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53화 (53/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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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체(實體)

    "어찌된 일이냐고 묻질 않더냐?"

    첩형 금무정의 노성 섞인 물음에 뒤를 돌아본 그 번역이 웃던 표정을 감추고 고개를 조아리면서 말을 이었다.

    "낯선 자를 쫓다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표창인이라는 자가 두 신입 요원이 지키는 곳으로 도주한 모양입니다. 뒤늦게 돌아왔지만 이미……"

    "낯선 자를 쫓았다?"

    "송구…… 합니다."

    짜악.

    커다란 소리와 함께 번역의 얼굴이 돌아갔다. 입술이 터졌는지 피가 흘러나왔지만 돌아간 얼굴을 제 자리로 돌린 번역의 얼굴에 다시 한 번 빛이 번쩍였다.

    다시 울리는 소리와 함께 돌아간 얼굴을 되돌리는 번역의 볼이 눈에 띠게 부어올랐지만 그 얼굴을 노려보는 금무정의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네놈이 맡은 임무가 무엇이냐?"

    "……혹시라도 도망 나올 장원의 잔당들을 막아서는 것입니다."

    "헌데?"

    "송구합니다. 갑자기 암기를 뿌리는 자가 나타나서 그를 쫓는 것이……"

    "네놈의 그 짧은 생각으로 어린 동량이 목숨을 잃었다. 네놈에 대한 책임은 돌아간 이후에 물을 것이다. 결코 쉽게 끝낼 생각은 없으니 단단히 각오해 두거라."

    "예."

    첩형의 직에 있는 금무정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주변을 훑었다. 죽어있는 어린 동창요원과 함께 입에 피를 흘리면서 창백한 안색으로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어린 동창요원. 무너진 담장과 파인 바닥 등을 살피던 그의 눈이 순간 번뜩였다.

    "내상을 입은 것인가? 몸은 괜찮더냐?"

    "……."

    길게 읍을 하는 아삼의 모습에 미간을 찌푸리는 첩형 금무정의 행동에 조금 전에 볼을 맞았던 번역이 말을 이어갔다.

    "저 아이는 벙어리입니다."

    "벙어리?"

    "소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나타난 표창인의 발길을 막아 세운 것 같습니다. 그 사이 다른 자가 나타나 던진 암기에 내상을 입은 것 같습니다."

    "흐음."

    번역의 말에 잠시 아삼을 살피던 금무정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표창인의 발걸음을 막았다는 것과 갑작스럽게 던진 암기를 막아섰다는 이야기를 듣고 생각보다 앞에 있는 앳된 얼굴을 한 동창요원의 실력이 괜찮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역시 그 사람의 눈은 틀리지 않았음인가?'

    일류 고수에 근접했다던 표창인이었다. 내기를 표출할 수는 없다지만 무기에 기를 실을 수 있고, 초식을 사용하는 데 막힘이 없는 경지를 뭉뚱거려서 이르는 말이었지만 저런 아이가 상대할 만큼 만만한 실력은 아니었다. 특히 이미 실전 경험이 풍부한 표창인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경험이 없을 신입의 동창요원이 막아섰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었다.

    '바닥에 나있는 족적, 저 곳에서 암기를 튕겨낸 것인가? 튕겨나간 암기가 담을 허물 정도라……'

    잠시 고심에 잠겨있던 금무정이 옆에 있던 번역을 바라봤다. 날카로운 그 눈초리에 고개를 숙이던 번역이 그의 눈치를 살폈다.

    "암기를 던졌다던 자는 누구더냐?"

    "…… 그게 너무 상황이 다급하여."

    "번역이라는 놈이 상황의 경중도 판단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니겠지?"

    살기어린 금무정의 말에 고개를 숙이던 번역이 눈을 굴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지? 정체를 밝혀야 하나? 그자의 정체를 발설한다면 일이 너무 커진다. 어차피 드러날 것이지만 시간을 벌어야겠지?'

    이윽고 생각을 마친 그가 다시 고개를 조아리면서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정확한 정체를 파악하지는 못 했습니다. 이미 죽은 요원과 함께 내상을 입은 듯한 저 아이까지 너무 걱정이 되어…… 제 실력을 가뿐히 상회하는 자인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절정을 넘어선 자인 것 같았기에."

    "절정? 절정 고수가 나타났다는 것이냐?"

    "소인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사옵니다."

    번역의 말에 침음을 삼키던 금무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석연치 않던 점을 풀기 위해서, 그리고 새로운 동창요원들의 경험을 키워주기 위해서 시작한 일이었다.

    이현령이라는 놈의 뒤를 캐내다가 이상하지만 위험하지 않을 일을 찾아서 일부러 이런 상황을 만들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피해가 컸다. 당연히 놓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놈이었고, 신입 요원을 잃어버릴 거라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못했다.

    절정 고수의 개입과 생각보다 장원에 있던 자들의 실력이 출중하다는 점들을 떠올리던 금무정이 주변을 둘러보면서 소리쳤다.

    "이만 정리하고 돌아간다. 잡아들인 자들은 엄히 문초를 할 것이니 잘 지켜보도록 해라."

    "예!"

    "네놈 이름이 무엇이냐?"

    "…… 소인은 번역의 직위에 있는 신영용이라고 합니다."

    "신영용? 내 잊지 않겠다. 염두에 둘 것이다."

    "…… 예."

    날카로운 눈빛을 접한 번역의 눈이 흔들렸다. 괜히 눈에 띠여서 좋을 것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삼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바라보던 첩형 금무정이 걸음을 옮기면서 휘장을 휘날렸다. 그의 뒤로 당두들이 뒤따랐고 이윽고 모여든 동창 요원들이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동이 터서 날이 밝아왔고 지친 몸을 이끌던 아삼은 그 대열에 합류했다. 손에 들린 검은 환약을 보면서 잠시 망설이던 아삼이 그것을 바스러뜨렸다.

    '좋은 의도를 품고 있는 것 같던 놈이 아니었어. 뒤늦게 준 환약이었지만…… 그래도 조심하는 것이 좋겠지.'

    생각보다 동창 내에서도 나뉜 세력들이 많은 것 같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놈의 등장에 더욱 경계심을 가지게 된 아삼이었고 힘없이 걷는 그의 옆으로 송상호가 따라붙었다.

    "몸은 괜찮은 거야?"

    "……."

    "다행이다. 그래도 그런 자들 손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니."

    살갑게 말을 붙이는 송상호의 모습에 미간을 찌푸린 아삼이 고맙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 모습에 두 주먹을 불끈 쥔 송상호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아삼의 뒤통수를 쳐다봤다.

    '팽가를 믿는 것인가? 아무리 팽가의 위세가 높다고 하지만 황궁에서 얼마나 힘을 쓸지는 두고 봐야겠지.'

    황궁으로 돌아온 그들은 간단한 훈계를 듣고 뿔뿔이 흩어졌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한 번역 신영용이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고, 한 처소 안으로 스며들었다. 은밀한 그 행동은 처음부터 그가 그 근처에 나타나지 않은 것 같은 생각을 가지게 만들었다.

    "동창이라는 놈들…… 꽤 유능한 놈들인가 보구나. 그런 식으로 꼬리를 잡다니."

    "우연히 얻어걸린 것입니다."

    "흐음. 그 우연이라는 것 또한 실력이다. 내 누누이 말하지 않았더냐? 경시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는 이상, 이곳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은 줄어든다고!"

    "명심…… 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면서 읍을 하던 신영용의 행동에 웃음을 짓던 늙은 환관이 앞에 놓인 찻잔을 들면서 말을 이어갔다.

    "그래. 첩형인 금무정이라는 자가 너를 주시한다 이 말이렷다?"

    "……예. 소인이 부족하여, 그자의 눈에 걸려든 것 같습니다."

    "꽤 골치 아프게 됐구나. 생각보다 유능한 자인 것 같던데…… 내 힘써보도록 하마. 별다른 징계는 없을 것이나, 질책은 면하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도 처신을 잘 해야 할 것이야."

    "예. 공공."

    공공이라는 자가 말을 마치면서 들었던 차를 들이켰다. 알싸한 향과 함께 입맛을 다시던 그가 미소를 머금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벙어리라는 아이의 실력이 출중하다고?"

    "예. 일류라 칭하는 표창인을 물리치고, 절정 고수인 비투소마(秘投小魔) 마소추의 암기를 막아냈습니다."

    "마소추?"

    "네. 그쪽에서 따로 붙여준 자로 무림에서 이름난 마인 입니다. 이번에 드러난 일을 덮기 위해서 동행을 했는데……"

    "절정 고수의 암기를 막았다? 그냥 피하면 되는 일 아니더냐?"

    "그것이……"

    무공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상관의 말에 말문이 막힌 신영용이었다. 마음먹은 대로 암기나 검을 피한다고 한다면 세상에 고수가 아닌 자가 없을 것이었다. 아직 이류 수준에 불과할 거라고 생각하던 신입 요원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절정 고수의 공격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나 죽이려고 마음먹고 던진 절정 고수의 공격을 막아낸 것만 봐도 아삼이라는 아이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마소추가 던진 암기를 막아낼 수 있는 자는 신입 요원들 중에 거의 없다는 것이 그들의 판단이었다. 물론 개중에 다른 신입 요원들보다 뛰어난 실력을 가진 자들도 있겠지만 미리 분류해 놓은 곳에 아삼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그만큼 자신을 철저히 숨겼던 아삼이었고, 사람들의 눈을 속인 그였다.

    "되었다. 네가 놀랄 만큼의 실력을 가졌다면 그런 것이겠지."

    "송구하옵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냐? 이번 일을 눈치 챈 것 같지는 않더냐?"

    그 물음에 쉽게 대답을 할 수 없는 신영용이었다. 그 동안 자신의 이목을 속이고 실력을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봐서는 그만큼 비상한 머리를 가진 아이라는 생각이었지만, 그렇다고 이번에 있었던 일을 눈치 챈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대로 죽이기에는 아까운 것도 같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고 한다면 당연히 살려둬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눈치 챈 것 같지는 않습니다. 혹시 모르니…… 제가 따로 접선을 해보겠습니다."

    "흐음."

    "이대로 버리기에는 아까운 점이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우리 쪽으로 인재를 끌어들여야 나중에 거사를 치루기가 더 편할……"

    "닥쳐라! 함부로 입에 올릴 말이 아니다!"

    "소…… 송구하옵니다."

    환관의 노성에 급히 부복을 하며 용서를 비는 신영용이었다. 이전에 그를 바라보던 흡족하던 눈빛이 흉흉하고 날카롭게 변했다. 그 사실을 잘 아는지 부복한 채로 덜덜 떨던 신영용이 다시 한 번 용서를 구했고, 인상을 찌푸린 환관이 그를 일으켜 세웠다.

    "내 아무리 네놈을 양자로 들였다고는 하나 미련한 놈을 계속 보살펴 줄 수는 없음이다."

    "……."

    "똑바로 처신하거라. 다음에 한 번 더 그딴 말을 입에 담았다가는……"

    "……."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것이다."

    "예. 공공. 가슴 속에 새기겠습니다."

    다시 한 번 부복을 하면서 바닥에 머리를 찧는 신영용이었다. 그런 그를 보면서 고소를 지어보이던 환관이 몸을 돌렸다.

    "그 아이는 네가 주시해 보거라. 네 말대로 끌어 들일 수 있다면 좋겠지. 허나 조금이라도 낌새가 이상하다면…… 증좌를 남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 공공."

    가부좌를 틀고 앉은 아삼이 몸을 관조해 나갔다. 천천히 단전의 기를 순환시키면서 기맥을 확인했고, 기운이 뭉쳐진 혈에 기를 보하자 뭉친 기운이 풀리면서 꽉 막혔던 곳이 조금씩 풀려가는 것 같았다.

    기맥을 타고 돌던 기운이 한 두 차례 순환을 했고 조금씩 풀려가는 혈맥과 함께 비릿한 무언가가 목구멍을 타고 역류되어 왔다.

    쿨럭.

    목젖을 타고 역류한 비릿한 피가 입안에 가득 고였고 어느 정도 답답함이 가시자 순환되던 기운들은 다시 단전으로 갈무리한 아삼의 눈이 떠졌다. 시린 정광과 함께 단전 한 곳에 뭉쳐있는 단단한 기운에 미간을 찌푸린 그가 하얀 천에 입에 머금은 피를 토해냈다.

    검붉은 죽은 피와 함께 비릿한 혈향이 퍼졌다. 그리고 하얀 천을 검게 물들인 그 모습을 천천히 들여다보는 그였다.

    '죽은 피인가? 답답함이 덜 한 것을 보면 내상이 어느 정도 풀린 건가?'

    처음 겪는 현상이었지만 운기로 치료를 하라는 말만 들었을 뿐,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오롯이 경험으로만 흡수하는 지식이 위험해보이기는 했지만 지금 그에게 도움이 될 만한 자는 없었다.

    그나마 사마택이 위안이 됐었지만 이제는 없는 사람이었다. 새삼 혼자라는 생각이 밀려오자 뭔가 허전한 마음도 들었지만 이내 정신을 추스린 그가 입에 묻은 피를 닦아 냈다.

    '신영용이라는 번역. 그 자는 어느 세력에 소속된 자일까? 표창인이라는 자와 같은 패거리라면 그것 또한 복잡하게 얽혀 있구나. 황궁이라는 이곳에 얼마나 많은 놈들이 서로 다른 뜻을 품고 있을지……'

    또 다시 황궁의 실체를 접한 아삼이었다. 아직까지 다 드러나지도 않았을 그 실체만 해도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크게 한숨을 내쉰 그가 살수지무를 이용해서 주변의 기척을 살폈다. 혹시라도 숨어있을 누군가를 파악하기 위함이었고, 자신이 전대 살왕의 비급을 익혔다는 사실에 더없이 감사했다.

    실질적인 싸움이나 대전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무공은 아니었지만 숨은 기척이나 상대방이 가진 기운을 파악하는 것에는 가장 효율적인 무공이었다. 자신의 내기를 갈무리하는 몇 단계 위의 무인이 아닌 이상 어지간한 자들의 기척을 읽을 수 있는 무공으로 주변을 살핀 그가 조심스럽게 서책을 하나 꺼내들었다.

    '규화보전…… 내게 남겨진 가장 큰 숙제인가?'

    사마택이 남긴 또 다른 책을 꺼내든 아삼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그가 남긴 배려로 조금씩 자신의 길을 찾으려는 아삼은 노력은 그렇게 계속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추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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