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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
사마택의 장례가 끝나자 또 한 번 궁내가 들썩였다. 조용하고 은밀한 움직임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상태로 여기저기에서 이어졌고 점점 더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사마택의 빈자리에 누구를 보낼 것인가가 환관들의 중대한 관심사가 되었고 다들 어떻게든 그 자리를 피하려고 노력했다. 그 자리에 거론 된 자신의 사람을 빼내려고 각 세력들도 분주히 움직였다. 무고에 배속된다는 것은 그만큼 권력에서 멀어진다는 것을 뜻했다. 어떻게든 요직에 자신의 사람을 하나라도 더 앉혀야 기반을 더 공고히 다질 수 있는 권력층에서는 당연히 꺼리는 자리가 바로 무고였던 것이다.
사마택의 경우는 본신의 무공이 뛰어났고, 정화라는 황제의 총애를 받던 든든한 뒷배가 있었기 때문에 무고 내에서도 수월하게 움직일 수 있었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지 못했다. 무공 비급을 따로 빼낼 가능성도 있었지만 이제 동창이라는 조직이 활성화되는 이때, 무고보다는 권력을 가질 그 조직에 목을 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송 공공, 이번 인사는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시지요."
뭔가 못마땅한 듯 잔뜩 얼굴을 찌푸리던 유현이 사람 좋은 미소로 가면을 쓴 듯 표정을 감추며 장인태감인 송기득을 향해 말했다.
"유 공공, 폐하께서 내리신 인사를 내 어찌 맘대로 바꿀 수 있단 말이요?"
유현의 불편한 심정을 알고 있는 송기득이었지만 짐짓 모른 체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 유현의 얼굴이 단번에 굳어졌다.
'이 능구렁이 같은 놈, 다 네 놈의 농간이란 것을 내 모르는 줄 아느냐?'
사례감의 우두머리인 송기득이었다. 모든 환관의 인사는 다 송기득의 손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모르지 않는 유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까지 들먹이면서 고개를 젓는 송기득의 모습에 그의 인상이 저절로 구겨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인상을 쓰고 있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이번 인사를 돌려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황궁 내에서 자신의 입지도 그만큼 줄어들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미소로 얼굴을 가린 그가 송기득을 향해 나직이 말했다.
"송 공공, 공공께서도 잘 알다시피 정훈 그 자는 지금껏 내서당의 훈육을 책임져 왔던 자입니다. 그리고 그 성과도 뛰어나서 이번에 동창에 들어갈 어린 환관들을 많이 길러내지 않았습니까? 그에 합당한 상을 내리진 못 할망정 무고로 가라니요? 정 태감에게 이번 인사는 너무 박하지 않습니까?"
"박하다니요? 그 자의 능력이 출중함을 알고 내린 자리입니다. 무고라는 곳이 어떤 곳이오? 그 가치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은 내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지 않소? 그곳에 있는 비급들 중, 하나라도 밖으로 빠져나간다면 피바람이 분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오? 그런 중한 곳에 아무나 보낼 수는 없지 않겠소? 정 태감 그 자라면 마땅히 잘 수행할 수 있을 것이오."
"하오나…… 정 태감 그는 무공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런 자가 어찌 무고를 지키겠습니까? 사마택이 지금껏 무고를 맡아온 것도 그 자의 무공이 뛰어나서 그런 것 아닙니까? 혹여 무고에 불순한 의도를 가진 자라도 들이닥친다면 무공도 하지 못하는 정훈이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유훈의 말에 순간 송기득의 얼굴이 굳어졌다. 도둑이 제 발 저린 격이었다. '불순한 의도를 가진 자'라는 단어가 그의 얼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불순한 의도라니요! 감히 그 누가 황제 폐하의 무고에 침입한단 말입니까?"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는 송기득이었다.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송기득의 모습에 별다른 생각 없이 말을 내뱉던 유현이 당황하면서 답했다.
"제 말은…… 꼭 침입한다는 것이 아니라…… 만에 하나 그렇게 된다면……"
"그런 일은 걱정하지 마시오. 무고를 지키는 금의위들이 있지 않소이까? 아무튼 이번 인사는 이미 정해졌으니 다시 거론하지 마시오."
뭔가 못마땅한 듯 획하니 고개를 돌리는 송기득이었다. 그 모습에 인상을 굳힌 유현이 자리를 박차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바드득' 거리면서 이를 갈던 그가 송기득이 있던 곳을 노려봤다.
'감히! 나를 무시했겠다? 두고 보자…… 송기득!'
머리를 감싸 쥐며 앉아있던 유현이 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정태감, 유 공공께서 몸이 좋지 않으시다고 아무도 만나지 않으신다 하셨습니다."
"내가 급히 봬야 할 일이 있다고 하지 않더냐? 어서 고하거라."
"이러지 마십시오. 아무도 들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나중에 다시 오시면 그때……"
"나중? 허어. 급한 일이라 하지 않았더냐? 정 네가 고하지 못하겠다면 내가 친히 고할 수 밖에."
막 입을 떼려던 정훈이었지만, 들어오라는 유현의 말에 얼굴 가득 미소를 짓고 재빨리 전각 안으로 들어섰다. 딱딱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 보는 유훈을 확인한 그가 고개를 숙여서 예를 올리고 불쌍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상당히 비굴한 표정이었지만 상관없다는 듯이 더 애처로워 보이려고 노력하는 정훈이었다.
"유 공공, 궁내에 소신을 황궁무고에 배속시킨다는 말이 돌고 있습니다. 어찌…… 그런 유언비어가 도는 건지. 공공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동안 소인은 내서당의 훈육을 성실히 수행했습니다. 헌데 갑자기 무고라니요? 사실이 아니겠지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공공."
머리를 감싸 쥔 채로 정훈의 한탄 섞인 말을 듣던 유현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고개를 흔들던 그가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로 정훈을 달래기 시작했다.
"나라고 네 공을 모르겠느냐? 그리고 이런 중차대한 시기에 너를 무고로 보내고 싶겠느냐?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이미 정해진 인사라 바꿀 수 없다고 하더구나. 잠시만 무고로 가 있거라. 가서 조금만 참고 있으면 내 다시 너를 부르마."
유현의 말에 정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다시 부른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막아주지 않고 있는데 시일이 흐르면 자신의 자리는 또 다른 놈이 차지할 거라는 사실은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이내 굳은 표정을 지우면서 울상을 짓던 정훈이 넙죽 엎드려서 애원을 하기 시작했다.
"공공, 저를 내치지 말아주십시오. 한번 무고에 발을 들여놓으면 죽기 전에 나오기 힘들다 들었습니다. 사마택이라는 그자도 죽어서야 무고에서 나올 수 있지 않았습니까? 제발 소신을 버리지 마십시오. 공공! 그간 공공의 옆에서 굳은 일도 마다하지 않던 소인입니다. 그 정을 봐서라도 제발 소신을 거둬 주십시오."
"나도 어쩔 수 없다 하지 않았느냐? 내가 너를 버리려는 것이 아니다. 송기득 그 자가…… 크흠. 지금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구나. 내 곧 다시 너를 불러들일 것이다."
고개를 흔드는 유현의 모습에 그대로 엎드려 있던 정훈의 얼굴이 처참히 구겨졌다. 애써 표정을 감추면서 힘없이 앉아있는 정훈의 모습에 앉아있던 유현이 내려와서 그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그만 돌아가 보거라. 이미 정해진 일이라 어쩔 수 없지만 내 필히 너를 다시 부르겠다."
"유 공공, 이러지 마십시오. 제발…… 소신은 유 공공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허니 소신을 이렇게 버리지 말아주십시오."
다급해진 정훈이 이번에는 유현의 바짓가랑이를 붙들며 울부짖었다. 그 모습에 유현의 얼굴이 잔뜩 굳어졌다.
"이런 미련한 인사 같으니라고. 나도 어쩔 수 없다 하지 않았더냐? 이리 매달린다고 될 일이 아니란 말이다. 도대체 그간 행실을 어떻게 했길래! 너를 무고로 내보낸 것은 송기득 그 자의 결정이었지만 그 전에 사마택이라는 자가 너를 추천했다들었다. 전임자의 추천도 있고 해서 네 놈으로 결정했다고 하는데, 내가 더 뭐라 한단 말이냐? 평소 네놈 행실이 네 발목을 잡은 것이다! 도대체 사마택 그 자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
유현의 호통에 정훈의 눈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더 이상 어떤 방법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게 된 정훈이 붙들었던 유현의 발을 놨다.
'사마택 이놈! 끝까지 나를……'
뜬금없이 자신이 황궁 무고에 배속된 것을 납득할 수 없었다. 다만 장인태감과 유현 사이의 힘겨루기에 희생양이 된 것이 아닐까 짐작했었는데 이 모든 것이 죽은 사마택의 농간이었다. 죽은 사마택의 모습을 보면서 만족해하던 자신이었지만 그런 자신을 비웃으면서 죽었을 사마택의 얼굴을 떠올린 정훈의 몸이 분노로 떨려왔다.
"이만 돌아가거라. 따로 할 말은…… 없다."
정훈의 손에 잡힌 바지를 털던 유현이 다시 침상으로 향했다. 이내 귀찮다는 듯 돌아눕는 유현의 모습에 그의 뒷모습을 매섭게 노려보던 정훈이 입술을 깨물고 천천히 일어섰다. 어느새 쥐어진 두 주먹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감탄고토(甘呑苦吐)라더니…… 이게 쓸모가 없어졌다는 것인가? 두고 보거라. 반드시 후회할 날이 올 것이다.'
무고로 향하는 정훈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무고 앞에 선 정훈이 '황궁무고'라고 쓰인 현판을 올려봤다. 웅장한 필체로 쓰인 현판과 함께 그 위에 덧대어 떠오르는 사마택의 모습에 인상을 구긴 그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흐흠."
헛기침을 내뱉으면서 사마택의 허상을 쫓아낸 그가 조심스럽게 무고 안으로 들어섰다. 처음 오는 무고의 내부를 신기해하며 여기저기를 훑어보던 그가 가까이에 있는 누렇게 바랜 책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막 책장을 넘기려던 정훈은 깜짝 놀라면서 뒤를 돌아봤다. 갑자기 들려오는 낯선 음성이 그에게 경고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함부로 볼 책이 아니오. 손에서 내려놓으시오."
까만 복면을 뒤집어 쓴 사내가 매서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 매서운 눈빛에 슬그머니 손을 내린 정훈이 원래 있던 자리에 손에 쥔 책을 내려놓으면서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뉘시오? 나는 금일부터 이 무고에 배속된 정훈이라 하오만?"
"나는 장휘라고 하오. 정오품직의 천호(千户)로 이 무고를 지키고 있소. 이 무고에는 그쪽도 알다시피 귀한 비급들이 보관되어 있소. 앞으로 그대의 임무는 이 비급들을 관리하는 것이니 비급들이 새나가지 않게 잘 지켜야 할 것이오. 그리고 한마디 더…… 무고를 지키는 환관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비급을 읽을 수는 없소! 명심하시오."
딱딱한 장천호의 말투가 맘에 들지 않은 듯 정훈의 얼굴에 쓰디쓴 미소가 번졌다.
"알겠소. 허나 나 또한 이곳의 책임자이니……"
삐쭉 튀어나온 책을 정리하며 말을 하던 정훈이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에 뒤를 돌아보더니 깜짝 놀라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느새 사라졌는지 그 어디에도 장 천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무고에서의 정훈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처소에 우두커니 앉아있던 아삼이 사마택이 건넸던 '전음술(傳音術)'에 관한 서책을 조심스럽게 펼쳤다.
'글로 의사를 전달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어. 매번 지필묵을 가지고 다닐 수도 없으니…… 이번 기회에 전음술을 익혀야겠다.'
결심을 굳힌 아삼이 사마택의 필체를 확인하면서 천천히 서책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전음술의 대표적인 것으로 의어전성(蟻語傳聲)이 있다. 의어란 개미의 소리란 뜻으로 이는 작은 소리를 다른 사람의 귀에 들리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의어전성은 발출할 수 있는 거리에도 한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상대를 특정하여 대화를 할 수는 없고 그 부근에 있는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다. 또한 입술을 움직임으로써 시전자가 은밀히 대화하고 있다는 것을 발각당하게 된다.'
그날부터 조금씩 전음의 기초를 수련해 나가는 아삼이었다. 그런 아삼의 속내를 읽기라도 했는지 동창에서도 어린 신입들을 위한 교육이 시작되었다. 기초적인 포박술과 도법, 박투술 등은 내서당에서 받았던 것들보다 더 효과적이고 수준 높은 것들이었다.
그렇게 기초적인 것을 수련하는 과정에서도 전음에 관한 교육도 이루어졌는데 아삼에게는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 봐도 벙어리인 아삼이 시전한 전음에서는 '어어어'하는 소리만 나올 뿐 어떠한 뜻도 전달 할 수 없었다.
'왜 안 되는 것일까? 말을 하지 못하는 벙어리는 전음도 안 되는 것인가?'
고민해 빠진 아삼이 또 다시 사마택이 전해준 서책을 꺼내 들었다. 이윽고 정독(精讀)하던 아삼의 눈에 '입술을 움직여서'라는 구결이 들어왔다.
'전음을 하려면 입술을 움직여야 한다. 이것은 말을 한다는 의미인가? 그렇다면 입술만 움직여봤자 소용이 없질 않은가? 그래서 '어어어'하는 소리만 전달 된 건가? 나 같은 벙어리는 전음을 할 수 없다는…… 것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아삼이 또 다시 책에 집중했다. 아무래도 다른 방도를 찾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렇게 간절히 원하던 아삼의 눈이 번뜩였다.
그의 눈에 네 글자가 각인되듯이 들어왔다.
'혜광심어(慧光心語)'
불문의 최고 수법으로 알려진 전음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