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30화 (3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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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력자들

주고희가 있는 곳으로 안내 된 아삼은 긴장된 모습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고희가 어린 환관의 그런 모습을 보고 웃음을 지었다.

"이제 오느냐?"

주고희의 목소리에 아삼이 고개를 숙여서 읍하고 조심스럽게 필사한 종이를 내밀었다. 두 손으로 받쳐진 종이를 받아든 주고희가 빠른 속도로 필사된 종이를 읽어나갔다.

'필사된 종이를 드리고 나면 황자마마께서 그 자리에서 필사된 비급을 읽으실 게다. 너는 그곳에서 기다렸다가 황자마마께서 필사된 종이를 태우시는 지를 확인해야만 한다. 반드시 네 두 눈으로 필사된 비급이 타는 모습을 확인하고 그 재도 남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사마택의 하명을 떠올린 아삼은 살며시 머리를 들어서 주고희의 행동을 확인했다. 사마택의 명이 아니었어도 그럴 참이었다. 어차피 자신이 익힐 비급을 다른 사람이 더 알게 된다는 것은 꺼림칙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삼의 조심스런 눈길을 눈치 챈 주고희가 필사된 비급을 태우면서 재미있다는 듯이 웃어보였다.

"자 이렇게 태웠다. 이제 됐느냐?"

송구스럽다는 듯 머리를 조아리는 아삼이었다. 아무리 왕권에서 멀어졌다는 말이 나오는 황자였지만 그래도 불경한 행동으로 책을 잡힌다는 것은 좋지 못한 일이었다. 조금 더 조심하지 못한 자신을 탓하면서 자책하던 아삼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주고희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리 불안해 할 필요는 없다. 사태감의 명이 있었겠지. 너 같은 어린 아이가 무엇을 알겠느냐? 그나저나 네 필체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구나. 이리 좋은 필체를 태워야 하는 것이 마음 아프지만 어쩔 도리가 없구나. 나중에 내 다른 책을 줄 터이니 필사를 해줄 수 있겠느냐?"

"……."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아삼의 모습에 인상을 쓰던 그는 이내 앞에 있는 아이가 벙어리라는 것을 깨닫고 쓰게 웃었다.

고급스러운 접시 위에 까만 재까지 잘게 부수는 아삼의 행동을 보던 주고희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렇게 보기 힘들다는 '규화보전'같은 중한 비급들을 읽는다고 하지만 자신은 익힐 수도 없는 것들 이었다. 괜한 호기심에 애먼 아이만 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앞에 있는 어린 벙어리 환관에게 미안해지는 주고희였다.

어쩐지 이 어린 아이도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것 같았다. 이 넓고 넓은 황궁에서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라도 아무것도 하면 안됐다. 허울 좋은 황자였다. 새장에 갇힌 새처럼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 황궁이었다.

끊임없이 자신이 권력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야만 했고 그래서 더 무림이라는 관과 분리된 세상에 심취했는지 몰랐다. 그래서 말로만 들었던 바람처럼 강호를 떠도는 그들의 삶을 동경하게 된 것인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오늘따라 한숨이 더 잦아졌고 이 황궁이 더 답답하게 느껴지는 주고희였다.

"아삼이라 했더냐?"

주고희의 물음에 아삼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어쩌다 이곳까지 들어왔느냐? 하긴 운명이라는 것이 너를 이 곳으로 이끌었겠지……"

주고희의 씁쓸한 미소에 무표정했던 아삼의 얼굴에도 슬픔이 묻어났다. 그저 삶에 지쳤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냥 쉬고 싶었는데, 주고희의 말처럼 이것 또한 자신의 운명인지 아삼이라는 아이의 몸에 들어와서 그 운명에 맞서는 자신의 모습에 쓰게 웃는 아삼이었다.

'전생에 포기했던 그 운명이 계속 이어진 것인가?'

"…… 내 이야기 조금 들어주겠느냐?"

주고희의 갑작스런 제안에 아삼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그리 긴장할 것 없다. 그저 누군가에게 넋두리를 하고 싶구나. 오늘따라 이 곳이 너무 답답하게 느껴진다."

자신의 처소를 둘러보던 주고희의 입에서 다시 한 번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쓸쓸한 주고희의 옆모습에 아삼은 마치 자신의 모습을 보는 듯 했다.

'거대한 황궁에 갇혀있다는 것은 나뿐만 아니라 황자라는 신분을 가진 자 마저도…… 마찬가지구나.'

무고로 너무 늦게 돌아가면 사마택의 불호령이 떨어질 것은 뻔한 일이었다. 하지만 한낱 환관 주제에 황자의 명을 거역하는 것도 힘들었다. 무엇보다도 지금 보이고 있는 주고희의 모습에 더 발길을 돌릴 수 없는 아삼이었다.

"이렇게 넓은 궁에서 내 말을 들어줄 이가 하나 없구나. 아니 어쩌면 내가 쉬이 입을 떼지 못하는 것이겠지. 말이 많으면 그만큼 위험한 곳이니까…… 이곳에서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무엇인 줄 아느냐? '제 명대로 살고 싶다면 절대 속마음을 내비치지 마라'는 말이었다."

주고희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는 아삼이었다. 자신이 이 궁으로 들어온 이후 너무나 절실히 느낀 것도 저 말이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튀면 그 만큼 더 많은 적들을 만드는 곳이 이곳이었다. 어쩌면 벙어리인 자신이 다행이라고 여길 정도라고 생각하던 그였다.

"모두 아바마마의 핏줄로 태어났으나 그 핏줄 때문에 수족지애(手足之愛)를 느낄 수가 없구나. 형님들에게 난 그저 자신들의 자리를 탐낼 적일뿐이었다. 처음부터 쳐내야 하는 곁가지 일 뿐이겠지."

"……."

"내 원이 무엇인 줄 아느냐? 이 답답한 궁에서 벗어나 바람처럼 강호를 떠도는 것이다. 허나 그것 또한 녹록치가 않구나. 내가 무공을 배운다면 그 또한 형님들에게는 위협으로 다가갈 테니 그저 조용히 무공 서적만 읽을 수 밖에……"

전생에서나 이 생에서나 가난한 자신의 처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아삼이었다. 어차피 한번 태어나 죽을 인생이라면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날 것이지 왜 하필 가난한 곳에 태어나서 힘겨운 삶을 살아야 하는지 불쑥불쑥 분노가 치솟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앞에서 한숨을 토해내는 주고희의 모습을 보고 꽤 많은 것을 가졌다고 행복하지는 않다는 것을 깨닫는 아삼이었다.

'그래. 인생이 그렇게 녹록치는 않더라.'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의 처지에 동감하는 아삼의 눈빛은 주고희에게 편안함을 줬고 몇 번 보지도 않았던 어린 환관에게 속마음을 내보이는 주고희가 피식 웃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아삼이라고 했더냐? 오늘은 참 이상하구나. 궁에서는 함부로 마음을 드러내지 말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었었는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마음을 놨던 것인지…… 아마 네가 말을 하지 못하니, 내 입이 쉬이 열린 것인지도 모르겠구나."

주고희의 말에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조아렸다.

"네 덕에 그래도 답답했던 가슴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구나. 자주 부를 것이니 앞으로도 이렇게 말상대가 돼 주거라."

인자한 미소를 지은 채 자신을 바라보는 주고희의 모습에 다시 한 번 머리를 조아리면서 읍을 하는 아삼이었다.

"자, 이것을 받거라."

지필묵을 들어서 손수 글을 적던 주고희가 먹이 마를 때 까지 기다리더니 그 종이를 아삼에게 건냈다. 공손히 종이를 받아든 아삼을 보던 주고희가 말을 이어갔다.

"그 서찰을 사태감에게 전해주거라. 너를 혼내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이 너무 지체된 것 같으니 그만 돌아가 보도록 하거라. 내 다음 필사를 기다리고 있으마."

주고희의 말에 정중히 예를 올린 아삼이 처소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자신의 손에 들린 종이를 바라봤다.

'괜찮은 녀석인 것 같은데?'

동병상련의 처지를 느꼈는지 주고희라는 사내에게 꽤나 마음이 가는 아삼이었다. 주고희의 마음 씀씀이에 그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흘렀다.

그 날 이후, 아삼이 주고희의 처소를 찾을 때마다 그 곳에서 함께하는 시간이 점점 많아졌다. 그리고 그 시간만큼 서로에게 편안한 마음을 가지게 된 두 사람이었다.

오늘도 변함없이 주고희의 처소를 찾은 아삼이었다. 필사된 규화보전을 빠르게 읽던 주고희가 이제는 익숙하다는 듯이 종이에 불을 붙이면서 타들어가는 것을 보더니 아삼에게 눈을 돌렸다.

"……내 너에게 청이 있는데 들어 주겠느냐?"

갑작스런 주고희의 말에 그 진의를 모르던 아삼이 한참 동안 그를 바라봤다. 불호령이 떨어지는 것만으로도 그칠만한 일이 아니었지만 그런 아삼의 행동에도 개의치 않던 주고희가 말을 이어갔다.

"필사된 종이를 태울 때마다 내 마음이 아프다. 이 종이에 글을 써주지 않겠느냐? 이렇게 태우기에는 네 필체가 너무 아깝구나."

잠깐 당황해 하던 아삼이 결심을 굳힌 듯 붓을 들었고 정성을 들여서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음(知音)'

또렷한 두 글자가 쓰여진 종이를 바라보던 주고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지음이라는 단어의 뜻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주고희였다. 소리를 알아듣는다는 뜻으로 자기 속마음을 알아주는 친구를 이르는 말로, 중국 춘추시대 거문고의 명수 백아(伯牙)와 그의 친구 종자기(鍾子期)와의 고사(故事)에서 비롯된 말이었다.

"네 글자를 알아봐주는 나를 칭찬하는 것이더냐?"

"……."

"하하하."

너털웃음을 지으며 자신에게 묻는 주고희의 모습에 송구스럽다는 듯 아삼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런 아삼을 향해 주고희가 책 한권을 내밀면서 말을 이어갔다.

"이것을 받거라. 이렇게 좋은 선물을 받았는데 나도 답례를 해야지 않겠더냐? 내서당에서 무예 수련을 받는다고 전해 들었다. 이 책이 네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주고희가 내민 책을 바라보던 아삼이 당황해하며 손사래를 쳤다.

"괜찮다. 받아두거라. 내 너에게 주고 싶어서 그러니 열심히 수련하도록 하거라."

미소를 지으면서 서책을 건네는 주고희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아삼이었다.

'무슨 뜻이지? 설마 나를 시험하는 것인가?'

주어진 책을 바라보면서 잠깐 동안 갈등하던 아삼이었지만 쉽게 손을 내밀지는 못했다. 며칠 동안 어느 정도 마음이 통한 것 같았지만 그래도 비급처럼 보이는 서책을 쉽게 받을 수는 없었다.

머뭇거리는 아삼의 모습에 인상을 찌푸린 주고희가 짐짓 엄숙한 목소리를 내며 아삼을 바라봤다.

"어허! 황자인 내 말을 무시하는 것이냐?"

"……."

"받아 들거라. 너는 그저 열심히 수련만 하면 되는 것이다. 열심히…… 내 몫까지 더 열심히 수련하거라. 내 몫까지……"

마지막 주고희의 말이 아삼의 마음을 움직였다. 자신에게 서책을 내미는 주고희의 모습에서 그의 진심을 느낀 것이었다.

어느새 쓸쓸한 얼굴로 먼 산을 바라보는 주고희의 모습에 아삼의 얼굴에도 쓸쓸함이 번졌다. 책을 받아든 아삼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속내를 내비치지는 않았지만 그의 마음을 알게 된 아삼이 책을 받아든 자신을 보면서 환하게 웃는 주고희에게 길게 읍을 했다.

'나를 위해서라도 네 대리만족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수련을 하마.……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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