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9 / 0204 ----------------------------------------------
결단
자욱한 모래바람과 함께 남색의 목면을 입은 중년의 여인과 비슷한 옷을 입은 여인이 말을 타고 황량한 대지 위를 달리고 있었다. 흡사 모녀지간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가녀린 몸으로 내리쬐는 햇빛을 등으로 받았지만 지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던 두 사람 중에 앞에 선 중년 여인이 갑자기 말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 뒤따라오던 여인을 향해 조용히 읊조렸다.
"아희야, 여기서 조금 쉬어가자."
단지 조용히 읊조린 것뿐이었지만 거친 모래바람 사이에서 정확히 뒤따라오던 여인의 귀에 선명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어느새 말에서 내린 여인이 재빠르게 중년 여인의 말고삐를 받아 들면서 바짝 마른 나무에 고삐를 메어 말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만들었고 중년 여인을 향해 가죽으로 만든 수통을 건넸다.
"자, 너도 목 좀 축이거라."
중년 여인이 입가에 흐르는 물을 닦아내며 여인을 향해 수통을 내밀었다. 목이 탔는지 벌컥벌컥 물을 들이키는 여인을 바라보는 중년 여인의 두 눈에 측은함이 어렸다.
"괜찮은 것이냐?"
걱정스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중년 여인을 향해 여인이 엷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 미소를 유난히도 시리게 느끼던 중년 여인은 조용히 침음을 삼켰다.
"사부님, 저는 괜찮습니다. 그렇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었다. 괜찮을 리가 있겠느냐? 아무리 너를…… 팔았다하나 그래도 너를 세상에 있게 해준 부모가 아니더냐? 그런 부모…… 흠. 나에게까지 애써 감출 필요는 없다."
여인의 말을 가로막은 중년 여인의 얼굴이 잔뜩 굳어졌다. 천천히 지나온 길을 돌아보던 그녀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고 아희라는 여인의 얼굴에 가져가려던 손을 내리면서 바닥을 밟았다.
터엉.
지축이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있던 돌과 모래가 튀어 올랐고 새하얀 손을 휘두르자 꽁꽁 얼어버린 돌과 모래가 한곳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허억."
다급한 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복면인이 그 공격을 피하려 했지만 순식간에 그 몸을 꿰뚫은 돌과 모래에 걸레로 변한 몸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 앞에 어느새 다가온 중년의 여인이 숨을 헐떡거리는 자를 보면서 비릿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리석은 놈이구나. 너를 이곳으로 보낸 자를 탓하거라."
이미 그자의 배후를 알고 있는 것인지 가녀린 손가락에서 나온 음한 지풍이 헐떡이는 자의 이마를 꿰뚫었다. 그대로 절명한 자의 꿰뚫린 이마에서 얼어붙은 상처와 함께 이미 죽은 그 몸뚱이가 빠른 속도로 싸늘하게 변해갔다.
"흔적을 지워라."
천천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중년의 여인이 허공을 향해 차갑게 말하자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자들이 죽은 시체를 없애기 시작했다.
"이런 쥐새끼가 근처로 올 때까지 몰랐다니…… 네놈들이 죽고 싶은 것이냐?"
"주……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이번 한 번 뿐이다. 다음에는 친히 네 놈들의 목숨을 거둬주마."
"명심하겠습니다."
차갑게 그들을 내려보는 중년의 여인은 마교의 장로였다. 빙마후라고 불리는 천요희. 그리고 그와 함께 동행한 젊은 여인은 아희라고 불리는 앳되어 보이는 여인이었다.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것처럼 새하얀 피부를 가진 그녀는 마교 내에서 빙화로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었고 특유의 차가운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사제지간인 두 사람이 들어선 곳은 산서성의 끝자락이었다. 조금만 더 가면 하북성이었고 목표로 했던 곳까지 도착하기 위해서는 며칠만 더 필요할 뿐이었다.
"그들은 나 혼자 만나도 충분할 것이야. 그러니 아희, 너는 우선 집으로 가 보거라. 혹 무슨 단서라도 찾을 수 있지 않겠느냐?"
"…… 하오나. 사부님."
"누가 그런 것인지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혹, 살아남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 그놈의 말로는 모두 몰살당한 것 같다고 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하아. 이 사부가 힘이 부족해서 그놈을 잡아들이지 못하고 있음이다. 미안하구나."
"……."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제자의 얼굴을 바라보던 천요희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랑스러운 제자에게 아무런 힘도 되어주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나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스승의 마음을 아는지 아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부님, 괜찮습니다. 이렇게 집을 둘러볼 기회가 생긴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하오니 너무 마음 쓰지 마셔요."
"그래. 그럼 여기서 헤어지도록 하자. 혹시 무슨 일이 생기거나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지체 없이 연통을 넣거라. 그리고 일이 끝나는 대로 이전에 말한 그 객잔으로 오도록 하고."
"예, 사부님."
자신을 향해서 정중히 인사를 건네던 제자의 모습에 차갑던 천요희의 얼굴에 따뜻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 모습을 보고 슬픈 미소를 짓던 그녀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면서 인사를 건넨 후, 말에 올라타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다급한 그녀의 심정을 대변해 주듯이 뿌연 먼지가 일었고 멀어진 그녀의 모습을 보던 천요희가 입을 열었다.
"저 아이를 지켜라. 혹시라도 저 아이 신변에 이상이 생긴다면 내 용서치 않을 것이다."
"존명."
그녀의 명과 함께 주변을 지키던 일련의 무리들의 기척이 사라졌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의 제자가 사라진 모습을 바라보던 그녀가 다시 표정을 감춘 채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다시 빙마후로 돌아온 그 모습에 암중에서 호위하던 자들은 더욱 긴장하면서 그녀를 뒤따랐다.
하북성의 끝자락을 향해 열심히 달리던 말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급히 멈춰 섰다. 이내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아희가 급히 말에서 내렸다.
'이것이 어찌 된 일이지?'
낡고 허름했으나 그래도 자신이 살았던 집이었다. 헌데 그런 집은 온데간데없었다. 온통 새까맣게 탄 집터와 쓰러질 듯 서 있는 타다만 몇 개의 기둥만이 이곳이 예전의 집이었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이런 악랄한 놈들. 죽인 것도 모자라서 집까지 이리 태웠단 말인가? 허면 부모님의 시신은…… 그 어린 아이들까지……'
어미의 얼굴을 떠올린 그녀가 집터를 헤집기 시작했다. 흩날리는 재와 함께 주변이 헤집어졌지만 이미 옮겨진 부모의 시체가 그곳에 있을 리 만무했다. 지저분한 바닥에도 불구하고 힘없이 그곳에 주저앉은 그녀의 두 눈동자가 먼 허공에 부딪쳤다. 그리고 자꾸만 떠오르는 기억에 두 주먹을 꽉 쥐는 그녀였다.
채 열 살이 안 되었을 때, 심한 기근이 들었다. 가난한 그들에게 찾아온 기근은 위로 하나 밖에 없었던 오빠를 잃게 만들었고 심한 배고픔에 하루하루를 힘들게 버텨야만 했다. 그때, 찾아온 사람들은 바로 어린 여아를 사러 온 사람들이었다.
계속되는 배고픔에 조금이라도 입을 줄여야 남은 가족들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한 그녀였다. 내심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말도 그들을 따라나서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였지만 그녀의 어미는 울면서 그의 남편과 딸을 말렸다. 잃어버린 큰 아이와 함께 딸아이까지 잃을 수는 없다고 했지만, 그 당시 자신은 부모를 떠나는 것보다 배고픔이 더 괴롭게 느껴졌다.
계속되는 굶주림은 참을 수가 없었다. 입에 풀칠 할 정도의 음식은 여섯 식구가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어린 동생들 때문에 그녀에게는 아주 적은 양만 돌아올 뿐이었다.
간혹, 바로 아래 동생인 아삼이라는 아이가 자신의 먹을 것을 나눠주기도 했지만 그것도 부족하게 느껴졌다. 자신이 그 사람들을 따라가면 가족 모두가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자진해서 나섰던 그녀였다. 아버지와 스스로의 선택이었지만 팔려가는 그 순간까지 그녀의 어머니는 스스로를 탓했다.
"아희야, 못난 이 에미를 용서하지 말어. 이런 에미 따위는 잊어버리고 잘 살아야혀. 너를 이리 보낸 죄는 다 이 에미가 받을 것이구먼. 너는 꼭 잘 살아야헌다."
연신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뺨을 쓰다듬던 어머니의 얼굴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 모습에 애써 눈물을 참으며 퉁명스럽게 내지르던 아버지의 얼굴도 떠올랐다.
"어딜가도 여기보단 나을 것인디, 뭐가 그렇게 서럽다고 울고 난리여? 여기서 굶어 죽는 것보다는 훨 나을 것인디…… 가서 눈치껏 잘 혀. 그럼 이쁨 받을 것이여."
그렇게 아희는 모르는 사람의 손을 잡고 집을 떠나야했다. 팔려가는 딸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어머니와 차마 팔려가는 딸의 모습을 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던 아버지의 모습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잊을 수가 없었다. 잊은 적도 없거니와 원망 한 적도 없었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좋았다.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그 말이 너무나 좋았던 그녀였다.
멍하게 타버린 집터에 주저앉은 그녀의 머릿속에는 자꾸만 어미의 울부짖는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다.
낯선 사람들을 따라가는 순간 손에 주어진 주먹밥을 게걸스럽게 먹으면서 웃어보이던 그녀였지만 어린 여자 아이가 감당하기에는 힘든 여정이었다. 하루에 두 번씩 주던 주먹밥도 조금씩 그 양이 줄었고 모종의 장소로 간 그곳에서 생각하기도 힘든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친구라고 생각했던, 친구라고 부르던 아이들을 죽이면서 그렇게 살아남아야 했고, 그때마다 자신을 생각해주던 부모와 먹을 것을 나눠주던 어린 동생의 얼굴을 떠올렸다. 힘들고 지친 와중에도 그녀를 지탱해 주던 사람들이 바로 그녀의 가족들이었다.
천요희의 눈에 들어서 그녀의 제자가 됐지만 한시도 집을 잊지 않았던 그녀였다. 그런 그리움 때문인지 다른 사람들 몰래 남겨진 가족들을 수소문했고 은밀하게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운이 좋게도 천요희라는 고절한 무공을 가진 사부 덕에 교내에서도 높은 위치를 가지게 되었지만 뜻하지 않게 적대적인 사람들도 조금씩 늘어만 갔다. 혹시라도 자신의 가족이 드러난다면 그들이 위험해진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최대한 그 사실을 숨겨야만 했다. 그리고 한동안 그렇게 드러내지 않고 가족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렇게 집을 주시하던 어느 날 그녀의 귀에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왔다. 자신에게 먹을 것을 줬던 바로 아래 동생이 크게 다쳤다는 사실과 다른 곳으로 팔려갔다는 소식이었다. 그 착하던 얼굴을 떠올린 그녀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급히 수소문을 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그 아이의 소식을 알 수 없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 사실을 숨기고 있는 것 같았고 그것이 걱정된 그녀는 자신의 사부를 찾아갔다.
모든 사실을 털어놓자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천요희였다. 교의 장로라는 신분으로 은밀하게 동생의 행방을 알아봐주던 사부였고 어렵사리 그 아이의 행방을 알 수 있었다.
그 어린 아이가 벙어리가 되었고 황궁에 환관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어렵게 알게 된 아희의 눈에서는 안타까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차갑기만 하던 제자의 눈물을 처음 본 천요희도 그 모습에 말을 이을 수 없었고 그녀를 위로했다.
은밀히 진행한 일이었지만 결국 동생의 행방을 알아내면서 자신의 가족을 들켜버렸고 일이 이 지경까지 오게 된 상황이었다.
일련의 과정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팔려가는 자신을 향해 미안하다고 울부짖던 어머니의 모습과 잘살라고 말하던 아버지의 모습. 착하고 어린 동생과 간난 아이였던 두 동생들. 그 어린 아이들까지 희생됐다는 생각과 함께 각오를 다지는 그녀였다.
'절대 이대로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은 이렇게 힘이 없어서 기다리고 있지만 절대…… 네놈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야!'
살기어린 안광이 번뜩이면서 한 사람이 얼굴을 떠올리는 그녀의 기운에 근처에서 그녀를 따르던 자들이 몸을 떨었다. 빙마후라고 불리는 사부의 위명에 떨어지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신교 내에서 손에 꼽히는 후기지수라는 말이 허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절로 주변을 얼어붙게 만드는 살기와 함께 까맣게 타버린 재들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그 가공할 위력에 급히 거리를 벌린 자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자신들이 모시는 그분의 하나밖에 없는 제자였다. 언젠가 그들의 주군이 될 그녀였기에 지금 분노하는 그녀의 모습이 더욱 안타깝게 느껴졌다.
어느새 꽉 쥔 주먹사이로 피가 흘러내렸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어머니의 모습에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움켜쥔 두 주먹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흐르는 눈물을 막으려고 힘껏 주먹을 쥐어보지만 한번 터져버린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어느새 깨문 입술 사이로 울분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