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36화 (36/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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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

1421년 하얀 매화꽃이 흩날리는 보화전에 각국 전통의상을 입은 사절단들과 대소신료들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늠름한 자태를 뽐내며 당당히 서 있는 정화를 영락제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바라봤다.

"여봐라, 정화 태감에게 의자를 대령하라."

"황공하옵니다. 폐하!"

길게 읍을하던 정화가 영락제의 명에 황공해하면서 극구 사양했지만 그런 정화를 무시한 황제가 옆에 서 있는 장인태감에게 눈짓을 보냈다. 황제의 눈빛을 접한 장인태감은 아랫 환관을 매섭게 노려보면서 고갯짓을 건넸다.

'저런 놈이 무에 그리 중하다고. 그나저나 당분간은 숨통이 트이겠군. 숨을 쉴 수 있겠어.'

못마땅한 듯 잔뜩 얼굴을 찌푸린 장인태감의 시선이 정화에게 닿았지만 이내 정화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어 보이는 그였다. 그런 장인태감의 시선을 눈치 챈 정화는 보란 듯이 의자에 앉으면서 일부러 그의 힘을 드러냈다.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무언의 시위였다.

"곧 먼 길 떠나야 하는 사람인데 응당 편하게 앉아야하지 않겠나? 원정이 시작되면 이런 편한 자리는 꿈도 못 꿀 것이 아닌가?"

"폐하,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황제의 말에 정화가 부복하며 길게 읍했다. 그런 정화를 바라보는 황제의 두 눈에 자랑스러움과 함께 애처로움이 흘렀다.

"내, 또 자네에게 수고를 끼치네. 이번 원정도 무사히 다녀오기를 바라겠네."

"폐하,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미력하나마 폐하의 은덕을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다는 사실이 소신은 매우 기쁘옵니다. 이번에는 각국 사절단들을 돌려보내면 되는 일이니 그리 긴 여정은 아닐 것 같사옵니다."

정화의 말에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옆에 선 장인태감을 바라봤다. 황제의 눈빛을 받은 장인태감이 보화전에 모인 각국 사절단에게 친서를 전달했다.

"내 그대들의 호의를 감사히 받겠네. 우의(友誼)의 표시로 이 친서를 전달하니 그대들의 왕에게 내 뜻을 전달해 주게나."

두 손으로 친서를 받아든 사절단들이 황제를 향해 부복했다. 그 모습에 만족한 듯한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껄껄 웃어보였다.

"하하하. 좋군. 좋아. 이제 그만 일어나보시게. 바쁜 여정에 이렇게 붙잡아두는 것도 자네에겐 고역이지 않겠는가?"

"소신이 어찌 그런……"

"하하하. 농이네. 농이야. 이제 그만 길을 떠나게."

"예! 폐하, 이제 원정을 위해서 일어서겠사옵니다. 그간 옥체 보존하시옵소서."

"그래. 그대도 꼭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도록 하게."

정화가 예를 표하고 보화전을 나섰고 함께 왔던 각국의 사절단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원정길을 떠나는 정화를 배웅하려는 것인지 하얀 매화꽃이 바람에 흩날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사마택이 나직이 속삭였다.

'정 공공, 부디 무사히 돌아오시기를……'

정화가 떠난 지도 벌써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그간 열심히 분뢰공을 포함한 다른 무공을 익히던 아삼의 얼굴에 비장한 눈빛이 어렸다.

'드디어 오늘이다. 오늘이면 넉넉하게 잡아도 50년이 넘는 시간이다. 이전 생에서 동정을 유지한지 50년이 넘는 시간이니 오늘에야말로 이 규화보전을 익힐 수 있을 거야. 규화보전…… 이제 곧 내가 그렇게 원하던 힘을 얻을 수 있을 거야.'

두 주먹을 불끈 쥔 아삼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마음을 다 잡던 아삼이 가부좌를 틀고 방 한가운데에 앉았다.

마음을 가다듬은 아삼이 필사했던 규화보전의 구결들을 머릿속에 떠올리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되뇌던 구결은 당연하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만큼 계속해서 되뇌고 생각하던 규화보전의 구결들이었다. 이내 두 눈을 감은 아삼이 천천히 규화보전의 그 구결에 따라서 기운을 모으고 몸 안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느껴지는 미증유의 힘이 빠른 속도로 모여들었다. 지독히도 음습한 그 기운은 쌓이는 속도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고, 조금씩 단전에 모여들면서 자리를 잡으려는 그 기운과 함께 온몸을 얼려버릴 듯한 한기가 아삼의 전신을 잠식해 나갔다.

조금씩 느껴지는 그 고통을 참아가면서 규화보전을 익히던 아삼이었지만 더욱더 거세지는 음습한 기운과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에 계속해서 운공을 이어갈 수는 없었다. 깨질듯 한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 쥔 아삼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거둬지지 않는 그 기운들이 단전에 자리를 잡았고 무서운 속도로 그의 몸을 내달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 때, 음습한 기운에 대항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그간 익혀왔던 동자공의 내력이었다. 상대적으로 몸집이 큰 그 기운이 좁쌀만큼 모여든 규화보전의 음한 기운을 막아섰지만 되려 크게 흔들렸다. 동자공의 양기가 규화보전의 음기를 막아설 수는 없었다.

푸웁.

크게 흔들리는 기운에 피를 내뿜은 아삼은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이 상태에서 정신을 잃어버리면 목숨을 잃을 거라는 사실이 본능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난 황소처럼 날뛰려는 그 기운은 결국 막아서는 동자공의 내력을 근소한 차이로 물리치고 그의 경맥을 따라 사지로 뻗쳐나갔다.

'이대로…… 끝인 건가?'

통제할 수 없는 그 힘에 허무함이 몰려드는 아삼이었다. 그토록 발버둥을 쳐가면서 이 생에서는 운명이라는 놈에 제대로 대응해보고자 했지만 그 기반을 갖췄다고 생각하자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스스로 체념하는 듯한 모습을 보일 때, 생각지도 못한 기운들이 그 음한 기운을 막아섰다. 이전에 정화가 줬던 자화란의 기운이었다. 미처 흡수하지 못했던 기운들이 그의 몸 곳곳에 쌓여있었고 그 양력의 기운이 뛰쳐나온 음한 기운을 막아섰다.

조금씩 안정되어가는 몸을 느낀 아삼이었지만 계속해서 밀려드는 한기는 그의 몸을 갉아먹고 있었다.

'크윽…… 뭐가 잘 못 된 거지?'

쓰러진 상태에서 바들바들 떨던 아삼이 얼굴을 구기면서 그 연유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몸속에서 날뛰는 기운은 안정시켰지만 그럴 생각을 이을 틈도 없이 영혼까지 얼려버릴 듯한 무서운 한기가 밀려들었다.

딱. 딱. 딱.

저절로 부딪쳐지는 이와 함께 한기에 떨던 아삼은 본능적으로 침상으로 기어갔다. 이내 이불을 걷어내고 안으로 들어서던 아삼이 이불을 뒤집어쓰면서 몸을 비벼가며 몸에 열을 내려고 노력했다. 동자공을 떠올렸지만 이 상태로는 운기도 할 수 없다고 판단하는 아삼이었다.

밀려드는 한기에 이를 부딪치던 아삼은 계속해서 차가운 몸을 비벼댔지만 스며드는 한기를 몰아낼 수는 없었다.

딱. 딱. 딱.

'…… 왜 이러지? 뭐가 잘못 된 거지? 혹시 이것이 주화입마(走火入魔)라는 것인가?'

무인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주화입마라는 단어였다. 그리고 여러 번 그 말을 들은 기억을 떠올린 아삼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아무리 머리를 굴러보면서 생각을 떠올리려고 했지만 뭐가 잘못 된 건지 가늠할 수 없는 그였다. 더 매섭게 파고드는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생각을 멈추지 않으려고 노력하던 아삼은 오랜 고심 끝에 떠오르는 한가지 생각에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설마…… 50년이란 기한을 잘못 계산한 건가? 이명철의 37년에 아삼의 13년이 아니란 말인가?'

아삼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고 이내 떠올린 그 생각은 확신으로 굳어졌다. 50년의 동정. 두 삶을 이어서 계산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어리석었다. 그저 빨리 강해진다는 생각에 경솔했던 자신을 탓해야 했지만 이미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지금은 이 지독한 한기에서 벗어나야만 했고 마음을 다잡은 아삼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동자공의 구결을 떠올리면서 가부좌를 틀었다.

천천히 들어오는 기운이 꺼져가던 불씨를 되살리는 것 같았다. 조금씩 더해지는 기운은 단전에 뭉쳐있던 기운에서 한줄기의 따뜻한 온기가 뿜어지게 만들었다. 천천히 달궈지듯 온기를 퍼뜨리는 동자공의 양력에 죽일 듯이 파고들던 한기가 한 풀 꺾인 듯 고통이 잦아들었다. 하지만 잦아든 고통도 잠시, 갑작스럽게 변한 상황에 안도하던 아삼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건 또 뭐지? 갑자기 왜?'

조금씩 힘을 더해가는 동자공의 내력에 위화감을 느낀 좁쌀만 하던 규화보전의 음기가 눈을 뜨기 시작했다. 작은 크기의 음기는 조금씩 몸집을 불려가는 동자공의 기운을 빼앗아가고 있었다. 야금야금 동자공의 기운을 훔쳐가면서 자신의 몸집을 불리는 그 음기를 느끼자마자 다시 잦아들었던 한기가 그의 몸을 덮쳐왔다.

'젠장.'

급히 기운을 갈무리하면서 운공을 중단하는 아삼이었다. 눈을 감고 몸을 관조하니 자신의 단전에서 익숙한 기운과 함께 차갑고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그 짧은 시간에 손톱만한 기운으로 변한 음기를 느낀 아삼은 다시 한 번 규화보전이라는 무공의 이름을 떠올리면서 경악했다.

'제대로 된 운공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저런 기운을 뿜어내는 놈이 자리잡다니.'

명불허전이었다. 아니 어떻게 보면 구전으로 전해지는 것들은 빙산의 일각뿐이었다. 아무런 제약 없이 규화보전이라는 무공이 익혀진다면 짧은 시간에 모두가 초절정의 고수를 뛰어넘고도 남을 정도의 위력이었다.

'마치 기운이 살아있는 것 같잖아. 이대로 동자공을 익힌다면 저놈이 커져서 내가 버티지 못할 것 같은데……'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음기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을 안고 있는 것처럼 아삼을 옥죄어왔다.

매서운 한기는 많이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한기가 느껴졌다. 어느덧 아삼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당분간은 익힐 수 없겠어. 10년이라는 시간이 더 필요한가? 대략 9년 반. 23살이라…… 남은 시간동안 규화보전에 관련된 것들을 따로 알아봐야겠어.'

규화보전의 수련을 훗날로 미루는 아삼이었다. 그동안 써먹을 분뢰공을 더 열심히 익히려고 마음먹은 그였지만 지금은 동자공을 수련하는 것도 버거웠고 계속해서 느껴지는 한기도 신경을 써야만 했다.

"안색이 왜 그 모양이냐? 어디 아픈 것이냐?"

창백한 얼굴로 무고로 들어서는 아삼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사마택이 물었지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로 젓는 아삼이었다.

"……."

아무런 말도 없이 필사를 하기 위해서 자리를 옮기는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던 사마택이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미 동자공이라는 것을 익히고 있는 아이였기 때문에 단순히 고뿔이 걸릴 일은 없었다.

혹시라도 뭔가를 잘 못 먹은 것이 아닌 이상 저렇게 창백한 안색을 드러낸 일은 없어야만 했다.

별 일 아니라는 듯 붓을 들어 필사하기 시작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마택이 의구심에 두 눈을 반짝였다.

'고뿔이라? 단순한 고뿔은 아닌데……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단순히 몸이 좋지 않은 것인가? 혹시…… 규화보전을! 아니지 그것을 익히기 위해서는 5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하잖아. 그 시간이 없다면 입문을 하려고 운공을 하는 순간, 얼음으로 변해버리는 것을. 그렇다면 저렇게 살아서 걸어올 리는 더더욱 없을 거야. 저 아이처럼 조심성이 뛰어난 아이가 그럴 리는 없어.'

고개를 갸웃거리며 여전히 아삼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사마택이었다. 그런 사마택의 시선을 온 몸으로 받아내던 아삼의 등 뒤로 한줄기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난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야만 해. 절대 사마택에게 틈을 보여서는 안 돼. 난 그저 고뿔에 걸린 것뿐이야!'

자신에게 최면을 걸 듯 자꾸만 되뇌는 아삼이었다. 그리고 그게 효과가 있었는지 평소와 다를 것이 없이 평온하게 필사를 하는 아삼이었다. 그 어느 때 보다도 창백해진 얼굴로 묵묵히 필사를 하는 아삼의 모습에 의심스런 눈초리로 노려보던 사마택의 눈빛이 거둬들여졌다.

"그동안 아이들을 훈육하느라 수고들 많았다. 이제 그 훈육도 막바지에 이르렀지만 그렇다고 정신을 놓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끝까지 집중해서 아이들을 가르쳐야만 한다."

낭랑한 정훈의 말에 훈육 환관들이 길게 읍을 했다. 그런 환관들을 바라보던 정훈이 옆에 선 동창 요원들을 가리키면서 다시 말을 이어갔다.

"여기에 서 있는 이 환관들은 동창에 소속된…… 분들이다. 지금부터 이…… 분들과 함께 동창에 들어갈 아이들을 뽑을 것이다. 허니 너희들도 두 눈 크게 뜨고 아이들 하나하나를 유심히 살펴야 할 것이야. 그래야 옥석을 가릴 수 있을 것이니 내 말을 명심하도록 하거라."

"예."

기본적으로 공통된 훈련을 받았던 아이들이었다. 그 아이들의 소속이 정해질 시기가 다가온 것이다. 지금까지 훈련한 결과에 따라서 소속이 달라질 것이었고 아삼 또한 다른 아이들과 비슷한 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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