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47화 (47/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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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보(悲報)

    푸른 도복을 입은 중년인의 등장에 모두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가 던진 것으로 보였던 검은 평범한 철검이었지만 정확히 두 무리의 흐름을 끊었고 자연스러워 보이면서도 위력적인 그 모습은 상대가 경시할만한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게 만들었다.

    "멈추시오!"

    "누구요? 왜 우리 일에 끼어드는 거요?"

    푸른색 도복을 입고 나타난 중년인을 향해서 끼어들지 말라는 듯한 말투로 말을 꺼내는 복면인이었지만 상대의 실력을 의식해서인지 존대를 했다. 그리고 그들의 행동에 쓴 웃음을 짓던 중년인이 그들을 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그저 지나가던 길에 이곳에서 진동하는 피비린내에 발길을 옮긴 것뿐이오. 무슨 연유로 이런 외딴 민가에 쳐들어와서 살생을 자행하는 거요?"

    "…… 당신이 상관할 바는 아니니, 그냥 지나가던 길이나 마저 지나가시오. 이일은 우리와 저자 사이에 얽힌 은원관계니……"

    "나는 팽가의 사람이오. 맹호단의 제 7조…… 허억."

    은원관계를 들먹거리면서 중년인을 떨쳐내려는 그들의 행태에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소속을 밝히는 천소만이었다. 하지만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뛰어드는 복면인의 행태에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순간적으로 천소만의 목을 찔러오는 쾌검과 함께 더 이상 피할 힘도 남아있지 않던 그의 얼굴에 절망이 어렸다. 본능적으로 감기려는 눈을 부릅뜬 채, 마지막을 맞이하려는 그의 눈에 푸른빛이 가득 들어왔다. 어느새 그의 앞을 가로막은 도포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짧은 순간에 거리를 좁혀서 그의 앞을 막아선 중년인의 경공에 놀란 천소만이 중년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맨 손으로 검면을 쳐낸 그가 손을 뻗자 바닥에 박힌 검이 뽑히면서 그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고 그 모습에 놀란 이들이 다급한 음성을 토해냈다.

    "허공섭물!"

    간단한 그의 한수에 모두가 놀라서 그를 바라봤다. 생각보다 더 대단한 실력을 가진 중년인의 모습에 침음을 삼키던 복면인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고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거리던 그들이 몸을 사리지 않고 그를 공격해왔다.

    동료를 방패삼아서 검을 찔러 넣었고 중년인을 가로막은 동료의 몸에 검을 찔러 넣으면서까지 공격을 해대는 지독한 모습에 그들을 막아서는 중년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지독한 자들이구나.'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들의 행동은 너무 극단적이었다. 정상적인 자들이 행할 행동은 아니라고 판단한 그의 손속이 더욱 단호해졌고 그의 검에 맞서던 자들은 순식간 요혈을 찔린 채 목숨을 잃었다.

    "흐음."

    쓰러진 자들을 보면서 침음을 흘리던 그가 뒤에서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천소만을 돌아봤다. 그제서야 그 시선을 느낀 천소만이 힘겹게 포권을 하며 고마움을 표했다.

    "고맙소."

    "…… 팽가라 하시었소?"

    "팽가의 맹호단 소속 천소만이라 하오. 도움에 감사드리오."

    비굴하지 않지만 고마운 마음을 표하는 그의 자부심어린 태도에 고개를 끄덕이던 중년인이 말을 이어갔다.

    "화산의 조충이오. 어떤…… 연유인지 알 수 있겠소?"

    "조충!"

    뜻밖의 이름을 들은 천소만이 경악성을 터뜨리며 놀라워했다. 조충은 화산파를 대표하는 고수들 중의 한 명으로 유명한 매화검수에 속한 사람이었다. 특히 이십사수 매화검법의 경지가 완숙에 이르렀다고 하여 '매화검'이라고 불릴 정도로 무림에 널리 알려진 고수였다.

    조충이라는 이름을 듣고 나서야 그가 복면인들을 수월하게 상대하던 모습이 당연하다고 느껴지는 천소만이었다. 이윽고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그가 다시 한 번 포권을 하면서 말을 이었다.

    "결례를 했습니다."

    "아니오. 개의치 마시오.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겠소?"

    침울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조충의 말에 상황을 설명해 나가는 천소만이었다. 그리고 그의 말을 들은 조충이 안 쪽에 쓰러져 있던 두 아이를 바라봤다.

    "저 아이들의 상심이 클 것 같소. 눈앞에서 부모를 잃었으니……"

    "모두 저희 탓입니다. 너무 안일하게 대처하는 바람에……"

    "그렇지 않소. 내 뒤늦게 왔지만 천 무사의 기개있는 모습은 쉽게 잊지 못할 것이오."

    "……."

    "팽가에 알려야 하지 않겠소? 저들의 목적이 저 식솔들이었다면 쉽게 포기할 것 같지는 않소만?"

    "그게…… 당분간 저 아이들을 맡아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지금은 여력이 부족하여……"

    천소만의 청에 잠시 고민을 하는 조충이었다. 이윽고 미미하게 끄덕여지는 그의 고개와 함께 수긍의 뜻을 표하자 천소만의 얼굴이 그나마 환해졌다. 혼절해 있는 두 아이의 안전을 보장받은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여긴 그가 다시 조충을 향해 고마움을 표했다.

    집 앞을 지키고 있는 조충을 확인한 천소만은 잠시 안에서 운기를 마치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너무 조급해 보이는 그 모습에 만류를 하려던 조충이었지만 싸늘하게 식은 두 구의 시체를 조심스럽게 챙기는 그 모습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윽고 두 시체를 추스린 그가 조충을 향해 감사의 뜻을 밝혔다.

    "감사합니다. 저는 이대로 팽가로 향하겠습니다."

    "알겠소. 나는 저 아이들을 데리고 따로 객잔을 잡아서 움직이겠소. 아무래도 이곳은 위험할 지도 모르니. 이 근처에 있는 객잔을 수소문하면 나를 찾을 수 있을거요."

    "감사합니다. 대협."

    다시 감사의 뜻을 내비친 천소만이 땅을 박찼다. 빠른 속도로 멀어져가는 그 모습을 딱딱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조충이었다.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무공도 모르는 양민을 해하기 위해서 그런 고수들이 나섰다는 것 자체가 흔치않은 일이었다. 특히 몸을 사리지 않는 그들의 행동은 정파라고 칭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어지간한 사파들도 그런 식으로 맹목적이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그였다.

    '마교…… 인가?'

    그가 잠깐 상념에 빠져있는 동안 아득하게 보이는 아삼의 집을 바라보던 천소만이 마음을 다잡으면서 내기를 끌어올렸다. 한시라도 빨리 팽가에 이 사실을 전해야만 했다. 급히 걸음을 옮기는 그였지만 갑자기 날아든 암기에 그의 몸은 그대로 꼬꾸라졌다.

    관자놀이를 꿰뚫은 암기가 바닥에 꽂혔고 그대로 바닥으로 처박힌 천소만의 뒤쪽에 야행복을 입은 사내 한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은밀한 그의 공격에 다급해하던 천소만이 이렇다 할 반응도 보이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진 것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피곤해지겠지. 조충이라…… 어찌됐든 둘째 공자의 일이 성공을 거두지는 못한 것이로군. 우리에게는 다행인가? 그나저나 희매가 많이 슬퍼하겠군.'

    쓰러진 천소만의 모습을 바라보던 사내가 급히 몸을 띄웠다. 뒤에서 맹렬하게 다가오는 조충의 모습에 다시 한 번 손을 뿌리자 섬광이 번뜩였다. 쏜살같이 날아간 암기를 확인한 조충이 철검을 꺼내들어 그것을 받아냈고 되려 그 암기를 낯선 사내를 향해 되돌려줬다.

    자신이 던진 암기가 힘을 더해서 다시 되돌아오는 모습에 침음을 삼키던 사내가 그대로 몸을 틀면서 나무를 박찼다. 자신이 상대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크윽!"

    옆구리를 스친 암기에 신음을 터뜨린 그자가 그대로 모습을 감췄다. 뒤늦게 뒤를 쫓은 조충이었지만 집 안에 있을 아이들을 떠올리면서 더 이상 그자를 추적할 수는 없었고, 쓰러진 천소만의 모습을 본 그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번졌다.

    "……."

    바닥에 꽂힌 암기를 손에 쥔 그가 아무런 말도 없이 다시 집 안으로 들어서서 두 아이를 옆에 끼고 걸음을 재촉했다.

    '우선 안전한 곳으로 간 이후에, 팽가에 알리는 것이 좋겠구나. 급히 본산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일이 이상하게 흘러가는 구나.'

    사마택의 장례가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온 아삼의 발걸음이 황궁무고로 향하였다. 처음부터 무고로 갈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생각에 잠겨서 걷다보니 어느덧 무고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한 아삼이었다.

    이전에 무고를 출입하던 어린 환관의 모습을 확인한 금의위도 딱히 제지를 하지 않았고, 조심스럽게 무고 안으로 들어선 아삼의 눈이 으레 사마택이 생전에 앉아 있던 의자에 닿았다.

    '뭘 그리 멍청히 서 있는 것이냐? 어서 필사를 서두르지 않고.'

    마치 사마택의 호통이 들려오는 듯 하자, 재빨리 상으로 다가가서 붓을 들던 아삼이 이내 자신의 행동을 깨닫고는 허탈한 웃음과 함께 힘없이 의자에 앉았다.

    '정이라는 것이 무섭구나. 이렇게 허전하고…… 그리울 줄이야.'

    자연스럽게 떠올린 사마택에 대한 생각에 아삼이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생각해보면 이곳에서 사마택만큼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낸 사람은 적은 것 같았다. 미운 정, 고마운 정이 쌓인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자신을 꿰뚫어보는 듯한 그 눈빛이 두려웠고 나중에는 무뚝뚝한 말투에 가려진 자신을 위하는 그 마음이 고마웠다.

    자신을 양자로 삼고 싶었단 사마택의 그 마지막 눈빛이 마음에 걸린 아삼이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그저 마음 한구석에 묻어야만 했다.

    - 사태감이 그리운 것이냐?

    갑작스런 전음에 놀란 아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익숙한 듯 천장을 바라봤다. 어느덧 천장에서 뛰어내린 장 천호가 사마택의 의자를 슬쩍 돌아보고는 아삼을 향해 말을 이어갔다.

    "이제…… 너는 이곳으로 올 필요가 없다. 곧 새로운 태감이 이곳을 맡을 것이니. 너는 택…… 그 친구가 원했던 대로 동창에 들거라. 그래도 그 친구의 마지막이 쓸쓸하지는 않겠구나.

    말을 끝낸 장 천호가 다시 모습을 숨겼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삼이 조용히 고개를 숙여서 예를 표하고 무고를 빠져 나왔다.

    터벅터벅 힘없이 처소를 들어서던 아삼이 자신을 부르는 반가운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난 곳을 바라봤다.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는지 새하얀 목면을 입은 황세웅이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삼! 이게 얼마만이야? 그동안 잘 지냈어?"

    반가운 마음에 아삼의 손을 덥석 잡던 황세웅이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아삼의 얼굴에 어색한 듯 머리를 긁적이면서 말을 이어갔다.

    "어때? 멋있지? 금의위다. 지금 금의위의 소기(小旗)야. 이래봬도 종 칠품직이라구! 하하하. 너랑 이인학 아니 팽인학은 동창에 들어갔다지? 같은 궁에 있으면서도 이제서야 보게 되는구나."

    "……."

    황세웅의 물음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아삼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다시 웃음을 짓는 황세웅이었다. 그리고 그의 모습을 본 아삼의 입가에도 작은 미소가 걸렸다. 오랜만에 만난 황세웅이 반갑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썩 달갑지 않은 아삼이었다. 그런 아삼의 심정을 읽은 황세웅이 찾아온 용건을 꺼내 들었다.

    "소가주께서 너를 찾으신다. 지금 나를 따르면 돼."

    기감을 살피던 황세웅이 앞장서서 처소를 나갔다. 그리고 그 뒤를 아삼이 조용히 따랐다. 어느덧 익숙한 전각이 눈에 들어왔고 황세웅이 아삼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난 이제 가 봐야 해. 오랜만에 봐서 반가웠어.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때 또 보자. 곤란한 일이 있으면 이 형님을 찾아와! 네 일이라면 특별히 도와줄 테니까. 하하하."

    환한 미소를 지어보이던 황세웅이 자신의 말에 웃음을 보이는 아삼을 보고 만족한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돌아서는 황세웅을 바라보던 아삼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지어졌다.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와서 예를 표하는 아삼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팽명민의 눈빛에서 슬픔이 묻어났다. 아무 말없이 아삼만 바라보던 팽명민이 이내 헛기침을 내뱉고 힘겹게 말을 꺼냈다.

    "흐흠…… 그래, 그간 잘 지냈느냐? 오늘은…… 내 너에게 전할 소식이 있어서 이리 불렀다."

    "……."

    "그것이……"

    뜸을 들이는 팽명민의 모습에 이상함을 느낀 아삼의 얼굴이 굳어졌다. 신중한 그의 모습으로 봐서 자신에게 좋은 소식은 아닌 것 같았다. 원래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더욱 딱딱하게 굳었고 그 모습을 바라본 팽명민이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미안하구나. 너와의 약조를 지키지 못했다. 너의 가족을 돌봐준다고 약속했는데……"

    팽명민에게서 가족들의 비보를 전해들은 아삼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갔다. 순간 다쳐서 누워있을 때, 자신을 지켜준다고 맹세하던 아호와 아영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어떻게든 아들을 살리려 애쓰던 부모님의 얼굴도 떠올랐다.

    "괜찮은 것이냐? 정말 널 볼 면목이 없구나."

    그늘이 내려앉은 아삼의 얼굴에 팽명민의 얼굴 또한 굳어갔다.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은 아삼에게 별 위로가 되지 않을 거란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할 말을 찾지 못하는 팽명민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누굴까? 내가 원한을 진 사람이 있었던 건가? 왜 아무런 죄도 없는 그들에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거지?'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아삼이었다. '이명철'이라는 이름에서 '아삼'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새롭게 만난 사람들이었다. 솔직히 함께 한 시간도 짧았고 그저 아삼이라는 아이의 가족이었기 때문에 그 아이의 몸을 빌려 살고 있는 자신에게는 빚처럼 남겨진 사람들일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느껴지는 아릿함과 먹먹함은 이전 생에 있을 때의 그 고통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자신의 가슴이 왜 이렇게 먹먹한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머릿속에는 아호와 아영 그리고 노쇠한 부모의 얼굴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 사마택도 없고 정화태감도 원정을 떠났는데…… 누가 나를 도와줄 수 있지?…… 장 천호?'

    복잡해진 머릿속에서 궁을 나갈 방법을 떠올리려는 아삼이었다. 그래도 이 생의 부모였기 때문에 직접 자신의 손으로 장례를 치러 주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에 잠긴 아삼의 모습에 팽명민이 마치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이미 손을 써 놨다. 지금 당장 나와 함께 궁을 나서자. 가서 네 손으로 직접 부모님의 시신이라도 거둬야 할 것 아니냐?"

    팽명민의 말에 아삼이 고개를 숙이면서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런 아삼을 급히 일으킨 팽명민이 그를 재촉했다.

    "인사는 되었다. 어서 가서 나갈 채비를 서두르거라. 나는 오문 밖에서 기다릴 테니 준비가  끝나는 대로 그쪽으로 오거라."

    팽명민의 재촉에 아삼이 빠른 걸음으로 전각을 나섰다. 서두르는 아삼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팽명민의 두 눈에 측은함이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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