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39화 (39/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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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험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기감을 살피던 사내가 아삼을 금의위에게 배속된 건물로 안내했다. 발걸음을 죽이면서 앞장서서 걷던 그 사내가 문 앞에서 나직이 속삭였다.

    "소가주, 말씀하신 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사내의 말에 문이 열리더니 안에서 기골이 장대한 사내 한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팽명민이었다.

    "고맙소."

    "아닙니다. 그럼."

    가볍게 목례를 하면서 자리를 비켜주는 사내의 모습에 팽명민 또한 고개를 숙였다. 예의를 잃지 않는 그 모습을 본 아삼은 그 속에 감춰진 모습도 똑같을 지를 생각하면서 긴장감을 유지한 상태로 안으로 들어섰다.

    아무런 말도 없이 자리에 앉은 팽명민의 모습에 조용히 안으로 들어선 아삼이 그를 향해서 고개를 숙이며 예를 보였다. 그리고 가만히 시립해 있는 아삼의 모습에 흡족한 표정을 짓던 그가 온화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오랜만이구나. 그래 궁에서는 지낼만 하느냐?"

    얼굴 가득 미소를 띤 팽명민이 아삼을 바라봤다. 주는 것 없이 싫은 아이가 이인학이라면 앞에 선 아삼에게는 왠지 모를 정이 갔다.

    "……."

    고개를 끄덕이는 아삼을 바라보던 팽명민이 자리를 권하면서 말했다.

    "거기 앉거라. 궁에 메인 몸이니 너무 오랜 시간은 빼앗지 않으마. 내서당에서 시험을 냈다 들었다. 전에도 말했다만 네가 팽인학 그 아이에게 도움을 줬으면 좋겠구나. 한낱 환관들의 시험에…… 우리 팽가에서 직접적으로 나서는 것은 그 모양새가 좋지는 않을 것 같구나. 아무래도 혼자보다는 둘이서 해결하는 것이 더 수월할 듯 싶구나."

    팽명민의 말을 듣던 아삼의 얼굴이 일순간 굳어졌다. 하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 표정을 감추는 아삼이었다. 무슨 일로 자신을 은밀히 부르는 건지 내심 긴장했는데 고작 이인학 그 아이를 도우라는 말에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동창이라는 조직에서 우위를 가지는 것이 이렇게 중한 일이었단 말인가? 하긴…… 그 유명하던 동창이라면.‘

    팽명민의 명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아직까지는 그의 말을 따르는 것이 더 좋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팽가의 보호를 받고 있을 자신의 가족들과 앞으로 있을 어려움들을 생각하면 굳이 적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단지 돕는 것뿐이니…… 실제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조삼보라는 놈의 행적은 대충 파악을 해 놓은 상태다. 그 지역을 금의위와 관의 병력들이 단단히 틀어막은 상황이니 남은 것은 너희들의 몫이다. 이미 인학이라는 아이에게 연통을 넣어놨으니 너를 찾아 올 것이다."

    "……."

    "자, 이것을 받거라."

    천천히 아삼의 얼굴을 살피던 팽명민이 자그마한 상자를 꺼내면서 그것을 열어 젖혔다. 열어진 상자 안에는 은박으로 싸여진 단약이 들어있었는데 그 단약에서 청량한 내음이 풍겨져 나왔다.

    "소공단이다. 네가 배운 동자공의 내력을 증진시킬 수 있을 양기를 품은 영약이다. 이번 일도 그렇고…… 앞으로도 도움을 청할 일이 있을 것이다."

    "……."

    '어차피 내가 맡아야 하는 일이니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지?'

    내밀어진 소공단을 보면서 고민을 하던 아삼이었지만 지금 그에게 필요한 물건인 것 같았고 거절을 할 수도 없는 것 같았다.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뜻을 표한 아삼이 내어진 소공단을 받아들었다.

    팽명민에게 예의를 표한 아삼이 건물을 나섰다. 돌아서는 아삼을 꿰뚫듯 바라보던 팽명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믿음이 가는 아이가 아닌가! 저 아이가 확신만 줬어도……'

    씁쓸하게 웃는 팽명민이었다. 이인학이라는 아이보다 아삼에게 더 마음이 갔던 그였기에 당당하게 도움을 구하는 이인학의 모습이 더 보기 싫은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미 팽가의 양자인 그였기에 소가주로서 이인학을 품어야만 했다.

    "네놈 실력이 미비하여 날 도울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뭐…… 혼자보다는 둘이 더 나을 테지. 허나 이거 하나는 분명히 기억해 둬! 너는 어디까지나 나를 돕기만 할 뿐이다. 네놈에게 명령을 내리는 사람은 나라는 것을 명심해라."

    아삼보다 자신의 위치가 더 높다는 것을 확실하게 각인시키려는 이인학이었다. 거만한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보는 이인학의 모습에 아삼이 귀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를 피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돌아서는 아삼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그렇게 한숨을 내뱉는 아삼을 보던 이인학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다.

    '저런 놈이 무슨 도움이 된다고! 젠장, 내가 원한 것은 팽가의 지원이었는데……'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은 이인학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요청하면 팽가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움을 줄 거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붙여준다는 것이 별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던 벙어리였다. 그것도 자신보다 한참 떨어진다고 생각되는 아이였기 때문에 더욱더 못마땅한 표정으로 아삼을 노려보는 이인학이었다.

    정태감이 준비하라고 줬던 사흘이라는 기간이 지나갔다. 정확히 그 시간이 지나자 다시 내서당에 모인 아이들을 보던 정태감이 눈을 빛냈다. 그의 뒤로 처음보는 낯선 자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 몸에서 느껴지는 음습하면서도 날카로운 기도에 앞에 서있던 아이들의 입이 닫아졌다.

    '이건…… 이전에 느꼈던 그 기운들이다.'

    지난 며칠 동안 아삼의 신경을 자극하던 그 기운들과 같은 느낌을 풍기는 자들이었다. 지금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을 보고 그동안 모종의 일로 자신들을 감시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아삼이 천천히 그들의 행색을 살폈다.

    쪽빛 물을 들인 목면 옷 위에 검붉은 비단 외투를 걸치고 검은색 관모를 뒤집어 쓴 사람들이었다. 수염이 없고 하얀 피부를 가진 그들의 모습의 같은 복장으로 통일되어 있었지만 풍기는 기세가 요사스러운 것이 절로 거부감이 드는 모습이었다.

    그들의 모습에 흠칫하던 아삼이었지만 머지않아서 자신도 저런 모습을 가진다는 생각에 씁쓸해 했다.

    정태감과 함께 나타난 10명의 동창 요원들은 정6품직의 군관(軍官)들로 20명 중에서 추린 사람들이었다. 흔히 말하는 동창 요원들의 바로 윗선으로 '번역'이라고 불리는 자들이었고 그들의 휘하로 내서당에서 교육을 받던 아이들이 나뉘었다.

    하북에서 산서 쪽으로 이동하는 대로의 중간에 위치한 번화한 마을로 옮겨진 아이들은 단단히 주의를 들으면서 긴장을 유지해야만 했다.

    조삼보라는 자를 잡기 위해서 엄청난 수의 관군이 동원됐다는 말에 마른 침을 꿀꺽 삼키던 아이들이 앞선 동창의 고수를 바라보면서 눈을 빛냈다.

    "이미 이곳은 쥐새끼 하나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을 정도로 통제된 곳이다. 이곳에 숨어있을 그자를 찾기 위해서 너희들만 나서야 한다. 이곳은 너희들의 자질을 평가하는 시험의 장이 될 것이다. 그동안 배운 모든 것들을 활용해서 '조삼보'라는 자를 잡아 들이거라. 우리 군관들은 각자 시작 위치를 달리하여 지켜보기만 할 뿐이다. 목숨이 위험하지 않는 이상 나서지 않을 것이니 모두들 주의하거라."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는 '번역'의 말에 긴장하던 아이들이 주변을 둘러봤다. 이윽고 시작하라는 명이 떨어지고 제각기 세력을 이룬 아이들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번화한 지역을 통째로 막아섰기 때문에 그 크기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실제로 관군이 투입된다고 하더라고 며칠은 걸릴 정도로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아이들의 시험을 핑계로 이런 엄청난 짓을 자행하게 만든 정훈이었다.

    열 명의 동창 '번역'들의 지휘아래 시작점을 달리하던 아이들이었지만, 각자 몇 명의 아이들의 통제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들 사이에서도 은연중에 아이들을 이끄는 자가 존재했고, 그런 아이들 틈에는 방태옥과, 송상호. 그리고 비슷하게 두각을 나타내던 아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응당 아이들을 이끌거라고 생각했던 이인학은 따로 떨어져서 행동했다. 단지 아삼과 함께 움직였을 뿐이었지만 지금 상황이 달갑지만은 않은 그였다.

    "저런 아이들과 같이 움직여봤자, 크게 도움은 안 될 거야. 이제 어디로 가면 좋을까? 아무래도 사람들이 많은 곳에 숨어있을 가능성이 높겠지? 몸을 숨기는 데, 사람들 사이만큼 안전하고 들킬 위험이 적은 곳은 없으니까. 네 생각은 어떻지?"

    비록 마음에 들지 않는 아삼이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생각은 가지고 있을거라고 판단하는 이인학이었다. 지금에 와서야 처음 봤던 그 총명함이 많이 희석된 상태였지만 그래도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찾아야만 했다.

    하지만 그의 물음에도 답을 하지 않던 아삼은 가만히 서서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런 아삼의 모습에 인상을 찌푸린 이인학이었지만 조금은 기다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다른 아이들을 피해서 아삼과 함께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이 아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아삼은 이전에 조삼보가 했던 말들을 곱씹어보면서 뭔가를 찾아내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에 눈을 빛냈다.

    "강호 무림의 세계는 네놈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다. 그래서 누군가 마음을 먹고 숨는다면 쉽게 찾을 수가 없다. 평생을 가도 찾을 수가 없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중원 땅도 넓지만 그만큼 보는 눈도 많은 법이다. 강호의 소식통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개방의 화자(걸인)들이고 하나는 하오문(下午門)이다. 개방의 화자들은 강호에 떠도는 굵직한 소문에 매우 밝다. 그리고 하오문(下午門)은 강호의 최약체라고 불려지는 무리들로 이루어진 집단으로, 기녀나 주류의 일꾼인 점소이가 주축이 돼서 강호상에 떠도는 은밀한 소문에 밝은 집단이다. 네놈들이 누군가를 찾고자 한다면 이들을 이용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제 아무리 쥐새끼같이 숨는 놈들도 그들의 눈은 피할 수 없으니까."

    조삼보의 말을 떠올린 아삼이 무언가를 깨달은 듯이 눈을 빛내자 옆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인학도 침을 삼켰다. 뭔가 좋은 방도를 떠올렸다고 판단한 그가 아직도 생각에 잠겨있는 아삼이라는 아이를 바라봤다.

    '신기한…… 녀석.'

    이인학이 자신을 바라보는 와중에도 아삼은 이전에 들었던 것들을 되짚어봤다. 사소한 내용 하나하나 떠올리려고 노력했고 몇 가지 생각을 떠올린 그가 어느 정도 결론을 내렸다.

    '조삼보가 사라졌다고 하는 곳이 기루라고 하지 않았던가? 특정한 지역에서 몸을 감추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고……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찾아야 하는 곳은 기루와 연관이 있는 곳이겠지? 하오문? 조삼보가 미련하게 기루에 숨었을 리는 없을 테고……'

    생각을 마친 아삼은 옆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이인학의 모습을 바라봤다. 순간 그와 눈이 마주치자 머쓱해진 이인학이 인상을 구기면서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혼자 멍하니 서서 뭘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이럴 시간에 빨리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거야! 젠장 네놈 때문에 너무 오래 시간을 지체한 것 같다. 빨리 움직여야 해!"

    투덜대는 이인학의 모습에 미간을 찌푸린 아삼이 나무막대기를 주워들면서 바닥에 글을 적었다.

    "객잔, 하오문."

    단 두 글자를 적고 이인학을 가리키자, 그 글을 보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이인학이었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지만 그 글을 읽고 아삼의 뜻을 정확하게 알아먹은 그였다. 새삼 아삼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는 그였지만 단지 그 뿐이었다.

    '어쩌다가 얻어걸린 거겠지. 그래도 기억력은 꽤나 괜찮은 놈이었으니.'

    조삼보를 쫓을 단초를 찾아낸 아삼의 행동에 인상을 찌푸린 이인학이 말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자신보다 뛰어난 모습을 보인 아삼이 못마땅한 그였고, 그런 이인학의 모습을 보면서 바닥에 적었던 글을 지우면서 뒤를 쫓는 아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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