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31화 (3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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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력자들

    주고희가 건넨 책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아삼은 품안에 책을 감추려다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사마택이 있는 곳을 향해서 걸어 들어갔다.

    "이제 오느냐?"

    사마택을 향해서 고개를 숙여서 예를 표한 아삼은 주고희에게서 받은 책을 그에게 건넸다.

    "이게 무엇이냐?"

    뜬금없는 아삼의 행동에 사마택이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그러자 아삼이 붓을 들어서 주고희와 있었던 일들을 적어 내려갔다.

    "황자마마께서 이 책을 너에게 주셨다?"

    사마택의 물음에 아삼이 고개를 조아렸다.

    '분명히 누군가가 나를 감시하고 있을 거야. 비록 황자라고 하지만 그도 조심하고 있는 와중에 나라고 이목을 속일 수가 있을까? 괜히 숨겼다가 나중에 발각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알 수 없으니 지금은 숨기는 것보단 이렇게 드러내는 게 더 낫겠지.'

    그런 아삼의 생각은 정확했고 비급을 건넨 아삼을 바라보는 사마택의 얼굴에는 흡족한 미소가 번졌다.

    '황자와의 일을 숨기려면 얼마든지 숨길 수 있었겠지. 헌데 이리 소상히 밝히는 것을 보면 이 아이가 나를 믿는다는 것인가? 아니면 감시하는 자의 이목을 파악한 것인가? 둘 중에 어느 것이 맞다고 해도 쉽게 이 아이를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아삼의 행동을 생각하면서 이리저리 책을 살피던 사마택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아삼에게 건네받았던 책을 다시 책을 건네면서 말을 이어갔다.

    "다행히 황자마마께서 너를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구나. 황자마마의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열심히 수련하도록 하여라."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반응에 얼떨떨 해하는 아삼이었지만 두 손으로 책을 받쳐든 그가 조용히 읍을 하며 감사의 마음을 표시했다.

    무영보법(無影步法).

    아삼이 '무영보법(無影步法)'이라는 글자가 쓰여진 책을 조심히 넘겼다. 무예의 기둥이 되는 일곱 가지의 자세와 한 가지 보법에 관해 설명해 놓은 책이었다. 아직 어린 아삼에게 주기 위해서 주고희가 특별히 고르고 고른 비급이었다. 그리고 그 일곱 가지의 기본적인 자세를 응용한 한 가지 보법이 적혀 있었다. 극에 달한다면 그림자가 없어질 정도로 빠른 보법을 펼칠 수 있다는 설명과 함께 구결이 적혀 있었다.

    마보(馬步) - 기본 자세에서 순간적으로 무릎을 굽혀 땅을 밟는 것을 가리킨다. 중심을 보다 안정시키기 위한 보법으로 기를 구사할 때, 허리를 돌리면서 자세를 취한다. 보통 때보다도 중심이 안정되기 때문에 허리를 돌리는 것에 의해 얻어진 힘을 증폭시킬 수 있다.

    '이것은 팽가에서 수련할 때 배웠던 것 같은데? 마보가 보법의 기본이 되는 자세였구나.'

    그동안은 시키면 시키는 대로만 했던 아삼이었다. 마보를 취하라고 하면 취했고 마보 자세로 견디라고 하면 견뎌냈다. 그저 하체만 단련하는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지만 그 모든 게 보법의 기본이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고 새삼 기본의 중요성을 알게 된 아삼이었다.

    궁보(弓步) - 기본자세에서 몸을 옆으로 향하게 하면서, 크게 한 발 내딛는 것을 가리킨다. 몸을 돌리는 과정은 반마보와 마찬가지이나, 뒷발을 크게 뒤로 펴듯이 내딛는 특징이 있다.

    '궁보라? 이게 맞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세를 취하고 있는 아삼은 갑작스런 전음에 깜짝 놀라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 그쪽 발이 아니다. 반대쪽 발을 내딛으면서 뒷발을 펴는 것이다. 뭘 그리 멍청이 서 있는 것이냐? 계속해서 수련을 하지 않고.

    갑작스런 전음과 함께 자신에게 가르침을 주는 복면인의 재촉에 허공에 대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아삼은 다시 보법 수련을 이어나갔다.

    '허공에 대고 읍이라니. 역시 재미있는 놈이로구나.'

    천장에 몸을 숨긴 채 아삼의 행동을 바라보던 복면인의 얼굴이 진한 미소가 지어졌다. 무료했던 찰나에 수련을 하는 아삼의 모습에 흥미가 동한 것이었고 생각보다 가르치는 재미가 쏠쏠한 복면인이었다.

    마보(馬步), 반마보(半馬步), 궁보(弓步), 허보(虛步), 독립보(獨立步), 궤보(跪步), 괴보(拐步) 7가지 자세가 몸에 익힐 때까지 수련을 계속하는 아삼이었다. 물론 틈틈이 복면인의 도움을 받았고 생각보다 수월하게 기본적인 자세를 익힐 수가 있었다.

    무공을 깊이 알지 못하는 아삼을 고려한 주고희의 배려였다. 처음 접할 수도 있는 아삼을 위해서 기본적인 자세가 담긴, 그것을 활용하는 단순하지만 상승의 묘가 담긴 보법을 전해 준 것이었다.

    어느덧 아삼의 나이가 13살이 되었다. 드디어 때가 온 것이다. 그동안 계속해서 되뇌이면서 구결을 떠올리던, 벼르고 벼르던 규화보전을 이제는 익힐 수가 있었다. 13살이 되는 해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리는 아삼이었다.

    '내 양기가 이상하리만치 충만하다고 했던 정화태감의 말에 의하면, 분명히 전생의 동정도 연관이 있을 테지? …… 그렇다면 50년 동정을 유지한 것이 충족되지 않았을까? 전생의 37년…… 그리고 아삼이라는 아이의 13년. 규화보전을 익힐 수 있지 않을까?'

    전생의 37년의 삶을 떠올린 아삼은 동정이라는 단어에 얼굴을 붉혔다. 바쁘다는 핑계로 제대로 된 연애를 하지 못했던 그였지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천천히 심호흡을 하던 아삼은 머릿속에 각인시켜놨던 규화보전의 첫 장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이내 정신을 집중시키면서 규화보전에 나온 구결들을 기억해 냈다.

    황궁무고에 필사를 도왔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따로 떨어진 처소에서 혼자 머물던 아삼은 정좌를 하고 앉아서 규화보전의 구결대로 기를 움직이려고 노력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겠지만 평소처럼 동자공을 익히던 아삼이었기 때문에 큰 변화만 없다면 들킬 일은 없었다.

    천천히 호흡을 들이마시면서 규화보전의 구결대로 몸속에 기를 회전시켰다. 동자공과는 달리 유독 차가운 기운이 몸속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고 한기가 쌓이는 속도는 동자공을 수련하면서 얻는 양기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간신히 걸음마를 뗀 아삼은 기를 갈무리하면서 눈을 떴다. 추운 겨울날 계곡의 얼음을 깨고 차가운 얼음물에 들어갔다가 나온 듯이 시리다 못해서 애린 느낌이 온 몸에서 느껴졌다. 엄청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동안 단전에 쌓아왔던 동자공의 내력을 흔들만한 힘이 느껴졌다.

    '이게 규화보전이라는 비급의 힘인가? 헌데 이 고통은 뭐지?'

    단 한걸음, 아니 혀끝으로 살짝 맛만 본 것뿐이지만 미증유의 힘이 느껴졌다. 영혼까지 얼려버릴 듯한 아찔한 한기는 왜 50년의 동정이 필요한 것인지 알게 해주었고, 잠깐 동안 생각을 마친 아삼은 당분간 규화보전의 연마를 늦춰야겠다고 판단했다.

    '아직 50년이라는 기간이 부족한 건가? 이정도로 고통스러운 음기면 쉽게 익히지는 못할 것 같은데.'

    정화태감의 눈은 정확했다. 이전의 삶을 포함해서 정확히 40년 가까이 되는 동정을 가진 아삼이었지만 아직 50년이 되기까지는 10년이라는 시간이 더 남은 상태였다. 지금 그가 가진 생각은 이전의 삶과 아삼의 삶까지 포함한 상태였지만 아쉽게도 아삼의 몸에 있던 10년은 단지 그의 신체에 쌓이는 동자공과 연관이 있을 뿐이었다.

    신공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위력적인 규화보전은 오롯이 한 인격체, 즉 한 영혼의 50년 동정이 필요했고 그 만큼 익히기 힘든 무공이었다. 이미 상식에서 벗어난 무공이었고 물질적인 잣대로 판단할 수 없는 신공이었다.

    규화보전의 위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던 아삼은 조급함을 떨쳐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지금 그가 익힐 수 있는 것들은 많이 있었다. 더 큰 힘을 위해서라도 기본에 충실해야 했고, 다른 자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살수지무’를 이용해서 기운을 감추는 것에 시간을 더 할애해야만 했다.

    '언젠가 익힐 규화보전이라면 그 기운을 감추는데 까지 최선을 다해야겠지.'

    무영보법(無影步法)을 시작으로 권각술까지. 주고희가 몇 차례에 걸쳐서 전해 준 비급 또한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는 아삼이었다.

    "그래, 내가 줬던 책들은 도움이 되더냐?"

    인자한 미소로 자신을 바라보는 주고희를 향해 아삼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구나. 그럼 그간 얼마나 늘었는지 보여 줄 수 있겠느냐?"

    갑작스런 제안에 아삼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그런 아삼을 안심시키던 주고희가 말했다.

    "그렇게 당황할 것은 없다. 그저 내 눈요기가 하고 싶을 뿐이니 마음 편히 해 보거라. 내가 익히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위력이 있는지 보고 싶구나."

    주고희의 말에서 쓸쓸함을 느낀 아삼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거절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자세를 취하던 아삼의 눈에 주고희의 뒤에 시립해 있는 사내들이 들어왔다.

    '저 자들은…… 황자를 호위하는 무사들인가? 자칫 잘못했다가는 엉뚱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겠구나. 우선은 그동안 쌓아올린 동자공을 움직여야겠다.'

    생각을 마친 아삼은 천천히 기운을 끌어올리면서 주고희가 줬던 비급에 적힌 무공들을 풀어냈다. 무영보법(無影步法)을 기본으로 권각술을 펼쳐보이는 아삼이었고 그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주고희였다. 마치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주고희의 두 눈이 열심히 아삼을 쫓았다.

    "내 책으로 읽힌 무공이라 논할 수는 없으나 그래도 그동안 봐왔던 다른 자들에 비해서 크게 뒤쳐지는 것 같지는 않구나. …… 고수라고 칭하는 너희들이 보기에는 어떻더냐?"

    주고희가 뒤에 서 있는 사내들을 향해 묻자 그들 중 하나가 앞으로 나와서 부복하며 말했다.

    "아직은 뛰어난 실력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꽤 괜찮은 실력이옵니다. 이대로 더 열심히 수련한다면 좋은 무인이 될 것 같사옵니다. 이제 열셋의 어린 나이라고 보면 앞으로가 기대되는 아이이옵니다."

    사내의 말에 흡족해 하던 주고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옆에 있던 책을 아삼에게 건네면서 말을 이었다.

    "자, 이걸 받거라. 내가 주는 비급들이 너에게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네가 이렇게 열심히 수련해주니 내 마음이 다 뿌듯하구나. 앞으로도 수련을 게을리 하지 말거라."

    책을 받아든 아삼이 조용히 고개를 조아렸다. 그런 아삼을 바라보는 주고희의 두 눈에 만족함과 함께 동경심이 어렸다.

    '나도 저 아이처럼 무예를 익힐 수 있다면……'

    주고희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고 그 미소에 가슴 한 쪽이 시큰해지는 아삼이었다.

    아삼이 내서당에서 수련을 하고 있는 동안 동창의 세력도 그만큼 견고해졌다. 동창의 수장들은 궁내에 거주하면서 황제를 옆에서 직접 모셨다. 그래서인지 금의위와 달리 동창은 상주문이 아닌 황제의 구두하명을 직접 받았다. 황제의 신임을 얻게 된 동창이 어느덧 금의위와 비슷한 위치까지 올라가게 된 것이었다.

    이런 동창에 들어가게 되는 아이들이 아삼을 비롯한 내서당에서 훈육받고 있는 아이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이 아이들에게 손을 뻗기 위한 각 세력 간의 경쟁이 더 치열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 중의 하나인 사마택 또한 어떻게든 아삼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다.

    "자, 이걸 받거라."

    사마택이 아삼 앞에 책 한권을 던지며 말했다. 뜬금없는 사마택의 행동에 놀란 아삼이 두 눈을 크게 뜨고 사마택을 바라봤다.

    "삼행통경(三行通經)이라는 책이다. 보면 알겠지만 경공술에 관해서 쓰여진 책이니 너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사마택의 말에 아삼이 조심스레 책을 들어 첫 장을 넘겼다.

    '경공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으니 그 첫째가 답설무흔(踏雪無痕)이요, 둘째가 궁신탄영(弓身彈影), 셋째가 이형환위(以形換位)다.'

    "흐흠……"

    사마택의 헛기침에 책을 읽던 아삼이 얼른 책장을 덮고 사마택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지금까지 내 말을 잘 따라준 상이니라. 이대로 내 말을 잘 따른다면 내 너를 모른 척 하지 않을 터이니 지금처럼만 하거라."

    사마택의 말에 아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아삼을 바라보던 사마택이 무언가 아쉬운 듯 자꾸 입맛을 다셨다.

    '내 사람으로 만들려면 저 아이를 양자로 들여야 하는데. 내 청하면 거절하지는 않겠지만 아니…… 거절할 수는 없겠지. 양자로 들인 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확실히 내 사람으로 만들려면 우선 저 아이의 마음을 가져야 할 터인데. ……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구나.'

    사마택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지금까지 많은 환관을 봐왔지만 아삼만큼 마음에 드는 아이도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더 신중을 기하게 되는 사마택이었다.

    '저 아이를 이곳에 묶어 둘 수는 없다. 정화태감을 위해서도 그리고 저 아이를 위해서도 이곳에서 썩히기에는 그 재능이 너무 아깝지 않는가?'

    "열심히 수련하도록 하거라. 후에 동창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 비급이 너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니……"

    사마택의 입에서 '동창'이란 단어가 튀어나오자 놀란 아삼이 사마택을 바라봤다. 어느덧 인자한 미소로 자신을 내려보는 사마택의 모습에 아삼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이 무고에서 썩는 줄 알았는데 동창이라니……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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