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52화 (5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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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체(實體)

    아직 주변이 흐릿하게 보이는 새벽이었다. 동이 틀려면 한 시진 정도 더 있어야만 했지만 그렇게 이른 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사전에 들었던 명대로 자신과 비슷한 동료 한 명과 한 단계 위의 직급인 번역과 함께 한 쪽 구석을 지키고 있는 아삼이 긴장한 듯 담을 주시했다.

    "특별히 조심해야 할 것이다. 어차피 당두를 포함한 고수들이 먼저 안에 들어섰을 테지만, 바깥쪽으로 도주할 수도 있으니 긴장을 늦추지 마라."

    "예!"

    짧게 읍을 하면서 고개를 숙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던 그가 몸을 숨기면서 주변을 살폈다. 어느새 주변이 고요해졌고 한 곳만 주시하던 그들의 눈가에 보였던 긴장감이 조금씩 풀어지고 있었다.

    아삼이 지금 낯선 곳을 주시하는 이유는 이전에 있었던 일들과 관련이 있었다.

    이부(吏部) 정6품 주사(主事) 이현령의 자백으로 뇌물을 건네던 자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많은 인사들이 그에게 뇌물을 건냈지만 관직을 뒤로 하고 낙향을 한다던 자가 그들 사이에 끼어있었다.

    관직을 버린 자가 인사를 담당하는 자에게 다시 뇌물을 준다는 일이 흔한 일은 아니었다. 그 점을 수상히 여겨서 조금 더 깊게 조사를 했고, 일개 군관이었던 자가 가지기에는 생각보다 많은 재물이 드러났기 때문에 이를 수상히 여긴 동창이 그자가 가진 장원을 둘러싼 상태였다.

    "상대는 표창인이라는 자로 오랜 시간 군관을 지낸 자다. 본신의 무공이 일류에 근접했다고 하니 각별히 조심을 해야 할 것이다. 이번에 금의위는 참여하지 않는다. 오롯이 우리 동창만 행하는 임무이기 때문에 최선을 다 해야 할 것이다."

    "예!"

    "장원 안으로 들어가서 적을 추포하고 소탕하는 것은 당두의 직위를 가진 자들이 나설 것이니, 번역을 포함한 신입 요원들은 빠져나가는 자들을 막아설 수 있도록 하라. 무공 실력이 떨어지는 만큼 각별히 주의해야 할 것이다. 지금부터 사전에 통보했던 대로 은밀히 움직인다."

    조금 전에 넓직한 공터에서 당부하던 금무정이라는 첩형의 말을 떠올린 아삼은 조금씩 흐트러지려는 정신을 바로잡았다.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는 순간에 자신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살아남으려면 필사적일 수 밖에 없겠지. 잡히면 그 끔찍한 고문을 당해야 할 테니까.'

    잠깐 생각에 잠긴 사이에 뒤쪽에서 은밀한 기척이 느껴졌다. 갑자기 느껴지는 그 기척에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옆에 있던 번역의 지위를 가진 자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뒤에서 느껴졌던 기척을 가진 자가 모습을 드러내면서 암기를 뿌렸고 그 사실을 눈치 챈 번역이 날아오는 암기를 쳐내면서 그를 뒤쫓았다.

    "이곳을 지켜라!"

    당부의 말을 마친 그가 급히 낯선 자를 쫓았고 아삼과 같이 있던 젊은 환관이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던 아삼의 미간은 좁아졌다.

    '번역이라고 하나 어지간한 당두보다 더 강한 기운을 가지고 있다. 살수지무를 익힌 나보다 먼저 뒤의 기척을 느꼈다니…… 마치 잘 짜여진 연극을 본 듯한 기분은 뭐지?'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아삼이었지만 장원 안에서 들려오는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떠오르던 생각들을 떨쳐내야만 했다. 계속되는 소리에 옆에 있던 젊은 환관이 애써 웃어 보이면서 태연한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했지만 파르르 떨려오는 아랫입술을 숨길 수는 없었다.

    "이쪽으로만 와라. 이쪽으로. 내가 이 손으로 너를 붙잡아서 단번에 당두로 올라서주마."

    "……."

    두려움 반, 기대 반의 심정으로 담만을 노려보는 그 행동에 씁쓸하게 웃던 아삼이었다. 하지만 그의 미소 짓던 표정도 조금씩 굳어져만 갔다. 장원 안에서 이쪽으로 이동하는 은밀한 기척을 감지해 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큰 그 기운에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담을 주시하던 아삼은 어느새 모습을 보이지 않는 번역을 확인하고 인상을 구겨야만 했다.

    "긴장하지 마! 너는 그냥 지켜만 봐. 내가 다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아무 것도 모르는 옆에 있는 놈의 허세에 더욱 딱딱하게 변한 아삼의 얼굴이었지만 그저 겁을 집어먹었다고 생각하던 동료는 아삼의 등을 두드리며 웃어보였다.

    하지만 그런 행동도 잠시 담을 넘는 낯선 인영에 놀란 그가 움직임을 멈추고 그 자를 바라봤다. 담을 뛰어넘던 자도 놀란 모습으로 그 둘을 바라봤고 이내 안심하는 듯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멈춰라!"

    갑자기 호기롭게 나서는 어린 동창의 모습에 인상을 구긴 낯선 자가 바닥을 박차고 뛰어들었다. 생각보다 빠른 그 움직임이었지만 충분히 막아설 수 있다고 판단한 그가 앳된 얼굴로 바닥을 박찼다. 그 모습에 그를 막아서려던 아삼이었지만 이미 멀어진 그를 잡을 수는 없었다. 이렇게 빨리 뛰쳐나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위험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아삼의 얼굴이 굳어졌다. 호기롭게 뛰쳐나가던 어린 환관이 허리춤에 차둔 군도를 꺼내들면서 그의 목을 찔렀지만 가볍게 허리를 틀면서 그 공격을 피한 자가 뽑아든 검으로 그의 목을 그어버렸다.

    촤아악.

    베어진 목에서 피를 뿌리면서 뛰어나간 그대로 바닥에 처박힌 환관과 함께 아삼을 바라보던 자가 검을 털면서 그대로 그곳에서 멀어져갔다.

    '표창인!'

    경공을 펼치며 달려가는 그자의 얼굴은 사전에 확인했던 자의 모습이었다. 일류에 근접했다던 말을 듣고 고민하던 아삼이었지만 어느새 그의 몸은 도망가는 그를 향해가고 있었다.

    '쫓아오는 건가? 어린놈들. 목숨 귀한 줄 모르고!'

    뒤늦게 쫓아오는 아삼의 모습에 미간을 찌푸린 표창인이었지만 멀리 떨어져있는 그 모습에 그대로 뒤쫓는 아삼을 떨쳐내려고 했다. 하지만 순식간에 좁아진 거리에 기겁을 하면서 뒤를 돌아봐야만 했다.

    궁신탄영의 수로 순식간에 앞으로 치고나온 아삼이었지만 표창인이라는 놈과의 거리는 상당히 멀었다. 이대로 놓아둘지 고민을 했지만 죽은 아이의 모습을 떠올린 그가 용천혈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을 조절하면서 무영보법을 밟아갔다.

    먼 거리를 움직이기에는 경공을 사용해서 기운의 소모를 줄여야 했지만 지금은 도망가는 자를 붙들면서 시간을 끌어야 했기 때문에 아삼의 선택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순식간에 좁아진 거리와 함께 헛바람을 집어삼키던 표창인이 뒤를 돌아봤고, 바닥을 박찬 아삼이 무영보법과 함께 분뢰공을 일으켰다. 분뢰공의 묘를 더한 무영보법이 펼쳐지자 순식간에 배는 더 빨라진 아삼의 신형이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났다.

    아삼이 멀리 떨어져있던 표창인에게 빠른 속도로 들이닥치자 기겁한 그가 눈앞으로 다가오는 아삼의 주먹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날아오는 조그마한 주먹을 잘라버리려는 생각이었지만 그가 생각했던 것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허초!"

    순식간에 거둬진 주먹을 보고 다급한 음성을 외치는 표창인이었다. 그리고 비어진 그의 가슴으로 아삼의 오른손 장이 틀어박혔다.

    '분뢰수.'

    달려든 속도와 함께 단전에 모여있던 정심한 양의 기운이 순식간에 기맥을 타고 오른손 손바닥으로 모여들었다. '퍼엉'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처박힌 표창인이 피를 뿜어내면서 튕겨져 나갔고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을 굴렀다.

    다시 내려앉은 아삼이 지급받은 군도를 꺼내들면서 바닥을 박찼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표창인을 향해 태산압정이라는 초식으로 위에서 아래로 도를 내려치려는 그였다.

    앞서 희생한 동료 덕에 자신을 깔봤는지 방심한 표창인을 생각보다 수월하게 상대한 아삼의 얼굴에 미미한 미소가 어렸다.

    하지만 달려드는 아삼의 기척에 새로운 기운들이 잡혔다. 왼쪽에 있는 담 뒤편으로 모습을 드러낸 두 개의 기척과 함께 바람을 가르는 파공음이 들려왔다.

    피리릭.

    갑자기 날아드는 암기를 눈치채고 몸을 튼 아삼이 들어 올린 도를 거둬들이면서 다시 그 도를 휘둘렀다. 빠르게 날아드는 암기라 피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적절한 초식을 떠올린 아삼이 빠르게 손을 놀렸다.

    '낙화검(落花劍).'

    예전에 주고희에게 필사했던 그 조잡스럽다던 쾌검이 그의 손에서 재현되었다. 쾌검술이었지만 군도로 펼쳐졌고 빠르게 다가오는 암기를 모두 쳐낸 아삼의 입에서 가쁜 숨이 흘러나왔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찌릿한 고통에 인상을 쓴 아삼이 암기가 날아온 곳을 바라봤다.

    '누구지? 뒤에 있는 저 자들은?'

    갑자기 나타나서 자신을 공격하는 모습에 미간을 찌푸린 아삼이었지만 뒤이어 날아오는 커다란 기운에 헛바람을 집어삼켜야 했다.

    '강력하다. 피하기에는 너무 늦었어.'

    거대한 기운을 머금은 채로 날아오는 암기에 진각을 밟으면서 하체를 고정시킨 아삼이 모여있던 기운을 끌어모으면서 다가올 공격에 대비했다.

    '분뢰도!'

    단전에 모여있던 기운이 순식간에 뻗쳐나가면서 도신을 타고 흘렀다. 유형화 된 도기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순식간에 쏘아진 도에 주변의 공기가 울었고 거력을 담은 암기와 아삼의 도가 부딪쳤다.

    쩌엉.

    커다란 소리와 함께 팔이 떨어져나갈 것 같은 충격에 휘청거리던 아삼이 그 반발력을 이기지 못하고 뒷걸음질 쳤다. 꽉 다문 입에서 한줄기 피가 흘러나왔지만 다행히 방향이 틀어진 암기는 뒤쪽 벽에 박혔고 그 힘을 이기지 못한 담이 허물어졌다.

    쿠우웅.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암기가 쏘아진 담 뒤쪽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공기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조금 전에 낯선 자를 쫓아갔던 번역이 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뒤로 물러선 그의 얼굴에 다급함이 서렸고 그곳에서 멀어져가는 기척과 함께 뒤를 돌아본 번역이 죽은 아이와 아삼을 바라봤다. 그 사이 비틀거리면서 몸을 일으킨 표창인이라는 자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그곳을 벗어났다.

    그 모습을 눈치 챈 번역인 것 같았지만 애써 시선을 돌리지 않는 모습이 아삼의 눈에 들어왔다. 이미 죽어버린 아이를 보면서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가는 모습에 이상함을 느낀 아삼이었지만 일부러 내색하지는 않았다. 지금 내색한다고 해도 자신에게 좋을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저놈과 연관 된 것인가?'

    죽은 아이를 향해서 모습을 돌리고 있는 번역이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아삼이었지만 돌아보는 그의 시선에 인상을 찌푸리면서 가슴을 부여잡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괜찮은 것이냐?"

    "……."

    자신의 안위를 묻는 번역의 말에 인상을 찌푸린 채 고개를 끄덕이던 아삼이 천천히 기를 끌어모았다. 혹시나 있을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서 은밀히 기운을 모았고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비틀거리는 아삼을 향해서 눈을 빛내며 다가오는 번역이었다.

    "어찌 된 일이냐? 이곳으로 표창인이라는 자가 지나친 것이냐?"

    "……."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아삼의 행태에 얼굴을 찌푸린 번역이었지만 이내 앞에선 아이가 벙어리라는 사실을 깨닫고 침음을 삼켰다. 잠시 고민하는 듯한 모습에 긴장한 아삼이 침을 삼켰다. 비릿한 피 맛과 함께 자신이 내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찌푸려진 얼굴을 더 구겼다.

    그 사이 근처로 다가온 번역이 품에 손을 집어넣었다. 순식간에 그의 주변이 살기로 가득찼고 군도를 다잡은 아삼의 눈이 그의 행동을 주시했다. '살인멸구'라는 단어를 떠올린 아삼이 마른 침을 삼키면서 다가올 위험에 대비를 했다.

    "어떻게 된 건가?"

    일촉즉발의 상황처럼 이어지던 대치상황은 새롭게 나타난 사람들에 의해서 깨져버렸다. 그 사실을 눈치 챘는지 품에 손을 넣던 번역의 굳은 얼굴이 펴지면서 약병을 하나 꺼내들었다.

    "내상약이다. 복용하면 고통이 덜할 것이다."

    받아든 환약을 보던 아삼이 급히 고개를 숙이면서 읍을 했다. 분명히 앞에 있는 자가 도망간 표창인과 모종의 관계가 있을 거라는 생각과 함께 복잡한 동창 내부의 관계에 얼굴을 찌푸렸다.

    '모두가 다 적이구나. 황궁이라는 곳은…… 정말 더러운 곳이구나.'

    있던 정도 다 떨어져 나가는 곳이었다. 모두들 자신의 본심을 숨긴 채 그렇게 생활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모습에 거부감이 드는 아삼이었다.

    고개를 숙인 아삼을 바라보는 번역의 눈빛이 번뜩였다. 일류 고수라고 칭하는 표창인을 쓰러뜨렸고 자신도 힘겨웠을 상대의 강력한 공격을 막아낸 놈이었다. 절정이라고 불리는 고수의 공격을 막아낸 그 모습에 경악했지만 애써 표정을 감췄다.

    '저런 놈이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것인가? 아니 일부러 두각을 나타내지 않은 것인가? …… 죽여야 하나? 우리 쪽으로 끌어들인다면 좋은 전력이 될 수 있겠지만…… 당분간 주시해야 할 놈인 것은 분명하구나.‘

    벙어리라는 것을 제외하면 평범하게 생각했던 어린 환관이었다. 자신의 예상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됐지만 오히려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그였다. 당분간 지켜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굳힌 마음과 함께 그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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