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34화 (34/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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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움직임

    어스름한 달빛이 비치는 유독 어두운 밤이었다. 조금씩 구름 뒤로 모습을 감추는 달빛에 일렁이는 화롯불만이 어둠을 물리치고 있었다.

    '은밀히 처리하기에 딱 좋은 날이구나. 하늘도 우리를 돕고 있음이야.'

    밖으로 나온 장인태감 송기득이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기척이 느껴지지 않은 복면인들의 모습을 상기시키면서 멀리 황궁무고가 있는 곳을 바라봤다.

    '황금 수십만 냥의 값어치는 충분히 할 놈들이겠지.'

    사라진 복면인들의 실력이 무림에서, 특히 살수라고 칭해지는 자들 중에서 수좌를 다툰다는 말을 전해들은 그였다. 자부심이 강한 놈들이니 만큼 누구보다 더 악착같이 잘 해내리라고 믿고 있던 송기득의 얼굴에는 성공하리라는 확신이 들어차 있었다.

    사마택이 건네준 분뢰공이라는 비급을 한 자, 한 자 열심히 필사하던 아삼은 갑자기 느껴지는 기운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서 주변을 둘러봤다. 그와 동시에 천장 위에 있던 복면인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황급히 무고의 문을 닫으면서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뭐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무고 곳곳에서 느껴지는 은밀한 기운들은?'

    자화란을 복용하고 살수지무의 성취가 늘어난 아삼이었다. 비록 모든 약효가 흡수되어서 내공으로 전환되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늘어난 내공과 익숙해진 살수지무는 천장에 있는 복면인의 존재를 흐릿하게 눈치 챌 수 있게 만든 상태였다. 물론 그 복면인보다 상대적으로 실력이 떨어지는, 근처를 지키고 있던 다른 사람들의 존재도 눈치 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느껴지는 기운들은 이전에 그가 느꼈던 그 기운들이 아니었다.

    생소하면서도 은밀한 그 기운은 본능적으로 누군가 무고에 침입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만들었다.

    '스윽. 스윽.'

    '티잉.'

    곳곳에서 들려오는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아삼은 그 소리가 바로 살이 베어지는 소리와 함께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는 어쩌다가 한 번씩 들려왔는데 그만큼 서로 비슷한 성향을 가진 두 무리가 격돌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반증이었다.

    일격필살(一擊必殺)의 살검을 익힌 자들의 격돌은 그만큼 치열했고 한 순간의 실수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을 정도로 살벌했다.

    은밀한 곳에서 들리는 소리에 주의를 기울이던 아삼은 갑자기 무고 안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사내들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검은 복면을 뒤집어 쓴 사내들이었지만 무고를 지키던 복면인들과는 뿜어지는 기세나 복장이 미묘하게 달랐다.

    조삼보에게 배웠던 추적술 중에서 관찰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아삼이었다. 황궁무고를 지키던 복면인들은 어깨에 금색 수실로 두 개의 선이 그어져있었고 새로운 복면인들은 그렇지 못했다.

    어느새 무고 안으로 모두 모습을 드러낸 그들이 서로 견제하는 듯이 노려봤지만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작은 틈만 보여도 목숨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번의 부딪침으로 서로의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잘 알게 된 두 세력이었다.

    '이대로 지켜봐야 하는 건가? 근처를 지키던 금의위들은 왜 나타나지 않는 거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던 아삼은 조용히 붓을 놓고 상황을 지켜봤다. 천장을 지키고 있던 복면인의 실력은 개중에 가장 뛰어나보였다. 어깨에 세 개의 선이 그려진 그가 쓰러뜨린 놈들만 해도 세 명이 넘어갔지만 그의 수하로 보이는 자들의 실력은 잠입한 놈들에 비해서 뒤쳐지는 것 같았다.

    여기저기 베어진 상처와 함께 쓰러진 자들의 수도 더 많아보였지만 계속해서 버티고 있으면 무고를 지키는 자들이 더 유리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지 더욱더 악착같이 달려드는 놈들이었다. 이미 죽은 목숨이라는 것을 확신한 놈들의 행동은 무모했지만 그만큼 효과를 보고 있었다.

    검붉은 피가 튀고 살점이 갈라졌다. 맡은 바 소임을 다하려는 듯한 모습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는 아삼이었지만 쉽사리 나설 수도 없었다. 아직까지 자신의 실력에 의문이 들었고 괜히 나섰다가 눈먼 칼이라도 맞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침입한 놈들 중에 한 놈이 아삼이 있는 곳으로 재빠르게 다가왔다. 주변을 살피던 사내의 눈길이 필사를 하던 상 위에 닿았고 '분뢰공(分雷功)'이라는 비급을 본 사내의 손이 비급 위로 올려졌다. 그 사실을 확인한 아삼은 자신도 모르게 사내의 손을 쳐내면서 비급을 가슴 속으로 감췄다.

    재빠른 그의 행동에 놀란 사내가 어린 아삼을 노려보더니 칼을 빼들면서 달려들었다.

    '젠장. 나도 모르게.'

    자신의 행동을 자책하던 아삼이었지만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었다. 자신을 향해 매섭게 달려드는 사내의 행동에 기운을 끌어올린 아삼이 방위를 밟으면서 걸음을 옮겼다.

    무영보법(無影步法).

    주고희에게서 받았던 보법을 실전에서 처음 적용시켜 보는 아삼이었고 그의 기대에 부응한 그 보법은 달려드는 사내의 시야에서 아삼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림자도 없앤다는 보법이 처음 발현되는 순간이었다.

    어설프지만 연습했던 대로 행한 보법으로 안으로 파고든 아삼이 그자의 비어진 복부를 향해서 주먹을 날렸다. 이 역시 주고희에게 받았던 권각술이 적혀진 비급의 무공이었다.

    퍼억.

    묵직한 느낌이 전해졌고 복부를 가격당한 복면인이 뒤로 떨어져나갔다. 비록 온전히 내공을 실을 수는 없었지만 얼얼해진 손을 부여잡은 아삼은 쓰러진 자를 보면서 새삼 무공이라는 것의 위력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동안 수련한 것이 헛되지 않았구나.'

    자신의 주먹을 바라보는 아삼의 얼굴에 뿌듯함이 넘쳤다. 처음 가지는 실전에서 이만큼 잘 싸울 줄은 스스로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 뭘 그리 멍청히 서 있는 것이냐? 적을 죽이지 않는 한 싸움이 끝난 것이 아니다. 뒤를 조심해라.

    복면인의 전음에 정신을 차린 아삼이 급히 뒤로 물러서면서 복면인이 말한 곳을 돌아봤다. 얼굴로 날아오는 칼날이 가까스로 그의 얼굴을 비켜나갔지만 아직까지 위험은 남아있었다. 급히 몸을 틀어서 그 궤적을 벗어나려고 했지만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는지 휘둘러진 검은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붉은 피가 튀면서 느껴지는 화끈한 고통에 인상을 찌푸린 아삼이 어깨를 감싸면서 검을 들고 있는 복면인을 노려봤다.

    '경솔했다. 방심했어.'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아삼이 어깨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입을 다물었다. 어린 아이의 대범한 행동에 눈살을 찌푸린 사내가 신중을 기했다. 그 사이에 빠르게 주변을 살펴보던 아삼은 죽어버린 시체를 보면서 침음을 삼켜야만 했다.

    살인. 사람이 사람을 죽인 것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시체는 몇 번 본 기억이 있었지만 그것은 병으로 인해서 죽은 사람을 본 경험밖에 없었다. 당연히 어린 아이라면, 시체를 처음 접한다면 느낄 혼란과 두려움 등이 있었겠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침착함을 유지하는 아삼이었다.

    바닥에 뒹구는 검을 집어든 아삼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실질적으로 그가 익히고 있는 무공이라는 것은 무영보법이라는 것 밖에 없었다. 기본적인 무기술을 배우기는 했지만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었다. 오늘 처음 봤던 분뢰공이나 살짝 맛을 보고 뒤로 미룬 규화보전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시간만 조금 더 있었다면……'

    아쉬워하는 그였지만 그런 생각도 사치였다. 어느새 다가온 낯선 사내가 그의 목을 향해서 날카로운 검을 찔러 넣었다. 빠른 속도에 기겁하던 아삼이었지만 침착하게 기운을 끌어올리면서 다시 한 번 보법을 밟았다. 머리를 스치면서 지나가는 검 끝에 쓰고 있던 모자가 꿰뚫렸고 그 사이 안으로 파고든 아삼이 단순한 검로를 밟아가며 낯선 자의 가슴을 찔렀다.

    푸욱.

    섬뜩한 소리와 함께 얼굴을 감싸던 복면에 얼룩이 졌다. 어린 아이라고 방심한 결과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만든 것이었다. 훈련이 잘 된 것인지 신음소리도 없이 앞으로 꼬꾸라진 사내였다. 그 모습을 보고 그자의 복면을 벗기려던 아삼이, 쓰러진 자의 얼굴로 손을 가져갔다.

    순간 갑자기 날아든 호리병 하나가 사내의 몸에 부딪치면서 깨졌고 흘러나온 액체가 죽은 사내의 몸을 녹이기 시작했다. 놀란 아삼이 뒷걸음치면서 무모하게 달려드는 자들을 바라봤다.

    '지독한 놈들이구나. 정체를 감추기 위해서 시체까지 없애다니?'

    화골산에 녹아내리는 시체를 바라보던 아삼이 고개를 들어서 상황을 지켜봤다. 벌써 많은 수의 시체가 무고에 나뒹굴고 있었고 그 중 몇몇은 화골산에 의해서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힘겹게 침입자들 막아서고 있는 복면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어깨에 금색 수실로 세 개의 선이 그어진 복면인의 곁에는 두 명의 수하들만이 남아있었고 아직 적들은 다섯 명이나 더 남았다.

    '지금은 저 자를 돕는 것이 더 좋겠지?'

    크게 위험을 무릅쓸 생각은 없었다. 단지 저들의 주의를 돌린다면 그 틈을 노리고 무고를 지키던 자들이 나서리라고 생각한 아삼이었다. 서로 눈치를 살피면서 대치하던 그 때, 보법을 밟던 아삼이 무고의 바깥쪽을 향해서 뛰쳐나갔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당황한 침입자들이 그를 막아서려고 할 때, 무고를 지키던 무인들이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짧은 순간에 드러난 틈으로 결국 남은 자들 중에서 한 놈이 더 쓰러졌지만 그 중에 가장 강한 기운을 가진 자가 아삼을 향해서 달려들었다.

    '지금 저놈이 밖으로 나간다면 우리들의 죽음으로만 끝날 문제가 아니다!'

    다급함을 느낀 그가 아삼을 향해서 살초를 뿌렸다. 섬뜩한 파공음을 내면서 날아드는 검에 기겁한 아삼이 급히 보법을 펼치면서 피하려고 했지만 너무 늦었다.

    가지고 있는 내력, 무공, 경험 등 모든 면에서 못 미치는 어린 아이의 발걸음은 한 없이 느렸고 어느새 눈앞까지 다가오는 검 끝에 아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퍼엉.

    커다란 폭음과 함께 눈앞으로 다가오던 검이 튕겨져 나갔다. 앞에서 자신을 노리던 자가 피를 뿌리면서 바닥에 처박혔고 그 옆에서 장을 거둬들이면서 주변을 살피는 자가 내려앉았다.

    '사마택!'

    엄청난 신위를 보이던 사마택이 대치하고 있는 자들을 발견하고 걸음을 옮겼다. 순간 몸이 늘어난 듯한 착각이 일 만큼 빠른 속도로 나아간 그가 손을 뻗자 순식간에 파고든 그의 손이 남은 세 놈의 가슴에 작렬했다.

    '분뢰공? 분뢰수인가? 저런 빠르기라니.'

    바닥에 주저앉아서 멍한 눈으로 그의 무공을 바라보던 아삼은 새삼 그가 건네준 무공의 위력을 깨달을 수 있었다. 고수라고 여겨졌던 자들이 이렇다 할 반항도 하지 못한 채 빠르고 위력적인 그의 공격에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어떻게 된 일이오?"

    "저자들이 무고로 침입을 했소. 저들을 막는 과정에서……"

    "전각을 지키던 금의위들은…… 흐음."

    바깥을 살펴보던 사마택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응당 있어야할 금의위들이 자리를 비운 것이었다. 분명히 윗선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가 입술을 깨물면서 침음을 삼켰다.

    '금의위를 물리쳤다? 누군가 비급을 노린 것인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사마택은 깊은 생각을 마치고서야 주저앉아있는 아삼을 바라봤다. 다행히 큰 부상은 없는 것 같았지만 오른쪽 어깨가 살짝 베인 것 같았다.

    "저 자들의 배후를 캐야하지 않겠습니까?"

    "이미 화골산까지 준비해온 것을 보면 쉽사리 말할 놈들은 아닌 것 같소."

    "……."

    "대충 정리를 해야 할 것 같소. 금의위에 사람을 보내서 경계를 더 철저히 해야 하겠소."

    "허면 이번 일은……"

    "당연히…… 함구해야 할 것이오. 내 따로 조사해 보겠소."

    사마택의 마지막 말이 마음에 들지 않은지 미간을 찌푸린 복면인이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면서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느덧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함을 되찾은 무고를 멍하게 바라보는 아삼이었다.

    "괜찮은 것이냐?"

    사마택이 아삼의 어깨를 살피며 물었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 아삼이 고개를 숙이면서 읍을 했다.

    "고생했다. 깊게 베이지는 않았으니 크게 불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 꽤 도움이 됐다지?"

    사마택의 물음에 아삼의 입술이 바짝 타들어갔다. 고개를 숙인 아삼의 눈동자가 불안함에 떨리기 시작했다.

    '설마, 불똥이 튀는 것은 아니겠지? 괜히 끼어든 것인가?'

    "그리 떨 것 없다. 오늘 싸움에 네놈은 없었다. 아니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은 기억에서 지워야 할 것이다. …… 처음 접하는 살인에도 잘 버텨주었구나. 그만 들어가서 쉬거라. 날이 밝으면 그때 다시 와서 줬던 비급을 필사할 수 있도록 하거라."

    사마택의 말에 아삼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그런 아삼의 곁을 스쳐 지나가던 사마택이 아삼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그를 치하했다. 하지만 사마택의 말을 듣고 자신이 한 일을 자각한 아삼은 안도하는 것도 잠시 조금씩 떨려오는 손을 바라봤다. 처음 느껴보는 그 감정에 뒤늦게 몸이 떨려오는 아삼이었다. 그리고 그런 아삼에게 다가온 복면인이 떨고 있는 그를 다독였다.

    "잘해 주었다. 응당 사라져야 했을 목숨이었다. 차라리 쉽게 끝내는 것이 그놈들에게도 더 좋았을 게다. 너무 자책하지는 말거라."

    대수롭지 않은 듯 다시 모습을 숨긴 복면인이었지만 처음 느끼는 그 감정은 쉽게 떨쳐내기 힘들었다. 뒤늦게 찾아온 생명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았고 복잡한 감정은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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