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33화 (33/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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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움직임

    팽가뿐만 아니라 다른 세력도 조금씩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중 송상호를 손자로 들인 장인태감 쪽도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 그 아이가 잘 해주고 있다고?"

    장인태감의 물음에 환관 하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송공공께서 직접 뽑으신 아이인데……"

    환관의 말이 마음에 드는 듯 장인태감의 얼굴에 만족한 미소가 흘렀다.

    "그건 그렇고 곧 있으면 동창에 들어갈 터인데…… 잘하고 있다고는 하나 잘한다고만 되는 것이 아니질 않느냐? 다른 아이들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면 동창에 들어간다고 해서 요직에 앉을 수 있겠느냐?"

    "허면 어찌해야 할 지……"

    "어찌하긴. 그 아이가 익힐만한 무공을 구해서 다른 아이들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입증해야겠지."

    갑작스런 장인태감의 하명에 환관이 머리를 긁적이며 되물었다.

    "무공이라 하시면?"

    "흐흠…… 내가 일일이 밥을 떠 먹여줘야 하느냐?"

    하나하나 묻는 환관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장인태감의 호통이 전각을 가득 울렸다. 그러자 잔뜩 겁에 질린 환관이 부복하며 말했다.

    "송구하옵니다. 하오나 어떤 무공을 전수해야 할 지…… 그리고 저희에게는 전수할 만한 비급도 없지 않사옵니까?"

    환관의 말에 장인태감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생각에 잠겼다.

    '동창에서의 입지를 넓히려면 필히 그 아이를 요직에 넣어야 할 텐데…… 내가 무공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에게 비급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를 어쩐다? 돈을 푼다고 해도, 얻을 수 있는 절정 이상의 비급은 없지 않은가?'

    오랜시간 생각에 잠겼던 장인태감의 두 눈이 번뜩였다.

    '황궁무고! 그곳에 널리고 널린 게 바로 무공 비급이 아닌가?'

    좋은 생각을 떠올린 장인태감이 환관을 향해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그러자 쭈뼛거리면서 걸어오던 환관이 장인태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황궁무고. 그곳이라면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장인태감의 말에 깜짝 놀란 환관이 두 눈을 크게 뜨면서 그를 바라봤다.

    "하오나 그곳은…… 엄청난 고수들이 지키고 있지 않사옵니까? 만에 하나라도 걸린다면……"

    "걸리지 않으면 될 것 아니더냐? 몰래 잠입해서 우리가 원하는 것만 가지고 나오면 된다. 돈만 있으면 그 고수라는 놈들보다 더한 놈들도 구할 수가 있지. 네놈은 그저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느니라."

    어느새 장인태감의 얼굴에 비열한 미소가 지어졌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면서 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진정시키려던 환관이 그런 장인태감을 바라보고 있었다.

    ***

    황궁무고에 들어서는 사마택의 모습이 사뭇 진지했다. 뭔가를 결심한 듯 비장한 얼굴로 아삼을 내려보던 사마택이 아삼의 앞에 책 한 권을 내던지면서 퉁명스레 말했다.

    "자, 해왔던 것들을 제쳐두고 오늘부터는 이 책을 필사하도록 하여라."

    자신의 앞에 던져진 책을 조심히 들어올린 아삼이었다. 그리고 그의 눈에 ‘분뢰공(分雷功)’이라는 세 글자가 들어왔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책을 들여다보는 아삼을 바라보던 사마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분뢰공(分雷功)은 우뢰를 나눌 정도로 빠른 무공을 말한다. 극쾌다. 이번 기회가 아니라면 네가 이 책을 볼 기회는 영영 없을 것이니 필사함에 있어서 한 치의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

    사마택의 말에 아삼이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책을 볼 기회가 없다고? 필사함에 있어서 소홀하지 말라니? 혹시…… 이미 눈치채고 있었던 것인가!'

    아삼의 두 눈동자가 흔들렸고 입술이 바짝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어느덧 등 뒤로 흐르는 땀에 겉옷까지 축축하게 젖어오는 아삼이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지금껏 내가 필사하면서 비급들을 외운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 왜 가만히 있었던 거지? 이제는 대놓고 비급을 외우라고 하는 건가?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멀뚱거리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아삼을 향해 사마택이 크게 호통을 쳤다.

    "뭘 그리 멍청히 보고 있는 게냐? 어서 서두르지 않고!"

    갑작스런 호통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아삼이 고개를 조아리면서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이내 붓을 잡은 아삼의 손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서둘러서 필사하도록 하거라. 그리 시일이 넉넉하지 않을게다. 그렇다고 대충대충 할 생각이랑 버려라. 글자 하나하나 꼼꼼히 숙지하면서 필사하도록 하거라."

    무고를 나서는 사마택의 뒷모습을 아삼이 물끄러미 바라봤다. 말은 거칠게 하나 자신을 위하는 사마택의 마음이 느껴졌다. 불안하기는 했지만 그 마음에 가슴 한편이 따뜻해지는 아삼이었다.

    돌아선 사마택의 얼굴에도 따뜻한 미소가 흘렀다.

    '이제 저 아이를 놓아줄 준비를 할 때가 됐겠지? 언제까지 이 무고에서 썩힐 수는 없으니…… 영민한 아이니 내 뜻을 알아차렸을 테지. 후훗. 그렇게 놀란 표정이라니……'

    애초에 아삼에게 건넨 비급은 규화보전을 제외하고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되는 것들이었다. 규화보전 역시 입문의 제한이 없었고 시간이 촉박하지 않았다면 아삼에게 돌아가지 않을 비급이었다.

    크게 중요하지는 않지만 언젠가는 필사를 해야 하는 것들. 실질적으로 아삼이 필사한 비급들 중에서 그 가치를 제대로 몰랐던 쓸만한 비급은 '살수지무'밖에 없었다. 물론 '무술기공'이라는 기초적인 무공서도 도움이 되었지만 다른 무인들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기본적인 책들이었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열심히 필사를 하던 아삼이었고 그런 아삼을 대견하다고 느끼는 사마택이었다. 서로에 대한 오해를 가지는 두 사람이었다. 이미 들켜버렸다고 판단한 아삼은 앞으로 행동함에 있어서 더욱 주의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었고, 놀란 표정을 봤던 사마택은 나름 순진한 아삼의 행동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붓을 단단히 쥔 아삼이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겼다.

    '분뢰공(分雷功)이란 기를 운용하는 한 방편을 이르는 무학이다. 우뢰를 가를 정도로 빠름을 추구하는 무학으로 손으로 펼친다하면 분뢰수, 검으로 도로 펼친다하면 분뢰검과 분뢰도가 되는 쾌를 추구하는 극단적인 무학이다. 빠름은 강함을 부순다. 빠름은……'

    '우뢰를 가를 정도로 빠름이라니…… 병기에 구애되는 무학이 아니란 말인가?'

    상승무공. 사마택이 아삼에게 건넨 비급은 바로 그중 하나였다. 한 시대를 풍미했을 정도의 위력적인 무공이 그의 손에 들려있었다.

    어느새 아삼의 두 눈이 반짝였다. 그리고 글자 하나하나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누런 종이에 쓰인 글자들이 아삼의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자네가 이 누추한 곳까진 어인 행차신가? 하긴, 자네가 있는 무고에 비하면 이 내서당은 아주 훌륭할 곳일 테지만 말이야.”

    한껏 비꼬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정훈의 태도에 사마택의 미간이 좁아졌다.

    "아삼이란 아이 말일세. 지금 그 아이가 아주 중요한 일을 하고 있어서 그러니 당분간은 내서당의 수련에서 빼주시게.”

    "얼마나 중한 일을 맡았길래, 내서당의 수련까지 빠진단 말인가?”

    "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고. 며칠만 그 아이를 빌림세.”

    귀찮다는 듯이 말하는 사마택의 태도가 못마땅한 정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내 비릿한 미소를 짓던 정훈이 사마택을 보고 말을 이어갔다.

    "무슨 중한 일이지는 모르겠으나 그 아이를 빼기는 힘들겠네.”

    "뭐라? 어째서?”

    "어째서라니? 그 아이는 황제 폐하의 명으로 내서당에서 수련을 해야 할 아이네. 내 어찌 사사로이 그 아이의 수련을 조정할 수 있단 말인가?”

    황제까지 들먹이는 정훈의 말에 순간 당황하는 사마택이었다. 그리고 그가 당황하는 모습에 정훈의 얼굴에 얄굿은 미소가 지어졌다.

    '훗, 무슨 일인지 모르겠으나 네놈이 달라고 하니 더 주기가 싫구나. 황상까지 들먹였으니 네놈도 뭐라 할 말은 없겠지……’

    눈에 가시 같은 사마택이 자신의 앞에서 당황하는 모습을 보니 작년에 먹었던 떡이 내려간 듯 속이 다 후련한 정훈이었다.

    하지만 그냥 당하고만 있을 사마택이 아니었다. 정훈과 비슷한 미소를 지어보이던 사마택이 표정을 감추면서 그를 바라봤다.

    "할 수 없군. 한낱 환관 주제에 황제 폐하의 명을 거역할 수 없으니…… 이를 어쩐다? 어쩔 수 없겠군. 내 정공공께 아뢸 수 밖에.”

    "저…… 정공공?"

    "황제 폐하의 명이라니 자네도 어쩔 수 없지 않겠나? 그러니 내 직접 정화 태감께 아뢰야겠지. 정훈이라는 환관이 극구 반대하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고."

    "……."

    "참 오랜만이실 게야. 한낱 환관 나부랭이가 황제 폐하의 명을 등에 업고 반기를 드는 일이……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지? 어느 순간 사라져버린 환관 놈이 떠오르는구만. 이제는 이름도 잊혀져서 가물가물한데 말이야."

    짐짓 모른 척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는 사마택의 말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정훈이었다. 그리고 그의 모습을 보던 사마택은 천천히 내서당을 나서면서 말했다.

    "그럼 수고하시게. 나는 정 공공께 가 봐야겠네.”

    놀란 정훈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가려는 사마택을 붙잡았다.

    "무슨 이깟 일로 정 공공의 심기를 어지럽히려고 하나? 곧 다시 원정을 떠나시려는 분의 심기를 어지럽혀야 쓰겠나? 그저 자네와 내가 알아서 처리하면 될 것을…… 자네 뜻대로 하시게. 내 관여하지 않겠네.”

    "황제 폐하의 명을 거역할 셈인가? 그러다 큰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하려고?”

    짐짓 모른 척하면서 대꾸하는 사마택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얄미운 정훈이었지만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면서 나직이 속삭였다.

    "자네와 나 두 사람만 입을 다물면 되지 않겠나? 그 벙어리라는 아이는 필요한 만큼 가져다 쓰시게.”

    그제서야 만족한 사마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태연한 모습에 정훈의 입가가 미세하게 떨려왔다.

    '능구렁이 같은 자식…… 황상의 총애를 받는 정화태감이라고 하지만 곧 다시 원정을 떠나는 것은 뻔한 일이다. 그 뒷배가 사라지는 날에도 지금처럼 뻔뻔한 낯짝을 꼿꼿이 세운 채로 나를 대할지 두고 보마.’

    "크흠. 그럼 수고하시게.”

    얼굴 가득 만족한 미소를 지으면서 떠나는 사마택을 매섭게 노려보는 정훈이었다.

    '사마택…… 두고보자!'

    정훈이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껏 사마택에게 당하기만 했지만 언젠가 때가 오면 자신이 느낀 수치심을 되돌려 주리라 다짐하는 정훈이었다.

    자시(子時)를 훌쩍 넘긴 늦은 밤이지만 무고의 불빛은 꺼질 줄을 몰랐다. 수일 내로 분뢰공(分雷功)을 필사하라는 사마택의 하명도 하명이지만 한번 책을 잡으니 그 내용에 빠져 붓을 놓지 못하는 아삼이었다.

    '엄청난 집중력을 보여주는 구나. 그동안에 보여줬던 모습은…… 다 거짓이었더냐?'

    꼼짝하지 않고 책만 들여다보는 아삼의 모습에 복면인의 얼굴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둔재로 알았던 벙어리 아이가 앙큼하게도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생각에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삼이라는 아이가 무고로 왔을 때부터 지켜봤지만 보면 볼수록 괜찮은 아이 같았다. 꽤나 호감을 가졌던 아이였지만 저런 영악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하긴 저런 모습을 숨기고 있었으니 그 사실을 눈치 챈 정화 태감이나 사태감의 눈에 들었을 테지.'

    계속해서 비급을 필사하는 아삼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던 복면인이 다시 자신의 일에 충실히 임했다.

    ***

    "그래 준비는 다 되었느냐?"

    "예."

    장인 태감을 모시고 있던 환관이 검은 두건을 뒤집어쓰고 야행복을 입은 사내들을 향해 물었고 그들이 부복하면서 대답했다.

    "미리 손을 써 놨으니 무고까지 움직이는 것은 쉬울 것이다. 허니 반드시 이 일을 성사시켜야 할 것이다. 행여 실패하거나 들키는 날에는…… 내 어찌 해야 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너희들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얀 분칠을 한 환관의 말에 사내들이 비장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전각을 나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환관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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