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54화 (54/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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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체(實體)

    팽명민을 만난 그날 이후부터 자신의 동아줄을 찾기 위한 이인학의 노력은 시작되었다. 우선 후궁들이 모여있는 북쪽을 향해 귀를 활짝 열어놓는 이인학이었다.

    후궁들의 동태와 함께 오고가면서 마주치는 궁녀들의 소소한 잡담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염탐하던 이인학의 귀에 어느 날 반가운 소식이 하나 날아들었다.

    "궁녀 왕소화가 드디어 후궁 첩지를 받았다며? 폐하의 승은을 입은 지가 언젠데……"

    "원체 가진 게 없는 아이였잖아. 출신도 미비하고…… 지금이라도 첩지를 받은 게 어디니? 난 영영 못 받을 줄 알았는데."

    "다른 후궁들의 질투도 엄청 났잖아. 그래도 폐하의 총애 덕분에 드디어 후궁 첩지를 받긴 받는구나. 이제 그 아이의 팔자도 펴겠구나. 나는 언제 그런 승은을 입어서 후궁이 될까?"

    "…… 늦었어도 후궁은 후궁이니. 부럽다."

    부러운 듯 긴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쭉 늘어뜨리며 가는 궁녀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인학의 얼굴에 음흉한 미소가 번졌다.

    '궁녀 왕소화라? 첩지를 받은 배경 없는 후궁이라……'

    공영미인 왕씨 왕소화. 타고난 재색으로 영락제의 눈을 한눈에 사로잡은 궁녀였다. 하지만 그 재색을 뒷받침해줄만한 어떠한 배경도 가지고 있지 않은 탓에 황제의 승은을 입은 지 어언 3년 만에 겨우 후궁의 첩지를 받을 수 있었다.

    '도움이 될 만한 배경이 없어서 후궁첩지를 늦게 받았다면…… 든든한 배경을 원할 터. 팽가의 양자인 내가 내미는 손을 쉽게 뿌리치지는 못 하겠구나.'

    결심을 굳힌 이인학이 북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나아가던 이인학은 갑작스레 들려오는 앙칼진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차악.

    커다란 소리가 후원에 울려 퍼졌다. 누군가의 볼기를 때리는 듯한 그 소리에 멀리서 그곳을 바라보던 이인학의 눈이 가늘어졌다.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세 여자들 사이에 서 있던 여인의 뺨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모두가 뛰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었는데 주변에는 그녀들을 보필하는 환관이나 궁녀들도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특히 개중에 가장 미모가 출중해 보이는 여인이 빨갛게 부풀어 오른 뺨을 부여잡은 상태로 자신을 노려보는 세 여인을 쏘아봤다.

    "이 년이, 감히 뉘 앞이라고 그런 눈을 하는 것이냐?"

    그 모습에 분을 참지 못한 듯 중앙에 선 여인의 손이 다시 한 번 올라갔지만 그 손을 대차게 붙잡던 여인이 붙잡은 손에 힘을 주면서 매섭게 노려봤다.

    "덕비, 말씀을 가려하시지요? 저 또한 폐하의 후궁입니다. 같은 지아비를 섬기는데 높고 낮음이 어디 있겠습니까?"

    "네 년이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구나. 같은 후궁? 덕비와 혜비. 그리고 나는 너처럼 근본도 없는 년하고는 섞일 수 없는 것을…… 반반한 얼굴 말고 네년이 내 세울 게 무에 있느냐?"

    "그러게 말입니다. 폐하의 승은을 입었다하나 그 미천한 출신 때문에 겨우 3년 만에 첩지를 받아든 주제에…… 그 손, 놓지 못 하겠느냐?"

    혜비의 말에 덕비와 순비의 입에서 조소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세 여인의 조소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는 여인이었다.

    "제 출신이 미천하다하나 이래봬도 같은 후궁첩지를 받은 몸입니다. 그리고 이 반반한 얼굴 덕분에 폐하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 전 당신들과 마찬가지로 폐하의 후궁이란 말입니다. 이제 나를 이렇게 하대할 이유가 없지요. 그만 길을 비켜 주시지요. 이렇게 한가하게 노닥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오늘밤 폐하를 맞이하기에도 빠듯하단 말입니다."

    "다……당신들? 이 년이!"

    꼿꼿한 자세로 자신들을 내려 보는 여인의 모습에 세 여인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하게 변했다. 이내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한 세 후궁의 손이 여인의 몸 이곳저곳에 생채기를 내기 시작했다.

    "이 년이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구나.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못 하도록 단단히 버릇을 고쳐주마!"

    "오냐, 오늘 그 반반한 얼굴에 오선지를 그려주마."

    "폐하께서 좋아하시겠구나. 이년!"

    세 여인들의 매질을 온 몸으로 받으면서도 꿋꿋이 얼굴을 감싸 안는 여인이었다. 이 궁에서 살아남으려면 자신에겐 반반한 얼굴 밖에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듯 얼굴을 보호하려고 몸을 웅크리는 여인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이인학의 눈빛이 반짝였다.

    '저 여인이 이번에 후궁첩지를 받은 공영미인 왕씨구나. 어떻게 접근하나 했는데…… 이렇게 좋은 기회가 생기다니, 하늘이 나를 돕는 것인가?"

    얼굴 가득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이인학이 미소를 지우고 다급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여인들을 향해 헐레벌떡 뛰어들어가면서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마마님들, 어찌 이곳에서 이러시는 것입니까? 어서 자리를 피하시지요. 곧 폐하께서 이쪽으로 납실 것입니다."

    갑작스런 환관의 등장과 이인학의 말에 놀란 세 여인이 멍하니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어서요. 서두르셔야 합니다. 폐하께서 이 광경을 보신다면…… 시간이 촉박합니다."

    재촉하는 이인학의 목소리에 그제서야 정신이 든 후궁들이 급히 자리를 피했다. 멀어져가는 세 여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인학이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있는 왕소화의 곁으로 다가가서 조심스레 물었다.

    "마마,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헌데 너는 무슨 연유로 그런 거짓을 고한 것이냐?"

    담담하게 묻는 왕소화의 모습에 의외라는 듯이 똑바로 그 얼굴을 바라보던 이인학이 멍하게 서 있다가 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절색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화사해 보이는 왕소화였다. 이내 뛰는 가슴을 진정시킨 이인학이 담담한 어투로 되물었다.

    "거짓이라는 것을 어찌 아셨습니까?"

    "폐하께서 이곳에 행차하신다면 응당 이곳이 환관들의 손길로 분주할 것 아니냐? 혹여 갑자기 납신다하더라도 만인지상인 폐하께서 움직이시는데 너 같은 젊은 환관 하나만 대동하시겠느냐?"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왕소화의 모습에 이인학의 두 눈이 반짝였다.

    '조금 전에 세 후궁들을 대하는 태도도 놀라웠는데, 단번에 상황까지 꿰뚫어보다니…… 생각보다 떨어지는 머리가 아니구나. 오히려 다행이다. 잘만 하면 서로 도움이 될 수준이 되겠어.'

    "아무튼 고맙구나. 네 덕에 내 곤욕을 면할 수 있었다."

    돌아서는 왕소화의 앞을 이인학이 재빨리 가로 막았다. 그 모습에 미간을 찌푸린 왕소화가 가로막은 환관에게 호통을 치려 할 때, 가로막은 이인학이 고개를 조아리면서 말을 이어갔다.

    "소인은 팽인학이라 하옵니다. 혹여 곤란한 일이 있으시면 소인을 찾아 주시옵소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인학의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왕소화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대하는 왕소화였다.

    "오늘 나를 도와줬다하여 내게 뭘 원하는 것이라면 사람을 잘 못 보았다. 너도 방금 봤다시피 같은 후궁이라고는 하나 미비한 출신 덕에 이리 천대받고 있는 나다. ……혹여 네 놈을 지켜줄 든든한 뒷배를 찾는 거라면 나보다는 방금 여기에 서 있던 후궁들을 찾아가거라."

    이인학의 속내를 꿰뚫는 왕소화의 말에 그의 얼굴이 굳어졌지만 이내 대수롭지 않은 듯 얼굴 가득 미소를 보이던 이인학이 나직이 속삭였다.

    "주어진 출신이야 어찌 할 도리가 없으나, 권력이란 이제부터 만들어 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 살벌한 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무엇보다 힘이 필요하다는 것은 소인이 말씀 드리지 않아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방금도 마마께 힘이 있었다면 저 후궁마마님들께서 저리 나오시지는 못했겠지요. 저는 그저 마마께 조그마한 힘이 되어 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이인학의 모습에 왕소화의 미간이 좁아졌다.

    '한낱 어린 환관 주제에 내게 힘이 돼주겠다고? 내 아무리 권력이 필요하다하나 이런 놈의 도움까지 받아야 한단 말인가?'

    긴 한숨을 내쉬며 의구심 짙은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왕소화를 향해 이인학이 다시 한 번 읊조리면서 자리를 떴다.

    "소인은 팽. 인. 학. 이라 합니다. 허면 곧 찾아뵙겠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하고는 사라지는 이인학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왕소화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내 뭔가가 생각난 듯 멀어지는 이인학을 바라보며 그의 이름을 되뇌는 왕소화였다.

    '팽인학? 팽인학? 팽가? 팽가라면…… 하북의 그 팽가란 말인가?'

    한낱 어린 환관이라 무시하려 생각했는데 하북 팽가의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그 손을 잡아도 자신에게 손해날 것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상황이 더 유리하게 변해가는 것을 깨달았다.

    발걸음을 재촉하며 자신의 처소에 들어선 왕소화가 주변을 살피면서 누군가를 찾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똘망똘망한 얼굴을 한 궁녀 하나가 쪼르르 달려와서 왕소화의 앞에 시립했다.

    "부르셨습니까? 마마."

    달려오는 궁녀를 확인한 왕소화가 그 아이를 가까이 오게 하고 귓속말로 속삭였다. 그녀의 행동에 매우 은밀히 행동해야 하는 것을 알아챈 금화라는 궁녀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 금화야, 너는 지금부터 팽인학이라는 환관에 대해 알아 보거라."

    "팽인학이라는 환관 말입니까?"

    "하북 팽가의 사람 같긴 한데…… 확실히 알 수 없으니. 아무튼 빠른 시일 내로 알아 보거라."

    왕소화의 말에 금화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읍을 하고 전각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무심히 바라보던 왕소화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문향, 드디어 때가 온 것 같아요. 조금만 기다려줘요. 조금만……'

    품속에서 꺼내든 옥잠을 바라보던 왕소화의 눈빛이 촉촉이 젖어들었다. 이내 옥잠 위로 한 사내의 얼굴이 겹쳐졌다. 그리운 그 얼굴에 왕소화의 눈에서 흘러내린 한 방울의 눈물이 그 옥잠 위로 떨어졌다.

    "마마, 금화입니다."

    갑작스런 인기척에 놀란 왕소화가 황급히 눈물을 훔치면서 옥잠을 품속에 넣었다. 옷매무새를 정리한 그녀가 표정을 감추면서 말했다.

    "들어오너라."

    "마마, 저…… 신 태감이 찾아왔습니다."

    "신문하가?…… 안으로 들여라."

    뜻밖의 방문자에 한쪽 입꼬리를 올린 왕소화가 안으로 들어서서 자신을 향해 허리를 굽히는 환관의 모습을 가소롭다는 듯 바라봤다. 그리고 그런 왕소화의 모습에도 환한 웃음을 지어보이던 신문하라는 환관이 길게 읍을 하면서 말을 건넸다.

    "마마, 드디어 후궁첩지를 받았다 들었습니다. 감축 드리옵니다."

    "하, 감축이라?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군. 그대에게 이런 축하를 다 받고…… 그나저나 이런 누추한 곳까지 그대가 어인 일이오? 그간 한번만 들려달라 그렇게 청할 때는 본체만체하더니……"

    왕소화의 말에 당황한 신문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하지만 어느새 표정을 감추고 능글맞은 미소로 허리를 더 숙이는 그였다.

    불편한 속내를 내비친 왕소화였지만 유연하게 대처하는 그 모습에 침음을 삼켜야만 했다.

    "마마, 마마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소신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소신이야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할 뿐이니…… 서운해하지 않으셔야 하옵니다. 이제부터 소신은 마마의 뜻을 받들 것이니 소신을 마음껏 부리십시오."

    바닥에 고개를 찧는 신문하의 모습에 왕소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흥, 이제서야 내가 쓸모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냐? 그동안 그렇게 도움을 청할 때는 나 몰라라 하더니 후궁 첩지가 대단하긴 대단한가 보구나. 네놈들이 먼저 이리 접근하는 걸 보면……'

    "되었다. 고개를 들어라. 무슨 일로 나를 찾아온 것이냐?"

    왕소화의 말에 신문하가 주변을 살피더니 나직이 속삭였다.

    "언제쯤 시작하실 생각이십니까? 문향공자의 복수를……"

    "네놈이 함부로 입에 올릴 분이 아니시다! 다시 한 번 입을 놀린다면 아무리 네놈이 그들의 사자라고 해도, 내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야!"

    "송구하옵니다. 마마. 저희들은 단지, 마마를 돕기 위해서…… 준비가 되시면 알려주십시오. 어차피 우리가 상대할 적은 같지 않사옵니까?"

    비굴한 미소를 지으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신문하의 모습에 미간을 찌푸린 왕소화가 언짢은 기색을 표했다. 자신에게 손을 내민 이자들을 믿을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건문제의 잔당'이라고 불리는 이자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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