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51화 (5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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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만

    조금씩 어두워져가는 하늘과 함께 태연하고 자연스럽게 처소를 빠져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당당하고 자연스러운 그 모습은 별다른 이상을 느낄 수 없었는데, 어색한 점이 있다면 환관의 복장을 한 사람이 금의위가 배속 받은 건물로 들어선다는 것이었다.

    이내 익숙한 듯 금의위의 처소로 옮겨가던 그가 어느 전각 앞에 멈춰 서서 주변을 살피더니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짧은 시간에 발휘한 신법은 그만큼 신묘했고 그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 시급을 다투는 일이라도 생긴 것이냐? 무슨 급한 일이길래 나를 보자고 했느냐?"

    들어서는 이인학을 매섭게 노려보는 팽명민의 눈빛에 멈칫거리던 그가 소가주의 눈치를 살피면서 어렵게 입을 뗐다.

    "다름이 아니오라…… 동창에서의 제 입지를 조금 세워주셨으면 합니다. 지금처럼 평요원의 위치에 있어서는 팽가를 위해 움직이는 게 쉽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조금 더 높은 직위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제가 벙어리인 아삼이라는 놈과 같은 위치라니…… 팽가라는 이름에 먹칠을 할까 두렵습니다."

    이인학의 말에 듣고 있던 팽명민의 얼굴이 잔뜩 굳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아삼의 일로 머리가 아플 지경인데 고작 자신의 입지를 세워달라고 청하는 이인학이 못내 못마땅한 그였다. 찌푸려진 미간과 함께 날카로운 눈초리로 이인학을 노려보던 그가 크게 호통을 쳤다.

    "동창에 들어간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입지 타령이냐? 우선은 동창에서 네 존재를 각인시키는 것이 급선무인 것을! 그렇게 행동하다 보면 자연스레 네 입지가 올라가는 법이다. 지금은 다른 것에 신경 쓰지 말고 우선은 네놈이 맡은 일이나 성실히 수행하도록 하거라."

    생각지 못한 갑작스런 호통에 당사자인 이인학의 얼굴이 눈에 보일 정도로 붉어졌다.

    '동창에서의 내 입지가 바로 선다면 팽가에서도 손해날 일은 없을 것인데…… 이런 호통이라니……'

    "존재를 각인시키려 해도 위치가 위치인지라 쉬이 눈에 띠기 어렵습니다. 눈에 띠지 않을 뿐더러 행동을 하는 데에도 제약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청을 드리는 것입니다. 팽가를 위해서 일을 하려면 지금의 자리보다는 적어도 한 단계 위의 자리가 좋을 것 같습니다."

    자신의 실력정도면 방태옥, 송상호 그 아이들보다 더 높은 자리가 어울릴 거라 생각하는 이인학이었다. 하지만 팽명민은 그런 이인학이 영 못마땅했다.

    "내 말을 못 알아들은 것이냐? 낭중지추(囊中之錐)라 했다. 네 능력이 뛰어나다면 머지않아 곧 그에 합당한 자리가 주어질 것이니 우선은 네 본분에 충실하도록 하거라."

    단호한 팽명민의 얼굴에 할 수 없이 고개를 조아리는 이인학이었다. 실상 그의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애써 마음을 다잡으면서 내색하지 않던 그가 표정을 감추며 고개를 들었지만 붉어진 얼굴색은 감출 수가 없었다.

    "다른 전할 말이 없다면 그만 돌아가 보도록 하여라. 궁에서는 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명심하고 중한 일이 아니라면 이렇게 쓸데없는 일로 찾지 말아야 할 것이다."

    팽명민의 말에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한 이인학이 고개를 조아리며 전각을 나섰다. 돌아 나가는 이인학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팽명민의 머릿속에 예전에 나눴던 구영고와의 밀담이 떠올랐다.

    "팽인학이라는 아이는 동창에 수월하게 들어갈 것 같습니다. 시험을 통과한 것도 그렇고 훈육 결과도 뛰어난 것이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소가주님께서 거론하신 아삼이라는 아이도 비록 정태감의 반대가 있었사오나 첩형장인 오건휘의 수락으로 동창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흡족한 결과에 팽명민의 얼굴에 만족한 미소가 흘렀다. 이내 구영고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 공을 치하하는 팽명민이었다.

    "수고했소. 앞으로도 그 아이들을 잘 지켜봐 주시오."

    "아닙니다. 응당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나저나 그 아이들의 직책은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아삼이라는 아이는 요직에 앉히기 어렵겠지만 팽인학이라는 아이는 시험도 통과했고 그 성과도 나쁘지 않으니 바로 번역의 자리에 앉혀도 괜찮을 듯싶은데…… 정태감이라는 자의 반발만 넘길 수 있다면 가능 할 것 같습니다."

    "반발이라니? 그건 무슨 말이오?"

    "그것이 팽인학 그 아이가 우리 팽가의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지 자꾸만 딴지를 걸어와서…… 조삼보를 추포하라는 명만 내렸을 뿐인데 성급하게 죽였다는 이유로 자꾸만 팽인학 그 아이의 공을 깎아 내리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만한 성과를 나타낸 아이는 유일해서 조금 무리해서 밀어붙인다면……"

    "아니오. 우선은 둘 다 같은 자리에 앉히는 게 좋을 것 같소."

    "평범한 요원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하오나 팽인학이라는 아이는 우리 팽가에서 지원을 해주는 아이가 아닙니까? 그런 아이를 어찌 동창의 맨 밑바닥에 앉힐 수 있겠습니까? 혹여 정태감이라는 자가 걸린다면 제가……"

    "그런 것이 아니오."

    팽명민이 구영고의 말에 가로막고 나섰다. 그 모습에 이해가 되지 않은 듯 구영고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이미 각 세력 간에 어떻게든 자신들의 입김이 닿는 아이를 요직에 앉히려 애쓰는 판국에, 일부러 밑바닥에 앉히려고 하는 팽명민의 의중을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때가 되면 스스로 번역의 자리에 오를 것이오. 그렇게 조금 늦게 올라서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이니…… 우선은 내 뜻에 따라줬으면 좋겠소."

    "알겠습니다."

    팽명민의 말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구영고였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보이는 팽가의 소가주가 이해가 되지 않는 그였다.

    '이번 기회에 팽인학, 그 아이를 길들이는 것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니겠지. 과유불급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 아이의 눈에 넘치는 그 야망을 이렇게라도 꺾어두지 않으면 이후에 그 아이 뿐만 아니라 우리 팽가에게도 큰 화를 불러올 수 있음이야. 지금 길을 들여 놔야해.'

    이인학을 대할 때마다 번뜩이는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의 지위가 높아질수록 점점 더 감춰지는 그 욕망어린 눈빛이 마음에 걸렸던 팽명민이었다. 이번 결단이 이인학뿐만 아니라 팽가에게도 더 좋은 결과로 나타날 거라고 확신을 하는 그였다.

    자신의 의중을 알 지 못한 채 자신의 입지를 올려달라고 청하는 이인학의 모습에 실망한 팽명민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정태감이라는 자가 황궁무고에 배속되고 지금 이인학의 지위를 올리는 것은 더 수월한 일일 테지만, 우선은 지켜보기로 마음먹었다. 가주인 팽문호에게서 이번 일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은 그였지만 점점 자신의 의도대로 흘러가는 것 같지는 않았다.

    '흠…… 그 아이를 어찌 하면 좋단 말인가?'

    보면 볼수록 자신에게 실망감만 안기는 이인학이 좀처럼 마음에 들지 않는 팽명민이었다. 하지만 이미 자신의 가문에서 받아들인 이상 어떻게든 이인학을 안고 가야만 했다. 그리고 그 사실에 마음 한켠이 답답해지는 그였다.

    팽명민을 만나고 돌아서는 이인학 역시 마음이 좋지 않았다. 너무 성급하게 팽명민을 만난 것은 아닌가 하는 후회지도 들었지만 무엇보다 자신보다 못한 놈들이 위로 올라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아삼이라는 녀석과 같은 위치에 있는 자신의 처지에 화가 났다. 이제는 그런 마음을 떨쳐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조삼보를 추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실력에 뒤지지 않는 그 아이의 모습을 봐서인지 어떻게든 아삼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팽가에서 양자인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면…… 내 입지는 내가 스스로 높일 수 밖에. 궁에서의 입지를 높이는 방법이야 많지 않는가? 팽가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몰래 다른 줄을 잡아야겠지. 우선은 권력 있는 무리를 알아봐야 하나?'

    또래의 다른 아이들 보다 비상한 머리를 가진 이인학이었다. 그리고 벌써 몇 년째 궁에서 생활하면서 환관들이 어떻게 생활해야 궁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을 이미 눈으로 보고 겪었던 그였다. 이 구중궁궐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자신의 뒤를 든든히 봐줄 뒷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만큼 그 뒷배를 신중하게 골라야 하겠지만 별다른 도움 없이 자신을 무시하는 팽가보다는 나을거라는 생각을 가졌다. 결심을 굳힌 그의 입이 앙다물어지면서 굳은 의지를 비췄다.

    '환관 쪽은 이미 각 세력에서 심어놓은 사람들이 득실거리니 자칫 잘못 건드렸다가 팽가의 미움을 살 수도 있겠지. 그렇다면 내가 잡아야 할 동아줄은……'

    고심하던 이인학의 눈이 궁의 북쪽으로 향하였다. 그곳은 황후를 비롯한 왕의 후궁들의 거처가 모여 있는 곳이었다. 순간 이인학의 두 눈이 번뜩였고 이내 자신의 묘책에 스스로 감탄한 듯 얄궂은 미소를 흘렸다.

    ***

    황궁무고로 쫓겨난 정훈의 얼굴은 좀처럼 펴질 줄을 몰랐다. 자신을 추천한 사마택이 괘심했지만 이미 죽은 사람인지라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지금에 와서 원망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정훈이었지만 그래도 욕설을 내뱉는 것만은 멈출 수 없었다.

    자신이 사마택을 욕할 때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살기어린 시선과 함께 살갗을 찌르는 싸늘한 느낌에 급히 뒤를 돌아봤지만 아무런 것도 찾을 수 없었다. 마치 죽은 사마택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생각에 급히 욕하는 것을 멈춘 그였지만 무고에 그 망령이 떠돈다는 생각에 더욱 찝찝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 정훈을 살기어린 눈빛으로 노려보는 장 천호의 얼굴도 펴질 줄을 몰랐다. 친우라고 여겼던 죽은 그를 욕하는 정훈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찝찝함을 떨쳐내려는 듯 헛기침을 해대는 정훈이었다. 책 냄새만 가득한 무고는 혹시나 모를 침입에 대비해서 문이 닫혀있었기 때문에 항시 그늘이 져 있었다. 어두운 그 안에서 누군가 주시한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드는 정훈이었지만 자신이 맡은 일이 있으니 쉽게 그곳을 벗어날 수도 없었다.

    그렇게 자신의 신세가 더욱 처량하게 느껴지자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사람은 바로 자신이 모시고 있었던 유현이었다. 마지막 구원의 손을 내려줄 것 같았던 그가 그 손을 거둬들였고 자신은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지금 이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이 모두 유현의 탓이라고 생각한 그는 도저히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이 늙은 암캐 같은 자식! 내 저를 위해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거늘. 어떻게 나를 이리 내칠 수가 있단 말인가! 먹물 냄새 가득한 이런 곳에 갇힐 줄이야. 어쩌다 내 신세가 이리 되었을고.'

    생각하면 할수록 한숨만 나오는 정훈이었다. 도저히 이 무고에서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들어찼기 때문이다.

    '다시 불러준다는 그놈의 말을 믿을 수는 없겠지. 그렇다면 애초에 나를 이렇게 내치지는 않았을 것이야. 내가 잡은 동아줄이 썩은 동아줄이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 줄을 바꾸면 되겠지. 유현이 송기득보다 높은 위치에 있었다면 내가 이리로 올 일도 없었을 거야. 사례감의 우두머리인 송기득의 줄을 잡는 것이 내가 여기서 나가는 길일 것이야. 송기득 그 자의 줄을 잡아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정화 태감? 폐하의 신임이 두터운 쪽은 정화 태감이나 정화는 외유가 너무 잦질 않는가? 밖으로만 도니 언제 폐하의 신임을 잃을지도 알 수 없을 터…… 아무래도 옆에서 폐하를 모시는 송기득이 더 낫겠구나. 내가 살길은 송기득. 그 자 밖에 없다.'

    마음을 굳힌 듯 정훈의 눈이 태화전으로 향하였다. 어떻게든 장인태감이라는 새로운 줄을 잡아서 이 무고에서 나가리라 다짐하는 정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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