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55화 (55/204)
  • 0055 / 0204 ----------------------------------------------

    밀약

    며칠 후, 자신을 찾는 왕소화의 부름에 이인학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후궁이 기거하는 화려한 전각으로 향하였다.

    "마마, 소신을 찾으셨습니까?"

    무릎을 꿇고 예를 표하는 이인학의 모습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던 왕소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에게 힘이 돼 주고 싶다 했더냐? 이제 갓 동창에 들어갔다 들었다. 그것도 고작 말단인 요원이라던데…… 어떻게 내게 힘을 되겠다는 것이냐?"

    짐짓 모른 체 묻는 왕소화의 하문에 이인학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왕소화의 얼굴을 흘깃 쳐다보던 그가 담담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소신이 마마께 어찌 힘이 될지는 마마께서도 이미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저를 부르신 게 아닙니까?"

    당돌한 이인학의 대답에 무뚝뚝하던 왕소화의 얼굴에 미미한 미소가 걸렸다. 생각보다 똑똑한 아이였다. 출세욕과 함께 잘 돌아가는 머리, 팽가의 배경까지 갖춘 아이라면 곁에 둬도 손해가 날 일은 없을 거라고 판단한 왕소화가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팽인학을 바라봤다.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왕소화의 커다란 눈망울에 얼굴이 붉어지는 이인학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 미소를 짓는 왕소화였다.

    "내게 힘이 되어주고 싶다 했더냐? 좋다. 내 너를 믿어보마. 이제 네가 나에게 원하는 것을 말해 보거라. 아무런 대가없이 나를 따르려고 하지는 않을 터. 무엇을 원하느냐?"

    "소신이 원하는 것은…… 마마께서 지금보다 더 높은 곳에 오르시는 것뿐이옵니다. 그래서 더 이상 마마를 깔보는 이가 없길 바랍니다."

    이인학의 대답을 들은 왕소화가 파안대소하였다. 그리고 담담한 표정으로 이인학에게 다가간 그녀가 가느다란 손을 내밀며 이인학의 얼굴을 천천히 들여 올렸다. 왕소화의 갑작스런 행동에 갈 곳을 잃은 이익학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리 긴장할 것 없다. 그저 네 눈이 보고 싶었을 뿐이다."

    자신의 두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왕소화의 모습에 이인학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눈앞에 있는 왕소화의 아름다운 모습에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런 이인학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하게 이인학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는 왕소화였다.

    "사람의 눈은 거짓을 말하지 못한다고 했지. 네 눈에는 아직 거짓이 담겨있지 않는 것 같구나."

    천천히 일어서는 왕소화의 모습을 눈으로 좇던 이인학이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지금껏 냄새나는 사내아이들과 생활해왔던 이인학이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여인을 본 적도, 여인의 향기로운 분 냄새를 맡은 적도 없었다.

    '절세미인이라더니…… 황제의 총애를 받는 이유가 있었던가? 거세당한 환관 놈의 심장이 왜 이렇게 뛰어대는 것인지……'

    아직까지도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무던히 애쓰는 이인학이었고 그런 그를 향해 왕소화가 나긋이 말했다.

    "이제 너를 내 사람이라 생각하겠다. 그러니 나를 실망시키지 말아야 할 것이야. 오늘은 그만 돌아가 보거라."

    왕소화의 하명에 이인학이 다시 한 번 예를 올리면서 조심스레 전각을 나갔다. 그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던 왕소화가 자신의 뒤를 향해 나직이 속삭였다.

    "어찌 생각하느냐? 저 아이가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 같으냐?"

    왕소화의 하문에 병풍 뒤에 숨어있던 금화가 왕소화의 앞으로 나아가 고개를 숙였다.

    "마마의 권력에 힘입어 자신의 위치를 올리려 하다니…… 어린놈의 머릿속에서 나올만한 계책은 아니지요. 그것도 아무런 배경도 없다고 알려진 마마를 택했으니 만약 저 아이의 선택이었다면 그 머리는 비상한 것 같습니다. 게다가 팽가의 양자라니 우리 쪽에서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다만……"

    말을 잇던 금화가 잠시 망설였고, 왕소화가 재촉하며 되물었다.

    "다만 뭐냐?"

    "저 아이의 눈에 번뜩이는 야망과 비상한 머리가 마음에 걸립니다. 혹여 우리가 호랑이 새끼를 키우는 것은 아닐지……"

    금화의 말에 왕소화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거야 그 호랑이를 어찌 길들이냐에 달린 게 아니겠느냐? 그만큼 권력에 눈이 먼 자라면 쉽게 움직일 수 있을 테니."

    왕소화의 말에 금화의 고개가 가볍게 끄덕여졌다. 하지만 금화라는 궁녀의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팽가의 양자로 들인 놈이 새로운 뒷배를 찾고 있음이오. 팽가도 마음대로 부리지 못한 놈을 어찌…… 흐음. 불쌍한 인사.'

    스무 살 전후로 보이는 금화라는 궁녀였지만 실상 생각하는 것은 노회한 노인 같았다. 실제로 그 나이를 속인 채로 왕소화의 옆에 머물고 있는 금화의 눈에 측은함이 어렸다.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지 왕소화의 입에서 의미심장한 말이 흘러나왔다.

    "생각지도 못한 팽가에 신문하까지…… 이제 슬슬 준비를 해야겠구나."

    왕소화의 눈이 자금성의 내정으로 향했다. 그곳을 매섭게 노려보던 왕소화의 얼굴에 서늘한 미소가 어렸다. 그리고 뒤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는 금화의 얼굴에 씁쓸한 표정이 지어졌다.

    왕소화의 손을 잡은 이인학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팽가의 도움 없이 자신이 직접 만들어낸 결과물에 스스로 만족한 듯 그의 얼굴에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그날 이후 그렇게 손을 잡은 이인학과 왕소화의 만남은 더욱더 잦아졌다.

    며칠 뒤, 당두인 구영고의 부름으로 그의 거처로 향하던 이인학의 얼굴이 구겨졌다.

    '도대체 또 무슨 일로 찾는 거지? 제대로 된 도움도 주지 않으면서 자꾸 귀찮게 부르다니. 젠장. 내 선택이 틀렸단 말인가?'

    잠시 전각 앞에서 주위를 살피던 이인학이 조심스레 안을 향해 고했다. 이내 들어오라는 말과 함께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피고는 전각 안으로 들어서는 이인학이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그곳에 앉아있는 것을 보고 급히 고개를 숙이면서 읍을 해야만 했다.

    "부…… 부르셨습니까?"

    뚫어져라 자신을 바라보는 팽명민의 눈빛에 자신도 모르게 주눅이 든 이인학이 더욱더 고개를 조아렸다.

    "거기 앉거라."

    차가운 팽명민의 말투에 쭈뼛거리며 자리에 앉는 이인학이었다. 그런 이인학 앞으로 돌돌말린 교지(敎旨)를 내던진 팽명민이 차가운 말투로 물었다.

    "이것이 무엇이냐? 어찌된 일인지 설명해 보거라."

    던져진 교지를 보고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인학이었다. 그리고 그 교지를 들어서 내용을 확인하던 그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조금씩 그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번졌고 그 미소를 감추려고 무던히도 노력하는 이인학이었지만 그 미소를 놓치지 않고 직접 확인한 팽명민의 얼굴은 점점 굳어졌다.

    "어떻게 네게 번역의 지위가 내려진 것이냐? 이 일은 우리 팽가에서도 모르는 일이다. 갑자기 왜 너에게 그런 자리가 내려진 것인지…… 알고 있는 것이 있느냐?"

    "소가주님께서 모르시는 일을 소인이 어찌 알겠습니까? 다만……"

    "다만?"

    "소인이 내서당의 훈육 성과도 훌륭했고 또 시험도 통과했으니 이제라도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주신 게 아닌가 사료됩니다."

    조심스럽게 자신의 눈치를 보면서 엷은 미소를 띠고 말을 이어가는 이인학의 모습에 더 이상 참지 못한 팽명민이 탁자를 내려치며 호통을 쳤다. 용케 그 힘을 버틴 탁자였지만 부르르 떠는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화가 나있는 알 수 있었다.

    "닥쳐라! 네놈이 기고만장해 있구나. 네 놈의 능력을 인정했다면 응당 동창에 들어갔을 때 번역의 직위가 내려졌을 것이다. 헌데, 이제 와서 그 능력을 인정했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송구합니다. 소인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째서 제게 이런 교지가 내려진 것인지…… 그리고 제 입지가 높아진다면 팽가에 더 좋은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머리를 조아리면서 모르쇠로 일관하는 이인학이었다.

    '내가 공영미인 왕씨의 손을 잡았다는 것을 안다면…… 흐음. 그래도 쉽게 내치지는 못 하겠지. 아삼이라는 놈이 걸리기는 하지만 이미 양자로 들인 사람은 나일 테니. 앞으로 조금 더 은밀하게 움직여야겠구나.'

    "모른다? 정말 너는 모르는 일이더냐?"

    의심의 눈초리로 자신을 노려보는 팽명민을 향해 억울한 듯한 표정을 지은 이인학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소가주께서도 모르시는 일을 소인이 어찌 알겠습니까? 소인은 정말 모릅니다."

    "좋다. 알겠다. 그만 돌아가 보거라. 내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자면 절대 경거망동하지 말거라. 알겠느냐?"

    "……예, 명심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예를 올리는 이인학을 매섭게 노려보는 팽명민이었다. 그 눈빛에 이인학의 등 뒤로 한 줄기 식은땀이 흘러 내렸지만 애써 담담한 모습을 보이며 전각을 나섰다.

    사라지는 이인학을 노려보던 팽명민이 옆에 선 구영고를 향해 나직이 말했다.

    "분명히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소. 아무 이유 없이 이런 교지가 내려질 리가 없지 않겠소? 아무래도 조금 더 주시할 필요가 있을 것 같소."

    "예. 알겠습니다."

    구영고가 고개를 조아리며 읍했다. 그런 구영고를 향해 팽명민이 다시 한 번 나직이 말했다.

    "그럼 이제 그 아이를 불러 주시오."

    팽명민의 말에 구영고가 전각을 나섰다. 일각이 채 되지 않아서 아삼과 함께 되돌아온 구영고가 팽명민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는 전각을 나갔다.

    "거기 앉거라."

    자신을 향해 예를 올리는 아삼을 향해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팽명민이 말하자 아삼이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그간 마음고생이 심했나보구나. 얼굴이 많이 상했다."

    "……."

    "이제 걱정하지 말거라. 사라졌던 네 동생들의 행방을 찾았다."

    팽명민의 말에 아삼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동생들의 행방을?'

    동생이라는 단어에 놀란 표정을 지은 아삼이 팽명민의 입술을 쫓았다. 아무런 감정도 나타내지 않던 아이의 얼굴에서 걱정스러움이 묻어나는 모습을 확인한 그가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화산에서 연락이 왔다. 화산파라고 들어봤을 테지? 그 화산의 매화검이라는 조충에게서 연통이 왔었다. 자신이 아이들을 데리고 있다고 하더구나. 그가 네 집에 도착했을 때는 혈전이 벌어진 상태였고 네 부모가 해를 입은 상황이었다고 하더구나. …… 곧 네 동생들을 팽가로 데려올 생각이다. 이번에는 팽가 내에서 안전하게 잘 돌볼 터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동생들을 팽가로 데려온다고? 팽가라……'

    팽가에서 아이들을 보호하고 있겠다는 말에 고민을 하는 아삼이었다. 만약 팽가에 아이들이 묶인다면 자신도 그곳에 예속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들의 손에 자신의 운명을 맡겨야 된다는 소리에 보이지 않게 인상을 찌푸린 아삼이었다.

    '어차피 이 몸뚱이의 혈육이 아닌가? 간혹 불편한 감정이 뒤따르지만 그렇다고…… 흐음.'

    잠시 생각에 잠겼던 아삼이 무언가를 결심한 듯 단호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모습에 의외라는 표정을 짓던 팽명민이 그를 향해 되물었다.

    "지금…… 싫다는 것이냐?"

    그 말에 아삼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붓을 들어서 자신의 생각을 적기 시작했다.

    '화산으로 흘러 들어갔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그 아이들의 운명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저 그 아이들이 무사한 것으로 됐습니다. 나머지는 그 아이들의 운명이겠지요.'

    아삼이 적은 글을 본 팽명민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내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만만치 않은 녀석이구나. 동생들을 맡긴다면 조금 더 수월하게 우리 가문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었을 텐데……'

    "네 생각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지. 내 화산파에 따로 연통을 넣어서 네 생각을 전하마. 그리고 한 가지 더…… 너에게 긴히 부탁할 것이 있다."

    "……."

    "아무래도 팽인학 그 아이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구나. 너와 같은 동창에 속해 있으니, 너라면 그 아이의 행동을 수월하게 파악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 아이를 은밀히 감시해다오."

    '이인학을 감시하라고?…… 흐음.'

    잠시 생각에 잠겼던 아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동생들의 일로 팽가에 진 빚을 이렇게라도 갚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아삼이었다. 딱히 거절할 명분도 없었다. 아직까지 팽가라는 커다란 패를 버리기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고맙구나. 그럼 부탁하마."

    팽명민의 말에 고개를 숙여서 읍을 한 아삼이 조심히 전각을 빠져나갔다. 그런 아삼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팽명민의 두 눈에 아쉬움이 드리웠다.

    '조금만 더 마음을 열었더라면…… 저 아이가 팽가의 사람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팽인학…… 괜한 행동으로 너를 내치게 만들지는 말거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