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57화 (57/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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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약

    동창에서의 교육도 어느덧 막바지에 이르렀다. 곧이어 각자의 훈련 성과와 뒤를 봐주는 세력들에 의해 동창요원들이 배치되면서 흩어지기 시작했다. 방태옥, 송상호, 이인학은 든든한 지원으로 황궁에 남을 수 있었고 아삼 역시 팽가와 오건휘의 은밀한 지원으로 황궁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황궁에 아삼이 배속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대원정을 떠났던 정화가 무사히 귀환하였다. 정화의 무사귀환으로 또 한 번 황궁이 떠들썩거리면서 웃음이 끊이질 않았지만 정작 주인공인 정화의 얼굴에는 깊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환영회를 마치고 처소로 들어온 정화가 피곤한 듯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의자에 앉았다. 이내 안타까운 표정으로 황궁무고가 있는 곳을 바라보던 그가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사마택…… 이 사람아, 어찌 그리 간단 말인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단 말인가!'

    돌아오자마자 접한 사마택의 비보에 정화의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마음 같아서는 환영회고 뭐고 참석하고 싶지 않았지만 황제가 친히 주관하는 환영회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자신을 위해 마련된 자리인지라 참석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지기(知己)를 잃은 슬픔은 감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환영회 내내 표정이 어두운 정화였다.

    "게 있느냐?"

    정화의 부름에 환관 한 명이 들어오면서 머리를 조아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정화가 딱딱한 어투로 그에게 명했다.

    "가서 아삼이라는 아이를 데려 오너라."

    정화의 명에 고개를 숙인 환관이 전각을 빠져나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명을 받았던 환관의 뒤를 따라서 아삼이 들어왔다. 앉아있는 정화를 확인한 아삼이 그를 향해 정중하게 예를 표하자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정화가 안부를 물었다.

    "그래, 그간 잘 지냈느냐?"

    "……."

    다시 보는 정화의 날카로우면서도 자애로운 눈빛에 급히 고개를 숙이는 아삼이었다.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듯한 눈빛에 눈을 마주치기가 힘들었던 그가 가슴 깊이 묻어 둔 서찰을 꺼내서 정화를 향해 공손히 내밀었다.

    "이게 무엇이냐? 혹…… 사마택이 내게 남긴 것이냐?"

    서찰을 받아든 정화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아삼을 바라봤다. 그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아삼의 모습에 정화의 두 눈이 서찰로 향했다.

    '정 공공, 공공께서 이 글을 읽으실 때, 아마 저는 공공의 옆에 없겠지요.

    공공께 고마운 마음을 꼭 전하고 싶어서 이렇게 붓을 들었습니다. 공공은 저희 사마가의 은인이십니다. 공공 덕에 미천한 이 목숨 부지할 수 있었고 사마가의 후계도 계속해서 이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 고마움 꼭 전하고 싶었습니다.

    더 이상 공공께 힘이 되어 드리지 못해 송구할 따름입니다. 저는 이제 공공을 뫼실 수 없사오나 아삼 그 아이라면 능히 공공께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 아이에게 전음술이 적힌 비급도 전해주었으니 이제 소통하는 데에도 불편함이 없을 것입니다. 공공, 그간 공공의 은덕으로 소신뿐만 아니라 이제 사마가는 역모의 굴레를 벗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이렇게 폐를 끼치고 가는 저를 용서하십시오.

    마지막으로 염치는 없지만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어딘가에 살아있을 제 딸아이가 걱정됩니다. 그 아이만큼은 폐주니 역모니 그런 것과 관련 없이 누군가의 아낙이 되어 평범하게 살아가기를 바랄 뿐입니다. 혹여 여력이 있으시다면 한 번만 그 아이를 봐주시겠습니까? 아삼 그 아이에게 딸아이에게 남긴 서찰을 부탁하였으니 공공께서 그 아이를 찾는 데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공공의 은혜를 갚을 길이 없음이 한없이 죄스러울 따름입니다. 이렇게 가는 저를 용서하십시오. 공공. 강녕하십시오.'

    사마택의 서찰을 하염없이 어루만지는 정화였다. 그 모습에 사마택의 모습이 떠오른 아삼 역시 숙연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한참을 그렇게 서찰을 바라보던 정화가 그 서찰을 고이 접어서 가슴에 품고 아삼을 향해 물었다.

    "사마택의 마지막이 어땠느냐? 혹여 외롭지 않았더냐?"

    정화의 물음에 아삼이 붓을 들어 대답했다.

    - 폐하께서 성대한 장례를 치러주셔서 외롭게 가시지 않았습니다.

    아삼이 쓴 종이를 받아든 정화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폐하께서?"

    "……."

    아무리 자신의 사람이라고 하지만 손수 장례를 챙겨주는 것까지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정화였지만 이내 그 생각을 버리고 다시 아삼을 바라봤다.

    "네가 전해준 사마택의 서찰에 의하면 너에게 전음술이 적힌 비급을 전했다고 적혀있었다. 헌데 왜 글로 적는 것이냐? 일부러 감추고 있는 것이냐?"

    정화의 물음에 아삼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그 말에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사마택이 건네준 책은 전음술에 관련된 내용과 규화보전을 익히려 했던 자들에 관한 책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뒤에 있던 내용까지 정화에게 알렸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아삼이었다.

    '혹시 규화보전에 관한 서책도 적혀 있는 것인가? 아니지, 아니야. 사마택이 내가 규화보전을 익힌 것을 안 것은 서찰을 전해달라고 부탁한 이후였으니……'

    당황해하는 아삼을 보면서 의아해하던 정화가 다시 그 이유를 물었다.

    "괜찮다. 편하게 말해 보거라. 어찌 전음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냐? 혹, 익히지 못한 것이냐?"

    되묻는 정화의 말에 마음을 정한 아삼이 붓을 들어서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글을 읽은 정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벙어리라 익히지 못했다? 하긴 그럴 수도 있겠구나. 전음입밀 자체가 작은 소리를 기에 싣는 것이니 애초에 말을 할 수 없는 자는 사용할 수 없는 것이로구나. 흐음…… 새로운 사실이구나."

    "……."

    한참 생각에 잠긴 정화의 행동에 어느새 그곳은 적막으로 가득 찼다. 그렇게 고요한 상태에서 깊게 생각에 잠겨있던 정화가 두 눈을 빛내면서 소리쳤다.

    "혜광심어!"

    정화의 말을 들은 아삼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자신이 생각했던 전음술이었으나 익힐 방도가 없어 포기하지 않았던가? 혹여 정화가 그 비급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기대감에 가슴이 떨려오는 아삼이었다.

    "혜광심어라면 네 뜻을 전달 할 수 있지 않더냐?"

    정화의 물음에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아삼이었다. 계속 이어질 말을 기다리면서 그의 입술에 시선을 고정시킨 아삼이 결국 참지 못하고 정화에게 물었다. 그만큼 벙어리로 살아가는 것이 힘이 들었고 답답했기 때문이다.

    - 혹시 그 비급을 가지고 계십니까?

    반듯하게 적혀진 그 글에 다급함이 보이는 것 같자, 아삼이 적은 글을 바라보던 정화가 피식 웃으면서 장난스럽게 답했다.

    "나에게 그런 불문의 비급이 있을 리가 있겠느냐?"

    정화의 답에 실망한 아삼의 고개가 힘없이 떨궈졌고 그 모습을 확인한 정화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 실망할 것 없다. 혜광심어라는 비급이 없다고 했지 방법이 없다고는 말 하지 않았다."

    얼굴 가득 장난스러운 미소를 띤 정화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급스러워 보이는 상자를 향해 다가갔다. 이내 상자의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를 꺼내 든 정화가 아삼을 향해 그것을 내밀면서 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전심어서(傳心語敍)…… 이거라면 능히 다른 사람에게 네 뜻을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전에……"

    갑자기 변한 분위기와 함께 진지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정화의 시선을 느낀 아삼이 고개를 조아렸다.

    "내가 이것을 내어주면 너는 나에게 무엇을 주겠느냐?"

    "……."

    정화의 물음에 쉽게 답을 할 수 없는 아삼이었다. 저 비급이 가진 가치는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어마어마할 것이 분명했다. 혜광심어와 비슷한 효능을 가진 비급을 얻는 대신에 자신이 줄 수 있는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아삼을 보면서 쓰게 웃던 정화가 말을 이었다.

    "나를 위해서 일을 해 주겠느냐?"

    '나를…… 원하는 것인가?'

    쉽게 답을 할 수 없는 아삼이었다. 지금 정화가 바라는 것은 바로 자신이었고 이전부터 휘둘리는 삶을 살지 않겠다고 생각하던 그였다. 물론 지금 정화라는 든든한 줄을 잡으면 목숨을 보전할 수 있겠지만 왠지 내키지 않는 그였다.

    우물쭈물하는 아삼의 모습을 보면서 미소를 짓던 정화가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그 누구라도 자신이 내미는 손을 거부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황제의 최측근이었고 그만큼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신이었다. 대원정을 통해서 축적한 부도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기 때문에 자신이 내민 손을 잡는다면 얻을 것이 적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실제로 그런 정화에게 연을 맺으려는 사람들이 득실거렸기 때문이 앞에 있는 어린 환관이 고심하는 모습은 묘한 감흥을 불러 일으켰다.

    "하하하. 힘들 것이다. 그래. 힘든 결정이지."

    "……."

    "무엇에 얽매이는 것만큼 힘든 일은 없는 법이지. 나 역시 너와 다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서 남성을 포기한 삶이다. 가장 큰 것을 포기하고 대신에 권력과 재물이라는 하찮은 것들을 얻을 수 있었다. 이런 내가 어린 너의 날개를 꺾지는 않을 것이다."

    "……."

    "받거라. 내 강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허나, 필요할 때 내 청을 하나 들어줬으면 좋겠구나. 이것은 그때를 대비한 착수금이라고 생각하거라. 각오가 섰다면 받아 들거라."

    정화의 말에 그의 눈을 바라보던 아삼이 떨리는 손으로 그가 건네는 서책을 받아 들었다. 한 번의 청을 들어주고 자신의 장애를 낫게 해줄 비급을 얻는 일이었다. 앞서 말한 정화의 성격상 자신을 구속하거나 해가 될 일은 시키지 않을 것 같았다.

    왠지 모를 믿음에 그 비급을 받아든 아삼이 '전심어서(傳心語敍)'라고 적혀진 네 글자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앞에 정화가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소중하게 받아든 그 책의 책장을 조심스럽게 넘기던 아삼이 재빨리 그것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간절해 보이는 어린 아이의 그 모습에 가만히 지켜보던 정화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고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원정을 떠날 때마다 나는 항상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사히 원정을 마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에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고, 이번에는 어떤 곳에서 어떤 사람들과 어떤 신기한 문물들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거렸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두려움보다는 설렘이 더 컸던 것 같구나. 아직까지 이렇게 원정을 떠나는 걸 보면……"

    아득한 눈빛의 정화가 언제 그랬냐는 듯 날카로운 눈빛으로 아삼을 바라봤다. 뚫어져라 자신을 바라보는 정화의 눈빛에 긴장한 아삼이 정화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너는 세상의 중심이 어디라고 생각하느냐?"

    "……."

    뜬금없는 질문에 아삼이 두 눈을 꿈벅거리며 정화를 바라봤다. 그러자 아삼에게 바짝 다가온 정화가 나직이 속삭였다.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넓다. 모두들 세상의 중심이 명이라 생각하나 원정을 다니면서 내가 본 세상에서 명은 그 중심이 아니었다. 그저 이 넓은 세상을 이루는 하나의 나라일 뿐이었지."

    정화의 말에 깜짝 놀란 아삼이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세상의 중심이 명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는 아삼이었지만 지금 정화의 발언이 얼마나 위험한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고대로 중화사상(中華思想)이 뿌리 깊게 박혀 온 나라에서 이 얼마나 위험한 발언인가? 자신도 모르게 주변을 살피는 아삼이었고 그런 아삼이 기특한 듯 정화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 불안해할 것 없다. 내가 무슨 말을 했더냐?"

    대수롭지 않은 듯 웃는 정화의 모습에 아삼이 정화의 의중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는 정화였다.

    "많은 나라를 다니면서 가장 불편했던 것이 무엇인 줄 아느냐? 바로 언어였다.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니 이거야 원 대화가 통해야지…… 하고 싶은 말은 많으나 표현할 수가 없었고 듣고 싶은 말도 많으나 들어도 뜻이 통하지 않더구나."

    아직까지 그 답답함이 느껴지는 듯 정화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리고 그 심정을 잘 이해한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는 아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천축국에 도착했을 때였다. 바다에 정박한 우리 대군을 보고 천축국 사람들이 접견을 청해 왔지. 그때 알게 된 비급이 이 '전심어서'다. 마음으로 울린 소리라는 이 전심어서를 통해 그들과 소통할 수 있었지."

    "……."

    "내 그들에게 배운 것을 책으로 엮었으나, 전심어서는 책으로만은 익힐 수 없다. 이 비급이 뜻하지 않는 이에게 들어가는 것도 염려되었거니와 글로 담기에는 그 한계가 있더구나. 물론 배우는 것 자체도 쉬운 일이 아니다. 만약 비급만 있다고 배워지는 것이라면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고수일 것이다. 내가 하나씩 풀이해 줄 것이니 지금 잘 배우도록 하거라."

    정화의 말에 아삼의 두 눈이 빛났다.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정화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집중하기 시작하는 아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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