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38화 (38/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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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험

    몇 달에 걸친 추적술의 수련이 모두 끝났다. 궁에서의 편한 생활이 익숙해진 조삼보였지만 그래도 자유롭지 못한 이곳은 못내 답답했다. 마음대로 술을 마실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여자를 품을 수도 없었다.

    돈은 쌓일 만큼 쌓아놨지만 정작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그의 문제였다.

    '눈앞에 수많은 절색이 있어도 그림의 떡이지.'

    간간이 보이는 어린 궁녀들의 모습에 입맛을 다시던 그였지만 괜한 짓을 벌였다가는 경을 친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에 함부로 행동할 수는 없었다.

    '이제 곧 이 생활도 끝이 나니까. 조금만 더 견디면 되겠지.'

    이제 그 답답한 생활도 오늘로 끝이다는 생각에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가는 조삼보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정태감의 얼굴이 굳었다. 뭐가 그리 좋은지 앞에서 실없이 웃는 조삼보의 모습이 눈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그래, 눈에 띄는 아이는 있던가?"

    "몇 명의 아이가 있었소. 맨 앞에 서 있던 방태옥이라는 아이도 그렇고 그 뒤에 서 있는 송상호라는 아이도 실력이 출중한 것 같소."

    조삼보의 입에서 '방태옥'이라는 이름이 튀어나오자 정태감의 얼굴에 만족할 만한 미소가 흘렀다.

    '역시 유공공의 안목은 틀리지 않았구나.'

    "팽인학이라는 아이 또한 훌륭했소. 그리고……"

    자신의 생각과 비슷한 아이들의 이름이 거론되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정태감이었다. 하지만 말을 하던 조삼보의 입이 갑자기 다물어지자 그 모습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그였다.

    말을 이어가던 조삼보의 머릿속에 아삼이라는 벙어리 아이가 떠올랐다. 아삼 또한 자신의 수련을 잘 따라와 줬다. 아니 자신이 가르쳐준 것들 이상으로 더 잘해내는 아이였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으나 극구 자신의 실력을 감추려고 노력했다.

    '만약 그 아이가 제 실력을 감추지 않았다면? 아마도 제일 뛰어난 아이였겠지?'

    자신을 숨기려고 애쓰는 아이였는데 자신이 그 사실을 말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숨겨줘야 하는 건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조삼보였다.

    "크흠. 그리고? 또 누가 있더냐?"

    말을 하다말고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조삼보를 채근하면서 정태감이 되물었다. 그제서야 결심을 굳힌 듯한 조삼보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아니오. 아무튼 다른 아이들도 모두 쓸만한 놈들이었소."

    "그동안 수고 했다. 자, 여기 네 놈이 일한 삯이니 받거라. 그리고 노파심에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곳에서 네 놈이 했던 일들이 밖으로 새어 나가는 안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여부가 있겠소. 내 그리 가벼운 입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오."

    정태감이 던져준 주머니를 받아든 조삼보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런 조삼보가 못마땅한 듯 정태감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이만 나가 보거라."

    정태감이 귀찮은 듯 손짓을 하면서 말하자 주머니를 단단히 챙긴 조삼보가 건성으로 인사를 올리면서 활기찬 걸음으로 내서당을 나섰다.

    멀어지는 조삼보의 모습을 바라보던 정태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확실히 처리하거라. 알겠느냐?"

    허공에 대고 나직이 속삭이는 정태감의 행동이 어색했지만 이내 모습을 드러낸 사내 한 명이 야행복을 입은 상태로 고개를 숙이면서 급히 조삼보를 따라나섰다.

    황궁을 빠져나오는 조삼보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더 가벼웠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면서 궁과 멀어진 조삼보가 저잣거리로 들어서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발걸음을 멈춘 그가 두 눈을 감으면서 귀를 쫑긋 세웠다.

    '젠장, 능구렁이 같은 고자새끼. 혹시나 했더니 나한테 사람을 붙였구나. 잠깐…… 이건!'

    언젠가 느껴봤던 익숙한 기운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고 이내 뭔가 어색한 듯한 몸놀림을 보이는 자들을 파악한 그가 애써 태연하게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지금 자신이 알아차렸다는 사실을 들킨다면 대처하기가 더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였기 때문이었다.

    '그 고자새끼가 내 목숨을 노리는구나. 이래서 궁과 관련된 일은 맡으면 안 되는 것이었는데……'

    뒤늦은 후회도 소용없었다. 지금은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벗어나야만 했고 아무렇지 않은 척 길을 나서던 조삼보가 홍등가를 발견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홍등가로 들어가는 조삼보를 발견한 사내가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강호인이라는 것들은 어찌 저리 한심한지…… 그저 주머니만 두둑하면 찾는 곳이 저런 곳이니……'

    조삼보를 쫓던 사내는 땅을 박차면서 뛰어 올랐다. 그의 몸놀림은 은밀하면서도 가벼웠고 홍등가의 기와에 올라선 그가 조용히 조삼보의 뒤를 쫓았다. 기녀와 함께 방으로 들어가는 조삼보의 모습을 확인한 사내의 얼굴에 조소가 어렸다.

    '네놈에게 마지막 선심을 베풀어주마. 이번에 네 마지막 즐거움일 테니, 즐길 수 있을 때 마음껏 즐기거라.'

    안에서 들려오는 끈적한 소리와 교성에 반 시진 정도를 기다린 사내는 이내 잠잠해진 방 안을 확인하고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살짝 열려진 창을 통해서 안으로 들어선 사내가 천천히 침상으로 향했다. 등을 보이고 누워있는 사내를 확인한 그가 검게 칠한 검을 꺼내들면서 그의 뒷목을 향해 찔러 넣었다.

    푸욱.

    수월하게 들어간 검 끝이 사내의 목을 찔렀고 검붉은 핏물이 새어나왔다. 축축해진 이불에 뒤척이던 기녀가 이상함을 느끼고 눈을 떴고 침상 앞에 있는 불청객을 확인하면서 기겁을 했다.

    놀란 기녀가 비명을 내지르려고 했지만 사내의 검에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가슴을 드러낸 채 쓰러진 기녀의 모습을 확인한 사내가 침을 삼키면서 등을 보이며 누워있는 시체를 돌렸다.

    "이…… 이건!"

    놀란 사내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두 눈을 부릅뜬 채 누워있는 시체는 그가 목표로 했던 조삼보가 아니었다.

    '이 쥐새끼 같은 놈, 어쩐지 너무 수월하다 싶었다.'

    사내가 신경질적으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순간의 어설픈 동정심으로 일을 그르쳤고 일을 시킨 정태감의 얼굴을 떠올리자 벌써부터 눈앞이 깜깜해지는 사내였다.

    "그래, 갔던 일은 잘 처리했느냐?"

    자신의 앞에 부복해 있는 사내를 보던 정태감이 눈을 빛냈다. 하지만 그 눈빛을 접한 사내가 고개를 숙이면서 침울한 말을 이어갔다.

    "송구합니다. 소신이 미련하여 그놈을 놓쳤습니다."

    "뭐라? 놓쳐!"

    "송구합니다. 워낙에 신출귀몰한 놈인지라."

    "이런 멍청한 놈 같으니라고."

    사내의 변명을 듣던 정태감이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하고 사내의 뺨을 갈겼다. '짝'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가 돌아간 사내였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리고 그런 사내의 행동에 눈살을 찌푸린 정태감은 얼얼한 손을 부여잡으면서 앞으로의 일을 걱정해야만 했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든 게 아닌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것을 눈치챘다면 그놈이 입을 놀릴 수도…… 아니지. 아니야. 그렇게 생각 없는 놈은 아닐게야. 자신의 목숨이 중한다는 것을 알면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겠지만 유공공께 뭐라 말을 한단 말인가? 이거 골치 아프게 됐구나. 유공공이 알기 전에 어떻게든 손을 써야 할 텐데……'

    한참을 고심하던 정훈이었지만 딱히 좋은 방법이 생각나질 않았다. 애초에 앞에 있는 놈이 제대로 일만 처리했더라면 이런 근심 따위는 없었을 거라는 생각에 부복해있는 놈을 향해 소리를 쳤다.

    "뭘 그리 멍청히 있는 것이냐? 어떻게 해서든 그 놈을 쫓지 않고."

    정태감의 호통에 부복해 있던 사내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서 나가는 사내의 뒷모습에 정태감의 얼굴이 굳어졌다.

    '저런 무능한 놈을 믿고 일을 맡겼다니…… 그나저나 이 일을 어찌 해결한다?'

    나가버린 사내를 노려보던 정훈이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그리고 그 노력이 통했는지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조삼보라는 놈이 숨어있다고 하더라도 관에서 발 벗고 나선다면 금새 잡힐 것이야. 문제는 그놈을 붙잡기 위한 명분과 시간인데……'

    한참을 고심하던 정훈은 이내 한 가지 방법을 떠올리면서 무릎을 '탁'쳤다. 스스로 생각해도 상당히 괜찮은 방법이었다.

    '그 방법을 쓰면 명분이라는 것도 얻고 시간도 벌 수 있겠군.'

    생각을 마친 정훈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급을 다투는 일인 만큼 여러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했고 다급한 그의 발걸음에 주변에 있던 환관들이 길을 비켜섰다.

    며칠 뒤, 내서당에 기립해 있는 아이들을 향해 정태감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너희들의 수련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곧 있으면 너희들에게 각자, 맞는 자리가 배정될 것이다. 그전에 너희들이 얼마나 잘 배웠는지 한 번 시험을 해 봐야겠다."

    갑작스런 시험에 여기저기서 아이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을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보는 정태감이었다. 그 눈빛을 접하고 주눅이 든 아이들이 조용히 입을 다물자 내서당을 둘러보던 정태감이 매서운 눈빛을 거뒀다.

    "시험은 간단하다. 너희들에게 추적술을 가르쳤던 조삼보를 찾아내는 것이다. 단, 은밀하게 찾아야 한다. 그자를 찾은 아이들은 나에게 와서 보고하도록 하여라. 사흘의 기한을 주겠다. 그 기한 안에 모든 준비를 마치거라. 조삼보를 찾아낸 아이에게는 황제폐하께 올려질 이름들 중에서 맨 윗줄에 적혀질 것이다."

    정태감의 말에 몇몇 아이들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이번 시험을 잘 통과한다면 황제폐하의 환심을 얻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동창이라는 조직을 계획한 자가 바로 황제였고 그만큼 관심을 가지는 일은 당연했다.

    모두가 들뜬 마음으로 각자의 뒷배가 가진 세력을 동원하리라 마음먹을 때, 유독 한 아이만 새하얀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갑자기 조삼보를 찾으라니? 그것도 은밀하게…… 이건 시험이 맞는 건가? 도대체 저 능구렁이가 뭘 꾸미고 있는 거지? 그건 그렇고 우리가 황궁을 벗어날 수는 있는 것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겨있던 아삼은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팔짱을 낀 채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인학의 그의 눈에 들어왔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네놈 실력에 조삼보를 찾겠다고 나서는 건 아니겠지? 괜히 나서서 걸리적거리지 말고 한쪽으로 비켜 있어라. 이번에야말로 네놈과 내 간극을 확실하게 알려주마."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이인학의 모습에 어이없어 하던 아삼이 실소를 흘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이인학의 얼굴이 굳어졌고 기분 나쁘다는 듯이 아삼의 어깨를 툭치고 지나갔다.

    '뭐지? 저 자식은?'

    어차피 이런 시험에 응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자신은 지금 이딴 시험에 메어 있을 시간 따위 없었다. 지금은 중요한 것은 한기를 물리칠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주고희가 내린 탕약으로 몸 상태가 많이 좋아진 아삼이었지만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아직까지 단전에 자리 잡은 그 음한 기운을 통제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조삼보를 잡아들여서 아이들의 역량을 파악한다는 정훈의 꼼수는 의외로 좋은 효과를 보였다. 그가 모시고 있는 유현도 그의 머리에서 나온 계획을 반기면서 그를 치하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잘 풀려나가자 나름 뿌듯해하는 정훈이었고 조금 더 일을 확실하게 처리하기 위해서 내서당에 배속된 동창 요원을 찾아 나섰다.

    다음날, 궁으로 아삼을 찾는 사내 하나가 찾아왔다. 자연스럽게 궁을 거닐던 그 사내가 아삼을 향해 명패를 건네면서 나직이 말했다.

    "팽가의 소가주께서 찾으신다. 조용히 나를 따르거라."

    사내의 말에 아삼의 두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갑작스런 팽명민의 부름이 의아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왜 나를 찾는 거지?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앞장 선 사내의 등을 바라보면서 조용히 따르던 아삼의 얼굴이 굳어졌다. 갑작스런 팽명민의 부름이 의아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연락이 없었던 그가 이렇게 자신을 찾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아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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