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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보(悲報)
하북성의 끝자락을 향해 급하게 달리던 말들이 허름한 집 앞에 급하게 멈춰섰다. 그리고 말에서 내린 아삼이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허물어진 담장 안으로 들어섰다. 이내 아삼의 눈에 여기저기 쓰러진 검은 복면을 뒤집어 쓴 사내들의 시체가 들어왔다.
"정중히 거두거라. 팽가를 위해서 힘쓴 자들이다. 우리 동료가 아니더냐!"
어느새 따라 들어온 팽명민이 힘없이 늘어져있는 맹호단의 두 시체를 발견하고 뒤따라던 수하들을 향해서 소리쳤다. 그러자 수하들이 한 곳에 모여있는 두 시체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시체들을 둘러보던 아삼의 발걸음이 집안으로 향했다. 그리고 집안으로 들어선 그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두 눈을 크게 뜬 채 꼬꾸라져 있는 부모님의 시체가 들어왔다. 이내 천천히 다가간 아삼이 조심스럽게 부모님의 눈을 감겨주었다. 한 곳을 주시하던 부모님의 눈빛은 걱정스러움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한 곳을 주시하던 그 눈빛에 구석을 바라보던 아삼이 천천히 그곳을 살폈다.
아삼 부모님의 시체와 팽가 무사의 시체를 수습한 팽가의 사람들이 따로 흔적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꼼꼼히 살피는 그 모습에 두 동생의 모습을 볼 수 없었던 아삼의 눈도 주변을 살폈다. 이내 모든 조사를 끝냈는지 그들이 아삼의 의중을 묻고 그 낡은 집에 불을 놓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활활 타오르는 불빛을 바라보던 아삼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아호와 아영…… 그 아이들은 어떻게 된 거지? 시체가 없는 걸로 봐선…… 어딘가에 살아있으려나?'
"이제 그만 돌아가자꾸나."
팽명민이 침울해있는 아삼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아삼이 팽명민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내 막대기를 주워들은 그가 땅바닥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동생들을 찾아달라고?"
땅바닥에 쓰인 글을 읽은 팽명민이 아삼을 향해 되물었고 그 물음에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아삼이었다.
"흠…… 알았다. 네 가족을 지켜주겠다 약조를 한 것은 나였으니, 당연히 네 동생들의 행방을 찾으려고 힘을 써보마. 내 이 약조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지키도록 하마."
팽명민의 굳은 약조에 고개를 숙여서 감사의 뜻을 전하는 아삼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침음을 삼킨 팽명민이 그를 일으켰다. 아무래도 그의 가족을 보살피겠다던 자신의 말이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아삼의 예가 부담스러운 그였다.
'이 많은 수의 복면인들이 양민의 집을 찾은 이유가 무엇일까? 따로 아이들을 노렸단 말인가?'
풀리지 않는 궁금증을 가진 팽명민이 주변을 둘러보면서 수하들을 바라봤다. 이내 입을 들썩이면서 전음을 보내던 그가 멍하게 서있는 아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됐다. 이제 그만 가자꾸나."
앞장 서는 팽명민을 따라 말에 올라탄 아삼이 활활 타오르는 집을 다시 한 번 돌아보며 길을 나섰다.
'나는 이제 뭘 해야 하지? 아삼의 부모님을 죽인 자들에게 복수를 해야 하나? 아삼이라는 아이의 몸만 빌렸을 뿐, 내 부모라고 할 수 있을까? 먹먹한 가슴은 무엇으로 설명한단 말인가? 내가 복수하는 게 맞는 것일까? 아니면……'
심란한 마음과 함께 깊은 생각에 잠겼던 아삼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우선 아영과 아호의 생사부터 확인하자. 만약 그 아이들이 살아 있다면 그 아이들을 돌보는 게 우선이겠지. 그래도 동생들이니…… 제발, 그 아이들이 무사해야 할 텐데.'
생각을 마친 아삼이 입술을 깨물면서 비장한 눈빛으로 앞을 주시했다. 그리고 불타오르는 집과 멀어지려던 그 때, 그의 눈에 이질적인 무언가가 들어왔다. 바닥에 뿌려진 핏자국과 함께 파여진 바닥.
급히 고삐를 잡아당기면서 말을 세우자 투레질을 하던 말이 걸음을 멈췄고, 갑자기 멈춰선 아삼의 행동에 앞서가던 팽명민도 달리던 말을 세웠다.
"무슨……"
갑작스런 아삼의 행동에 의아해하던 팽명민이 연유를 물으려다가 멈칫했다. 말에서 내린 아삼이 핏자국이 난 곳을 유의 깊게 살피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저곳은…… 7조 조장이 쓰러졌던 곳이 아닌가?'
생각보다 뛰어난 아삼의 관찰력에 감탄하고 있을 때, 주변을 살피던 아삼이 한쪽으로 걸어가면서 날카로운 눈빛을 빛냈다. 이윽고 나무에 박힌 무언가를 꺼내든 그가 천천히 그것을 살폈다.
'이 암기는?'
"천소만이라는 맹호단의 조장을 해한 암기 같구나. 패인 바닥에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아마도 튕겨져 나간 것 같구나."
팽명민의 말에 눈을 빛낸 아삼이 패여 있던 바닥을 살펴보면서 궤적을 그렸다. 도저히 이곳까지는 튕겨져 나올 수가 없다고 판단한 그가 주변의 핏자국을 살피면서 이전의 상황을 유추하려고 노력했다.
'또 다른 자가 있다. 가지가 꺾이고 뿌려진 핏자국으로 봐서 저쪽으로 도망을 간 것 같은데……'
조삼보의 가르침이 컸던 덕인지 이전의 배움을 토대로 여기에서 일어난 상황들을 유추하던 그가 바닥에 글을 적었다. 그리고 그 글을 읽던 팽명민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생각보다 예리한 아삼의 지적과 함께 스스로 앞에 있는 이 아이를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맞다. 쓰러진 흉수들의 몸에서 팽가의 것이 아닌 새로운 검흔이 새겨 있었다. 순식간에 요혈을 격중당한 것으로 봐서 엄청난 환검(幻劍)이나 한꺼번에 복수의 급소를 공격하는 산검(散劍)같아 보였다. 아마도 누군가가 개입을 했을 터. 팽가는 그자를 쫓을 생각이었다."
팽명민의 말을 듣던 아삼의 고개가 미미하게 끄덕여졌다. 새로운 가능성을 찾은 듯 응어리 진 가슴이 조금 풀리는 것도 같았다. 뽑아든 암기를 바라보던 아삼이 조심스럽게 팽명민을 향해 그 암기를 건넸다.
암기를 건네받은 팽명민의 눈이 아삼을 향했고 그 눈빛을 접한 그가 다시 한 번 바닥에 글을 적기 시작했다.
"이 암기의 주인을 찾아 달라? 흐음. 이 흉수와 관련된 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는 것이겠구나?"
자신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아삼을 보고 눈을 빛내는 팽명민이었다. 내서당에서 받은 교육에서는 두각을 나타내지 않았던 아이였다. 팽가에서 이인학이나 황세웅보다 뛰어난 실력을 나타냈던 아이가 갑작스럽게 뒤쳐졌던 이유를 알 수 없어서 의아해 했었지만 이제야 앞에 선 아이의 진면목을 보는 것 같았다.
'영악한 아이다. 궁에서 그만큼 자신을 감출 수 있다는 것은…… 현명하다고 봐야 하겠지? 역시 아버님이나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이야.'
잠깐 동안 아삼의 실체를 접한 것 같은 팽명민의 얼굴에 진한 미소가 걸렸다. 보고받은 것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는 이 아이의 심계에 다시 한 번 감탄을 하던 그의 눈이 번뜩였다.
'꼭 붙잡아야 할 아이다. 인학이라는 아이와는 비교를 불허하는구나. 우리 팽가에 꼭 필요한 아이다. 환심을 사둘 필요가 있겠어.'
팽가에 있을 때 보다는 시들시들해졌던 마음이었지만 그런 마음을 떨쳐버린 팽명민이 입술을 달싹였다. 이윽고 그의 주변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 않던 자들 중 한명이 빠른 속도로 그곳과 멀어져갔다. 아삼이라는 아이를 잡기 위해서 이번 일을 확실하게 처리하려는 팽명민의 의도였다.
그리고 멀어지는 기척을 감지한 아삼의 눈이 번뜩였다.
장례를 치루기 위해서 다시 길을 재촉하는 그들이었다. 빠른 속도로 말을 달려서인지 거친 바람이 두 뺨에 부딪쳤고 날카로운 바람 때문인지 두 눈이 시려왔다. 붉게 충혈 된 두 눈에 잔뜩 힘을 주던 아삼이 고삐를 다잡으며 앞을 향해 달려 나갔다.
***
마교 내에서도 심처라 할 수 있는 곳에는 몇 채의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가장 중하다고 생각되는 성물이 모셔진 전각과 마교 내의 무공 비급들을 모아놓은 무고, 교주가 있는 교주전이었다. 교주전을 중심으로 그 뒤쪽의 가장 깊숙한 곳에 성물과 무고가 위치해 있었고 앞쪽에는 여러 채의 전각이 있었는데 마교 내에서도 지위가 높은 자들이 기거하는 곳이었다.
대부분의 장로와 교주의 식솔들의 거처도 그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그 여러 거처 중에서도 교주의 직계라고 할 수 있는 둘째 아들 장호영이 기거하는 전각에 늦은 밤까지 불이 켜져 있었다.
"도대체 그런 짓을 왜 벌인 것이냐?"
답답해하는 듯한 마태령의 물음에 고개를 숙이던 장호영은 이내 분하다는 투로 말을 이어갔다.
"그 천한 년이 저를 무시하지 않습니까?"
"…… 무시했다?"
"천 장로의 제자라고는 하나, 그 근본은 천한 년이 아닙니까? 형님의 행태에 기고만장 했는지 제 말을 흘겨듣기에……"
"……."
장호영의 답에 할 말을 잃은 마태령이었다. 이 아이가 왜 이렇게 어리석게 행동하는지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는 그였다. 어렸을 때부터 근골과 무에 대한 재능을 보고 제일 먼저 받아들인 아이였다. 머리가 나쁘다면 상승 무공을 익힐 수도 없었지만 자신의 독문 무공을 가르쳐 줄때를 보면 그렇게 떨어지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일취월장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의 안목이 정확했다는 것을 깨달은 그였다. 빠른 속도로 성장해가는 장호영의 모습에 뿌듯해 했지만, 그 성정이 너무 거칠었고 옹졸했다.
'조금만 더 진중했어도…… 소교주의 자리는 네놈의 몫이거늘……'
장호영을 바라보는 마태령의 눈에 안타까움이 스쳤다. 무공을 깨우치는 오성의 반만 실생활에 드러났어도 소교주라는 자리는 바뀌었을 거라고 확신하는 그였다. 조급하고 거친 성정은 무공에서 우위를 차지하던 이점을 깎아먹었고, 옹졸한 그의 마음 씀씀이는 너무 많은 자들을 적으로 돌렸다. 당연히 소교주의 자리는 그의 형인 장무영에게로 돌아가 버렸다.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머쓱해진 장호영이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면서 그를 바라봤다. 이런 상황에서는 잘도 돌아가는 머리였다.
"마 숙부! 아니, 사부! 그 일이 실패로 돌아갔는데, 이제 어떡하면 좋습니까?"
"크흠. 어쩔 수 없다. 이대로 묻는 수 밖에."
"…… 어렵게 알아낸 정보가 아닙니까? 이대로 묻는다면 몰살당한 자들이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차라리 소교주의 짓으로 돌리는 것은 어떻습니까? 형님의 입지를 흔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눈을 빛내면서 의중을 묻는 둘째 공자인 장호영의 태도에 눈살을 찌푸린 마태령이 타이르듯이 말을 이어갔다.
"어차피 그 정도 소모품이야 재물과 시간만 있으면 금방 만들어 낼 수 있는 전력이다. 그깟 것에 연연하는 모습은 지존이 될 모습에 어울리지 않아."
"……."
"소교주의 곁에 누가 붙어있는 지는 너도 잘 알지 않느냐? 군사라는 놈은 그런 얕은 수를 충분히 간파하고도 남을 거다. 되려 공론화시켜서 우리를 곤란하게 만들고도 남을 놈이지."
"……."
마태령의 말을 듣던 장호영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괜히 들쑤셔봤자 자신에게 불리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였지만 표정이 좋지만은 않았다. 촌구석에 위치한 일반적인 양민을 해하기에는 충분하다 못해 넘칠 정도로 과분한 전력이었지만 살아서 돌아온 놈들이 없었다.
너무나 안일하게 생각한 자신을 탓해야 했지만 그런 쉬운 일도 처리하지 못한 놈들의 한심함에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마태령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내 무공 탓인가? 위력적이기는 하지만 그만큼 성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던가?'
실제로 성격이 난폭하다고 알려진 마태령이었다. 일부러 그런 모습을 부각시키려고 의도적으로 행한 것이 사실이었지만 가끔씩 자신도 흥분하는 경우가 있었다.
신교 내에서도 장로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감춰야 할 부분도 많았다. 일부러 급한 성정을 드러내는 그였지만 실제로는 꽤나 심계가 깊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살얼음판을 걷는 그곳에서 진즉에 도태되었을 것이었다.
'저 편협한 마음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구나. 가만히 두었어도 될 일을…… 괜한 적을 만들었음이야. 그것도 꽤 껄끄러운 적이 아닌가.'
그 여아와 사제지간인 천 장로가 어떻게 나올지도 걱정이었다. 유독 그 아이를 아끼던 천 장로였다. 자신을 뛰어넘을 거라고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니던 그녀의 성품으로 보아 아마도 유야무야 넘길 것 같지는 않았다.
'교주는 또 어떻게 나올지…… 하아.'
한숨을 내쉬면서 못마땅한 시선으로 장호영을 바라보는 그였다. 그런 자신의 의중을 모르는지 미간을 찌푸린 채로 생각에 잠겨있는 그 모습이 좋게 보이지만은 않았다.
'천하에 마태령이 정이라는 것에 휘둘릴 줄이야……'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도맡아서 가르치던 장호영이었다. 아이가 없던 그에게는 그가 자신의 아들이었고, 조카였다. 명석하고 호탕하던 아이는 어느새 온데간데없고 소교주의 자리를 내어준 뒤로 더 편협하고 옹졸하게 바뀐 그 모습은 더욱 안쓰럽게 느껴졌다.
미미하게 고개를 흔들던 마태령이 이내 자리에 일어섰다. 그 모습을 보고 뒤늦게 그를 배웅하는 장호영이었지만 이어지는 그의 말에 움직임을 멈췄다.
"당분간 무공에만 전념하거라."
"……."
함부로 나대지 말라는 그 속뜻을 알아챈 장호영이 뒤늦게 고개를 숙였다. 차가운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