폐하의 의중 또한 잘 읽어내야 하겠지만 오건휘, 그자는 그 성정이 우유부단하여 그런 큰 집단을 이끌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사옵니다. 혹여 다른 자의 꾐에 빠져 따로 손을 잡을 수도 있으니 그 점이 걱정되옵니다."

    정화의 말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긴 영락제가 다시 한 번 앞에 있는 그를 바라봤다. 환관으로 지내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인물이었다. 자신에게 올 때, 결정된 사항이었지만 마냥 아쉬울 따름이었다.

    '오건휘는 정화의 사람이 아닌가? 자신의 사람을 앉혀주겠다는데도 저렇게 평하다니. 역시 정화인가? 내 쓸데없는 걱정과 욕심에 괜히 충성스러운 내 사람을 밖으로 돌린 것이 아닌가?'

    측근 중에서도 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정화였다. 그런 자를 내치기 싫었던 황제는 대원정이라는 명 아래, 그를 밖으로 돌렸고 중요한 권력과 멀어지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어느 정도의 권력이 따라붙었지만 스스로 권력을 탐할 사람은 아니었다. 자신의 명을 성실히 수행하면서 성공적으로 원정을 마친 정화였지만, 이제 와서 그를 밖으로 돌렸던 자신의 선택이 후회가 되는 황제였다.

    잠깐 동안 고심을 하던 황제가 결심을 굳힌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정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은 마땅한 인재가 없으니 우선 오건휘라는 자를 그곳에 앉히도록 하겠네. 그 후에 적당한 인사가 나타난다면 그때 바꿔도 늦지는 않을 것이야. 그리고 당분간 자네가 원정을 떠날 일은 없을 걸세. 자네도 긴 원정에 지쳤을 테니 이번 기회에 좀 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황공하옵니다. 폐하."

    고개를 숙여서 읍을 하는 정화를 보던 황제가 진중한 어투로 말을 이어갔다.

    "되었네. 그만 일어나게. 마지막으로 내 자네에게 한 가지 더 부탁을 하겠네. 오건휘, 그 자를 잘 지켜봐주게. 혹여 다른 마음을 품지 않도록."

    "예. 폐하."

    황제의 당부를 들은 정화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그런 정화를 향해 술잔을 내밀면서 빈 잔 가득 술을 따라주는 황제였다.

    "나는 자네만 믿겠네. 남은 아이들도 잘 돌봐주시게."

    근심을 떨쳐버린 듯 환하게 웃던 영락제가 단숨에 잔을 비웠고 모습에 정화도 잔을 비워냈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술이 오늘따라 쓰디쓰게 느껴지는 정화였다.

    탁자 위에 놓은 서책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구영고의 미간이 좀처럼 펴질 줄을 몰랐다. 저 치부책은 분명히 독이 들어있는 술이었다. 하지만 그 주향이 너무나 달콤하게 느껴졌고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고 있었다.

    '저 치부책만 있다면 미미하지만 확실히 내 실력을 각인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동창에서 내 입지는 탄탄해 질 것이고…… 하지만 팽가에서 알게 된다면 곤란해 질 것은 분명할 터. 그렇지 않아도 팽인학 그 아이를 주시하고 있는 상황이니.'

    괜한 근심을 가지고 온 팽인학이라는 아이의 행동이 괘씸했다. 다시 한 번 고개를 흔들면서 잡념을 떨쳐내려던 구영고가 얼굴을 찌푸렸다.

    '이것을 받고 자신의 일을 눈감아 달라? 훗. 말이 안 되는 것이지. 어차피 언젠가는 이 책에 적혀있는 비리라는 것도 드러날 터. 내 잘 써주마. 그리고 너를 더욱 주시하겠다. 팽인학.'

    잔뜩 굳은 얼굴로 서책을 노려보던 구영고가 결심을 굳힌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인학이 가지고 왔던 서책이 들려있었고 발걸음을 재촉하면서 궁을 벗어나고 있었다.

    "궁에 있어야 할 사람이 이곳까지 어인 일이오?"

    갑자기 팽가로 찾아온 구영고의 모습에 의아해하던 팽명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렇게 찾아온 것을 보면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 것 같았다. 어지간한 일로는 자신을 찾아올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팽명민을 향해서 구영고가 치부가 적혀있다던 서책을 공손히 내밀었다. 조심스럽게 내미는 서책을 받아든 팽명민이 그것을 넘기면서 둘러봤고 많은 관리들의 이름이 적힌 것을 보고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이것들이 무엇이오?"

    "탐관오리들의 비리가 적힌 치부책입니다."

    "치부책?"

    "예, 팽인학 그 아이가 저에게 은밀하게 가지고 왔습니다."

    "팽인학이? 은밀하게? 흐음…… 혹시 이 책의 출처는?"

    "아무래도 그 왕씨 성의 후궁에게서 받은 것 같습니다."

    구영고의 말에 팽명민의 얼굴에 조소가 흘렀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팽명민이 구영고를 바라봤다.

    "뭐라고 하면서 가져왔는지 알 수 있겠소?"

    "그 서책을 내밀며 그 아이가 말하기를 이 치부책을 이용하면 동창에서 우리 팽가가 우위를 점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우선은 동창에서 확실한 세력을 구축하는 게 시급하지 않습니까? 어차피 우리의 손에 들어온 치부책이니 이번 기회에 그 서책을 이용해 공을 세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건넨 이의 의중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들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것은 위험하지 않겠소?"

    내키지 않는 듯한 팽명민의 반응에 다시 한 번 그를 설득하는 구영고였다.

    "그 후궁이 바라는 것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우선은 동창에서 팽인학 그 아이의 입지가 서야 그 후궁도 부리기 쉽지 않겠습니까? 지난번의 교지도 그렇고 이번 치부책도 그렇고 모두 동창에서의 팽인학의 위치를 높여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되면 그를 양자로 부리는 팽가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번 기회에 동창에 팽가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흐음."

    구영고의 말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던 팽명민이 침묵했다.

    '팽인학 그 아이가 은밀히 구영고에게 건넸다라. 구영고가 그 사실을 우리 팽가에게 알릴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할 아이가 아닐 텐데. …… 알려져도 상관없다 이 말인가? 방자함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이놈!'

    인학의 생각을 되짚어보던 팽명민의 얼굴이 구겨졌다. 기고만장해 하는 그놈의 표정이 눈에 선했지만 이번 일은 그놈의 뜻대로 따라줘야 할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찾아가서 혼을 내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인상을 찌푸리던 팽명민이 불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구영고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구 당두 뜻대로 처리해 보시오. 다만, 우리 팽가가 너무 주도적으로 나서지는 말아야 할 것이오."

    "그 말씀은……"

    "굳이 우리가 이런 하찮은 일에 불을 켜고 달려들 필요가 없다는 말이오. 그 책을 건넨 자들의 의도가 불확실하니 설혹 탈이 나더라도 우리 팽가가 혼자 뒤집어 쓸 필요는 없지 않겠소? 동창에 팽가만 있는 것도 아니지 않소?"

    "아…… 알겠습니다."

    팽명민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숙인 구영고가 서책을 품에 갈무리하면서 그곳을 나섰다. 팽가에서 멀어진 그가 조금 전에 대화를 나눴던 곳을 굳은 표정으로 바라봤다.

    '역시 팽가의 소가주인 건가? 노련한 정치가를 보는 것 같군. 이제 막 약관이 된 나이에……'

    마냥 좋게만 봤던 소가주였다. 자신에게 반 존대를 해가면서 존중해주는 모습을 보였던 그인지라 어린 나이였지만 호감을 가졌고 이후에 자신의 입지가 탄탄해 진다면 손쉽게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판단을 해왔었다. 하지만 지금 진면목을 드러낸 팽가의 소가주는 섣불리 판단을 내릴 인물이 아니었다.

    "호부에 견자는 없다더니…… 송곳니를 감추고 있던 호랑이였구나."

    커다란 건물들이 들어찬 팽가를 보면 뇌까리던 구영고의 몸이 황궁을 향했다. 모습을 감추고 있는 호랑이의 눈에 들기 위해서도, 자신을 위해서도 이 일을 은밀히 처리해야만 했다. 드러내지 않고 공을 차지할 수 있도록.

    ============================ 작품 후기 ============================

    코멘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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