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25화 (25/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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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궁무고

    주고희. 아삼이 무고에서 만난 황자의 이름이었다.

    주고희는 영락제의 네 번째 아들로 권력에서 철저하게 배제된 아들이었다.

    영락제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첫째는 황태자 주고치, 둘째는 한왕 주고후, 셋째는 조간왕 주고수였다. 그리고 막내이자 4남이 오늘 만남 주고희였다. 주고희는 다른 형들과 달리 어떠한 감투도 쓰지 못했다.

    아무런 권력도 얻지 못했지만 그래도 영락제의 아들, 황손이었다. 황궁이 어떤 곳인지 그리고 황실의 일원이 어떤 것인지 태어난 순간 깨달았던 주고희였다. 황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이 권력에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걸 스스로 증명해야만 했다. 황제인 아버지의 삶을 통해서도 철저하게 깨달은 그는 권력보다는 스스로의 안위를 택했고 그가 눈을 돌린 곳은 바로 무공이었다.

    "황자마마, 이것이 말씀하신 규화보전이라는 비급 이옵니다."

    사마택이 단단해 보이는 목합에서 조심스럽게 낡은 책 하나를 꺼내들면서 주고희에게 건냈다.

    "오호라, 그래. 이게 바로 그 책이란 말이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주고희가 조심스레 책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책장을 넘기면서 말로만 듣던 책의 내용에 심취했다. 가까운 곳에서 비급을 넘기는 주고희의 그 모습에 호기심이 동한 아삼 역시 가슴이 두근거렸다.

    말로만 들었던 유명한 비급에는 도대체 어떤 내용이 들어있길래 저런 눈빛을 내는 것인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주고희가 찾은 규화보전(葵花寶典)은 환관이 지은 책으로 그 위력이 바다를 가르고 산을 부술 정도로 대단하다고 알려진 비급이었다.

    극음의 무공으로 남자만 익힐 수 있고 여자는 익힐 수 없는 무공이었다. 해서 이 무공을 익히기에 적합한 인물은 남성성을 잃은 환관들이었다. 애초에 이 책을 지은 사람이 환관이었기 때문에 가장 최적화 된 사람은 바로 환관이었다.

    환관들은 일반 남성에 비해서 양기를 소모하는 일이 없어서 양기가 몸속 깊숙이 갈무리되어 있었다. 계속해서 차오르는 양기와 그 양기를 감당할 만한 음기.

    그렇기 때문에 이 극음의 무공을 익히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은 바로 남성을 잃은 환관들이었다. 다만 음기가 너무나 강한 무공이라 다 같은 환관이라 하여 모두 익힐 수는 없었다. 그래서 책이 지어지고 나서도 300년간 익힌 자가 없을 정도로 그 입문 조건이 까다로운 비급이었다. 그만큼 입문하기 까다롭고 난해한 무공이 바로 이 규화보전(葵花寶典)이었다.

    익히기만 하면 더할 나위없는 위력을 발휘하는 무공. 그래서 무림이라는 곳에서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것이 바로 이런 무공비급이었다.

    "역시 황궁무고로구나. 혹시나 하고 청했는데 말로만 전해지던 이 책이 실제로 전해지다니…… 내 이 책을 가져가서 정독(精讀)해야겠구나."

    낡은 책을 덮은 주고희가 조심스레 책을 받쳐들면서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런 주고희를 사마택이 만류하고 나섰다.

    "황자마마, 송구하오나, 그건 불가하옵니다."

    "불가하다? 황손인 내가 행하려 함인데 어찌 불가하다 하느냐?"

    불쾌한 듯한 주고희의 말에 송구스럽다는 듯이 머뭇거리던 사마택이 힘겹게 입을 뗐다.

    "황자마마, 마마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그 책의 가치는 대단한 것이옵니다. 황제폐하의 명으로 마마께 모든 무고가 개방되었다고는 하지만 행여나 그 책이 손상되거나 잃게 된다면 소신은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사옵니다. 만에 하나라도 그 비급이 무고를 빠져나가서 세상에 전해진다면 민심은 더욱 혼란해 질 것이고 무림이라고 불리는 곳은 피바람이 불 것이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사마택의 말에 주고희의 얼굴이 굳어졌다. 꼭 읽고 싶었던 책이었다. 자신이 이 무공을 익힐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명성이 자자한 책이 아니던가? 도대체 어떤 내용이 실려있기에 수많은 무림인들이 자신의 남성까지 포기하면서 이 무공을 익히려고 하는지 궁금했던 그였다.

    "자네를 곤란하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네. 내 조심해서 보고 다시 돌려주겠네."

    어렵게 대면한 책을 쉬이 놓을 수 없는 주고희가 다시 한 번 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감하다는 듯 머리를 조아리면서 난색을 표하던 사마택이 말을 이었다.

    "황자마마, 소신도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마마의 명을 따르고 싶사옵니다. 하지만 이 무고에도 어길 수 없는 명이 있사옵니다. 중요한 비급은 절대 밖으로 돌리지 말라는 황제폐하의 엄명이 계셨사옵니다. 한낱 환관 따위가 어찌 지엄한 황상의 명을 거역하겠사옵니까?"

    "명이 시던가? 커험. 내 자네를 곤란하게 하고 있었네. 명이시라면 어쩔 수가 없지……"

    침울해 있는 주고희가 할 수 없다는 듯이 사마택에게 비급을 건냈다. 하지만 여전히 낡은 그 책에서 눈길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주고희였다. 그 모습에 황망해하던 사마택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내비쳤다.

    "황자마마, 마마께서 이 책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이곳으로 발걸음을 하시옵소서. 그때는 소신이 마땅히 이 책을 내드리겠사옵니다."

    "자네의 뜻은 고맙게 받겠네. 허나 내 이쪽으로 매일 발걸음을 하기는 어렵네. 자네도 알다시피 내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는 눈이 많질 않은가? 형님들에게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을 것이야."

    주고희의 말에 사마택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왕권 다툼에서 멀어진 주고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편히 놔둘 황태자와 황손들이 아니었다. 황태자라는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다른 형제들을 견제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그 자리를 내놓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황실의 일원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매사에 조심해야 하는 어려운 자리였다. 그렇게 조심해야 목숨이라도 부지할 수 있었다.

    "내 이 책을 빌려갈 수는 없다지만 필사는 가능하지 않겠는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이 두 눈을 반짝이던 주고희가 사마택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듣고도 고개를 흔들던 사마택이 다시 한 번 고개를 조아렸다.

    "송구하오나 그것도 불가하옵니다. 규화보전(葵花寶典)은 대여(貸與)나 필사 모두를 금하고 있사옵니다. 필사한 것이 유출되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지 않겠사옵니까?"

    "후, 모두 불가하다니……"

    주고희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자꾸 불가하다 하니 더 읽고 싶은 마음이 동하는 것도 있었지만 이미 살짝 읽어본 이 책을 어떻게 해서든지 모두 읽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허면 이건 어떻겠는가? 이 책 모두를 한꺼번에 필사하지는 않겠네. 부분적으로 필사를 한 이후에 읽은 것들은 내 바로 태워버리겠네."

    주고희의 말에 사마택의 얼굴에 난감한 빛이 스쳤다. 아무리 왕권 다툼에서 멀어진 주고희라고 하나 그래도 이 황실의 엄연한 손이었다. 황자의 신분을 가진 주고희가 저렇게까지 나오는데 끝까지 불가하다 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마지못해서 고개를 끄덕이는 사마택이었다.

    "……알겠사옵니다. 다만 지금 필사하는 책들도 있고 해서 시일이 조금 걸릴 듯 하옵니다."

    "하하하. 알겠네. 내 기쁜 마음으로 기다릴 터이니 필사가 끝나면 연통을 주게나."

    얼굴 가득 미소를 띤 채 가벼운 발걸음으로 무고를 나서는 주고희였다. 그 뒷모습에 고개를 숙여서 읍을 하던 아삼의 가슴도 두근대기 시작했다. 규화보전(葵花寶典)을 필사할 수 있다니…… 생각지도 못한 기회가 온 것이었다.

    '하아, 이거야 원. 황자마마께서 저리 부탁하시니 매몰차게 거절하기도 어렵구나. 일이 참 난감하게 되었어. 이제야 이 지긋지긋한 필사에서 벗어나나 했더니……'

    사마택의 입에서 긴 한숨이 튀어나왔다. 그동안 아삼에게 필사를 넘기면서 급박하게 돌아가던 정세 속에서 모종의 일들을 처리할 수 있었던 사마택이었다. 헌데 이렇게 중한 책을 아삼이라는 아이에게 맡길 수도 없었다.

    그것도 황자마마께서 볼 것이니 더 정성을 들여 필사해야 할 것이었다. 이래저래 귀찮은 일을 떠맡은 것 같아 심기가 불편한 사마택의 눈에 시립한 채 서 있는 아삼이 들어왔다.

    "뭘 그리 멍청히 서 있는 것이냐? 하던 일을 계속해서 하지 않고/"

    갑작스런 사마택의 호통에 깜짝 놀란 아삼이 상으로 다가가서 자리에 앉았다. 조심스럽게 붓을 들면서 펼쳐진 비급을 한 자씩 정성스레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주고희의 입에서 필사라는 단어가 나오자 자신도 모르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잡으려고 필사적으로 참았던 아삼이었다. 말로만 듣던 규화보전을 필사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내심 쾌재를 불렀지만 그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자신에게 곧 규화보전(葵花寶典)을 필사하라는 명이 떨어질 거라 기대했었지만 호통이 떨어졌다. 사마택 역시 양물을 거세당한 환관이라 그런지 그 성격이 들쑥날쑥 했다. 좀처럼 좀잡을 수 없는 그의 행태에 그 책일 필사할 수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아삼이었다. 아무래도 자신에게 그 기회가 오지 않을 것 같아 불안한 아삼이었다.

    '어떻게든 규화보전(葵花寶典)을 필사해야 하는데…… 젠장, 귀찮은 일은 모두 떠맡았는데 이제와서 저 책만은 자신이 맡는다니! 어떻게 해야 하지? 저 책만 필사할 수 있다면 내가 그렇게 원하던 힘을 얻을 수 있을 텐데……'

    조바심에 입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아삼이었다. 그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낯선 모습을 보이는 사마택이었다. 자리에 앉은 그가 붓을 손에 들더니 조심스럽게 규화보전을 펼치면서 한 자 한 자 정성스럽게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망할 자식!'

    속으로 그를 욕하던 아삼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 눈빛을 느꼈는지 사마택이 고개를 들면서 낯선 모습으로 바라보는 아삼을 노려봤다.

    "뭘 그렇게 쳐다보는 것이냐?"

    "……."

    "내 원래 소임이 바로 이것이었다. 에잇, 오늘 따라 글은 왜 이렇게 안 써지는 거야!"

    불편한 심경을 드러내는 사마택이었다. 오랜만에 앉은 그 자리가 낯선지 투덜거리는 그였지만 다시 눈빛을 거둬들인 아삼은 속으로 그를 욕했다.

    규화보전(葵花寶典).

    눈앞에 엄청난 대어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아삼에게는 그 대어를 낚을 만한 힘이 없었다. 원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힘이 없었다.

    그저 사마택이 저 일을 자신에게 맡겨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방법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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