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37화 (37/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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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련

    그간 필사한 종이를 든 아삼이 주고희의 거처를 찾았다. 어느덧 익숙해진 아삼의 얼굴을 확인한 환관이 재빨리 주고희에게 고했다.

    "황자마마, 아삼이라는 아이가 찾아왔습니다."

    얇은 환관의 목소리에 안에서 부터 반가움이 묻어나는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들라 하라."

    황자의 목소리를 들은 환관이 아삼에게 눈짓을 하자 그 눈빛을 받은 아삼이 환관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는 전각으로 들어섰다. 자신을 바라보는 주고희를 향해서 읍을 하며 예를 표한 아삼이 공손히 필사한 종이를 내밀었다. 그 종이를 받아든 주고희가 만족할 만한 웃음을 지어보이면서 단숨에 필사한 그것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흐음. 이번에 필사해 온 비급은 쾌검술이라고는 하나 꽤나 조잡해 보이는 구나. 쓸데없는 초식도 여럿 보이고…… 하지만 이런 비급도 강호에 나가면 피바람이 불겠지? 허허."

    필사한 비급을 읽은 주고희가 짧게 그 비급에 대한 평을 했고, 그의 말을 들은 아삼도 속으로 동의하면서 고개를 조아렸다.

    "헌데 아삼아, 네 안색이 너무 창백하구나. 혹시 어디가 불편한 것이더냐?"

    백지장처럼 새하얀 아삼의 얼굴에 주고희가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지만 아삼은 묵묵히 고개를 흔들면서 괜찮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

    "단순한 고뿔은 아닌 것 같은데……"

    여전히 아삼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주고희가 미간을 찌푸렸고 그의 이마에 내천자가 새겨졌다. 이내 아무런 말도 없이 고심하던 주고희가 밖을 향해 소리쳤다.

    "게 누구 있느냐?"

    주고희의 부름에 환관 하나가 재빨리 전각으로 들어서면서 고개를 조아렸다.

    "부르셨사옵니까? 황자마마."

    "그래. 지금 당장 가서 어의를 불러 오거라."

    주고희의 하명을 들은 환관과 아삼이 두 눈이 커다래졌다. 이내 놀란 환관이 주고희를 향해서 걱정스러운 말투로 되물었다.

    "황자마마, 어디가 불편하시옵니까?"

    걱정스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환관을 향해 주고희가 귀찮은 듯 손사래를 치면서 그를 재촉했다.

    "그런 것은 알 것 없고. 어서 가서 어의를 불러 오거라."

    주고희의 재촉에 읍을 한 환관이 빠른 걸음으로 전각을 나섰다. 환관이 전각을 떠난 것을 확인한 아삼이 주고희의 앞에 부복하면서 강하게 고개와 두 손을 흔들었다. 거부의 의사를 밝힌 아삼의 눈이 주고희를 바라봤고 그의 눈빛을 접한 주고희의 표정이 굳어지자, 다시 그 모습을 본 아삼이 송구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만 일어 서거라. 내 마음이 불편해서 그런 것이다. 너는 그저 내 호의를 달게 받으면 된다."

    주고희의 말에 자신을 향한 마음 씀씀이가 느껴졌지만 이미 자기가 왜 이렇게 창백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는 아삼이었다. 행여나 자신이 규화보전을 익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지금 보이는 호의 섞인 눈빛은 차갑게 변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였다.

    '이대로 거절할 수는 없는 건가?'

    불안해하던 아삼이 눈동자를 굴릴 때, 조금 전에 전각을 빠져나간 환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자마마, 어의를 데려 왔사옵니다."

    차오르는 숨을 삼키면서 내뱉던 환관의 말에 반색을 하던 주고희가 짐짓 위엄 있는 목소리로 답을 했다.

    "들라 하라."

    주고희의 명에 옆구리에 자주색 보자기에 싸인 상자를 들고 얼굴 가득 흰 수염을 드리운 노인 한 명이 읍을 하면서 고했다.

    "황자마마를 뵈옵니다. ……불편하신 곳이 있으시옵니까?"

    "불편한 것은 내가 아니라 이 아이다. 이 아이의 안색이 너무 창백하구나. 한번 진맥을 해보도록 하거라."

    주고희의 명을 들은 어의가 옆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어린 환관을 바라봤다. 창백한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서 있는 어린 환관의 모습에 어의의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흘렀다.

    '한낱 어린 환관을 진맥하라니…… 뭔가 특별한 아이인가?'

    소 잡는 칼로 닭을 잡아라는 듯한 주고희의 명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마지못해서 아삼에게 다가간 어의였지만 겉으로 내색할 수는 없었다. 다만 창백한 얼굴의 어린 환관을 향해서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는 그였다.

    "진맥을 볼 것이다. 손을 내밀도록 하거라."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당황한 아삼이 주고희를 바라봤다. 인자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는 주고희의 모습에 그제서야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가 조심스럽게 팔을 내밀었다.

    눈을 지긋이 감은 어의가 아삼의 맥을 살폈다. 이내 뭔가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어의의 모습에 굳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던 주고희가 물었다.

    "어떤가? 많이 안 좋은 건가? 얼굴이 창백하고 몸이 찬 것을 보면 고뿔인가? 아무래도 고뿔은 아닌 것 같은데……"

    "그것이…… 조금 이상하옵니다."

    "이상하다니?"

    "이 아이의 몸에는 지금 음기가 가득 차 있사옵니다. 해서 이렇게 창백한 안색을 가지고 있는 듯 하옵니다. 아무리 거세를 한 환관이라 하오나…… 이 아이와 비슷한 또래가 가질 수 있는 음기가 아니옵니다."

    자꾸만 고개를 갸웃거리는 어의의 모습에 바짝 입이 타 들어가는 아삼이었다.

    '내가 규화보전을 익히고 있다는 것이 발각되는 것은 아닐까? 황자의 괜한 호의가 독으로 다가오는 구나.'

    아무리 자신을 아낀다하지만 아삼이 몰래 익힌 규화보전이라는 비급은 황자인 주고희도 필사해서 보고 태워버릴 만큼 중요한 책이었다. 그런 비급을 자신이 익혔다는 것이 발각된다면 주고희가 어떻게 나올 것인지…… 그리고 다른 자들이 가만히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발각된다는 생각만으로도 정신이 아찔해지는 아삼이었다.

    "음기라…… 치료할 방도는 있는 것이냐?"

    "그것이…… 우선은 이 아이의 몸에 양기를 복돋아주는 탕약을 처방해야 할 것 같사옵니다. 영약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다면 좋겠지만 저런 아이에게 내리는 것은 과한 것 같사옵니다. 양기를 북돋아 주는 것으로는……"

    "인삼(人蔘)이 양기(陽氣)를 북돋아 주는데 탁월하다고 들었는데 맞느냐?"

    "예. 황자마마. 자고로 인삼(人蔘)은 따뜻한 성질의 약재이옵니다. 많은 양기(陽氣)를 가지고 있는 약재로 잘 알려져 있사옵니다. 그 인삼을 다려서 한동안 마신다면 이 아이의 몸에 충분한 양기를 복돋아 줄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그리 처방해 주도록 하여라."

    주고희의 하명에 어의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하오나 황자마마, 지금 처방해 줄 삼이 없사옵니다. 조선에서 들여온 인삼뿐이온데 그런 귀한 약재를 어찌 저런 아이에게……"

    "조선에서 들여온 인삼이라?"

    인삼 중에서도 조선의 인삼을 최고로 쳐줬다. 그만큼 약효가 뛰어나고 고관대작들의 약으로 사용되는 것이 바로 조선에서 들여오는 인삼이었다. 조선의 인삼은 구하기도 어렵거니와 그 값어치 또한 만만치 않았다.

    "네. 지금 조선에서 들여온 인삼만 있사옵니다. 혹여라도 다른 귀한 분들을 위하여……"

    "그렇다면 약효가 더 뛰어나질 않겠느냐?"

    "그…… 그것이."

    그런 큰 값어치를 가진 약을 한낱 어린 환관 따위에게 처방하라는 사실이 이해가 되지 않는 어의였다. 아마도 주고희가 잘 못 생각하고 있는 듯하여 말끝을 흐렸지만 개의치 않는 주고희가 무덤덤한 말투로 말했다.

    "상관없다. 내, 지우(知友)라 여기는 아이다. 혹여나 이 아이가 잘못 된다면 내 그 책임을 어의인 그대에게 물을 것이다. 알겠느냐?"

    단호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주고희의 눈빛에 길게 읍을 하는 어의였지만 여전히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연신 굳은 얼굴로 아삼을 바라봤다.

    "어서 가서 양기를 북돋아 줄 약을 처방해 오도록 하거라."

    주고희의 하명에 어의가 예를 표하고 전각을 나섰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아삼이 황공해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런 아삼을 인자한 미소로 바라보며 주고희가 나직이 속삭였다.

    “다행이구나. 네놈의 필체를 다시 볼 수 있겠구나.“

    불편해하는 아삼의 표정을 보고 이 상황을 돌리려는 듯 농을 건네는 황자였다. 하지만 정작 이 상황이 달갑지만은 않던 아삼은 그 농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뭔가를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주고희의 눈치를 살피면서 안절부절 못하는 아삼이었지만 주고희는 웃으면서 불안해하는 아삼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우선 그곳에 앉거라. 처방해 올 약을 기다리는 동안 그렇게 서있을 수는 없지 않겠느냐?"

    자리를 권하는 주고희의 태도에 다시 읍을 하면서 거절의 뜻을 비추는 아삼이었다. 그런 아삼을 보고 곁으로 다가온 주고희가 괜찮다는 듯이 그를 다독였다.

    "그깟 무고의 비급을 하나 익힌 것이 대수겠느냐? 나는 개의치 않을 것이다."

    "……."

    주고희의 조용한 말에 아삼의 몸이 빳빳하게 굳어졌다. 확실히 눈치를 챈 듯한 주고희의 의미심장한 말투였다. 커다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이내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아삼이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확실히 눈치를 챘구나. 이를 어쩐다? 이대로 나를 봐준다는 말인가?'

    "동자공을 익혔다고 들었다. 괜히 어설픈 내공심법을 익히려다가는 몸이 축날 것이다. 내 비록 무공을 익히지는 못하지만 꽤 많은 비급을 읽었다고 자부한다. 서로 상충되는 심법을 익히는 것은 금할 행동이다. 잘못하여 주화입마에 들면 돌이킬 수 없음이야. 엄청난 신공이 아닌 이상 되도록이면 피하는 것이 좋다."

    "……."

    "당분간 몸을 정양하거라. 네가 익히고 있는 동자공 또한 그리 떨어지는 무공이 아니다. 우선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조급함을 버려라."

    걱정하는 기색을 내비치며 조언을 해주는 황자의 말에 깊게 읍을 하던 아삼이 감사의 뜻을 보였다. 그런 아삼을 손수 일으키면서 자리에 앉히는 주고희였다. 어느새 그의 얼굴에 따뜻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고 그 미소를 접한 아삼의 눈에 고마움이 스쳤다.

    '내가 무공을 훔쳐배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다만…… 그 무공이 규화보전이라는 사실만 모를 뿐인가?'

    불안한 마음과 함께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 아삼이었다. 황궁에서의 생활은 역시나 녹록치 않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 그였다.

    그날 밤, 한왕 주고후의 전각에 모인 두 사람이, 잔뜩 긴장한 상태로 머리를 조아리면서 서있는 환관 하나를 심드렁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전각의 주인인 주고후가 그를 향해 무심한 말투로 물었다.

    "그래, 넷째에게 무슨 일은 없느냐?"

    주고후의 하문에 긴장하며 서있던 환관이 낮에 있었던 일을 고하였다. 그리고 환관의 이야기를 듣던 주고후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중얼거렸다.

    "한낱 어린 환관을 위해서 어의를 불렀다? 그 아이에게 귀하다는 조선 인삼을 내렸다라……"

    "형님, 그 어린 환관이라던 아이는 저번에 넷째가 보여준 그 필체가 뛰어난 아이 아닙니까? 요즘 그 아이를 자주 곁에 두는 것 같던데…… 혹여나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요?"

    주고수가 전에 봤던 아삼이라는 벙어리 아이를 떠올리면서 말하자, 주고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환관을 향해 주머니 하나를 던지며 명했다.

    "수고했다. 너는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거라. 그리고 지금처럼 넷째를 잘 감시하도록 하거라."

    던져진 주머니를 품에 안은 환관이 길게 읍을 하면서 전각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주고수가 주고후를 향해 조심스레 말했다.

    "아무래도 넷째의 행동이 심상치 않습니다. 총명함을 내비쳤던 아이가 아니옵니까? 이대로 두고 보기에는 불안한 것이 사실입니다."

    "의구심은 드나, 아직 움직이는 낌새는 드러내지 않고 있지 않더냐? 조금 더 두고 볼 수 밖에…… 언젠가는 품고 있던 뜻을 밝히지 않겠느냐? 조만간 그 꼬리가 잡히겠지."

    한왕 주고후의 말에 조간왕 주고수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리고 깊은 생각에 빠져있는 주고후를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주고수였다.

    한 아비의 피와 살을 물려받은 형제였지만 만인지상의 자리에는 오직 한 명만이 오를 수 있었다. 권력 앞에서는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누는 비정한 형제였다.

    주고희가 내린 탕약으로 점차 안정을 찾아가는 아삼이었다. 그리고 곧 동창에 들어갈 아이들을 선별하기 위한 내서당의 움직임도 은밀히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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